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8-07(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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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불성무물(不誠無物)의 철학이여!
    “성실은 인간의 위대한 힘이요, 덕이요, 빛이다.” 안병욱, 『인생, 그 순간에서 영원까지』, 자유문학사, 1987, p.243. 양구 인문학박물관과 방명록   지극한 정성을 다하면 사람은 물론 하늘도 감동하게 합니다. 이당의 좌우명은 “불성무물”입니다. 이는 동양의 고전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로서,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정성을 다해야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인생은 요행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성실이 근본이 되어야만, 모든 것은 그 존재적 가치를 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실이 근본이 되어야만, 인생도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성실을 달리 말하면 ‘충실(充實)’이라고 합니다. 하루하루를 최선으로 살아가는 것, 알차고 보람 있게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당의 말대로 “현재는 미래를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현재 자체가 목적입니다.” 탁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성실한 마음과 자세로 대해야 합니다. 만남도 참되고. 말도 참됨으로써 성실함을 일상화해야 합니다. 표정도 밝게 하며, 마음과 마음이 맞닿은 화(和)를 이루어야 합니다. 온화하고 인자하며 조화로움 가운데 중용을 지키는 화목(和睦)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論語』에서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이야기합니다. 사람과 어울림에 있어서 화합하면서도 부화뇌동하지 아니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 내 앞의 사람과 사물입니다. 지금 여기는 나에게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중요한 시·공간입니다. 이당은 톨스토이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시간은 현재요,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내가 지금 대하고 있는 사람이요, 제일 중요한 일은 그 사람에게 선(善)을 행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사람과 사물에 진정성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는 성실함은 내 앞의 모든 존재에 대한 예의이며 선입니다.  정성을 다하고 성실한 사람에게 고개가 숙어지는 것은 그에게서 번져오는 선과 겸손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참되고 순수하고 독실한 것”이 느껴지기에 그렇습니다. 한때 성실이 집안의 모든 사람을 묶어주는 삶의 철학이자, 그 집안의 지향성인 것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실’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속고 속이는 일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 무던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당은 “성실의 재건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삶의 요소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성실함을 존재의 척도로 삼는 사회, 이로써 신뢰와 감동으로 일렁이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실함, 곧 나와 너, 세계와 삶을 속이지 않는 삶으로 공명을 불러일으키고 파장을 일으키는 “성실주의”가 하나의 진리가 되는 세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당은 말합니다. “성실은 우리가 딛고 설 인생의 땅이요, 우리가 밟고 나아갈 길이다.” 안병욱, 『인생, 그 순간에서 영원까지』, 자유문학사, 1987, pp.242-253.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06
  • 율곡 이이의 후예, 성(誠)을 통한 이당의 마음 공부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공부는 마음 공부(工夫)다. 심학(心學)처럼 중요한 학이 없다. 마음 공부란 무엇이냐. 우리 마음을 닦는 공부요, 우리의 마음을 기르는 공부다. 우리의 마음을 쓰는 공부요, 우리의 마음을 통일하는 공부다. 수심(修心)과 양심(養心)과 용심(用心)과 구심(求心)이 마음 공부의 중요한 목표요, 항목이다.” 『安秉煜에세이1.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교육도서, 1988, p.177.   이당은 마음 공부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달리 정신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마음을 공부하는 것이 철학자의 자세이자 마땅히 힘쓸 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닦고 기르는 것은 알지만, 마음 씀씀이와 마음을 올바르게 찾는 것은 지난한 일입니다. 그래서 후자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래서 이당은 마음 공부의 요령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인생의 가장 근본이 되는 진리를 하나 붙들고 밤낮으로 그것을 사유하고, 실천하고, 터득하려고 애를 쓰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삶의 우선순위에서 점점 더 밀려나고 있습니다. 몸 쓰는 일, 마음 쓰는 일, 머리 쓰는 일도 점점 더 약화하여 갑니다. 이런 것은 모두 유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마음 공부가 따로따로 되고 있으니 혼연일체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닦고 마음을 쓰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앞세우다가 보니 마음이 다치게 됩니다.   이당은 본립도생(本立道生), 즉 ‘근본이 서면 방법[道]은 저절로 생긴다’는 말로 올바른 마음 공부가 중심 역할을 하도록 안내합니다. 성(誠)의 철학자답게 율곡 이이를 비롯하여 퇴계 이황(敬), 우암 송시열(直), 도산 안창호의 애(愛)에 이르기까지 마음 공부의 대표 선인들을 언급합니다.   ‘성(誠)’을 마음 공부의 화두로 삼았던 율곡 이이는 매사에 정성을 다하고 성실한 마음 자세로 일과 사람을 대했습니다. 퇴계 이황은 ‘경(敬)’이 모든 일의 근본이라고 믿었습니다. 공경스러운 마음은 오만한 마음, 거짓된 정신, 경솔한 태도를 경계합니다. 우암 송시열은 곧고 올바르며 공정한 정의의 원칙대로 사는 것을 삶의 최우선으로 꼽았습니다. 곡(曲), 사(邪), 악(惡)은 모두 ‘직(直)’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산 안창호는 사랑하기를 삶의 철학으로 품고 살았습니다. 잘 알다시피 그의 사랑은 나라, 사람, 진리, 자연, 하나님, 문화, 일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만사의 철학으로 규정짓고 몸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도산 안창호는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네가 하는 일에게 네 정성과 최선을 다하여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성(誠)이든, 직(直)이든, 경(敬)이든, 애(愛)든 다 성(誠)으로 통한다면 무리(無理)일까요? 