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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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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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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무실역행의 정신을 강조한 사람은 도산 선생이다.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선생이 도산 선생에게 “무실역행을 우리말로 쉽게 풀이하면 뭐라고 하면 좋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때 도산은 간결 명쾌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무실은 속이지 말자요, 역행은 놀지 말라다.” 속이지 말고 놀지 말자. 이것이 무실역행의 근본이다. 적극적 표현을 하면, '참되자'와 '일하자'다.”

안병욱, 『세계사와 민족의 이상』, 철학과현실사, 1990,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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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실학학회>에서는 실학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실학은 형이상학적 사변적 학풍의 비생산적 논쟁이 만성화되어 있거나 어떤 이념과 체제에 묶이어 시대 현실에서 멀어져 가고 있을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현실에 즉한 실제 사정에 대한 과학적 파악으로 문제해결을 추구하려는 학문 방향을 말한다.”

 

이는 사변적인 학문이 아니라 실증적이면서 동시에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공부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형이상학보다 삶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율곡, 정약용, 안창호, 그리고 이당 안병욱은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더 방점을 두었던 사람들입니다. 정신이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하늘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생에 있어야 합니다. 생의 근본 철학은 무실과 역행이어야 한다는 것은 독일 근대철학자 피히테(Johann G. Fichte)와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1870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일어났던 독불전쟁에서 독일이 패망한 원인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피히테는 도덕적 삶의 해이와 민중의 이기심을 들었습니다.

 

그는 칸트의 계승자이자 초월적 관념론자로서 자아의 본질을 무한한 활동으로 보았습니다. 이 자아의 활동성은 동일한 사유 원리와 존재 원리를 바탕으로 하기에 행위(Handlung)와 사실(Tatsache)를 결합하는 근원적 활동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식과 존재가 하나로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피히테는 이를 일컬어 사행(事行;Tathandlung)이라고 합니다. 이당은 “나는 활동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인간은 능동적 활동의 주체다. 그는 활동적 자아를 강조했다”라고 적시했습니다. 자아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행동하는 양심 속에 있습니다.

 

인간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삶의 실천이나 개인의 실력에서 성실해야 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이당이 실(實)의 개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도 삶은 실재실재(實在, reality)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것이 현실이고 그 역인 현실도 참되어야 한다는 생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참되다고 속임이 없는 것은 단지 개별 민중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민중을 토대로 하는 국가나 민족도 참되고 속임이 없어야 합니다. 조직, 제도, 체제가 개별 민중을 속이는 것은 진실을 상실한 것입니다. 왜곡된 진실을 받아들이는 민중들은 자신의 삶을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실(實)과 대립하는 것이 명(名), 허(虛), 위(僞)입니다. 명은 이름입니다. 실은 알맹이입니다. 이름만 있고 알맹이가 없으면 유명무실합니다. 그와는 반대로 이름과 알맹이, 형식과 내용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을 명실상부(名實相符)라고 합니다. 명과 실이 다 완전한 것은 명실겸전(名實兼全) 혹은 명실쌍전(名實雙全)입니다. 제대로 이름값을 하려면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이름이 제구실을 못 하면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빈 수레가 요란한 법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이름값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정명사상(正名思想)을 펼쳤습니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부모는 부보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은 자기다움의 품위와 교양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러자면 내실(內實)을 키워야 합니다. 실과 대립하는 허(虛)는 공허와 허무를 의미합니다. 속이 빈 것이고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허명(虛名), 허세(虛勢), 허영(虛榮), 허욕(虛慾)은 허망한 것들입니다. 이에 이당은 “충실 속에 미(美)가 있고 힘이 있고 생명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충실미를 따르지 못하는 것이 위(僞)입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삶은 참과 진실을 가볍게 여깁니다. “진실은 인간의 최고의 덕이다”라는 이당의 외침은 자신의 생의 법칙이자 규범을 살아낸 실질이고 체험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당은 “무실은 실사구시다. 행동과 실천은 아니 하고 공리공론으로 빈말, 빈 소리만 하는 폐풍(弊風)을 버리고, 실제(實際)와 실질(實質)에 입각하여 올바른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실사구시다. 우리는 무실인(務實人)이 되어야 한다”라고 역설합니다.

 

안병욱, 『빛과 지혜의 샘터』, 철학과현실사, 1992, p.38, 151.

안병욱, 『세계사와 민족의 이상』, 철학과현실사, 1990, pp.264~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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