문화유산은 오래된 건물과 유적만으로 남지 않는다.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생활했는지까지 함께 이해할 때 과거의 공간은 더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세계 각국에서 온 청년들이 양주 회암사지에서 조선시대 궁중음식을 맛보고 전통 다과를 직접 만들며 한국의 문화유산을 음식으로 경험했다.
식문화기업 리원재(대표 박리원)는 9일 경기 양주 회암사지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 자원봉사 프로그램(World Heritage Volunteers·WHV) 2026’ 현장 행사에서 해외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한국 전통 궁중식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번 행사는 이룸문화교류협회가 주관한 회암사지 WHV 프로젝트의 하나로 마련됐다. 주최 측에 따르면 회암사지 프로젝트는 WHV 2026의 전 세계 37개국 87개 프로젝트 가운데 한국에서 선정된 프로젝트다.
WHV는 청년과 지역사회가 세계유산과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유산의 보호·보존과 홍보 활동에 참여하는 국제 프로그램이다. 단순한 현장 봉사를 넘어 문화유산 교육과 지역사회 교류도 함께 진행한다.
회암사지는 14세기 선종사찰의 공간 구성과 수행·생활문화를 보여주는 유적으로 조선 초기에도 왕실과 깊은 관련을 맺었다. 202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이번 음식 체험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오늘의 식문화와 연결하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프로그램을 맡은 리원재 박리원 대표는 고조리서 연구와 전승음식을 바탕으로 회암사지의 역사, 조선시대 음식 기록, 경기북부의 가을 식재료를 하나의 상차림으로 풀어냈다.
식재료 역시 장소와의 연관성을 살렸다. 양주산 한우와 배·밤, 포천 포도, 경기도산 쌀, 연천 율무를 비롯한 잡곡과 대추 등을 활용해 음식을 만들고, 이를 전통 형태의 석작(대나무를 엮어 만든 뚜껑 있는 바구니) 도시락에 담아 참가자들에게 제공했다.
고문헌 속 음식도 현재의 식탁으로 불러왔다. 1795년 정조의 화성행차와 혜경궁 홍씨 회갑 관련 기록을 담은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등장하는 전복초를 비롯해 잣즙 새우냉채 등 궁중음식을 소개했다.
참가자들은 음식을 맛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전통 다과 ‘생강란’을 직접 빚었다. 손으로 음식을 만들면서 재료와 조리법, 그 안에 담긴 한국의 생활문화까지 자연스럽게 접하도록 한 것이다.
이번 프로그램에서 주목할 점은 문화유산 해설의 범위를 유적과 건축에서 음식으로 넓혔다는 데 있다. 회암사지의 역사를 설명한 뒤 당시의 음식문화와 지역 식재료를 함께 경험하게 하면 방문자는 공간을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다양한 감각으로 기억할 수 있다.
음식은 특히 문화교류의 진입장벽이 낮다. 언어와 역사적 배경이 다른 참가자도 함께 맛보고 직접 만들어보는 과정을 통해 낯선 문화를 비교적 쉽게 경험할 수 있다. 세계유산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과정에서 식문화가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는 이유다.
리원재 박리원 대표는 “회암사지의 시간을 한 상에 담았다”라며, “여러 나라에서 온 참가자들이 한국의 문화유산을 느끼고 전통의 맛으로 한층 깊이 기억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주최 측 이룸문화교류협회 김서정 대표는 “올해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만큼, 2027년 WHV 프로젝트도 한국에서 선정돼 우리문화유산을 세계적으로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문화유산을 보존한다는 것은 오래된 공간의 형태만 지키는 일이 아니다. 그곳에서 이어진 음식과 생활방식, 지역의 재료와 사람의 기억까지 함께 전할 때 유산의 의미는 더 풍성해진다.
회암사지에서 마련된 한 상과 작은 생강란 하나는 세계유산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언어였다. 문화유산을 눈으로 보는 데서 맛보고, 만들고, 기억하는 경험으로 넓힐 때 과거는 오늘의 사람들과 다시 연결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