필자는 일리(一理)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당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마음 공부에 대한 전범(典範)을 알았으니, 실천할 일만 남았습니다. 후대의 자손은 선대의 교훈을 과거의 산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 누구도 선대의 연장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을 닦고 기르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을 올바로 쓰는 일까지,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조신하게 챙기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마음 공부를 위해 인생의 진리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 진리를 자신의 마음 밭에 놓고 곱씹어 득함으로 몸에서 배어 나오게 하면 눈빛이 달라질 것입니다. 낯빛은 온화해지고 목소리의 색깔 다정하며, 눈에서 배어 나오는 빛깔이 부드러워져서 결국 정신은 선(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선대의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닦아 놓고 증명한 마음 공부(의 방법)를 정성(精誠)껏 성실(誠實)하게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우리도 그와 같은 인물로 닮아갈 것입니다. 『安秉煜에세이1.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교육도서, 1988, pp.177-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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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병욱 평전
    2020-08-05
  • 이당 안병욱의 언어철학: 이름에 걸맞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름과 알맹이가 둘 다 완전한 것, 이름도 좋지만 그 속에 담긴 알맹이와 실력이 충분할 때 한문에서는 명실겸전(名實兼全)이라고 한다.” 안병욱, “현대인의 생활지표”, 김양호 편, 『언어교양대학』, 언어문화사, 1974, p.79. 양구 인문학박물관 안병욱 교수 서재   세상에 이름을 갖지 않은 존재가 없을 것입니다.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있다’, ‘사물이 있다’, ‘동물이 있다’, ‘식물이 있다’ 등등 ‘있다’라고 할 때는 그 대상을 지칭하는 이름이 있어야 그 ‘있음’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안병욱은 그 이름을 ‘명(名)’이라고, 알맹이와 자격을 ‘실(實)’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은 있지만,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자격과 실력과 알맹이가 없으면 유명무실(有名無實)이라고 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세계나 사람 중에는 이름은 있지만 이름값을 못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텅 빈[虛] 상태나 거짓된[僞] 존재도 많이 있습니다. 이당은 알참, 실질, 실력을 갖춘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이처럼 삼박자를 갖춘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실하다’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이는 다부지고 튼튼하며 알찬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듣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름을 갖지 못한 존재, 그리고 이름이 있더라도 이름값을 못 하는 존재도 많습니다. 이름에 걸맞은 실력으로 영근 알맹이를 가득 채우려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도 삶의 지향을 거기에다 두어야 합니다.   이름값을 한다, 이름에 걸맞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달리 자신의 ‘자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한다는 말과도 통합니다. 교수, 성직자, 국회의원, 대통령, 교사, 사장, 회장, 학생 등 각기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걸맞은 언행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이른바 유용(有用)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당이 지적하고 있듯이 무용지물(無用之物)의 사람, 해를 끼치는 자가 됩니다.   나아가 자신의 자리를 잘 파악하고 인식하면서 이름에 걸맞은 언행을 하려는 사람은 질서와 아름다움을 생각하여 처신합니다. 자리의 아름다움이란 있어야 할 곳, 즉 제 자리에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달리 ‘앎답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앎은 인식이며 양심입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 사물이 있어야 할 곳을 제대로 알고 양심에 따르는 것이 아름다움입니다. 이러한 자리는 궁극적으로 행복의 자리, 행복한 삶과도 연결이 됩니다. 이것이 순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당은 여기에서 사회적 자리에서 요구되는 원칙들을 말합니다. 책임과 신용(신의)입니다. 당연한 것 같지만 몸으로 잘 실행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책임(responsibility)은 대인관계에서 타인에 대한 욕구나 어려움에 적절하게 반응하고 응답한다(respond)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신용을 잃지 않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회적 관계에서 무시해서는 안 되는 도덕적 행위들입니다. 이 두 가지를 지키지 못하면 사회적 자리가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마치 산사태가 벌어지는 것처럼 엄청난 피해와 혼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당은 자리에 대한 건강함을 유지하고 이름에 걸맞은 사람살이를 하려면 제 ‘구실’(口實)을 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구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구실의 다섯 가지 원리를 거론하면, 사람 구실, 가족원 구실, 직장인 구실, 민주 시민 구실, 백성 구실입니다. 구실을 순우리말로 하면 ‘노릇’이요, 라틴어로 하면 오피시움(officium)이나 페르소나(persona)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각자 직책이나 자리에 잘 어울리는 역할과 기능을 하면 그만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 노릇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의 자리가 사람의 자리라는 것을 명확하게 안다면 나머지 사람살이의 구실은 저절로 잘 될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 근본적인 구실이 안 되면 나머지도 안 됩니다. 사람 구실을 제대로, 올바로 해야 보람 있는 삶이 영위되는 것 아닐까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 이당은 그것을 명실상부(名實相符)라고 합니다. 이름과 사물이 일치되는 세계가 되어야 하고, 이름과 인품이 잘 맞아떨어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만큼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당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자기 이름이 있다. 우리는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알맹이와 실력을 갖추자.”   늘 마음에 두고 반성하고 연구하며 노력해야 할 말입니다. 삶에서 정성과 성실함을 기울이라는 그의 평소 전언을 생각해보면, 유독 이름과 자리, 그리고 구실이라는 말이 오래도록 마음의 울림으로 남습니다. (안병욱, “현대인의 생활지표”, 김양호 편, 『언어교양대학』, 언어문화사, 1974, pp.7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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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병욱 평전
