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8-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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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신의 완성은 덕에 있습니다
    “‘君子誠之爲貴’(『중용』, 25장). 군자는 성실을 가장 존귀하게 생각한다. 성실은 인간의 최고의 가치다. 우리는 저마다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실하여라. 이것이 인간의 도덕의 첫째 원칙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책 중에서 성실의 원리를 가장 강조한 것은 『중용』이다. 성실은 『중용』의 중심 사상이요, 핵심 원리다.” 안병욱, 『수필로 읽는 동양고전』, 철학과현실사, 2003,  pp.112~113.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하늘을 감동하게 해서 끝내는 자기 생각이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이루는 것을 ‘성(誠)’이라고 합니다. ‘성(誠)’을 지향하는 사람이 마음에 품은 좋은 뜻이 하늘과 부합하기 위해서는 수기(修己)해야 합니다. 자아를 갈고닦아 인격을 수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태도로 갈고닦아야 하겠습니까? 이당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성실하고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성(誠)은 형이상학적 가치입니다. 인간의 도덕 원리이자 그 도덕 원리의 근간이 되는 대원리라는 말입니다.   “자아를 수양하여 덕(德)을 쌓은 다음에는 성실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 이것이 ‘수기이경(修己以敬)’이다 .”지금 우리는 인간에 대한 존경과 예의가 점점 더 위축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표면적으로는 인권을 외치는데 과연 그것이 숭고한 인간애와 비례하는지는 의문입니다. 물질을 최상으로 여기는 행태를 추구하다 보니, 인간도 사물처럼 대하는 시대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기는 자신을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하여 정중한 마음으로 대하고 자신을 잘 갈고닦으며 공경과 성실을 다하는 것입니다. 공경과 존경, 그리고 예의는 대인(對人)과 대물(對物) 관계 모두에 필요한 마음 자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존경과 공경을 다 하는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도 펼치는 것이 곧 수기(修己)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널리 평안(平安)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삶을 편안하게 합니다. 공자는 그것을 “수기안인”(修己安人)이라고 했습니다. 수기는 수신(修身)과 같습니다. 수신은 지위고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인생의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동양의 『대학(大學)』의 제1장에는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자천자이지어서인 일시개이수신위본)”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기 자신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기 자신의 인격적 수양은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지향해야 할 과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가 자기 성실성의 최우선으로 정기(正己)를 내세운 것도 그런 연유입니다. 이당은 정기를 다시 세분하여 ‘지기(知己)-수기(修己)-성기(成己)’로 해석합니다. 자기 자신을 바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지기(知己), 곧 자기가 자신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도 파악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진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 씌어있는 ‘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 ‘너 자신을 알라’)’은 뼛속깊이 새겨야 할 명언입니다. 정기의 그다음은 수기(修己)입니다. 자기 자신의 인격을 잘 갈고닦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됩니다. 정기의 마지막은 성기(成己)입니다. 자기 수련의 목적은 자기완성에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의 삶은 성기를 통하여, 덕(德)의 확장과 결실로 나타나야 합니다. 자기가 완성되었다는 객관적인 지표는 선(善)과 경(敬), 그리고 인격(人格)입니다. 이당은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덕은 선을 행할 수 있는 힘이요, 옳은 길을 갈 수 있는 품성이요, 남을 감동, 경복(敬服) 시킬 수 있는 능력이요, 인격에서 풍기는 따뜻한 활기(活氣)요, 인간성을 정성껏 갈고닦아서 얻는 윤리적 자질이다.”   이와 같은 덕은 ‘수기-지기-성기’에서 나옵니다. 덕이 있으면 선을 베풀게 됩니다. 그러니 존경받게 되며 인격자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당연히 “덕인(德人)은 득인(得人)이다”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흡인력과 감화력으로 자신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입니다. 덕망이 있으면 사람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늘 주의를 해야 할 것은 재물에 대한 유혹입니다. 덕과 재물이 조화를 이루기 어려운데, 항상 덕을 앞세워야 탈이 없습니다.   『대학(大學)』에서는 “덕본재말(德本財末)”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덕을 근본으로 하라고 충고합니다. 본말전도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당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또 어떤 사람이 바람직한 인간인가. 이를 자문하고 “덕기”(德器)라고 답합니다. 덕기는 “어질고 너그러운 포용력이나 재능”을 뜻합니다. 그런 훌륭한 덕을 쌓은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덕을 닦는 그릇이 되어서 닦고 또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늘 덕기(德氣, 어질고 너그러운 얼굴빛이나 마음씨)가 어린 인품을 지니게 되어 사람들로부터 공경받게 될 것입니다.     안병욱, 『수필로 읽는 동양고전』, 철학과현실사, 2003,  pp.16~21, 40~45, 111~116.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14
  •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합니다
    “지성감천(至誠感天)이다. 지성은 사람만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늘도 감동시키고 귀신도 감동시킨다. 무엇이 인간을 감동시키느냐. 지성이다. 지성은 인간 최고(最高)의 힘이요, 인간 최강(最强)의 무기요, 인간 최대(最大)의 덕(德)이다.” 안병욱,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자유문학사, 2001, p.173. [타임즈코리아] 사람의 마음은 늘 하늘이 지닌 마음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길)은 먼저 성실(誠實)과 성심(誠心)에 이르러야 하늘에 닿을 수 있습니다. 성실과 성심이 인간의 마음에 닿은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성실과 성심을 인간의 개인적 소유물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성은 하늘이 인간에게 그렇게 살라고 알려준 이상이요, 삶의 지도입니다. 정성을 ‘다하라’와 정성에 ‘닿아라’에서 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다함과 닿음에 이를 수 있을까요. 삶에서 작은 일을 할지라도 정성스러운 마음을 다해야 하늘의 마음에 닿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중용』 25장에 나오는 “군자는 성실을 가장 존귀하게 생각한다(是故, 君者誠之爲貴)”라는 말이 이해됩니다. 유교의 최고의 인간상이자,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군자(君者)’입니다. 군자는 모름지기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정성을 다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군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정성을 다하는 삶의 자세를 굳게 지켜나가는 사람만이 군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완성된 인격체가 되고자 한다면 정성스러운 마음 바탕을 갖추어야 합니다. 성실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삶의 근본적인 가치를 성에 둔다, 혹은 인간과 사물에 정성이 가닿도록 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야 하늘의 마음에도 닿을 수 있습니다.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그렇게 나의 마음과 하늘의 마음이 다른 사람의 마음과 사물의 본질에 닿도록 정성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늘의 마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의 마음이 내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성이 욕망이 되지 않습니다.   이당은 여기에서 『중용』 24장의 풀이로 돌아갑니다. “지극한 정성은 신과 같다(至誠如神).” 인간이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면 하늘에 닿게 됩니다. 성을 이룬 군자가 되었으니 성심, 곧 마음에 성이 그득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감동과 감화입니다. 정성이 차고 또 차서 넘칠 정도는 되어야 하늘도 감동합니다. 하늘이 움직이게 하려면 그만큼 정성을 다하는 것을 하늘도 느껴야 합니다. 