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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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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2
  • 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 가지고 놀다보면 저절로 얻는 바가 있다!
    [타임즈코리아] 『철학과 비판(이종철, 도서출판 수류화개)』은 저자의 혜안이 넘치는 철학함(philosophieren)의 방식을 담은 성실한 결과물입니다. 저자는 삶의 일상에서 문제의식을 길어 올려 좋은 의식과 감각의 실천(bon sense)으로 나아갑니다. 비판(Kritik)은 모름지기 가르는 것, 곧 이성 자신이 이성의 가능성과 한계,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생각’을 그야말로 곱씹어 ‘생각하여’ 현실을 풀어가는 해석학적 통찰력은 그의 목적, 즉 에세이 철학을 잘 드러낸 듯합니다. 그는 놀이하는 장사꾼,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어린 아이처럼, 그러면서 점잖은 어른답게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essay)합니다.   글을 쓸 때는 그의 말대로 ‘진리의 순간’, 자신의 영혼과 만나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게다가 진리에의 용기(der Mut zur Wahrheit), 즉 어떤 사태에도 굴하지 않고 대면하고자 하는 저자의 올곧은 사유 실험과 현실 탐험은 철학적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저자가 임제 선사(臨濟 禪師)의 말 ‘살불살조’(殺佛殺祖)를 인용하면서 말하듯이, 내가 생각하는 것 외에는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반영일 것입니다. 오늘날 시민의 저조한 독서율과 글쓰기의 난조는 바로 매체에 매몰된 의식 때문입니다. 헤겔이 말한 ‘정신적 동물의 왕국’에 모여 엄지손가락으로 타자를 쳐가며 소통하고 정보를 검색하는 현대인에게 자기 생각, 주체의 생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일상인(das Man)에 대해 비판적인 사유를 독려하고, 편견을 반성하는 주체가 되는 것은 물론 사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도록 도와줍니다. 저자의 철학적 신념처럼 현실적이고 실천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권위에 익숙해진 일상인의 해방을 위해서 종래의 철학, 이론, 인물을 재해석하고 발전시키자고 제안합니다. 특히 저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제3세대 철학자 악셀 호네트(A. Honneth)의 인쟁투쟁이란 권리에 대한 쟁취임을 간취합니다. 인간의 자존심과 인격적 존엄과 관련되는 권리는 주격 ‘나’의 주체성을 자각하고 가치 인정에 따른 연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보편적 법칙, 즉 규정적 판단력(bestimmende Urteilskraft)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에세이 철학을 꾀하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요? 그리고 저자가 주장하는 현실문제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과 실천은 무엇일까요? 평자가 볼 때,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대상이나 사물을 무심코 공평하게 대하려면 무엇보다 내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쏠리지 않고 평정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말하는 ‘초연’[Gelassenheit, 평자주: 방기(放棄)]이란 이런 경지를 말할 수 있다. 이 개념은 ‘들어가기’(Sicheinlassen)와 ‘나가기’(Sichlosslassen)라는 양면성을 담고 있다. 전자는 ‘몰입’의 측면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거리두기’의 측면이라 할 수 있다. (…) 이것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실천적 거리’(phronesis)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들어가기와 나가기의 그 어느 지점에서 설정되는 균형적인 ‘중용’의 지혜가 그것이다”(376-377).   멀어지지도 않고 가까이 가지도 않는, 집착하지도 않고 무관심하지도 않는 그런 상태를 저자는《금강경》의 한 문장과 비교합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곧 마땅히 머무는 곳 없는 곳에서 마음을 내라는 말입니다. 하이데거의 초연이라는 개념이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로(M. Eckhart)부터 빌려온 것이라 시대착오적인 말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대의 철학적‧종교적 용어라고 치부하기 십상인 이 개념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물질과 기술과학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어 자신의 개별적 주체성이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글 속에는 자신의 마음이 녹아들기 마련입니다. 특히 에세이는 평소 저자의 생각이 오롯이 드러납니다. 독자에게 자신을 적나라하게 개방하기에 모험, 솔직함, 진정성, 그리고 사유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저자의 책에서는 법학을 전공한 후 다시 철학을 공부한 학자답게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편성과 특수성, 그리고 다시 개별성을 통한 종합으로 귀결되는 듯한 글쓰기는 그의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줍니다.   다시 “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 《중용》). 저자의 책을 가지고 놀아보니 얻은 바가 생겼습니다. 동일한 지평에서 볼 때, 이 책은 전문적인 철학함의 훈련을 하지 않은 독자에게도 철학적 사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진리에 대한 용기’가 생기도록 해 줄 이 책의 제목《철학과 비판》에서, 특히 ‘비판’(批判)에 주목할 것을 권합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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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30
