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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앎은 ‘행함’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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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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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코리아] 무실(務實)의 한쪽 날개인 역행(力行)은 바로 행동주의와 실천주의를 일컫습니다. 탁상공론이나 하고 실천과 행동이 게으르면 민중도 나라도 힘이 약해집니다.

 

조선 근대유학의 양대 산맥을 꼽으라고 하면 주자학(朱子學)과 양명학(陽明學)입니다. 이견이 없다면 전자는 독서, 이론, 수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후자는 지행일치(知行一致)와 사상연마(事上鍊磨)의 철학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주자학에 매달려 공담허상(空談虛想) 만 늘어놓을 뿐 민생과 민중의 의식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양명학이 배척당하게 되면서 그 뜻을 제대로 실현할 환경이 조성되지 못했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實學)은 바로 이러한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서 등장한 철학입니다.

 

왕양명은 “아는 것은 행하는 것의 시작이고, 행하는 것은 아는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知行之始, 行知之成)”라고 가르쳤습니다. 앎의 목적은 행위에 있습니다.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실제적인 일을 통해서 인격과 정신을 연마해야 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근면과 성실로써 땀을 흘리면서 그 노고를 아끼지 않으면 그 일의 의미를 터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행함으로써 배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속이지 않고 진실하고 근면하게 실천하는 것이 무실역행이고, 지행일치의 삶이자 생의 철학입니다. 사실 진실주의와 행동주의는 이율곡이 주장하는 성(誠)의 철학을 시작으로 왕양명뿐만 아니라 실학에 이르기까지 오롯이 드러나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나 이당 안병욱이 정신과 삶의 철학으로 펼치려고 했던 무실역행의 뿌리는 성실이고 참이었습니다. 성의 표현이 무실이며 역행입니다. 참의 원리는 하늘의 길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늘을 본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불완전합니다. 유한한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유한함과 불완전함을 부단히 극복하려는 존재입니다. '참'되려고 노력하고 '성실'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다면 성의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실역행의 인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당은 그 방법으로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辯), 독행(篤行) 다섯 가지를 언급합니다. 사람은 널리 배워서 정신세계를 확대하고 식견을 넓게 해야 합니다(박학). 사람은 자세히 물어야 합니다. 올바른 물음은 올바른 대답을 가능하게 합니다(심문). 혼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색이 없는 독서는 저작(咀嚼)이 없는 식사와 같다(신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올바른 사리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명변). 사람은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판단한 것이 모두 행동과 실천으로 귀결되어야 합니다(독행).

 

이당은 “학(學)에서 시작하여 행(行)으로 끝나야 한다. 학의 목적은 각(覺)에 있고, 각의 목적은 행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성에서 비롯됩니다. 참됨과 성실함[誠]은 말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성실한 행위가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실역행의 근본이자 성의 본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진실함이 바탕을 이루지 않으면 그것은 사상누각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자신도 속는 것이고 타자도 속이는 삶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는 곧 그것이 무가치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안병욱, 『빛과 지혜의 샘터』, 철학과현실사, 1992, p.38, 151.

안병욱, 『세계사와 민족의 이상』, 철학과현실사, 1990, pp.264~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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