이에 이당은 “우리 인간의 노력의 목표는 하늘처럼 참되려고 힘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맹자(孟子)도 이렇게 말합니다. “참은 하늘의 길이고, 참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람의 길이다(誠者天之道也 思誠者人之道也).”   이당은 성을 참(됨)으로 풀었습니다. 인생의 최고 진리는 참입니다. 참과 진리가 동어반복처럼 들리기는 하나, 진실무위(眞實無僞)에 가깝습니다. 참됨이야말로 사람이 반드시 추구해야 할 길입니다. 그 참됨은 결국 하늘의 길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생의 수양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순자(荀子)는 “우리의 마음을 기르고 정신을 수양하는 데 성실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養心莫善於誠)”고 일러줍니다. 정성을 다함, 참됨, 성실함을 인생의 화두로 삼고 살아가는 것은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최선의 길일 것입니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 Marcel)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성실한 만남을 중시했습니다. 나와 너의 만남, 그 자체도 소중하지만 잠시 잠깐의 만남도 진정한 만남이 되어 오래 지속되게 하려면 서로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되지 않은 만남은 금방 들통납니다. 속임수와 거짓은 언젠가 탄로가 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삶에서 성실, 참(fides; fidelity)은 최고의 덕입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성실이 없는 곳에 존재(存在)가 없다. 성실의 정도가 존재의 정도를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이당은 “참된 내가 될 때 나는 참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가 있다. 거짓된 나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얼마만큼 성실하냐에 따라서 내가 얼마만큼 존재하느냐가 결정된다. 성실의 정도가 나의 존재를 좌우한다”고 풀어 말합니다. 성실은 나의 존재와 비존재를 가르는 척도입니다. 참되게 삶을 살아가는 한 나는 비존재가 아니라 존재입니다. 참되면 그는 있는 것이고, 참되지 않으면 실상 그는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는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네가 하는 일을 정성껏 하여라”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성심을 다하는 삶의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성실, 곧 정성을 다하는 한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무슨 일이든 간에 그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넌지시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요?   안병욱,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자유문학사, 2001, pp.172~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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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병욱 평전
    2020-08-13
  • 삶 속에 속임수와 거짓의 자리는 없습니다
    “성실은 거짓이 없고 정성(精誠)스러운 것이다. 성실은 진실무망(眞實無妄)이다. 참되고 허망(虛妄)하지 않은 것이다. 성실의 반대는 허위요, 허망이요, 속임수다.” 안병욱,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자유문학사, 2001, p.169.   이당은 삶과 철학이 모순되지 않습니다. ‘성실’을 말하면 ‘성’과 ‘실’에 걸맞은 사람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정성스러움은 없으면서 지나친 결실과 결과만을 바랍니다. 그러니 성실에서 말하는 삶의 진실 됨은 찾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거짓과 속임수만 난무합니다. 경쟁과 야합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삶의 진정성과 순수성은 온데간데없고 술수와 속 다른 말만 무성합니다.   이당은 주자(朱子)가 성(誠)을 진실무망으로 해석한 것을 따라서 삶은 거짓 없고 진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여기서 망(妄)을 망(望)과 같은 의미로 보기도 하니, 무망이란 결국 진실한 것 이외에는 바라지 않는다는 말도 됩니다. 삶의 세계가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진실하게만 살아갈 수 있는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문 자체가 문제입니다.   중용에서 말하는 성실이 삶의 으뜸가는 덕목이 되어야 합니다. 성실을 성현의 말로만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우주의 이치라고 믿고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것은 존재 가치를 지니고, 그에 따른 성실로 존재 가치를 실현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치입니다. 삶의 현실과 이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치에 맞게 사는 것이 삶이어야 합니다.   중용은 이렇게 일러줍니다. “참은 하늘의 길이요, 참을 실천하는 것이 사람의 길이다”(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중용』 20장). 감탄을 자아내는 말입니다. 인간은 우주 질서 속에 있습니다. 인간은 하늘과 땅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자연의 이치나 원리와 법칙에 따라서 살아야지, 그것을 넘어서면 거짓과 속임수가 됩니다. 생사화복, 생로병사 그 모든 것들이 다 자연이 일러준 법칙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매우 단순한 이치를 설명한 말입니다.   참을 알고 참을 실천하는 것은 태어남과 병듦, 그리고 죽음조차도 다 하늘의 길이니,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아귀다툼하면서 삽니다. 다른 사람들이 죽든 말든, 고통을 당하든 말든, 가난해서 굶든 말든 상관없이 축재(蓄財)하고 온갖 욕망을 다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진실과 순수는 허망한 것들입니다. 남에게 거짓된 행위를 하는 것은 물론 자신까지도 속이며 살아가니 말입니다.   하늘과 땅이 거짓말을 하고 속이는 일은 없습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이고 무위(無爲)입니다. 사람들만 의식적으로 행동하고 거짓을 꾸며대는 작위(作爲)와 허위(虛僞)의 행태를 보입니다. 이당은 계속해서 중용 25장의 말을 인용합니다. “성실은 사물의 시작인 동시에 끝이다. 성실이 없으면 사물도 없다(誠者物之終始, 不誠無物).” 누누이 강조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성실은 모든 일에 시작이요, 끝입니다. 시종일관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성실하지 않고 과한 결실과 결과만을 바라는 것은 과욕입니다. 여기에서 탈이 생깁니다. 관계가 깨집니다. 우주의 이치, 천지 만물의 이법을 어겼으니 그 결과를 손에 쥔다고 한들 그것은 거짓의 열매입니다. 어디까지나 만사는 성실과 진실이라는 내면적인 법칙[眞實]에 따라서 이루어질 때 거짓되지 않습니다[無妄]. 말을 이루는 게 성(誠)이라는 한자어의 내포적 의미가 그것을 지향합니다.   결과로서 주어진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우연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나의 진실한 마음에 의한 필연적인 것인지, 자신을 성찰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당은 말합니다.   “성실성이 결여된 행동은 천박한 행동이다. 얼마만큼 성실한가에 따라서 인간과 사물의 가치가 결정된다. 성실은 성물(成物)의 원리인 동시에 성기(成己)의 원리다(『중용』 25장).” 사물이란 본래 인간의 수단이 아니니, 그것이 지닌 가치를 배려하면서 동시에 인간은 하늘이 부여한 덕스러운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 성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내 마음과 타자의 마음이 멀지 않고, 내 몸과 사물이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의 몸과 마음을 잘 갈고닦는 것과 사물과 타자에게 성심을 다하여 베푸는 것, 이 둘의 관계가 어디 분리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성실한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들이야말로 소리 없이 모두에게 유의미한 가치를 공급할 것입니다.   안병욱,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자유문학사, 2001, pp.169~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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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병욱 평전
    2020-08-12
  • 인생의 내적 힘은 ‘덕(德)’입니다
