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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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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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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가 3도(三度) 틀리면 법률의 조직이 바뀐다. 자오선(子午線)이 진리를 결정한다. 불과 수년 동안에 법률의 근본이 바뀐다. 기묘한 정의(正義)여, 한 줄기의 강에 지배를 받다니, 피레네산맥의 이쪽에서는 진리인 것이 저쪽에서는 오류다. 이것은 인간이 진리니, 정의니, 법률이니 하면서 큰소리를 치지만, 따지고 보면 어처구니없는 데가 있다는 것이다. 국경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면 법률의 체계가 달라지고, 진리의 기준이 다르고, 정의의 원리가 뒤바뀐다. 생각하면 허망한 일이다. 진정한 웅변은 웅변을 경멸하고, 진정한 도덕은 도덕을 무시한다. 철학을 멸시하는 것이 정말 철학을 하는 것이다.”

안병욱, 『安秉煜에세이3 사색인의 향연』, 교육도서, 1988, pp.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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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파스칼(B. Pascal)의 『팡세(Pensees)』라는 책을 떠올리면 종교철학서 혹은 종교적 수상록을 쓴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서 여러 사연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팡세』를 통해 삶[生]의 의미를 되새기곤 할 것입니다. 『팡세』는 삶, 사랑, 죽음 등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깊이 관조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니체(Friedrich W. Nietzsche)조차도 “플라톤, 파스칼, 스피노자에 관해서 말할 때 그들의 피가 나의 핏속에 흐르는 것을 나는 느낀다”고 말할 정도로 파스칼을 높이 샀습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Gott ist tot)’고 선언한 후 생과 대지(大地)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반면에 파스칼은 생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한 끝에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사뭇 철학적 결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두 사람 모두 생에 대해서만큼은 성실했습니다. 이당의 해석대로 이 두 철학자는 성실하게 인생을 사색했습니다. 이당은 특히 파스칼을 “성실무비(誠實無比)의 철학자, 사색하며 신앙한 철학자”로 기록합니다.

 

인간이 사색한다는 것은 인간이 비록 세계-내-존재로서 우주에서 매우 미약한 존재이기는 하나 사고할 수 있기 때문에 위대하고 품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힘을 상실하면 인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냥 갈대가 아니라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존재만이 인간입니다. 생각이 없는 존재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냥 생각이 아닙니다. 깊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깊은 생각을 하려면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파스칼에 의하면, 그것은 기하학적 정신(esprit geomtrique)과 섬세(纖細)의 정신(esprit de finesse)입니다. 전자는 논리와 추리에 의해서, 후자는 직관에 의해서 사물의 원리와 질서를 단번에 파악하는 방법입니다. 과학적 인식에는 기하학적 정신이 필요하고, 인생을 이해하는 데는 섬세한 정신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이렇게 논리적인 이성과 섬세한 심정(心情)을 갖습니다. 전자는 로고스(logos)의 세계라 하고, 후자는 파토스(pathos)의 세계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성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심정에 의해서도 진리를 인식합니다. 사람이 양극단에 치우치면 균형이 무너집니다. 논리와 직관이 더불어 작용해야 사태의 본질과 인생의 본바탕을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에서 우세한 결과가 나왔을지라도 그것은 한시적일 뿐이고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우쭐거린다면 자신이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행태입니다. 즉,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생(vie)을 세 가지 질서와 존재 방식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신체(corps), 정신(esprit), 사랑 혹은 자비(charite)입니다.

 

먼저 인간의 생[生]은 신체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당연한 진리에 머물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신체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면 정신과 앎[知]에 대해서는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몸이 가난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체의 질서에서 사는 사람은 정신의 질서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정신의 질서 혹은 존재 방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정신의 질서는 명예, 영광, 지식을 추구합니다. 신체의 질서를 자연태(自然態)라고 한다면, 정신의 질서는 자각태(自覺態)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사랑 혹은 자비의 질서로 사는 사람은 성자(聖子)입니다. 겸손, 인내, 정결, 거룩함이 삶의 속성으로 자리 잡은 사람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쉽게 범접하기는 어려운 세계이기도 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정신의 질서에 속하는 중간적 존재자로 보았습니다. “인간은 전체와 무한의 중간자다. (...) 인간은 천사도 아니요, 짐승도 아니요, 그 중간자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순적 존재입니다. 한없이 위대하지만 동시에 한없이 비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사고하는 인간, 사유하는 인간, 생각하는 갈대이기 때문입니다.

 

사유하는 인간은 우주(자연)를 포함하면서 초월하는 포월(包越)의 존재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자각하여 비참한 존재라는 것도 인식합니다. 죽음, 죄, 전쟁, 허위, 정욕, 위희(慰戱), 허욕(虛慾) 등 삶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것을 망각하고 마음에 위안을 주는 온갖 위희(divertissement)로 살아갑니다. 인생을 제대로 통찰하면 불안, 공허, 권태가 늘 도사립니다. 이것이 인간이 자기 도피를 하려는 까닭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유한성은 스스로 신앙을 도약하게 합니다. 파스칼에 의하면 인생[生] 최고의 질서는 신앙입니다. 신앙은 도약입니다. 신이 있다고 하면 무한한 행복이 보장되지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한한 행복을 얻게 됩니다. 그러니 신의 유무에 대한 내기를 해도 본전은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을 바깥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깥의 행복은 쉬 사라질 것들입니다. 파스칼은 영원한 행복을 위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중간적 존재자의 유한성을 극복하면서 신을 갈구하는 것, 즉 신앙하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생 전체를 신에게 걸었습니다. 이당은 파스칼의 그 성실무비하고 경건한 구도자의 모습을 본받았으며 인간의 진정한 행복의 본질을 추적했습니다. 파스칼처럼 진리를 위해서 논리와 직관을 통해 삶의 본질에 천착했습니다. “위에서 찾으라”라는 파스칼의 말은 이당에게도 통용되는 말입니다. 진정성 있는 진리 탐구자인 동시에 경건한 구도자의 모습, 이것이 바로 이당의 삶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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