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9-18(금)

성의(誠意)는 참되고 아름다운 삶을 꽃피우는 원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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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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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적으로 볼 때, 현대에는 세 가지 정신적 악(精神的 惡)이 있다.

첫째는 모르고도 배우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알고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한번 깊이 음미(吟味)해 볼 만하다.”

『安秉煜에세이2 삶의 보람을 찾아서』, 교육도서, 1988,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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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 안병욱 서재

 

[타임즈코리아] 현대 사회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문제점은 진실(眞實)되고 정성을 다하려는 뜻과 의지가 눈에 띄게 약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배움[學/問]’과 ‘가르침[敎/育]’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은 배우고 가르침, 가르치면서 배움이 서로 밀접한 상호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산 안창호가 말한 무실(務實)하고 역행(力行)하는 삶과도 연결됩니다.

 

성실을 말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에 힘써야 한다는 무실역행(務實力行)의 교육사상에 비춰 볼 때 참되기를 힘써야 배움과 가르침도 헛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는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은 논리적인 정합성과 순차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실을 천명하고 역행하는 것이 학문의 근본이며 사람 된 도리라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당은 “지식이기주의자(知識利己主義者)”가 되지 말라고 당부하였을까요? 배움과 가르침, 앎의 선후(先後), 배우려는 것과 가르치려는 의지가 다 배우고자 하는 정신에서 비롯됩니다. 배우고자 할 때 만물은 다 스승이 되고, 모든 사람이 스승이자 학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배움은 ‘겸손(謙遜)’과 짝을 이룹니다. 모든 대상, 사물, 사람 등과 인생과 세상이 다 삶을 배우는 학교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스승으로 보입니다. 이런 자세가 되면 자연히 겸손한 마음이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죽는 날까지 배운다’는 말도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배워서 동시에 가르쳐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정성을 다하는 의지와 뜻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성의(誠意)가 없으면 게으르게 되고, 게으르게 되면 스승을 찾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배움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성의(誠意)가 살아 숨 쉬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성의가 있어야 겸손해지고, 배우며 가르치려는 의지가 삶의 진보를 가져오는 선순환이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삶의 공동체를 일컬어 책임사회, 봉사 사회, 연대 의식이 강한 사회라고 부릅니다. 인간이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집단 간에 아무런 성의가 없는 무관심(無關心)의 사회가 아니라 관심으로 가득한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배움과 가르침은 서로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당이 독특하게 개념화한 “지식이타주의자”는 배워서 남에게 주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지식이기주의자”는 배워서 자기만 알고 가르치려 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타인에 대해 그냥 수수방관합니다. 더욱이 지식이기주의는 자신이 아는 것을 다라고 생각하는 오만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성의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배움과 가르침에 성의가 있는 사람은 모두가 배우는 주인(주체)이자 가르치는 주인(주체)가 됩니다. 이른바 상호주체(후설의 현상학적 개념으로는 상호주관적 존재)입니다.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나아가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 혹은 배움과 가르침은 모두 ‘지(知)’와 ‘행(行)’의 태도입니다. 앎을 추구하는 것에서 얻게 된 모든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행위입니다. 이것을 지행합일(知行合一) 혹은 지행일치(知行一致)이라도 합니다. 도산 안창호는 이를 위해서 ‘무실역행주의(務實力行主義)를 설파했습니다. 참됨(진실)을 알고 이를 행하는 데 힘쓰는 민중(시민)이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배움과 가르침이 모두 성의 있고, 성실에 바탕을 두려면 말이나 생각에만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당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知)가 문제가 아니요, 행(行)이 문제다. 우리는 언(言)의 인(人)이 아니고, 행(行)의 인(人)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 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처럼 큰 정신적 죄악은 없다.”

 

이제부터라도 상호 배움과 상호 가르침에 성의(誠意)와 성실(誠實), 그리고 성심(誠心)을 다해야 한다는 큰 깨우침을 주는 말입니다.

 

『安秉煜에세이2 삶의 보람을 찾아서』, 교육도서, 1988, pp.129-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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