    “인생은 삼수도장(三修道場)이다. 평생 배우고 공부하는 수학(修學)의 도장이요, 부지런히 일하고 창조하는 수업(修業)의 도장이요, 덕(德)을 쌓고 자아(自我)를 완성하는 수덕(修德)의 도장이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안병욱, 자유문학사, 2001, 머리말 중에서 양구 인문학박물관 방명록   이당의 철학 가운데 유독 많이 등장하는 개념 중의 하나는 ‘덕(德)’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삶은 덕스러움입니다. 이당은 “도는 길이요, 덕은 힘이다. 도는 인간이 지켜야 할 객관적 규범이요, 덕은 그 규범을 실현할 수 있는 주체적 능력이다. 도덕은 도와 덕이 합한 것이다. 도와 덕은 동양 사상의 중심 원리요, 핵심 개념이다”(p.197)라고 정의합니다. 이는 라틴어 vis(virtus)에서 연원하는 virtue를 해석한 말입니다. 덕(德)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규범인 도(道)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인간의 이성적인 힘, 자아의 힘입니다.   그런데 이 힘 혹은 능력의 자생력은 갈고닦음, 곧 수(修)에 있습니다. 좀 더 구체화하면 수양입니다. 이당은 이와 같은 수양의 덕목들을 크게 세 가지로 봅니다. 수학(修學), 수업(修業), 수덕(修德)입니다. 이 세 가지 수양의 덕목들은 모두 수덕으로 수렴됩니다. 배움과 직업(일)은 덕스러운 인간이 되는 과정으로써 수행이자 덕행입니다. 배움도 일도 모두 덕을 행하기 위해서 인간이 해야 하는 필수사항입니다.   이당은 이러한 덕목을 수행하는 인생을 도장(道場)으로 비유합니다. 인생은 덕(德)을 완성하기 위한 수양과 훈련장이요, 정신단련장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도량’이라고 하는데 산스크리트어 보디만달라(Bodhimandala)를 음차한 것입니다. 보리(菩提)는 산스크리스트어 Bodhi를 음사(音寫)한 말입니다. 때로 지(知), 도(道), 각(覺)으로 번역합니다. 보리는 부처가 6년의 고행(苦行) 끝에 깨달은 진리요, 미혹이 없는 정각(正覺)의 세계요,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깊은 지혜의 경지를 말합니다. 만다라는 진리를 터득하고 도(道)를 깨닫는 장소, 불상(佛像)을 비치하는 단(壇)의 의미로 쓰입니다. 이와 비슷한 뜻을 갖는 영어는 gymnasium이라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청년들은 gymnasium에서 심신을 단련했습니다. 독일에서는 중·고등학교 과정을 김나지움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서 기원했을 것입니다.   이당은 산다는 것은 갈고닦는 것(生卽修)이라고 보았습니다. 생명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것처럼 갓난아이부터 죽음을 앞둔 노년에 이르기까지 산다는 것은 갈고닦음의 연속입니다. 학문을 갈고닦고, 직장과 일에서 자기의 생업을 위해서 실력과 재능을 갈고닦되, 그것은 덕을 행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 그리고 학문을 연마할 때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상경하애(上敬下愛)가 있어야 하고, 수평적으로는 신의를 다지며 아름다운 학풍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일과 직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살기 위해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번 단련하고 천 번을 갈고 닦는 백련천마(百鍊千磨)의 성실함으로, 어려움도 견디며 부지런히 노력하는 각고면려(刻苦勉勵)의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인생이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격을 갈고닦는 데 게으르지 않아야 하는 지속적인 덕행의 수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당은 『대학』, 『논어』, 『시경』에 나오는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말로써 이를 정리했습니다. 절차탁마란 돌과 옥, 소의 뿔과 짐승의 뼈(石, 玉, 角, 骨)를 쓸 만한 물건으로 만들기 위하여 갈고 닦고 다듬는 지난한 과정을 일컫습니다. 절(切)은 칼로 자르는 것이요, 차(磋)는 돌 가는 것이요, 탁(琢)은 옥을 쪼고 다듬는 것이요, 마(磨)는 가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절차탁마의 자세와 그 실천이 필요하고, 일을 하기 위해서도 온갖 노력과 진지함을 다하여 수양에 수양을 더하여 온전한 덕을 고양하는 삶의 자세를 지켜나가야 하니 얼마나 독실해야 하겠습니까?   동양 고전 『예기(禮記)』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玉不琢不成器 人不學不知道” <學記>. “구슬은 갈고 닦지 않으면 훌륭한 그릇이 될 수 없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진리를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사물도, 사람도 갈고닦지 않으면 제대로 빛이 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인생에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인격을 잘 갈고닦아야 합니다. 이당은 힘줘 말합니다. “인간은 발광체다. 몸에서 빛을 발하는 존재다.”   사람은 저마다 빛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눈, 얼굴, 마음, 삶, 행동, 인격 모든 면에서 빛나야 합니다. 그래야 내면적 힘인 덕을 시종일관 몸에서 떠나지 않도록 갈고닦아서 수덕의 완성체를 일궈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안병욱, 자유문학사, 2001, pp.7~18, p.197.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11
  • 성의(誠意)는 참되고 아름다운 삶을 꽃피우는 원천입니다
    교육적으로 볼 때, 현대에는 세 가지 정신적 악(精神的 惡)이 있다. 첫째는 모르고도 배우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알고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한번 깊이 음미(吟味)해 볼 만하다.” 『安秉煜에세이2 삶의 보람을 찾아서』, 교육도서, 1988, p.129. 양구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 안병욱 서재   [타임즈코리아] 현대 사회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문제점은 진실(眞實)되고 정성을 다하려는 뜻과 의지가 눈에 띄게 약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배움[學/問]’과 ‘가르침[敎/育]’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은 배우고 가르침, 가르치면서 배움이 서로 밀접한 상호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산 안창호가 말한 무실(務實)하고 역행(力行)하는 삶과도 연결됩니다.   성실을 말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에 힘써야 한다는 무실역행(務實力行)의 교육사상에 비춰 볼 때 참되기를 힘써야 배움과 가르침도 헛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는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은 논리적인 정합성과 순차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실을 천명하고 역행하는 것이 학문의 근본이며 사람 된 도리라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당은 “지식이기주의자(知識利己主義者)”가 되지 말라고 당부하였을까요? 배움과 가르침, 앎의 선후(先後), 배우려는 것과 가르치려는 의지가 다 배우고자 하는 정신에서 비롯됩니다. 배우고자 할 때 만물은 다 스승이 되고, 모든 사람이 스승이자 학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배움은 ‘겸손(謙遜)’과 짝을 이룹니다. 모든 대상, 사물, 사람 등과 인생과 세상이 다 삶을 배우는 학교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스승으로 보입니다. 이런 자세가 되면 자연히 겸손한 마음이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죽는 날까지 배운다’는 말도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배워서 동시에 가르쳐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정성을 다하는 의지와 뜻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성의(誠意)가 없으면 게으르게 되고, 게으르게 되면 스승을 찾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배움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성의(誠意)가 살아 숨 쉬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성의가 있어야 겸손해지고, 배우며 가르치려는 의지가 삶의 진보를 가져오는 선순환이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삶의 공동체를 일컬어 책임사회, 봉사 사회, 연대 의식이 강한 사회라고 부릅니다. 인간이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집단 간에 아무런 성의가 없는 무관심(無關心)의 사회가 아니라 관심으로 가득한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배움과 가르침은 서로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당이 독특하게 개념화한 “지식이타주의자”는 배워서 남에게 주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지식이기주의자”는 배워서 자기만 알고 가르치려 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타인에 대해 그냥 수수방관합니다. 더욱이 지식이기주의는 자신이 아는 것을 다라고 생각하는 오만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성의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배움과 가르침에 성의가 있는 사람은 모두가 배우는 주인(주체)이자 가르치는 주인(주체)가 됩니다. 이른바 상호주체(후설의 현상학적 개념으로는 상호주관적 존재)입니다.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나아가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 혹은 배움과 가르침은 모두 ‘지(知)’와 ‘행(行)’의 태도입니다. 앎을 추구하는 것에서 얻게 된 모든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행위입니다. 이것을 지행합일(知行合一) 혹은 지행일치(知行一致)이라도 합니다. 도산 안창호는 이를 위해서 ‘무실역행주의(務實力行主義)를 설파했습니다. 참됨(진실)을 알고 이를 행하는 데 힘쓰는 민중(시민)이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배움과 가르침이 모두 성의 있고, 성실에 바탕을 두려면 말이나 생각에만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당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知)가 문제가 아니요, 행(行)이 문제다. 우리는 언(言)의 인(人)이 아니고, 행(行)의 인(人)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 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처럼 큰 정신적 죄악은 없다.”   이제부터라도 상호 배움과 상호 가르침에 성의(誠意)와 성실(誠實), 그리고 성심(誠心)을 다해야 한다는 큰 깨우침을 주는 말입니다.   『安秉煜에세이2 삶의 보람을 찾아서』, 교육도서, 1988, pp.129-133.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10