  • 존재는 텅 빔(無; Leere, Nichts)이다
    [타임즈코리아] 하이데거나 노장철학을 논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사적 사유의 맥락을 해체한 인물이요, 노자와 장자는 공자와 같은 정형화된 논법을 타파한 동양철학자입니다. 굵직한 한 사람의 철학을 다 우려낸다는 것도 버거운 일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닌 이 둘을 조합한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철학자 윤병렬은 이 둘을 존재(Sein)와 도(道, Tao)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손쉽게 풀어 밝힙니다. 하이데거의 시원적 사유, 길(Weg), 침묵 언어, 무위,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 등의 유비점들을 찾아 그것을 현상학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흐름은 매끄럽습니다. 서양과 동양의 정신적 간격이 다소 멀어 보이지만,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단순한 비약이라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를 말하고, 도를 말하는 순간에 이미 존재도 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역작은 존재와 도가 결코 언어로서 규정될 수 없는 것임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르케(arche)를 규정하는 순간, 그것을 마치 다 안다고 하는 인식론적 오류에 빠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Nichts)가 단지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무가 그 자체로 물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먼저 주어져 있어야 합니다. 다만 저자는 인식론적 오만을 거두고 존재론적 겸허함의 삶을 살라고 권유하고 있는 듯합니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하게 한다”(sein-lassen)는 말이나 “도는 존재자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두 개의 언어가 번역불가능성의 근원어(Urwort)의 문제임을 깨우쳐 줍니다. 이는 존재나 도는 삶의 방식, 삶 그 자체로부터 개시해야 할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삶의 방식은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입니다.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이 대도시로 모여들고 깊이 성찰하는 삶이 점점 사라집니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의 노예가 되지 말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노자도 무위자연을 말합니다. 이는 작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퇴락한 존재인 일상인(das Man)으로 살거나 장자의 물(物)에 빠지지 않고 자연 그 자체, 혹은 세계의 근거인 존재의 목자로, 존재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존재는 말씀으로 인간에게 다가옵니다. 인간은 그 존재의 언어를 뒤따라 말하고 사유하고 응답할 뿐입니다. 존재의 말씀은 인간이 세계에 어떻게 도달해야 하는지, 세계에 길을 내줍니다. 길을 가야하고 도를 깨우쳐야 하는 인간이 존재의 빛에 의해서 살아야 하는 당위성은 존재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언어의 말 걸어옴은 우리가 어떤 경험(erfahren)을 하는 것인데, 이는 “어떤 길 위에서 걸어감을 통해 그 무엇에 다다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종국에는 다시 시원적인 말인 도, 그리고 “본래 길”(eigentlich Weg)에 이르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길을 내면서 움직이는 일입니다(Be-wëgen). 들길에서 외치는 단순하고 소박한 소리에 따라서 사는 삶,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자연, 무위자연의 소리에 따라서 사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고향을 상실했습니다. 소요유(逍遙遊)의 장자적 삶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존재물음(Seinsfrage)은 절실해집니다. 도에 대한 사유도 간절해집니다. 하이데거는 세계로 던져진 “너는 실존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세계에 대한 배려(Besorgen)와 이웃에 대한 실존적 심려(Fürsorge)로서 관계 맺음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이러한 실존적 삶의 방식은 존재의 근원에 가깝게 다가감을 요구합니다. 그 이정표를 하이데거의 존재와 노장철학의 도를 통해서 알아듣기 쉽게 비교, 분석한 이 책(『윤병렬, 하이데거와 도가의 철학, 서광사』, 2021)은 윤병렬 선생님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케 합니다.   존재 망각과 고향상실의 시대라 규정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혜안이 동양철학의 도에 대한 존재론적 삶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윤병렬 선생님의 노고와 역작에 깊이 감사할 뿐입니다.   평자가 감히 이 책의 학문적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이 주제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물론 민중도 이 책을 통해 저자의 해석학적 언어와 씨름을 해야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따라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민중들이 이 책을 읽고 생각을 모은다면(legein; logos) 하이데거와 도가철학이 예언자의 길을 찾아주는 친근한 동반자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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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9
  • 유물론도 인간의 이상세계를 지향합니다!
