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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존재의 삶과 바르게 사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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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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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잘”이라는 근대적 경제성장으로의 회귀 속에 매몰되어 “바르게”라는 삶의 가치를 도외시한다면, 종래에는 자기의 권리마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 말 혹은 언어란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면서 인간의 사유를 형성하고 삶을 창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말하지 않는 정치는 없을 것이고, 역으로 정치 없는 말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말과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하지만 말을 잘못 사용하면 오해와 갈등, 세계 이해의 불가능성, 상호 소통 불가능성 등을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언어가 갖고 있는 불확정성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말 혹은 언어란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면서 인간의 사유를 형성하고 삶을 창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이규호, 말의 힘, 좋은 날, 1998, 58-60쪽) 

이러한 언어철학적 의미에서 본다면, 정치적 상황에서 말이라는 것은 맥락과 소통이 중요한데, 정부나 정치가들이 하는 말을 유심히 살펴보면 전혀 맥락과 맞지 않는 말들을 하고 있다. 맥락과 맞지 않는다는 말은 소통이 안 된다는 말도 된다. 말(기표)은 퍼뜨리되 의미(기의)는 헷갈리고 조작되는 말들을 자꾸 발언한다.

말은 적게 하되 국민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이따금 복지, 행복, 국정원, NLL, 종북, 역사의식 등 정부가 쏟아내는 말들은 말의 파시즘, 즉 언어의 전체주의화, 과거 정권으로의 회귀를 연상하는 것들이다. 이 사회는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하다는 이상한 논리에 빠져서 대부분의 책, 강연, 강의 등이 행복과 연관이 되지 않으면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말의 파시즘, 정서의 파시즘, 과거 정부가 이루지 못한 미완의 파시즘을 완성하려고 하는 것일까? 복지라는 것도 그렇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복지가 단순히 물질적 복지만을 말하는 것이 분명히 아닌데도, 우리는 물질적 복지의 양을 늘리면 그것이 곧 복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민주주의는 국민 혹은 민중들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에 균형을 맞춘다는 것쯤은 상식이다. 최장집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필자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는 민중(people)의 광범한 정치참여에 의한 공적 결정과 그 결정을 집행하는, 일련의 규칙 또는 제도를 가지며, 이를 통하여 그것은 정치의 영역에서 민중의 권력으로 표현되고 사회의 영역에서 민중의 물질적, 문화적, 정신적 삶의 질적 고양이 담보되는 정치적 체계를 말한다.”(최장집, 한국민주주의의 이론, 한길사, 1993, 4쪽)

따라서 민주주의의 복지는 독일의 사회학자 랄프 다렌도르프(R. Dahrendorf)가 말하는 정치적 참여와 과정, 정치적 기회와 통로의 확대를 의미하는 사회적 시민권에서 물질적 급부(provisions)만 강조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물질적 급부를 통해서 복지와 사회보장을 확대하면 사회적 시민권이 확대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측정 가능한 양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사느냐에 있다기보다 정치적 삶의 측면에서 질적인 삶, 즉 ‘도덕적 자율성과 평등의식에서 기초한 삶’을 사느냐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최장집, 민중에서 시민으로, 돌베개, 2009, 124, 168-169쪽)

그렇다면 그 질적인 삶의 척도와 근본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함석헌이 말한 것처럼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이 되어야 한다.

“잘 살아보자는 것, 소위 잘 산다는 얘기 하는 것 그게 지배적인 관념인 되는 건, 그건 아무리 선진국이라 해도, 그리고 또 선진국에서 하는 일이지만, 그게 무조건 좋은 얘기인 줄로만 알지만은 않아야 돼. 그런데 국가에서 썩 잘 애용하는 표어, 곧잘 내세운다는 것이 “우린 복지국가 건설한다.” 난 그 복지국가란 소리 아주 듣기 싫어. 새벽이면 거의 매일이다시피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하는 요놈의 소리가 참 듣기 싫어. 얼마나 잘 살아보겠다고 그래. 그거 얼마나 지독한 사람들이야. “바로 살아보세, 바로 살아보세”하고 가르친다면 잘 살 수 있지만,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하면 다 나쁜 놈 되고 만다 그 말이야. 잘 살기 위해서는 무소불위(無所不爲)예요. 못할 게 없어요. 잘 살기 위해선...... 그래 ‘잘’이란 좋은 의미로도 쓰이지만 나쁜 의미로도 쓰이는 거야. 그런데 그것이 아주 우리의 인생관이 돼가지고, 정부가 그걸로 일부러 고치려고 하고 있어. 서양 선진국이란 것도 역시 그런, 사회 복지라는 것, 그것만 강조해. 옛날에는 그렇지 않아요. 사람으로서 도리에 이르느냐, 아니냐.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함석헌, 함석헌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74-75쪽)

복지(wellbeing/welfare)라고 하는 것은 잘(well) 먹는 것(fare)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복지는 삶의 양이 아니라 삶의 질이다. 영어 단어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being)의 문제다. 자꾸 많이, 좋은 것을 소유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가지고 높은 데 올라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함석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살 것인가 하는 존재의 문제가 곧 복지의 본래적인 의미라는 것이다. 최장집이 염려하는 목소리를 좀 더 들어보자.

“인간적인 가치를 구현하고, 한 사회의 문화적·사회적·사회경제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을 위해서 개인과 사회가 동원되고 한 사회의 개인적·집단적 가치가 규정되며 그 비중에 따라 가치의 위계 구조가 만들어지는 상황이 도래했다. 인간의 가치, 민주주의의 가치, 환경의 가치, 평화의 가치가 경제 성장의 가치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인식되는 수단-목적의 전치 현상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최장집, 민중에서 시민으로, 돌베개, 2009, 142쪽)

정치의 가치 전도 현상은 위험 수위를 넘어서 인간이 정치사회적 존재라면 응당 추구해야 하는 근본적인 삶의 태도가 완전히 바뀐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치적 존재인 인간이 사회적 삶을 살아가면서 가장 우선으로 두어야 하는 가치가 또 다시 “잘”이라는 근대의 경제성장으로의 회귀 속에 매몰되어 “바르게”라는 삶의 가치를 도외시한다면 정치의 본질,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인간 혹은 민중, 시민의 자기 권리마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민중의 정치적 행위, 정치적 삶은 국가로부터의 어떤 혜택을 받는 수혜 대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의 존재로서 바르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와 연관하여 국가는 일정한 정치적 언어로 과거 미완의 파시즘을 선전하고 선동하는 것을 멈추고 국민들에게 바르게 살도록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야 할 책무가 있다.

거듭 이야기 하지만, 잘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르게 사는 것’이다. 그것을 국민에게 말할 수 있고 강조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함석헌이 말했던 주장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이야기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시대에도 울림이 있는 것은 그의 예언자적 외침이 잘 들어맞기 때문이라기보다 우리 자신의 사유가, 우리의 정치적 의식과 삶이 너무나 진부해서이지 않을까?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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