실시간 창작과지성 기사

  • 수신의 완성은 덕에 있습니다
    “‘君子誠之爲貴’(『중용』, 25장). 군자는 성실을 가장 존귀하게 생각한다. 성실은 인간의 최고의 가치다. 우리는 저마다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실하여라. 이것이 인간의 도덕의 첫째 원칙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책 중에서 성실의 원리를 가장 강조한 것은 『중용』이다. 성실은 『중용』의 중심 사상이요, 핵심 원리다.” 안병욱, 『수필로 읽는 동양고전』, 철학과현실사, 2003,  pp.112~113.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하늘을 감동하게 해서 끝내는 자기 생각이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이루는 것을 ‘성(誠)’이라고 합니다. ‘성(誠)’을 지향하는 사람이 마음에 품은 좋은 뜻이 하늘과 부합하기 위해서는 수기(修己)해야 합니다. 자아를 갈고닦아 인격을 수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태도로 갈고닦아야 하겠습니까? 이당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성실하고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성(誠)은 형이상학적 가치입니다. 인간의 도덕 원리이자 그 도덕 원리의 근간이 되는 대원리라는 말입니다.   “자아를 수양하여 덕(德)을 쌓은 다음에는 성실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 이것이 ‘수기이경(修己以敬)’이다 .”지금 우리는 인간에 대한 존경과 예의가 점점 더 위축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표면적으로는 인권을 외치는데 과연 그것이 숭고한 인간애와 비례하는지는 의문입니다. 물질을 최상으로 여기는 행태를 추구하다 보니, 인간도 사물처럼 대하는 시대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기는 자신을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하여 정중한 마음으로 대하고 자신을 잘 갈고닦으며 공경과 성실을 다하는 것입니다. 공경과 존경, 그리고 예의는 대인(對人)과 대물(對物) 관계 모두에 필요한 마음 자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존경과 공경을 다 하는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도 펼치는 것이 곧 수기(修己)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널리 평안(平安)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삶을 편안하게 합니다. 공자는 그것을 “수기안인”(修己安人)이라고 했습니다. 수기는 수신(修身)과 같습니다. 수신은 지위고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인생의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동양의 『대학(大學)』의 제1장에는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자천자이지어서인 일시개이수신위본)”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기 자신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기 자신의 인격적 수양은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지향해야 할 과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가 자기 성실성의 최우선으로 정기(正己)를 내세운 것도 그런 연유입니다. 이당은 정기를 다시 세분하여 ‘지기(知己)-수기(修己)-성기(成己)’로 해석합니다. 자기 자신을 바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지기(知己), 곧 자기가 자신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도 파악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진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 씌어있는 ‘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 ‘너 자신을 알라’)’은 뼛속깊이 새겨야 할 명언입니다. 정기의 그다음은 수기(修己)입니다. 자기 자신의 인격을 잘 갈고닦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됩니다. 정기의 마지막은 성기(成己)입니다. 자기 수련의 목적은 자기완성에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의 삶은 성기를 통하여, 덕(德)의 확장과 결실로 나타나야 합니다. 자기가 완성되었다는 객관적인 지표는 선(善)과 경(敬), 그리고 인격(人格)입니다. 이당은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덕은 선을 행할 수 있는 힘이요, 옳은 길을 갈 수 있는 품성이요, 남을 감동, 경복(敬服) 시킬 수 있는 능력이요, 인격에서 풍기는 따뜻한 활기(活氣)요, 인간성을 정성껏 갈고닦아서 얻는 윤리적 자질이다.”   이와 같은 덕은 ‘수기-지기-성기’에서 나옵니다. 덕이 있으면 선을 베풀게 됩니다. 그러니 존경받게 되며 인격자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당연히 “덕인(德人)은 득인(得人)이다”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흡인력과 감화력으로 자신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입니다. 덕망이 있으면 사람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늘 주의를 해야 할 것은 재물에 대한 유혹입니다. 덕과 재물이 조화를 이루기 어려운데, 항상 덕을 앞세워야 탈이 없습니다.   『대학(大學)』에서는 “덕본재말(德本財末)”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덕을 근본으로 하라고 충고합니다. 본말전도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당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또 어떤 사람이 바람직한 인간인가. 이를 자문하고 “덕기”(德器)라고 답합니다. 덕기는 “어질고 너그러운 포용력이나 재능”을 뜻합니다. 그런 훌륭한 덕을 쌓은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덕을 닦는 그릇이 되어서 닦고 또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늘 덕기(德氣, 어질고 너그러운 얼굴빛이나 마음씨)가 어린 인품을 지니게 되어 사람들로부터 공경받게 될 것입니다.     안병욱, 『수필로 읽는 동양고전』, 철학과현실사, 2003,  pp.16~21, 40~45, 111~116.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14
  •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합니다
    “지성감천(至誠感天)이다. 지성은 사람만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늘도 감동시키고 귀신도 감동시킨다. 무엇이 인간을 감동시키느냐. 지성이다. 지성은 인간 최고(最高)의 힘이요, 인간 최강(最强)의 무기요, 인간 최대(最大)의 덕(德)이다.” 안병욱,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자유문학사, 2001, p.173. [타임즈코리아] 사람의 마음은 늘 하늘이 지닌 마음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길)은 먼저 성실(誠實)과 성심(誠心)에 이르러야 하늘에 닿을 수 있습니다. 성실과 성심이 인간의 마음에 닿은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성실과 성심을 인간의 개인적 소유물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성은 하늘이 인간에게 그렇게 살라고 알려준 이상이요, 삶의 지도입니다. 정성을 ‘다하라’와 정성에 ‘닿아라’에서 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다함과 닿음에 이를 수 있을까요. 삶에서 작은 일을 할지라도 정성스러운 마음을 다해야 하늘의 마음에 닿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중용』 25장에 나오는 “군자는 성실을 가장 존귀하게 생각한다(是故, 君者誠之爲貴)”라는 말이 이해됩니다. 유교의 최고의 인간상이자,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군자(君者)’입니다. 군자는 모름지기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정성을 다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군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정성을 다하는 삶의 자세를 굳게 지켜나가는 사람만이 군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완성된 인격체가 되고자 한다면 정성스러운 마음 바탕을 갖추어야 합니다. 성실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삶의 근본적인 가치를 성에 둔다, 혹은 인간과 사물에 정성이 가닿도록 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야 하늘의 마음에도 닿을 수 있습니다.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그렇게 나의 마음과 하늘의 마음이 다른 사람의 마음과 사물의 본질에 닿도록 정성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늘의 마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의 마음이 내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성이 욕망이 되지 않습니다.   이당은 여기에서 『중용』 24장의 풀이로 돌아갑니다. “지극한 정성은 신과 같다(至誠如神).” 인간이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면 하늘에 닿게 됩니다. 성을 이룬 군자가 되었으니 성심, 곧 마음에 성이 그득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감동과 감화입니다. 정성이 차고 또 차서 넘칠 정도는 되어야 하늘도 감동합니다. 하늘이 움직이게 하려면 그만큼 정성을 다하는 것을 하늘도 느껴야 합니다. 