    2020-08-04
  • 사랑의 종교철학적 아포리즘(aphorism)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습니다. 사랑은 아낌없이 줍니다. 사랑에 관한 상반되는 이 명제는 모두 옳은 말입니다. 사랑에는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전자는 ‘빼앗는 사랑’이며, 후자는 ‘주는 사랑’ 또는 ‘바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고, 아낌없이 줍니다. 이것이 사랑의 헌신(獻身)의 원리입니다. 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고 독점하고 싶어 하며,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독점의 원리입니다.”『인생사전』, 예원북, 2013, p.75.   [타임즈코리아] 안병욱이 종교에 대해서 언급한 글은 거의 없습니다. 말년의 글에서 조금씩 나타나는 신에 대한 사랑 혹은 거기에서 파생되는 사랑에 관한 풀이는 흡사 설교 문을 읽는 듯합니다. 사랑을 크게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하향적 사랑, 인간이 신을 향하는 상향적 사랑,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 사랑으로 나누는 명료함도 해석학적 식견이 한몫한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고상한 밀어(密語)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사랑을 종교적 실천이나 연인 사이의 아름다운 감정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철학적 문제로 사유하는 데까지 나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다 보니 이른 봄 지표면은 녹았으나 땅속은 아직도 얼어 있는 것처럼, 사랑에 대해 온전한 이해와 실천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칫하면 사랑도 소유 개념으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소유하거나 말거나 하는 이기주의로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당은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삶과 사랑은 자신에게 충실하면서 동시에 타자에게도 성실해야 하기에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당이 그토록 강조하는 것처럼, 삶을 성실하게 산다는 것은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과 타자에게 속이지 않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시기, 질투, 분노, 증오를 넘어서야 합니다.   철학적 사랑은 나의 속이나 남의 속을 모두 만족시키는 순수함에 있기에 어렵습니다.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당은 빼앗는 사랑이 아니라 온전히 내어주는 아가페적 사랑을 높게 평가합니다. 흔히 아가페적 사랑은 성서적, 기독교적 사랑으로 봅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사랑의 정수를 꿰뚫어 본 이당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추구하고 실천에 힘쓴다면 사랑은 모든 덕 중에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맑은 영혼이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 사랑 안에 있다는 해석학적 논리도 두드러집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으면서 유한한 인간은 그저 그러한 사랑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음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적 사랑을 하기 어렵다면 최소한 ‘우애’(philia)라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에로스(eros)는 곡해되었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인 스토르게(storge)도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현상을 부인하고 싶지만,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현실입니다. 모두가 다 신의 자녀로서 신의 뜻에 따라 사랑(agape)을 할 수 없다면, 우정 어린 마음으로 사람을 사귀는 것만큼이라도 귀중하게 여기며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친구처럼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황량한 사막과도 같습니다. 벗을 뜻하는 한자어 우(友)는 두 친구가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형상을 본뜬 것입니다. 꼭 벗이 아니더라도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도 많아야 합니다.   필리아는 우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문화·예술에 대한 사랑까지 아우르며 심지어 philosophia, 곧 지혜에 대한 각별하고 사심 없는 사랑도 포함합니다. 철학과 사랑의 긴밀한 랑데부(rendezvous, 밀회)가 잘 드러나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을 딱 네 가지로 분류하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또 이 사랑의 개념과 감정은 서로 중첩되기도 합니다. 이 개념들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넓고 깊게 할 수 있는 만큼 사람이 달라집니다. 그 사랑 속에 그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한 이해만큼 실천하게 됩니다. 실천이 부족하다면 그만큼 이해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만큼이 그 사람의 깊이입니다. 그 사람의 삶의 질은 이와 비례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랑받은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당은 사람 안에 사랑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 안에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형이상학적 통찰에서 사랑을 말해줍니다.   ※아포리즘(aphorism) 명언, 격언, 잠언과 같이 신조나 이치를 기억하기 쉽게 간결하고 명쾌한 표현으로 쓴 글을 일컫는 말이다. 주로 작가의 체험적 내용을 독창적으로 표현한 것이기에 그 작가만의 개성과 지적 역량을 통해 사물의 핵심이나 이치를 깨달으며 교훈도 얻는 묘미를 맛보게 된다.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03
