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말하며, 거대한 악이 반드시 특별히 사악한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했다. 오히려 생각하지 않는 태도, 판단을 멈춘 습관, 남들도 하니 따라간다는 무감각이 잔혹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 경고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폭력은 언제나 극적인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일상에 스며든 무심함, 장난이라는 이름의 조롱, 어쩔 수 없다, 그 정도는 참아야 한다, 이제까지 다 그래왔다, 분위기라는 핑계, 침묵과 묵인” 속에서 자란다. 그래서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폭력의 노골적인 장면만이 아니라, 폭력이 자라날 수 있는 그림자와 기운, 그 토양 전체다.
우리는 폭력 없는 사회를 말하면서도 종종 폭력을 너무 좁게 이해한다. 손으로 때리고 발로 차는 것만 폭력이라 여기고, 그 밖의 수많은 상처는 ‘그럴 수도 있는 일’쯤으로 넘겨 버린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동 폭력, 장애인 시설 폭력, 노인요양원 폭력, 학교 폭력, 외국인 근로자 냉대, 다문화 가정에 대한 비뚤어진 시선, 직장 내 갑질, 은따, 왕따”는 모두 사람의 존엄을 무너뜨리는 폭력이다.
물리적 접촉이 없다고 해서 폭력이 아닌 것이 아니며, 피가 나지 않는다고 해서 상처가 가벼운 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말 한마디, 시선 하나, 반복된 배제가 주먹질로 만들어낸 상처보다 더 깊고 오래 남는 고통이 되기도 한다.
특히, 약자를 향한 폭력은 사회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문제다. 아이와 장애인, 노인, 조직 안에서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 집단 속에서 소수인 사람은 자신을 방어하기 어렵고, 목소리를 내기도 어렵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약자를 향한 폭력은 더 비겁하고 더 악질적이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구조를 방치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일 수 없다. 약자를 얼마나 잘 보호하느냐는 그 사회의 문명 수준을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다.
더 심각한 것은 노골적 폭력 못지않게 은밀한 폭력이다. 의도적인 뒷담화로 누군가를 음해하는 일, 사실을 왜곡해 평판을 무너뜨리는 일, 편을 갈라 특정인을 고립시키는 일, 겉으로는 웃으면서 뒤로는 관계를 끊어 버리는 일은 모두 사람을 사회적으로 죽이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가짜뉴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런 행위를 너무 쉽게 ‘성격 차이’, ‘조직 문화’, ‘애들끼리의 문제’, ‘원래 그런 것’으로 축소해 왔다. 그러나 이런 태도야말로 폭력의 서식지를 넓혀 주는 방식이다. 공동체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폭력이 벌어진 뒤의 소란만이 아니라, 폭력이 벌어져도 별일 아니라는 듯 넘기는 분위기다.
왜 이런 현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가. 그 이유는 우리 사회의 깊은 곳에 아직도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야만적 논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뒤처지면 도태되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약하면 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타인을 짓밟아도 된다는 무의식이 아직도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명사회의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포장만 달라졌을 뿐 본질적으로는 야만의 논리다. 사람을 능력과 힘만으로 평가하고, 약한 존재를 짐처럼 여기며, 타인의 고통을 자기 이익의 발판으로 삼는 사고는 어떤 화려한 말로도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
폭력이 발생하는 이유는 가해자만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옆에서 웃어 주는 사람, 모른 척하는 사람, “괜히 일을 키우지 말자”, “그럴 수도 있잖아”, “어쩔 수 없잖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 폭력은 반복된다. 동조와 묵인은 폭력의 또 다른 얼굴이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가해의 얼굴이다. 폭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반대하고 신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폭력에 동의하는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폭력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훨씬 더 엄격하게 세워야 한다. 직접적인 가해는 물론이고, 폭력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유지하며 정당화하는 태도까지 분명히 비판받아야 한다.
도덕과 윤리의 수준도 그만큼 높아져야 한다. 폭력을 저지르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폭력을 용인하지 않는 감수성, 폭력의 기색을 알아차리는 민감함, 약한 사람의 고통에 먼저 반응하는 책임감이 함께 자라야 한다.
폭력에 감염된 생각, 즉 누군가를 조종하고 밀어내고 짓밟아도 된다는 의식 자체가 부끄러운 것, 비윤리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물론, 마음속 생각을 모두 법으로 다스릴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적 양심과 윤리적 기준은 법보다 먼저 사람을 움직인다. 폭력적인 사고방식이 ‘강하다’거나 ‘현실적이다’라고 칭송받는 사회가 아니라, 그것이 부도덕하고 저열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라는 말은 단지 종교적 권면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다운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원칙이기도 하다. 우리는 폭력 그 자체뿐 아니라, 폭력의 그림자, 폭력의 냄새,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습관까지도 경계해야 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특정 물질에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듯, 우리 사회도 폭력의 징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누군가를 조롱하는 말, 은근한 따돌림, 반복되는 모욕, 힘 있는 사람의 일방적 압박, 약자를 향한 냉소에 대해 공동체 전체가 “그건 매우 잘못된 행위다. 즉각 멈춰야 한다. 절대로 안 된다”라고 즉시 경고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살만한 세상은 강한 사람이 더 편하게 사는 세상이 아니다. 약한 사람도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 세상, 누구도 관계 속에서 모욕당하거나 소외되지 않는 세상이다. 이런 사회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법과 제도도 필요하고, 교육도 필요하며, 공동체의 윤리적 합의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각자의 결심이다. “나만은 그러지 않겠다”라는 다짐을 넘어, “나부터 앞장서서 막겠다”라는 태도와 의지 그리고 이에 따른 실천이 필요하다.
폭력의 그림자도 용납하지 않는 사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문명사회다. 폭력을 행사하는 손만이 아니라, 폭력을 묵인하는 침묵까지도 부끄러워하는 사회, 약자를 괴롭히는 것을 가장 파렴치하고 수치로 여기는 사회, 차이를 존중하고 존엄을 지키는 일을 가장 기본적인 상식으로 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사람이 살만한 세상이며,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할 공동체의 얼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