이에 이당은 “우리 인간의 노력의 목표는 하늘처럼 참되려고 힘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맹자(孟子)도 이렇게 말합니다. “참은 하늘의 길이고, 참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람의 길이다(誠者天之道也 思誠者人之道也).”   이당은 성을 참(됨)으로 풀었습니다. 인생의 최고 진리는 참입니다. 참과 진리가 동어반복처럼 들리기는 하나, 진실무위(眞實無僞)에 가깝습니다. 참됨이야말로 사람이 반드시 추구해야 할 길입니다. 그 참됨은 결국 하늘의 길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생의 수양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순자(荀子)는 “우리의 마음을 기르고 정신을 수양하는 데 성실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養心莫善於誠)”고 일러줍니다. 정성을 다함, 참됨, 성실함을 인생의 화두로 삼고 살아가는 것은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최선의 길일 것입니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 Marcel)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성실한 만남을 중시했습니다. 나와 너의 만남, 그 자체도 소중하지만 잠시 잠깐의 만남도 진정한 만남이 되어 오래 지속되게 하려면 서로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되지 않은 만남은 금방 들통납니다. 속임수와 거짓은 언젠가 탄로가 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삶에서 성실, 참(fides; fidelity)은 최고의 덕입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성실이 없는 곳에 존재(存在)가 없다. 성실의 정도가 존재의 정도를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이당은 “참된 내가 될 때 나는 참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가 있다. 거짓된 나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얼마만큼 성실하냐에 따라서 내가 얼마만큼 존재하느냐가 결정된다. 성실의 정도가 나의 존재를 좌우한다”고 풀어 말합니다. 성실은 나의 존재와 비존재를 가르는 척도입니다. 참되게 삶을 살아가는 한 나는 비존재가 아니라 존재입니다. 참되면 그는 있는 것이고, 참되지 않으면 실상 그는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는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네가 하는 일을 정성껏 하여라”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성심을 다하는 삶의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성실, 곧 정성을 다하는 한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무슨 일이든 간에 그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넌지시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요?   안병욱,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자유문학사, 2001, pp.172~176.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13
  • 삶 속에 속임수와 거짓의 자리는 없습니다
    “성실은 거짓이 없고 정성(精誠)스러운 것이다. 성실은 진실무망(眞實無妄)이다. 참되고 허망(虛妄)하지 않은 것이다. 성실의 반대는 허위요, 허망이요, 속임수다.” 안병욱,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자유문학사, 2001, p.169.   이당은 삶과 철학이 모순되지 않습니다. ‘성실’을 말하면 ‘성’과 ‘실’에 걸맞은 사람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정성스러움은 없으면서 지나친 결실과 결과만을 바랍니다. 그러니 성실에서 말하는 삶의 진실 됨은 찾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거짓과 속임수만 난무합니다. 경쟁과 야합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삶의 진정성과 순수성은 온데간데없고 술수와 속 다른 말만 무성합니다.   이당은 주자(朱子)가 성(誠)을 진실무망으로 해석한 것을 따라서 삶은 거짓 없고 진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여기서 망(妄)을 망(望)과 같은 의미로 보기도 하니, 무망이란 결국 진실한 것 이외에는 바라지 않는다는 말도 됩니다. 삶의 세계가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진실하게만 살아갈 수 있는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문 자체가 문제입니다.   중용에서 말하는 성실이 삶의 으뜸가는 덕목이 되어야 합니다. 성실을 성현의 말로만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우주의 이치라고 믿고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것은 존재 가치를 지니고, 그에 따른 성실로 존재 가치를 실현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치입니다. 삶의 현실과 이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치에 맞게 사는 것이 삶이어야 합니다.   중용은 이렇게 일러줍니다. “참은 하늘의 길이요, 참을 실천하는 것이 사람의 길이다”(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중용』 20장). 감탄을 자아내는 말입니다. 인간은 우주 질서 속에 있습니다. 인간은 하늘과 땅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자연의 이치나 원리와 법칙에 따라서 살아야지, 그것을 넘어서면 거짓과 속임수가 됩니다. 생사화복, 생로병사 그 모든 것들이 다 자연이 일러준 법칙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매우 단순한 이치를 설명한 말입니다.   참을 알고 참을 실천하는 것은 태어남과 병듦, 그리고 죽음조차도 다 하늘의 길이니,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아귀다툼하면서 삽니다. 다른 사람들이 죽든 말든, 고통을 당하든 말든, 가난해서 굶든 말든 상관없이 축재(蓄財)하고 온갖 욕망을 다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진실과 순수는 허망한 것들입니다. 남에게 거짓된 행위를 하는 것은 물론 자신까지도 속이며 살아가니 말입니다.   하늘과 땅이 거짓말을 하고 속이는 일은 없습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이고 무위(無爲)입니다. 사람들만 의식적으로 행동하고 거짓을 꾸며대는 작위(作爲)와 허위(虛僞)의 행태를 보입니다. 이당은 계속해서 중용 25장의 말을 인용합니다. “성실은 사물의 시작인 동시에 끝이다. 성실이 없으면 사물도 없다(誠者物之終始, 不誠無物).” 누누이 강조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성실은 모든 일에 시작이요, 끝입니다. 시종일관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성실하지 않고 과한 결실과 결과만을 바라는 것은 과욕입니다. 여기에서 탈이 생깁니다. 관계가 깨집니다. 우주의 이치, 천지 만물의 이법을 어겼으니 그 결과를 손에 쥔다고 한들 그것은 거짓의 열매입니다. 어디까지나 만사는 성실과 진실이라는 내면적인 법칙[眞實]에 따라서 이루어질 때 거짓되지 않습니다[無妄]. 말을 이루는 게 성(誠)이라는 한자어의 내포적 의미가 그것을 지향합니다.   결과로서 주어진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우연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나의 진실한 마음에 의한 필연적인 것인지, 자신을 성찰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당은 말합니다.   “성실성이 결여된 행동은 천박한 행동이다. 얼마만큼 성실한가에 따라서 인간과 사물의 가치가 결정된다. 성실은 성물(成物)의 원리인 동시에 성기(成己)의 원리다(『중용』 25장).” 사물이란 본래 인간의 수단이 아니니, 그것이 지닌 가치를 배려하면서 동시에 인간은 하늘이 부여한 덕스러운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 성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내 마음과 타자의 마음이 멀지 않고, 내 몸과 사물이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의 몸과 마음을 잘 갈고닦는 것과 사물과 타자에게 성심을 다하여 베푸는 것, 이 둘의 관계가 어디 분리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성실한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들이야말로 소리 없이 모두에게 유의미한 가치를 공급할 것입니다.   안병욱,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자유문학사, 2001, pp.169~172.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12
  • 인생의 내적 힘은 ‘덕(德)’입니다