  • 행복한 인생을 위한 기초, ‘사랑-함’
    “인간은 애정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빵은 육체의 양식이요, 사랑은 정신의 양식이다. 우리는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사랑을 먹어야 한다. ‘사랑은 인간의 주성분이다’라고 철학자 피히테는 말했다.” 『인생 그 순간에서 영원까지』 p.21. 이당 안병욱 교수와 부인 김광심 여사 생전 모습   [타임즈코리아]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은 물질만 풍요로우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부분 즐기는 시간과 공간, 대상과 장소를 보면 사물성이나 물질성이 많은 것도 이를 반영합니다. 안병욱은 인생철학자로서 삶을 우선으로 하는 삶의 경험적 이치를 잘 설명해 주는 생철학자입니다. 그는 인생의 집을 짓는데 필요한 세 가지 원리로 사랑, 믿음, 창조를 거론합니다.   안병욱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랑은 인생의 흐뭇한 향기다. 사랑은 인생의 따뜻한 햇볕이다. 우리의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사랑이다.” 자칫 사랑을 감정으로 치부하기 쉬운데, 오히려 사랑은 정신의 토대가 되어야 하고, 그것 없이는 삶의 자양분과 원동력을 마련할 수 없다는 말은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생의 모든 힘을 뿜어내는 정신이자 정신의 깊은 속입니다.   게다가 정신도 사랑을 기반으로 해야 인간의 이성적 행위로서의 책임과 이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마저도 가능해집니다. 이성(ratio, nous, reason)의 개념 안에 계산, 수치, 계량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니,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인간은 도구적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안병욱은 “사랑은 인생의 위대한 가치요, 근본적인 가치요, 영원한 가치다. 사랑 없는 인생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다. 산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명제(命題)를 잊어서는 아니 된다”고 말합니다. 이른바 사랑절대주의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판별하는 기준, 윤리적 잣대입니다. 안병욱은 사랑-하기를 철학-하기(philosophieren)처럼 명제화하고 있는 것은 사랑-함도 결국 공부고 끊임없는 훈련과 체득의 과정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에 대해, 사람에 대해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세계(우주)를 사랑한다는 것인데, 이는 연습과 훈련과 공부를 통해 체득됩니다. 공부-함, 철학-함, 사랑-함은 삶의 행위이자 생철학의 근간이 됩니다. 인간다움과 인간 정신의 외현적 표상이자 인간의 지표로 평가되는 행위들입니다.   사랑을 왜 공부해야 할까요? 그것은 삶과 사랑이 동근원적(同根原的)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둘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원인임과 동시에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의 장(場)이 같다는 말입니다(『인생 그 순간에서 영원까지』, 자유문학사, 1987, 21-23 참조).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7-30

실시간 안병욱 평전 기사

  • 아, 불성무물(不誠無物)의 철학이여!
    “성실은 인간의 위대한 힘이요, 덕이요, 빛이다.” 안병욱, 『인생, 그 순간에서 영원까지』, 자유문학사, 1987, p.243. 양구 인문학박물관과 방명록   지극한 정성을 다하면 사람은 물론 하늘도 감동하게 합니다. 이당의 좌우명은 “불성무물”입니다. 이는 동양의 고전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로서,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정성을 다해야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인생은 요행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성실이 근본이 되어야만, 모든 것은 그 존재적 가치를 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실이 근본이 되어야만, 인생도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성실을 달리 말하면 ‘충실(充實)’이라고 합니다. 하루하루를 최선으로 살아가는 것, 알차고 보람 있게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당의 말대로 “현재는 미래를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현재 자체가 목적입니다.” 탁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성실한 마음과 자세로 대해야 합니다. 만남도 참되고. 말도 참됨으로써 성실함을 일상화해야 합니다. 표정도 밝게 하며, 마음과 마음이 맞닿은 화(和)를 이루어야 합니다. 온화하고 인자하며 조화로움 가운데 중용을 지키는 화목(和睦)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論語』에서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이야기합니다. 사람과 어울림에 있어서 화합하면서도 부화뇌동하지 아니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 내 앞의 사람과 사물입니다. 지금 여기는 나에게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중요한 시·공간입니다. 이당은 톨스토이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시간은 현재요,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내가 지금 대하고 있는 사람이요, 제일 중요한 일은 그 사람에게 선(善)을 행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사람과 사물에 진정성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는 성실함은 내 앞의 모든 존재에 대한 예의이며 선입니다.  정성을 다하고 성실한 사람에게 고개가 숙어지는 것은 그에게서 번져오는 선과 겸손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참되고 순수하고 독실한 것”이 느껴지기에 그렇습니다. 한때 성실이 집안의 모든 사람을 묶어주는 삶의 철학이자, 그 집안의 지향성인 것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실’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속고 속이는 일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 무던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당은 “성실의 재건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삶의 요소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성실함을 존재의 척도로 삼는 사회, 이로써 신뢰와 감동으로 일렁이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실함, 곧 나와 너, 세계와 삶을 속이지 않는 삶으로 공명을 불러일으키고 파장을 일으키는 “성실주의”가 하나의 진리가 되는 세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당은 말합니다. “성실은 우리가 딛고 설 인생의 땅이요, 우리가 밟고 나아갈 길이다.” 안병욱, 『인생, 그 순간에서 영원까지』, 자유문학사, 1987, pp.242-253.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06
