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즈코리아 뉴스추천뉴스2026. 4. 28. 오후 6:37:52

오늘이 말하는 어제와 내일

박시우 작가
오늘이 말하는 어제와 내일

현재는 홀로 떨어져 있는 점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지금’을 붙잡고 산다고 말하지만, 실제의 현재는 늘 어제와 내일 사이에 놓여 있다. 지금 이 순간의 생각과 선택, 판단과 행동은 어제의 경험과 기억 위에 세워지고, 동시에 내일의 방향과 결과를 향해 뻗어 나간다. 

그러므로 현재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지금 무엇이 있는가”를 보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지나 여기까지 왔는가”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를 함께 보는 일이다. 오늘은 어제와 단절된 시간이 아니며, 내일을 향해 무책임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순간도 아니다. 

오늘은 어제를 해석하고 내일을 설계하는 자리다. 문제는 그 해석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데 있다. 같은 사실을 두고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의미를 읽어 낸다. 세상에는 각양 다양한 시선과 안목이 교차한다. 누군가는 손해를 보고 누군가는 기회를 보고, 누군가는 아픔을 보고 누군가는 계산을 먼저 한다. 

분명히 현실은 하나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의 현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현실을 바라보는 수많은 관점과 의미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일은 단순한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크게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같은 현재를 보면서 나눔과 배려, 협력과 상생의 길을 선택한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욕심과 경쟁, 갈등과 파괴의 길로 나아간다. 

세상은 늘 사건보다 해석이 먼저 갈라놓는다. 같은 현실을 앞에 두고도 누군가는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를 묻고, 누군가는 “어떻게 더 많이 차지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무엇을 기준으로 어제를 해석하고, 오늘을 이해하며, 내일을 만들어 낼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 문제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도덕과 윤리, 사상과 교육, 경제와 종교가 서로 얽혀 있다. 사람은 자기가 배운 방식대로 세상을 보고, 자기가 믿는 가치대로 판단하며, 자기가 익숙한 기준으로 타인을 평가한다. 

어떤 사회는 효율과 경쟁을 먼저 가르치고, 어떤 공동체는 책임과 연대를 더 크게 말한다. 어떤 이는 성취를 최고의 선으로 여기고, 어떤 이는 공존과 자비를 더 깊은 가치로 붙든다. 이처럼 오늘을 바라보는 기준은 결코 우연히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자라 온 시간과 문화, 사상과 훈련이 응축된 결과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준의 문제를 너무 복잡하게만 볼 필요는 없다. 분명한 원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기준이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배고프면 남도 배고프고, 내가 지치면 남도 지치며, 내가 억울하면 남도 억울하다는 너무도 단순한 사실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흔히 자기의 고통에는 민감하면서도 타인의 고통에는 둔감해지기 쉽다. 자기의 사정은 충분히 설명하려 하면서도, 남의 사정은 쉽게 재단한다. 그러나 공정성과 도덕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내가 나를 이해해 달라고 바라는 만큼, 남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질 수 있는가. 내가 대우받고 싶은 방식으로 타인을 대할 수 있는가. 이것이 내 삶을 지탱하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 되어야 한다.

성경 마태복음 7장 12절과 누가복음 6장 31절이 말하는 황금률은 바로 그 원리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 가르침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그 깊이를 놓치기 쉽다. 이 한 문장 안에는 인간 공동체를 유지하는 핵심 윤리가 담겨 있다. 

서로를 이용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나와 같은 감정과 필요, 상처와 소망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는 태도가 생명의 원리처럼 작동해야 한다. 3세기의 로마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더가 이 구절을 금으로 써서 거실에 붙였다고 전해지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황금률(golden rule)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 가르침이 황금처럼 귀하다는 뜻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의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표현도 같은 의미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라는 이 말은 단순한 예의범절이 아니라, 인간 이해의 근본 원리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그 말을 들었다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내가 그 조건 속에 놓여 있었다면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중심적 해석에서 한 걸음 벗어날 수 있다. 

오늘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지금 벌어진 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자리까지 함께 상상하는 일이다. 그래서 오늘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소비하는 일이 아니다. 오늘은 어제를 다시 읽고, 내일을 더욱더 바르게 쓰는 자리다. 

어제를 원망의 재료로 삼을 것인지, 성찰의 자산으로 삼을 것인지는 오늘의 기준에 달려 있다. 내일을 불안의 그림자로만 볼 것인지, 책임 있게 준비해야 할 가능성으로 볼 것인지도 오늘의 태도에 달려 있다. 

오늘의 관점이 어제의 의미를 바꾸고,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렇다면 오늘을 가볍게 살 수는 없다. 오늘은 지나가는 순간이 아니라, 해석과 창조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저 느티나무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수많은 세월을 품고 푸르게 서 있는 나무는 어제를 생각하지만, 거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비바람과 계절의 변화, 더운 여름과 차가운 겨울을 지나왔지만, 편견이나 조급함 없이 다시 잎을 틔우고 내일을 향해 창의적 순환을 이어간다. 

나무는 어제를 짐으로만 지고 있지 않다. 어제를 품고 능동적으로 오늘을 살며, 그 자리에서 내일을 준비한다. 그 푸르름은 단지 생명의 색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다.

사람의 삶도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제를 성찰하되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오늘을 정직하고 창의적으로 살아 내며, 내일을 책임 있게 역동적으로 열어 가는 태도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를 판단하는 기준과 남을 판단하는 기준을 다르게 두지 않는 일, 내가 바라는 존중과 이해를 남에게도 적용하는 일, 역지사지와 황금률의 정신으로 현재를 해석하는 일이야말로 오늘이 내일에게 건네는 가장 건강한 언어일 것이다.

‘오늘이 말하는 어제와 내일’이란 거창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내가 무엇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있는가, 어떤 원리로 어제를 해석하고 내일을 준비하고 있는가를 묻는 가장 현실적인 질문이다. 

오늘이 바르면 어제의 상처도 의미를 얻고, 내일의 불안도 방향을 찾는다. 오늘이 흐리면 어제는 원망이 되고, 내일은 두려움이 된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바로 오늘이다. 오늘의 기준, 오늘의 관점, 오늘의 태도다. 그 오늘이 어제를 새롭게 말하게 하고, 내일을 다르게 열어 가기 때문이다.

인기 기사

인기 기사가 없습니다.

더 많은 기사가 추가되면 인기 기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댓글

익명 댓글은 지원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