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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도 인간의 이상세계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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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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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코리아] 철학을 좀 안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유물론이나 관념론 중 어느 하나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곤 합니다. 이렇게 철학적으로 유물론이다 관념론이다, 하는 해묵은 논쟁의 역사가 인간의 갈등과 전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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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물질세계(경제적 삶의 조건)에 기반을 둔 인간의 삶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현실보다도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면서 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관념론은 애초에 그 이상세계를 그리고 항상 사물적 인간이나 물질적 현실을 넘어서려고 하였습니다. 두 입장의 시작이 어디에 있건 간에 인간의 삶을 딱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철학적, 사상적 결이 무수히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란 원래 역사적 맥락이 만들어 낸 존재입니다. 어떤 삶의 세계에 처해 있었느냐가 그의 철학을 형성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플레하노프(Georgi Plechanov, 1856-1918)라는 맑스주의 철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철학사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은 서구 유럽철학, 영미철학, 동양철학 이외의 이른바 러시아 철학이라는 변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간에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 이념적으로 러시아나 유물론의 철학을 다룬다는 것은 거의 금기시 되어 있었던 것도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철학자인 플레하노프의 삶과 생애를 예술철학적 입장에서 정리하고 풀이한 한국의 철학자가 고(故) 강대석 교수입니다. 평상시 유물론적 입장에서 철학을 해왔던 강대석 교수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 인간관과 종교론에 대해서도 해밝은 분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난 2월에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평자와 일면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학문적 관심을 갖고 멀리서 사숙을 하던 차에 그분의 궂긴 소식을 듣고는 놀람을 금치 못했습니다. 불현듯 그분의 저서에 대한 서평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플레하노프는 맑스나 레닌과도 교류를 했던 철학자입니다. 19세기의 역사가 그렇듯이 세계의 이념적 지형은 혼란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지리적 다툼 또한 매우 잦았던 때였습니다.

 

급격한 산업사회의 도래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갈등이 심화되고 그로인한 노동자 탄압과 인권은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플레하노프는 관념론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사회적 현실과 조건을 외면하고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관념론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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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플레하노프는 인문학교를 졸업하고 보병학교에 진학을 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곧 자퇴를 합니다. 그 후 페테르부크르의 광산전문학교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렇듯 그의 학력을 보면 예술철학자로서 어떤 특별한 면모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를 보면 철학자란 당대의 시대가 만들어 내는 듯합니다. 잘 알다시피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차르 전체주의 정치로 농민의 경제 해방이 요원해지게 됩니다.

 

이 시기 플레하노프는 망명과 도피 생활을 계속하면서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읽고, 『공산당선언』을 러시아로 번역하는 작업도 하였습니다. 빵보다 책을 더 귀중하게 생각했던 그는 “혁명적 이념 없이는 참된 의미의 혁명 노동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나키스트 바쿠닌이나 수정 맑스주의자 베른슈타인의 견해와 달리 하면서 그들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예술적 소양도 풍부했습니다.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 바그너의 니벨룽겐을 즐겨들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또한 아나키즘, 생철학자 베르그송의 관념론, 톨스토이의 종교적 휴머니즘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사생관에서는 매우 자연적이고 소박하였습니다. 이는 죽음이란 자연과 하나되는 것이다, 라는 견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플레하노프의 철학적 토대는 유물론이었습니다. “악인을 만드는 것은 본성이 아니라 사회제도다”라는 대명제 하에 맑스주의는 온전한 세계관이요 철학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그의 필생의 과제는 예술의 해석에 있었습니다. 예술(언어) 속에 감정, 사상이 들어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시대적 미감”이 무엇인가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사회적 조건, 즉 생산력과 생산방식에 따라 사람의 위치, 심리가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예술은 사회생활과 삶의 반영이라는 철학적 입장을 고수하기에 이릅니다. “예술은 사회적 인간의 관심이 되고 행동원인이 되는 모든 것을 묘사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말한 것처럼 예술이란 “지상에서 천국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입장과 맥을 같이 합니다.

 

 특히 그는 예술 작품의 이념은 사회학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설파함으로써 예술은 인간의식의 발전, 사회질서의 개선에 기여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무용론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예술철학은 “예술에는 이념(자유, 평등, 민주)이 없으면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의 표현이나 예술은 인류를 위한 봉사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덕이란 타인의 행복을 통해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노동자 자신의 시, 노래, 문학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감성의 표현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오늘날의 오해와는 달리, “공산주의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임을 입증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플레하노프의 유물론적 미학의 핵심인 주관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조건(현실)이라는 데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가 이념이 빠진 예술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한 것은 예술의 기능과 목적은 인간과 사회의 발전, 그리고 이 땅에서 더 좋은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물론이든 관념론이든 이들의 철학은 지금의 세계가 아닌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분투한 실천적 이론과 이론적 실천의 조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진부한 이념의 논쟁보다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위해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화해를 통해 새로운 유토피아, 곧 이상세계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현실에서 초월로, 초월에서 현실로 그 방향이 어디든 최종목적은 인간의 삶의 조건의 해방과 인간의 의식의 개혁 두 가지가 정합적으로 맞물리는 삶의 세계가 아닐까요? 플레하노프의 경우 그것을 예술이라는 영역이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플레하노프 생애와 예술철학(강대석 지음, 사람일보)』 은 고 강대석 교수의 유작이라면 유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의 몸은 다시 물질로 돌아가 관념의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자연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그의 정신세계와 감성세계를 잘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좋은 저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원광디지털대학교 원불교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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