  • 율곡 이이의 후예, 성(誠)을 통한 이당의 마음 공부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공부는 마음 공부(工夫)다. 심학(心學)처럼 중요한 학이 없다. 마음 공부란 무엇이냐. 우리 마음을 닦는 공부요, 우리의 마음을 기르는 공부다. 우리의 마음을 쓰는 공부요, 우리의 마음을 통일하는 공부다. 수심(修心)과 양심(養心)과 용심(用心)과 구심(求心)이 마음 공부의 중요한 목표요, 항목이다.” 『安秉煜에세이1.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교육도서, 1988, p.177.   이당은 마음 공부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달리 정신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마음을 공부하는 것이 철학자의 자세이자 마땅히 힘쓸 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닦고 기르는 것은 알지만, 마음 씀씀이와 마음을 올바르게 찾는 것은 지난한 일입니다. 그래서 후자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래서 이당은 마음 공부의 요령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인생의 가장 근본이 되는 진리를 하나 붙들고 밤낮으로 그것을 사유하고, 실천하고, 터득하려고 애를 쓰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삶의 우선순위에서 점점 더 밀려나고 있습니다. 몸 쓰는 일, 마음 쓰는 일, 머리 쓰는 일도 점점 더 약화하여 갑니다. 이런 것은 모두 유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마음 공부가 따로따로 되고 있으니 혼연일체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닦고 마음을 쓰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앞세우다가 보니 마음이 다치게 됩니다.   이당은 본립도생(本立道生), 즉 ‘근본이 서면 방법[道]은 저절로 생긴다’는 말로 올바른 마음 공부가 중심 역할을 하도록 안내합니다. 성(誠)의 철학자답게 율곡 이이를 비롯하여 퇴계 이황(敬), 우암 송시열(直), 도산 안창호의 애(愛)에 이르기까지 마음 공부의 대표 선인들을 언급합니다.   ‘성(誠)’을 마음 공부의 화두로 삼았던 율곡 이이는 매사에 정성을 다하고 성실한 마음 자세로 일과 사람을 대했습니다. 퇴계 이황은 ‘경(敬)’이 모든 일의 근본이라고 믿었습니다. 공경스러운 마음은 오만한 마음, 거짓된 정신, 경솔한 태도를 경계합니다. 우암 송시열은 곧고 올바르며 공정한 정의의 원칙대로 사는 것을 삶의 최우선으로 꼽았습니다. 곡(曲), 사(邪), 악(惡)은 모두 ‘직(直)’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산 안창호는 사랑하기를 삶의 철학으로 품고 살았습니다. 잘 알다시피 그의 사랑은 나라, 사람, 진리, 자연, 하나님, 문화, 일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만사의 철학으로 규정짓고 몸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도산 안창호는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네가 하는 일에게 네 정성과 최선을 다하여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성(誠)이든, 직(直)이든, 경(敬)이든, 애(愛)든 다 성(誠)으로 통한다면 무리(無理)일까요? 필자는 일리(一理)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당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마음 공부에 대한 전범(典範)을 알았으니, 실천할 일만 남았습니다. 후대의 자손은 선대의 교훈을 과거의 산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 누구도 선대의 연장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을 닦고 기르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을 올바로 쓰는 일까지,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조신하게 챙기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마음 공부를 위해 인생의 진리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 진리를 자신의 마음 밭에 놓고 곱씹어 득함으로 몸에서 배어 나오게 하면 눈빛이 달라질 것입니다. 낯빛은 온화해지고 목소리의 색깔 다정하며, 눈에서 배어 나오는 빛깔이 부드러워져서 결국 정신은 선(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선대의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닦아 놓고 증명한 마음 공부(의 방법)를 정성(精誠)껏 성실(誠實)하게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우리도 그와 같은 인물로 닮아갈 것입니다. 『安秉煜에세이1.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교육도서, 1988, pp.177-179.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05
  • 이당 안병욱의 언어철학: 이름에 걸맞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름과 알맹이가 둘 다 완전한 것, 이름도 좋지만 그 속에 담긴 알맹이와 실력이 충분할 때 한문에서는 명실겸전(名實兼全)이라고 한다.” 안병욱, “현대인의 생활지표”, 김양호 편, 『언어교양대학』, 언어문화사, 1974, p.79. 양구 인문학박물관 안병욱 교수 서재   세상에 이름을 갖지 않은 존재가 없을 것입니다.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있다’, ‘사물이 있다’, ‘동물이 있다’, ‘식물이 있다’ 등등 ‘있다’라고 할 때는 그 대상을 지칭하는 이름이 있어야 그 ‘있음’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안병욱은 그 이름을 ‘명(名)’이라고, 알맹이와 자격을 ‘실(實)’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은 있지만,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자격과 실력과 알맹이가 없으면 유명무실(有名無實)이라고 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세계나 사람 중에는 이름은 있지만 이름값을 못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텅 빈[虛] 상태나 거짓된[僞] 존재도 많이 있습니다. 이당은 알참, 실질, 실력을 갖춘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이처럼 삼박자를 갖춘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실하다’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이는 다부지고 튼튼하며 알찬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듣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름을 갖지 못한 존재, 그리고 이름이 있더라도 이름값을 못 하는 존재도 많습니다. 이름에 걸맞은 실력으로 영근 알맹이를 가득 채우려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도 삶의 지향을 거기에다 두어야 합니다.   이름값을 한다, 이름에 걸맞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달리 자신의 ‘자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한다는 말과도 통합니다. 