    “인생은 삼수도장(三修道場)이다. 평생 배우고 공부하는 수학(修學)의 도장이요, 부지런히 일하고 창조하는 수업(修業)의 도장이요, 덕(德)을 쌓고 자아(自我)를 완성하는 수덕(修德)의 도장이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안병욱, 자유문학사, 2001, 머리말 중에서 양구 인문학박물관 방명록   이당의 철학 가운데 유독 많이 등장하는 개념 중의 하나는 ‘덕(德)’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삶은 덕스러움입니다. 이당은 “도는 길이요, 덕은 힘이다. 도는 인간이 지켜야 할 객관적 규범이요, 덕은 그 규범을 실현할 수 있는 주체적 능력이다. 도덕은 도와 덕이 합한 것이다. 도와 덕은 동양 사상의 중심 원리요, 핵심 개념이다”(p.197)라고 정의합니다. 이는 라틴어 vis(virtus)에서 연원하는 virtue를 해석한 말입니다. 덕(德)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규범인 도(道)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인간의 이성적인 힘, 자아의 힘입니다.   그런데 이 힘 혹은 능력의 자생력은 갈고닦음, 곧 수(修)에 있습니다. 좀 더 구체화하면 수양입니다. 이당은 이와 같은 수양의 덕목들을 크게 세 가지로 봅니다. 수학(修學), 수업(修業), 수덕(修德)입니다. 이 세 가지 수양의 덕목들은 모두 수덕으로 수렴됩니다. 배움과 직업(일)은 덕스러운 인간이 되는 과정으로써 수행이자 덕행입니다. 배움도 일도 모두 덕을 행하기 위해서 인간이 해야 하는 필수사항입니다.   이당은 이러한 덕목을 수행하는 인생을 도장(道場)으로 비유합니다. 인생은 덕(德)을 완성하기 위한 수양과 훈련장이요, 정신단련장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도량’이라고 하는데 산스크리트어 보디만달라(Bodhimandala)를 음차한 것입니다. 보리(菩提)는 산스크리스트어 Bodhi를 음사(音寫)한 말입니다. 때로 지(知), 도(道), 각(覺)으로 번역합니다. 보리는 부처가 6년의 고행(苦行) 끝에 깨달은 진리요, 미혹이 없는 정각(正覺)의 세계요,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깊은 지혜의 경지를 말합니다. 만다라는 진리를 터득하고 도(道)를 깨닫는 장소, 불상(佛像)을 비치하는 단(壇)의 의미로 쓰입니다. 이와 비슷한 뜻을 갖는 영어는 gymnasium이라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청년들은 gymnasium에서 심신을 단련했습니다. 독일에서는 중·고등학교 과정을 김나지움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서 기원했을 것입니다.   이당은 산다는 것은 갈고닦는 것(生卽修)이라고 보았습니다. 생명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것처럼 갓난아이부터 죽음을 앞둔 노년에 이르기까지 산다는 것은 갈고닦음의 연속입니다. 학문을 갈고닦고, 직장과 일에서 자기의 생업을 위해서 실력과 재능을 갈고닦되, 그것은 덕을 행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 그리고 학문을 연마할 때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상경하애(上敬下愛)가 있어야 하고, 수평적으로는 신의를 다지며 아름다운 학풍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일과 직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살기 위해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번 단련하고 천 번을 갈고 닦는 백련천마(百鍊千磨)의 성실함으로, 어려움도 견디며 부지런히 노력하는 각고면려(刻苦勉勵)의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인생이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격을 갈고닦는 데 게으르지 않아야 하는 지속적인 덕행의 수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당은 『대학』, 『논어』, 『시경』에 나오는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말로써 이를 정리했습니다. 절차탁마란 돌과 옥, 소의 뿔과 짐승의 뼈(石, 玉, 角, 骨)를 쓸 만한 물건으로 만들기 위하여 갈고 닦고 다듬는 지난한 과정을 일컫습니다. 절(切)은 칼로 자르는 것이요, 차(磋)는 돌 가는 것이요, 탁(琢)은 옥을 쪼고 다듬는 것이요, 마(磨)는 가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절차탁마의 자세와 그 실천이 필요하고, 일을 하기 위해서도 온갖 노력과 진지함을 다하여 수양에 수양을 더하여 온전한 덕을 고양하는 삶의 자세를 지켜나가야 하니 얼마나 독실해야 하겠습니까?   동양 고전 『예기(禮記)』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玉不琢不成器 人不學不知道” <學記>. “구슬은 갈고 닦지 않으면 훌륭한 그릇이 될 수 없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진리를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사물도, 사람도 갈고닦지 않으면 제대로 빛이 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인생에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인격을 잘 갈고닦아야 합니다. 이당은 힘줘 말합니다. “인간은 발광체다. 몸에서 빛을 발하는 존재다.”   사람은 저마다 빛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눈, 얼굴, 마음, 삶, 행동, 인격 모든 면에서 빛나야 합니다. 그래야 내면적 힘인 덕을 시종일관 몸에서 떠나지 않도록 갈고닦아서 수덕의 완성체를 일궈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안병욱, 자유문학사, 2001, pp.7~18, p.197.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11
  • 성의(誠意)는 참되고 아름다운 삶을 꽃피우는 원천입니다
    교육적으로 볼 때, 현대에는 세 가지 정신적 악(精神的 惡)이 있다. 첫째는 모르고도 배우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알고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한번 깊이 음미(吟味)해 볼 만하다.” 『安秉煜에세이2 삶의 보람을 찾아서』, 교육도서, 1988, p.129. 양구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 안병욱 서재   [타임즈코리아] 현대 사회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문제점은 진실(眞實)되고 정성을 다하려는 뜻과 의지가 눈에 띄게 약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배움[學/問]’과 ‘가르침[敎/育]’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은 배우고 가르침, 가르치면서 배움이 서로 밀접한 상호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산 안창호가 말한 무실(務實)하고 역행(力行)하는 삶과도 연결됩니다.   성실을 말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에 힘써야 한다는 무실역행(務實力行)의 교육사상에 비춰 볼 때 참되기를 힘써야 배움과 가르침도 헛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는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은 논리적인 정합성과 순차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실을 천명하고 역행하는 것이 학문의 근본이며 사람 된 도리라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당은 “지식이기주의자(知識利己主義者)”가 되지 말라고 당부하였을까요? 배움과 가르침, 앎의 선후(先後), 배우려는 것과 가르치려는 의지가 다 배우고자 하는 정신에서 비롯됩니다. 배우고자 할 때 만물은 다 스승이 되고, 모든 사람이 스승이자 학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배움은 ‘겸손(謙遜)’과 짝을 이룹니다. 모든 대상, 사물, 사람 등과 인생과 세상이 다 삶을 배우는 학교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스승으로 보입니다. 이런 자세가 되면 자연히 겸손한 마음이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죽는 날까지 배운다’는 말도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배워서 동시에 가르쳐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정성을 다하는 의지와 뜻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성의(誠意)가 없으면 게으르게 되고, 게으르게 되면 스승을 찾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배움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성의(誠意)가 살아 숨 쉬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성의가 있어야 겸손해지고, 배우며 가르치려는 의지가 삶의 진보를 가져오는 선순환이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삶의 공동체를 일컬어 책임사회, 봉사 사회, 연대 의식이 강한 사회라고 부릅니다. 인간이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집단 간에 아무런 성의가 없는 무관심(無關心)의 사회가 아니라 관심으로 가득한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배움과 가르침은 서로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당이 독특하게 개념화한 “지식이타주의자”는 배워서 남에게 주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지식이기주의자”는 배워서 자기만 알고 가르치려 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타인에 대해 그냥 수수방관합니다. 더욱이 지식이기주의는 자신이 아는 것을 다라고 생각하는 오만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성의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배움과 가르침에 성의가 있는 사람은 모두가 배우는 주인(주체)이자 가르치는 주인(주체)가 됩니다. 이른바 상호주체(후설의 현상학적 개념으로는 상호주관적 존재)입니다.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나아가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 혹은 배움과 가르침은 모두 ‘지(知)’와 ‘행(行)’의 태도입니다. 앎을 추구하는 것에서 얻게 된 모든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행위입니다. 이것을 지행합일(知行合一) 혹은 지행일치(知行一致)이라도 합니다. 도산 안창호는 이를 위해서 ‘무실역행주의(務實力行主義)를 설파했습니다. 참됨(진실)을 알고 이를 행하는 데 힘쓰는 민중(시민)이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배움과 가르침이 모두 성의 있고, 성실에 바탕을 두려면 말이나 생각에만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당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知)가 문제가 아니요, 행(行)이 문제다. 우리는 언(言)의 인(人)이 아니고, 행(行)의 인(人)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 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처럼 큰 정신적 죄악은 없다.”   이제부터라도 상호 배움과 상호 가르침에 성의(誠意)와 성실(誠實), 그리고 성심(誠心)을 다해야 한다는 큰 깨우침을 주는 말입니다.   『安秉煜에세이2 삶의 보람을 찾아서』, 교육도서, 1988, pp.129-133.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10
  • 아, 불성무물(不誠無物)의 철학이여!
