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삶의 지혜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완성하는 것이다.
자아의 완성, 자아의 실현이다.
그리스의 철학자는 이것을 엔텔레케이아(Entelekeia)라고 하였고,
중국의 사상가들은 이것을 성기(成己)라고 하였다.
이 말은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이다. 성기는 자기완성이다.”
안병욱, 『나를 위한 인생 12장』, 자유문학사, 2005, p.172.
[타임즈코리아] 이당은 ‘성(成)’에 담긴 철학적 의미가 『중용』의 성(誠)의 철학의 연장선에 있음을 밝힙니다. ‘成’이라는 한자어가 갖는 무게감은 자기를 완성한다는 데에서 알 수 있습니다. ‘成’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 실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우리는 성을 사업의 성공이나 학업적 성취, 또는 인생의 가시적, 물질적 성취, 나아가 권력이나 명예를 얻는 꼭짓점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成’의 진정한 의미는 ‘나’라는 인격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이당이 일관성 있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요, 나의 의지와 힘으로 움직이는 활동체요, 독자적인 개성과 이성과 양심을 지니는 인격체”인 ‘나’인 것도 원초적 자아(individual)의 그 독특성의 소중함을 천명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成’이 자기를 완성하고 세우는 데에서 중요한 철학적 개념으로 작용하는 것은 나에게서 출발하지 않는 사회와 나라, 그리고 공동체는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당은 공동체나 집단우선주의보다 자기, 개별적 자아나 자유에 더 방점을 찍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 건설이나 나라 건설, 공동체의 건설은 자아건설(自我建設)에 있다고 역설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종교학자 최준식이 적시하고 있듯이, 우리나라는 집단주의, 가족이기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폐단이 많습니다. 이것이 민족주의, 국수주의, 배타주의, 전체주의, 인종차별주의 등으로 확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개별적 자아의 완성이 올바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집단적 정체성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데서 파생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당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는 자아관 또는 자아개념을 확립해야 합니다.
그것도 그냥 자아관이 아니라 맹자나 주자가 설파한 정기(正己)여야 합니다. 주자는 자신의 저서 『근사록(近思錄)』에서 “정기위선(正己爲先)”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나를 바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대학(大學)』에서도 수신위본(修身爲本)이라고 했는데, 오늘날에도 이처럼 나를 갈고 닦아 성숙한 인격을 만드는 데 근본을 두어야 합니다. 사회, 정치, 경제, 교육, 종교에서 여러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이유는 수신과 정기가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실체가 의식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인데, 이는 동양 사회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를 완성하고 확립하는 인격은 몸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몸(짓)은 의식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다스리거나 가르치고자 하는 자, 혹은 타자와 관계 맺는 모든 개별적 자아들은 자기를 먼저 바로 잡고 세운 후 남 앞에 서야 합니다.
이당의 폭넓은 통찰력과 철학적 독서력은 프래그머티즘 철학의 확립자 윌리엄 제임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의식개혁과 사고혁명에 동감을 표하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사고가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성격이 바뀌고, 성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변화와 변혁의 시발점은 의식과 사고의 개조에 있습니다. 사고가 행동을 결정한다는 명제는 “사람을 바꾸려면 먼저 사람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논리로 통합니다.
이당의 생즉사(生 思, 산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라는 철학적 실존은 정사(正思)와 상통합니다. 정사는 공자의 사무사(思無邪)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사악한 것이 없어야 합니다.” 나아가 정사는 남의 의견에 맹종하거나 억측을 일삼지 않고, 스스로 명석판명하게 사고하는 것입니다.
정사, 정행(正行)으로 나아가자면 습(習)을 고쳐야 합니다. 습여성성(習與性成, 습관이 오래되면 그것이 천성으로 굳어짐)이기 때문입니다. 나쁜 습관이 몸에 배기 전에 좋은 습관으로 좋은 성격을 만들어야 합니다.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혁구습(革舊習), 곧 낡은 습관을 개혁(혁파)하라고 조언합니다. 습관의 습(習)은 ‘익힐 습’, ‘버릇 습’, ‘거듭 습’자입니다. “습은 날개 우(羽)와 백(白)이 합성된 한자어입니다. 백(白)자는 스스로 자(自)의 한 획을 줄인 것입니다.
어린 새가 자신의 힘으로 날려고 날개를 수없이 퍼덕거리는 모양을 상형화한 글자입니다. 습은 되풀이하고 반복하는 것이요, 관(貫)은 반복의 결과 버릇이 되고 관행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궁극적 완성인 성(成)은 사고와 행동을 바꾸고 습관을 바꾸어 성격을 새롭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독일의 문학자이자 미학자인 쉴러(F. Schiller)는 말합니다. “네 운명은 네 가슴 속에 있다.” 이당은 성(誠)과 성(成)을 연관 지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진리와 정의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는 건전한 인격을 건설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자신의 성(成)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성찰해야 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成)이라는 한 글자에 담긴 사려 깊은 이당의 철학을 곱씹어 봐야 할 것입니다.
안병욱, 『나를 위한 인생 12장』, 자유문학사, 2005, pp.171~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