교수, 성직자, 국회의원, 대통령, 교사, 사장, 회장, 학생 등 각기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걸맞은 언행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이른바 유용(有用)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당이 지적하고 있듯이 무용지물(無用之物)의 사람, 해를 끼치는 자가 됩니다.   나아가 자신의 자리를 잘 파악하고 인식하면서 이름에 걸맞은 언행을 하려는 사람은 질서와 아름다움을 생각하여 처신합니다. 자리의 아름다움이란 있어야 할 곳, 즉 제 자리에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달리 ‘앎답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앎은 인식이며 양심입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 사물이 있어야 할 곳을 제대로 알고 양심에 따르는 것이 아름다움입니다. 이러한 자리는 궁극적으로 행복의 자리, 행복한 삶과도 연결이 됩니다. 이것이 순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당은 여기에서 사회적 자리에서 요구되는 원칙들을 말합니다. 책임과 신용(신의)입니다. 당연한 것 같지만 몸으로 잘 실행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책임(responsibility)은 대인관계에서 타인에 대한 욕구나 어려움에 적절하게 반응하고 응답한다(respond)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신용을 잃지 않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회적 관계에서 무시해서는 안 되는 도덕적 행위들입니다. 이 두 가지를 지키지 못하면 사회적 자리가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마치 산사태가 벌어지는 것처럼 엄청난 피해와 혼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당은 자리에 대한 건강함을 유지하고 이름에 걸맞은 사람살이를 하려면 제 ‘구실’(口實)을 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구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구실의 다섯 가지 원리를 거론하면, 사람 구실, 가족원 구실, 직장인 구실, 민주 시민 구실, 백성 구실입니다. 구실을 순우리말로 하면 ‘노릇’이요, 라틴어로 하면 오피시움(officium)이나 페르소나(persona)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각자 직책이나 자리에 잘 어울리는 역할과 기능을 하면 그만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 노릇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의 자리가 사람의 자리라는 것을 명확하게 안다면 나머지 사람살이의 구실은 저절로 잘 될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 근본적인 구실이 안 되면 나머지도 안 됩니다. 사람 구실을 제대로, 올바로 해야 보람 있는 삶이 영위되는 것 아닐까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 이당은 그것을 명실상부(名實相符)라고 합니다. 이름과 사물이 일치되는 세계가 되어야 하고, 이름과 인품이 잘 맞아떨어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만큼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당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자기 이름이 있다. 우리는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알맹이와 실력을 갖추자.”   늘 마음에 두고 반성하고 연구하며 노력해야 할 말입니다. 삶에서 정성과 성실함을 기울이라는 그의 평소 전언을 생각해보면, 유독 이름과 자리, 그리고 구실이라는 말이 오래도록 마음의 울림으로 남습니다. (안병욱, “현대인의 생활지표”, 김양호 편, 『언어교양대학』, 언어문화사, 1974, pp.73-95.)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04
  • 사랑의 종교철학적 아포리즘(aphorism)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습니다. 사랑은 아낌없이 줍니다. 사랑에 관한 상반되는 이 명제는 모두 옳은 말입니다. 사랑에는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전자는 ‘빼앗는 사랑’이며, 후자는 ‘주는 사랑’ 또는 ‘바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고, 아낌없이 줍니다. 이것이 사랑의 헌신(獻身)의 원리입니다. 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고 독점하고 싶어 하며,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독점의 원리입니다.”『인생사전』, 예원북, 2013, p.75.   [타임즈코리아] 안병욱이 종교에 대해서 언급한 글은 거의 없습니다. 말년의 글에서 조금씩 나타나는 신에 대한 사랑 혹은 거기에서 파생되는 사랑에 관한 풀이는 흡사 설교 문을 읽는 듯합니다. 사랑을 크게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하향적 사랑, 인간이 신을 향하는 상향적 사랑,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 사랑으로 나누는 명료함도 해석학적 식견이 한몫한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고상한 밀어(密語)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사랑을 종교적 실천이나 연인 사이의 아름다운 감정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철학적 문제로 사유하는 데까지 나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다 보니 이른 봄 지표면은 녹았으나 땅속은 아직도 얼어 있는 것처럼, 사랑에 대해 온전한 이해와 실천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칫하면 사랑도 소유 개념으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소유하거나 말거나 하는 이기주의로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당은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삶과 사랑은 자신에게 충실하면서 동시에 타자에게도 성실해야 하기에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당이 그토록 강조하는 것처럼, 삶을 성실하게 산다는 것은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과 타자에게 속이지 않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시기, 질투, 분노, 증오를 넘어서야 합니다.   철학적 사랑은 나의 속이나 남의 속을 모두 만족시키는 순수함에 있기에 어렵습니다.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당은 빼앗는 사랑이 아니라 온전히 내어주는 아가페적 사랑을 높게 평가합니다. 흔히 아가페적 사랑은 성서적, 기독교적 사랑으로 봅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사랑의 정수를 꿰뚫어 본 이당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추구하고 실천에 힘쓴다면 사랑은 모든 덕 중에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맑은 영혼이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 사랑 안에 있다는 해석학적 논리도 두드러집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으면서 유한한 인간은 그저 그러한 사랑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음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적 사랑을 하기 어렵다면 최소한 ‘우애’(philia)라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에로스(eros)는 곡해되었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인 스토르게(storge)도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현상을 부인하고 싶지만,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현실입니다. 