    “성실은 인간의 위대한 힘이요, 덕이요, 빛이다.” 안병욱, 『인생, 그 순간에서 영원까지』, 자유문학사, 1987, p.243. 양구 인문학박물관과 방명록   지극한 정성을 다하면 사람은 물론 하늘도 감동하게 합니다. 이당의 좌우명은 “불성무물”입니다. 이는 동양의 고전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로서,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정성을 다해야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인생은 요행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성실이 근본이 되어야만, 모든 것은 그 존재적 가치를 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실이 근본이 되어야만, 인생도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성실을 달리 말하면 ‘충실(充實)’이라고 합니다. 하루하루를 최선으로 살아가는 것, 알차고 보람 있게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당의 말대로 “현재는 미래를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현재 자체가 목적입니다.” 탁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성실한 마음과 자세로 대해야 합니다. 만남도 참되고. 말도 참됨으로써 성실함을 일상화해야 합니다. 표정도 밝게 하며, 마음과 마음이 맞닿은 화(和)를 이루어야 합니다. 온화하고 인자하며 조화로움 가운데 중용을 지키는 화목(和睦)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論語』에서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이야기합니다. 사람과 어울림에 있어서 화합하면서도 부화뇌동하지 아니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 내 앞의 사람과 사물입니다. 지금 여기는 나에게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중요한 시·공간입니다. 이당은 톨스토이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시간은 현재요,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내가 지금 대하고 있는 사람이요, 제일 중요한 일은 그 사람에게 선(善)을 행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사람과 사물에 진정성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는 성실함은 내 앞의 모든 존재에 대한 예의이며 선입니다.  정성을 다하고 성실한 사람에게 고개가 숙어지는 것은 그에게서 번져오는 선과 겸손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참되고 순수하고 독실한 것”이 느껴지기에 그렇습니다. 한때 성실이 집안의 모든 사람을 묶어주는 삶의 철학이자, 그 집안의 지향성인 것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실’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속고 속이는 일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 무던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당은 “성실의 재건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삶의 요소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성실함을 존재의 척도로 삼는 사회, 이로써 신뢰와 감동으로 일렁이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실함, 곧 나와 너, 세계와 삶을 속이지 않는 삶으로 공명을 불러일으키고 파장을 일으키는 “성실주의”가 하나의 진리가 되는 세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당은 말합니다. “성실은 우리가 딛고 설 인생의 땅이요, 우리가 밟고 나아갈 길이다.” 안병욱, 『인생, 그 순간에서 영원까지』, 자유문학사, 1987, pp.242-253.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06
  • 율곡 이이의 후예, 성(誠)을 통한 이당의 마음 공부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공부는 마음 공부(工夫)다. 심학(心學)처럼 중요한 학이 없다. 마음 공부란 무엇이냐. 우리 마음을 닦는 공부요, 우리의 마음을 기르는 공부다. 우리의 마음을 쓰는 공부요, 우리의 마음을 통일하는 공부다. 수심(修心)과 양심(養心)과 용심(用心)과 구심(求心)이 마음 공부의 중요한 목표요, 항목이다.” 『安秉煜에세이1.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교육도서, 1988, p.177.   이당은 마음 공부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달리 정신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마음을 공부하는 것이 철학자의 자세이자 마땅히 힘쓸 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닦고 기르는 것은 알지만, 마음 씀씀이와 마음을 올바르게 찾는 것은 지난한 일입니다. 그래서 후자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래서 이당은 마음 공부의 요령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인생의 가장 근본이 되는 진리를 하나 붙들고 밤낮으로 그것을 사유하고, 실천하고, 터득하려고 애를 쓰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삶의 우선순위에서 점점 더 밀려나고 있습니다. 몸 쓰는 일, 마음 쓰는 일, 머리 쓰는 일도 점점 더 약화하여 갑니다. 이런 것은 모두 유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마음 공부가 따로따로 되고 있으니 혼연일체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닦고 마음을 쓰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앞세우다가 보니 마음이 다치게 됩니다.   이당은 본립도생(本立道生), 즉 ‘근본이 서면 방법[道]은 저절로 생긴다’는 말로 올바른 마음 공부가 중심 역할을 하도록 안내합니다. 성(誠)의 철학자답게 율곡 이이를 비롯하여 퇴계 이황(敬), 우암 송시열(直), 도산 안창호의 애(愛)에 이르기까지 마음 공부의 대표 선인들을 언급합니다.   ‘성(誠)’을 마음 공부의 화두로 삼았던 율곡 이이는 매사에 정성을 다하고 성실한 마음 자세로 일과 사람을 대했습니다. 퇴계 이황은 ‘경(敬)’이 모든 일의 근본이라고 믿었습니다. 공경스러운 마음은 오만한 마음, 거짓된 정신, 경솔한 태도를 경계합니다. 우암 송시열은 곧고 올바르며 공정한 정의의 원칙대로 사는 것을 삶의 최우선으로 꼽았습니다. 곡(曲), 사(邪), 악(惡)은 모두 ‘직(直)’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산 안창호는 사랑하기를 삶의 철학으로 품고 살았습니다. 잘 알다시피 그의 사랑은 나라, 사람, 진리, 자연, 하나님, 문화, 일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만사의 철학으로 규정짓고 몸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도산 안창호는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네가 하는 일에게 네 정성과 최선을 다하여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성(誠)이든, 직(直)이든, 경(敬)이든, 애(愛)든 다 성(誠)으로 통한다면 무리(無理)일까요? 필자는 일리(一理)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당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마음 공부에 대한 전범(典範)을 알았으니, 실천할 일만 남았습니다. 후대의 자손은 선대의 교훈을 과거의 산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 누구도 선대의 연장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을 닦고 기르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을 올바로 쓰는 일까지,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조신하게 챙기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마음 공부를 위해 인생의 진리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 진리를 자신의 마음 밭에 놓고 곱씹어 득함으로 몸에서 배어 나오게 하면 눈빛이 달라질 것입니다. 낯빛은 온화해지고 목소리의 색깔 다정하며, 눈에서 배어 나오는 빛깔이 부드러워져서 결국 정신은 선(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선대의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닦아 놓고 증명한 마음 공부(의 방법)를 정성(精誠)껏 성실(誠實)하게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우리도 그와 같은 인물로 닮아갈 것입니다. 『安秉煜에세이1.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교육도서, 1988, pp.177-179.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05
  • 이당 안병욱의 언어철학: 이름에 걸맞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름과 알맹이가 둘 다 완전한 것, 이름도 좋지만 그 속에 담긴 알맹이와 실력이 충분할 때 한문에서는 명실겸전(名實兼全)이라고 한다.” 안병욱, “현대인의 생활지표”, 김양호 편, 『언어교양대학』, 언어문화사, 1974, p.79. 양구 인문학박물관 안병욱 교수 서재   세상에 이름을 갖지 않은 존재가 없을 것입니다.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있다’, ‘사물이 있다’, ‘동물이 있다’, ‘식물이 있다’ 등등 ‘있다’라고 할 때는 그 대상을 지칭하는 이름이 있어야 그 ‘있음’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안병욱은 그 이름을 ‘명(名)’이라고, 알맹이와 자격을 ‘실(實)’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은 있지만,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자격과 실력과 알맹이가 없으면 유명무실(有名無實)이라고 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세계나 사람 중에는 이름은 있지만 이름값을 못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텅 빈[虛] 상태나 거짓된[僞] 존재도 많이 있습니다. 이당은 알참, 실질, 실력을 갖춘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이처럼 삼박자를 갖춘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실하다’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이는 다부지고 튼튼하며 알찬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듣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름을 갖지 못한 존재, 그리고 이름이 있더라도 이름값을 못 하는 존재도 많습니다. 이름에 걸맞은 실력으로 영근 알맹이를 가득 채우려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도 삶의 지향을 거기에다 두어야 합니다.   이름값을 한다, 이름에 걸맞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달리 자신의 ‘자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한다는 말과도 통합니다. 교수, 성직자, 국회의원, 대통령, 교사, 사장, 회장, 학생 등 각기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걸맞은 언행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이른바 유용(有用)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당이 지적하고 있듯이 무용지물(無用之物)의 사람, 해를 끼치는 자가 됩니다.   나아가 자신의 자리를 잘 파악하고 인식하면서 이름에 걸맞은 언행을 하려는 사람은 질서와 아름다움을 생각하여 처신합니다. 자리의 아름다움이란 있어야 할 곳, 즉 제 자리에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달리 ‘앎답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앎은 인식이며 양심입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 사물이 있어야 할 곳을 제대로 알고 양심에 따르는 것이 아름다움입니다. 이러한 자리는 궁극적으로 행복의 자리, 행복한 삶과도 연결이 됩니다. 이것이 순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당은 여기에서 사회적 자리에서 요구되는 원칙들을 말합니다. 책임과 신용(신의)입니다. 