모두가 다 신의 자녀로서 신의 뜻에 따라 사랑(agape)을 할 수 없다면, 우정 어린 마음으로 사람을 사귀는 것만큼이라도 귀중하게 여기며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친구처럼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황량한 사막과도 같습니다. 벗을 뜻하는 한자어 우(友)는 두 친구가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형상을 본뜬 것입니다. 꼭 벗이 아니더라도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도 많아야 합니다.   필리아는 우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문화·예술에 대한 사랑까지 아우르며 심지어 philosophia, 곧 지혜에 대한 각별하고 사심 없는 사랑도 포함합니다. 철학과 사랑의 긴밀한 랑데부(rendezvous, 밀회)가 잘 드러나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을 딱 네 가지로 분류하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또 이 사랑의 개념과 감정은 서로 중첩되기도 합니다. 이 개념들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넓고 깊게 할 수 있는 만큼 사람이 달라집니다. 그 사랑 속에 그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한 이해만큼 실천하게 됩니다. 실천이 부족하다면 그만큼 이해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만큼이 그 사람의 깊이입니다. 그 사람의 삶의 질은 이와 비례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랑받은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당은 사람 안에 사랑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 안에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형이상학적 통찰에서 사랑을 말해줍니다.   ※아포리즘(aphorism) 명언, 격언, 잠언과 같이 신조나 이치를 기억하기 쉽게 간결하고 명쾌한 표현으로 쓴 글을 일컫는 말이다. 주로 작가의 체험적 내용을 독창적으로 표현한 것이기에 그 작가만의 개성과 지적 역량을 통해 사물의 핵심이나 이치를 깨달으며 교훈도 얻는 묘미를 맛보게 된다.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03
  • 행복한 인생을 위한 기초, ‘사랑-함’
    “인간은 애정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빵은 육체의 양식이요, 사랑은 정신의 양식이다. 우리는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사랑을 먹어야 한다. ‘사랑은 인간의 주성분이다’라고 철학자 피히테는 말했다.” 『인생 그 순간에서 영원까지』 p.21. 이당 안병욱 교수와 부인 김광심 여사 생전 모습   [타임즈코리아]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은 물질만 풍요로우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부분 즐기는 시간과 공간, 대상과 장소를 보면 사물성이나 물질성이 많은 것도 이를 반영합니다. 안병욱은 인생철학자로서 삶을 우선으로 하는 삶의 경험적 이치를 잘 설명해 주는 생철학자입니다. 그는 인생의 집을 짓는데 필요한 세 가지 원리로 사랑, 믿음, 창조를 거론합니다.   안병욱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랑은 인생의 흐뭇한 향기다. 사랑은 인생의 따뜻한 햇볕이다. 우리의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사랑이다.” 자칫 사랑을 감정으로 치부하기 쉬운데, 오히려 사랑은 정신의 토대가 되어야 하고, 그것 없이는 삶의 자양분과 원동력을 마련할 수 없다는 말은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생의 모든 힘을 뿜어내는 정신이자 정신의 깊은 속입니다.   게다가 정신도 사랑을 기반으로 해야 인간의 이성적 행위로서의 책임과 이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마저도 가능해집니다. 이성(ratio, nous, reason)의 개념 안에 계산, 수치, 계량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니,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인간은 도구적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안병욱은 “사랑은 인생의 위대한 가치요, 근본적인 가치요, 영원한 가치다. 사랑 없는 인생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다. 산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명제(命題)를 잊어서는 아니 된다”고 말합니다. 이른바 사랑절대주의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판별하는 기준, 윤리적 잣대입니다. 안병욱은 사랑-하기를 철학-하기(philosophieren)처럼 명제화하고 있는 것은 사랑-함도 결국 공부고 끊임없는 훈련과 체득의 과정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에 대해, 사람에 대해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세계(우주)를 사랑한다는 것인데, 이는 연습과 훈련과 공부를 통해 체득됩니다. 공부-함, 철학-함, 사랑-함은 삶의 행위이자 생철학의 근간이 됩니다. 인간다움과 인간 정신의 외현적 표상이자 인간의 지표로 평가되는 행위들입니다.   사랑을 왜 공부해야 할까요? 그것은 삶과 사랑이 동근원적(同根原的)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둘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원인임과 동시에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의 장(場)이 같다는 말입니다(『인생 그 순간에서 영원까지』, 자유문학사, 1987, 21-23 참조).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7-30
  • 진실한 물음, 분명한 대답: 물음 주체, 삶의 주체인 ‘나’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尊貴)한 것이 무엇이냐. 온 천하를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최고 가치가 무엇이냐. 제일 값지고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나다. 왜냐,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다. 무수한 너가 있고 무수한 그가 있다. 그러나 나는 오직 하나뿐이다.” 『지혜롭게 사는 길』, p.13.   안병욱 교수, ‘양구인문학박물관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 전경   [타임즈코리아] 인간이 태어나서 제일 먼저 부딪히는 철학적 물음 중의 하나가 ‘나는 오직 하나다’, ‘똑같은 존재가 하나도 없다’라는 난제(難題, aporia)일 것입니다. 그런데 당연한 현상으로 의식해서인지 존재 주체인 나에 관해서 묻지 않습니다. 안병욱은 나에 대해서 ‘자기’, ‘자아’(自我), ‘존엄한 생명’, ‘고귀한 인격’(人格), ‘아름다운 영혼’, ‘자각적(自覺的)인 주체(主體)’, ‘양심의 존재’, ‘이성(理性)의 빛’, ‘자유로운 혼’, ‘불성(佛性)의 그릇’, ‘만물의 연장’, ‘독자적 개성’과 같이 여러 개념으로 정의합니다.   이러한 개념에서 의미하는 공통점은 ‘나’란 도구적 존재나 매매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의 개별성은 자꾸 상품으로 전락하거나 소모품(소비재)처럼 취급되기도 합니다. 주체요, 인격이요, 영혼이요, 독존적 존재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는 그냥 시류에 떠밀려서 혹은 맥락에 맞춰서 그때그때 자기의 자신을 팔기도 하고, 또 다른 자기[他我]를 사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자아의식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보는 관점이 부재한 상태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규정하거나 나에게 명령 내린 대로만 살아가면 타율적 인간으로 전락합니다. 안병욱은 시지포스(Sisyphus)의 용기와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의 정열을 갖고 살라고 당부합니다. 자기에 대한 자부심, 곧 자기 자신의 마음에 자기 자신임, 자기(selbst, self)라는 것을 반드시 인식시킴으로써 타자와는 구별된 자기 인생을 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부심과 용기는 다르지 않습니다. 자부심이 있는 사람은 용기도 있습니다. 자신감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자기 인식과 자기 자신의 과신과 몰지각에서 비롯된 오만이나 교만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만용입니다.   ‘나’에 대한 인식과 ‘우리’라는 공동체성의 맥락에서 볼 때 우리 사회는 그 어디에서도 정도를 걸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를 집단화하거나 ‘우리’를 이익만 생각하는 패거리로 왜곡·곡해합니다. 진정한 자기에 대한 물음도 없는 채 공격, 비난, 혐오 같은 것을 행하는 데에는 민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안병욱이 말한 ‘나’에 대한 존귀한 존재론적 지위·위치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7-29
  • 인생의 지혜는 삶보다 먼저 옵니다
    “보람 있는 인생, 성실(誠實)한 인생, 아름다운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밝은 지혜가 필요하고 총명한 슬기가 있어야 한다.” 『지혜롭게 사는 길』 서문 중에서 안병욱 교수 생전 모습   [타임즈코리아] 안병욱의 “성(誠)의 철학”은 ‘삶을 이루고 말[言]을 성취하는 것[成]’을 뜻합니다. 모름지기 인생이란 말이 자기를 표현한 현실입니다. 수많은 말이 세계와 관계, 그리고 사물을 지칭하고 뜻을 부여합니다. 그중에서 안병욱이 강조하듯이 지혜란 인생을 바르고 뜻있게 살기 위한 올바른 판단력과 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인생의 방향감각을 상실한 듯합니다. “정신의 진주”, “마음의 등불”, “총명한 슬기”를 통해서 삶을 잡지 않아서입니다. 형이상의 길보다 형이하의 길을 쫓아가기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성의 길보다 욕망의 길을 추구하기에 드러난 결과입니다. 도(道)를 굳이 진리의 길과 죄악의 길로 나눈다면 사람들은 바른길(正道)이 아닌 죄악의 길로 접어들어 사악한 길(邪道)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에게 정도(正道)를 알려주고 그 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 지혜입니다. “인생은 부단한 선택의 과정이다”라고 말한 그의 생각은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와 흡사한 실존주의 맥락 안에 있습니다. 인간은 매사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실존이 결정됩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삶의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정도(正道)를 걷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인간이 단 한 번 태어나 살아가기에 연습은 불가능합니다. 이를 알고 있다면 인간답게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됨의 실현이고 의미 있는 인생입니다. 안병욱의 철학적 통찰이 수많은 철학자의 연장선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차원입니다. 정도(正道)를 가는 사람은 자기다운 길을 걷는 데 충실합니다. 인생은 나의 것이지 타자의 것, 모호한 누군가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길을 가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이를 통해 조화의 꽃을 피워 냅니다.   지혜의 철학, 어쩌면 동어반복일 수 있는 'philo-sophia'는 지혜를 사랑하는 것임을 되짚어 보는 것입니다. 지혜를 추구하며 올바름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하는지를 반성하기 위함입니다. 이에 안병욱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옳은 길을 가고 있는가. 우리는 옳은 길을 걷고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이 물음 앞에 서야 한다.”(지혜롭게 사는 길, 삼육출판사, 1977, pp.10~12.)   김대식 박사   안병욱 평전의 저술자 김대식 박사는 박수근과 이해인이 탄생한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 대구가톨릭대학교,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하였으며 종교학과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서울신학대학교, 성공회대학교, 숭실대학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에 출강했으며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종교연합(URI-Korena) 지도위원,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씨알의 희망과 분노』(공저),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 성서해석 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식탁의 영성』(공저), 『망각의 해석학』(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생태 영성의 이해』,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예수와 신앙 언어』. 『함석헌과 이성의 해방』, 『그리스도교 감성학』, 『함석헌의 평화론』, 『간트철학과 타자인식의 해석학』,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그리스도교 생태철학』, 『켜켜이 쌓인 시간을 풀어주는 사람』, 『치명적 자유의 향연: 아나키즘과 함석헌』(공저), 『아시아 평화공동체』(공저), 『인문학적 상상력과 종교』(공저)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종교 간 고통에 대한 해석학적 성찰과 유동적 종교」, 「생명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과 생명미학적 정치」 등이 있다. 주요 관심분야는 아나키즘과 현상학적 인식론 및 존재론을 기반으로 하는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주의 해석, 기술철학과 정치미학, 해체구성적 종교이다.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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