당연한 것 같지만 몸으로 잘 실행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책임(responsibility)은 대인관계에서 타인에 대한 욕구나 어려움에 적절하게 반응하고 응답한다(respond)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신용을 잃지 않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회적 관계에서 무시해서는 안 되는 도덕적 행위들입니다. 이 두 가지를 지키지 못하면 사회적 자리가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마치 산사태가 벌어지는 것처럼 엄청난 피해와 혼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당은 자리에 대한 건강함을 유지하고 이름에 걸맞은 사람살이를 하려면 제 ‘구실’(口實)을 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구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구실의 다섯 가지 원리를 거론하면, 사람 구실, 가족원 구실, 직장인 구실, 민주 시민 구실, 백성 구실입니다. 구실을 순우리말로 하면 ‘노릇’이요, 라틴어로 하면 오피시움(officium)이나 페르소나(persona)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각자 직책이나 자리에 잘 어울리는 역할과 기능을 하면 그만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 노릇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의 자리가 사람의 자리라는 것을 명확하게 안다면 나머지 사람살이의 구실은 저절로 잘 될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 근본적인 구실이 안 되면 나머지도 안 됩니다. 사람 구실을 제대로, 올바로 해야 보람 있는 삶이 영위되는 것 아닐까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 이당은 그것을 명실상부(名實相符)라고 합니다. 이름과 사물이 일치되는 세계가 되어야 하고, 이름과 인품이 잘 맞아떨어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만큼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당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자기 이름이 있다. 우리는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알맹이와 실력을 갖추자.”   늘 마음에 두고 반성하고 연구하며 노력해야 할 말입니다. 삶에서 정성과 성실함을 기울이라는 그의 평소 전언을 생각해보면, 유독 이름과 자리, 그리고 구실이라는 말이 오래도록 마음의 울림으로 남습니다. (안병욱, “현대인의 생활지표”, 김양호 편, 『언어교양대학』, 언어문화사, 1974, pp.73-95.)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04
  • 사랑의 종교철학적 아포리즘(aphorism)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습니다. 사랑은 아낌없이 줍니다. 사랑에 관한 상반되는 이 명제는 모두 옳은 말입니다. 사랑에는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전자는 ‘빼앗는 사랑’이며, 후자는 ‘주는 사랑’ 또는 ‘바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고, 아낌없이 줍니다. 이것이 사랑의 헌신(獻身)의 원리입니다. 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고 독점하고 싶어 하며,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독점의 원리입니다.”『인생사전』, 예원북, 2013, p.75.   [타임즈코리아] 안병욱이 종교에 대해서 언급한 글은 거의 없습니다. 말년의 글에서 조금씩 나타나는 신에 대한 사랑 혹은 거기에서 파생되는 사랑에 관한 풀이는 흡사 설교 문을 읽는 듯합니다. 사랑을 크게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하향적 사랑, 인간이 신을 향하는 상향적 사랑,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 사랑으로 나누는 명료함도 해석학적 식견이 한몫한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고상한 밀어(密語)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사랑을 종교적 실천이나 연인 사이의 아름다운 감정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철학적 문제로 사유하는 데까지 나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다 보니 이른 봄 지표면은 녹았으나 땅속은 아직도 얼어 있는 것처럼, 사랑에 대해 온전한 이해와 실천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칫하면 사랑도 소유 개념으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소유하거나 말거나 하는 이기주의로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당은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삶과 사랑은 자신에게 충실하면서 동시에 타자에게도 성실해야 하기에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당이 그토록 강조하는 것처럼, 삶을 성실하게 산다는 것은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과 타자에게 속이지 않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시기, 질투, 분노, 증오를 넘어서야 합니다.   철학적 사랑은 나의 속이나 남의 속을 모두 만족시키는 순수함에 있기에 어렵습니다.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당은 빼앗는 사랑이 아니라 온전히 내어주는 아가페적 사랑을 높게 평가합니다. 흔히 아가페적 사랑은 성서적, 기독교적 사랑으로 봅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사랑의 정수를 꿰뚫어 본 이당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추구하고 실천에 힘쓴다면 사랑은 모든 덕 중에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맑은 영혼이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 사랑 안에 있다는 해석학적 논리도 두드러집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으면서 유한한 인간은 그저 그러한 사랑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음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적 사랑을 하기 어렵다면 최소한 ‘우애’(philia)라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에로스(eros)는 곡해되었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인 스토르게(storge)도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현상을 부인하고 싶지만,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현실입니다. 모두가 다 신의 자녀로서 신의 뜻에 따라 사랑(agape)을 할 수 없다면, 우정 어린 마음으로 사람을 사귀는 것만큼이라도 귀중하게 여기며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친구처럼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황량한 사막과도 같습니다. 벗을 뜻하는 한자어 우(友)는 두 친구가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형상을 본뜬 것입니다. 꼭 벗이 아니더라도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도 많아야 합니다.   필리아는 우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문화·예술에 대한 사랑까지 아우르며 심지어 philosophia, 곧 지혜에 대한 각별하고 사심 없는 사랑도 포함합니다. 철학과 사랑의 긴밀한 랑데부(rendezvous, 밀회)가 잘 드러나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을 딱 네 가지로 분류하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또 이 사랑의 개념과 감정은 서로 중첩되기도 합니다. 이 개념들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넓고 깊게 할 수 있는 만큼 사람이 달라집니다. 그 사랑 속에 그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한 이해만큼 실천하게 됩니다. 실천이 부족하다면 그만큼 이해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만큼이 그 사람의 깊이입니다. 그 사람의 삶의 질은 이와 비례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랑받은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당은 사람 안에 사랑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 안에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형이상학적 통찰에서 사랑을 말해줍니다.   ※아포리즘(aphorism) 명언, 격언, 잠언과 같이 신조나 이치를 기억하기 쉽게 간결하고 명쾌한 표현으로 쓴 글을 일컫는 말이다. 주로 작가의 체험적 내용을 독창적으로 표현한 것이기에 그 작가만의 개성과 지적 역량을 통해 사물의 핵심이나 이치를 깨달으며 교훈도 얻는 묘미를 맛보게 된다.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03
  • 행복한 인생을 위한 기초, ‘사랑-함’
    “인간은 애정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빵은 육체의 양식이요, 사랑은 정신의 양식이다. 우리는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사랑을 먹어야 한다. ‘사랑은 인간의 주성분이다’라고 철학자 피히테는 말했다.” 『인생 그 순간에서 영원까지』 p.21. 이당 안병욱 교수와 부인 김광심 여사 생전 모습   [타임즈코리아]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은 물질만 풍요로우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부분 즐기는 시간과 공간, 대상과 장소를 보면 사물성이나 물질성이 많은 것도 이를 반영합니다. 안병욱은 인생철학자로서 삶을 우선으로 하는 삶의 경험적 이치를 잘 설명해 주는 생철학자입니다. 그는 인생의 집을 짓는데 필요한 세 가지 원리로 사랑, 믿음, 창조를 거론합니다.   안병욱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랑은 인생의 흐뭇한 향기다. 사랑은 인생의 따뜻한 햇볕이다. 우리의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사랑이다.” 자칫 사랑을 감정으로 치부하기 쉬운데, 오히려 사랑은 정신의 토대가 되어야 하고, 그것 없이는 삶의 자양분과 원동력을 마련할 수 없다는 말은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생의 모든 힘을 뿜어내는 정신이자 정신의 깊은 속입니다.   게다가 정신도 사랑을 기반으로 해야 인간의 이성적 행위로서의 책임과 이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마저도 가능해집니다. 이성(ratio, nous, reason)의 개념 안에 계산, 수치, 계량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니,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인간은 도구적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안병욱은 “사랑은 인생의 위대한 가치요, 근본적인 가치요, 영원한 가치다. 사랑 없는 인생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다. 산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명제(命題)를 잊어서는 아니 된다”고 말합니다. 이른바 사랑절대주의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판별하는 기준, 윤리적 잣대입니다. 안병욱은 사랑-하기를 철학-하기(philosophieren)처럼 명제화하고 있는 것은 사랑-함도 결국 공부고 끊임없는 훈련과 체득의 과정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에 대해, 사람에 대해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세계(우주)를 사랑한다는 것인데, 이는 연습과 훈련과 공부를 통해 체득됩니다. 공부-함, 철학-함, 사랑-함은 삶의 행위이자 생철학의 근간이 됩니다. 인간다움과 인간 정신의 외현적 표상이자 인간의 지표로 평가되는 행위들입니다.   사랑을 왜 공부해야 할까요? 그것은 삶과 사랑이 동근원적(同根原的)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둘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원인임과 동시에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의 장(場)이 같다는 말입니다(『인생 그 순간에서 영원까지』, 자유문학사, 1987, 21-23 참조).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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