    [타임즈코리아] 철학을 좀 안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유물론이나 관념론 중 어느 하나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곤 합니다. 이렇게 철학적으로 유물론이다 관념론이다, 하는 해묵은 논쟁의 역사가 인간의 갈등과 전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세계(경제적 삶의 조건)에 기반을 둔 인간의 삶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현실보다도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면서 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관념론은 애초에 그 이상세계를 그리고 항상 사물적 인간이나 물질적 현실을 넘어서려고 하였습니다. 두 입장의 시작이 어디에 있건 간에 인간의 삶을 딱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철학적, 사상적 결이 무수히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란 원래 역사적 맥락이 만들어 낸 존재입니다. 어떤 삶의 세계에 처해 있었느냐가 그의 철학을 형성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플레하노프(Georgi Plechanov, 1856-1918)라는 맑스주의 철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철학사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은 서구 유럽철학, 영미철학, 동양철학 이외의 이른바 러시아 철학이라는 변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간에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 이념적으로 러시아나 유물론의 철학을 다룬다는 것은 거의 금기시 되어 있었던 것도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철학자인 플레하노프의 삶과 생애를 예술철학적 입장에서 정리하고 풀이한 한국의 철학자가 고(故) 강대석 교수입니다. 평상시 유물론적 입장에서 철학을 해왔던 강대석 교수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 인간관과 종교론에 대해서도 해밝은 분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난 2월에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평자와 일면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학문적 관심을 갖고 멀리서 사숙을 하던 차에 그분의 궂긴 소식을 듣고는 놀람을 금치 못했습니다. 불현듯 그분의 저서에 대한 서평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플레하노프는 맑스나 레닌과도 교류를 했던 철학자입니다. 19세기의 역사가 그렇듯이 세계의 이념적 지형은 혼란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지리적 다툼 또한 매우 잦았던 때였습니다.   급격한 산업사회의 도래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갈등이 심화되고 그로인한 노동자 탄압과 인권은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플레하노프는 관념론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사회적 현실과 조건을 외면하고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관념론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몰락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플레하노프는 인문학교를 졸업하고 보병학교에 진학을 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곧 자퇴를 합니다. 그 후 페테르부크르의 광산전문학교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렇듯 그의 학력을 보면 예술철학자로서 어떤 특별한 면모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를 보면 철학자란 당대의 시대가 만들어 내는 듯합니다. 잘 알다시피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차르 전체주의 정치로 농민의 경제 해방이 요원해지게 됩니다.   이 시기 플레하노프는 망명과 도피 생활을 계속하면서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읽고, 『공산당선언』을 러시아로 번역하는 작업도 하였습니다. 빵보다 책을 더 귀중하게 생각했던 그는 “혁명적 이념 없이는 참된 의미의 혁명 노동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나키스트 바쿠닌이나 수정 맑스주의자 베른슈타인의 견해와 달리 하면서 그들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예술적 소양도 풍부했습니다.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 바그너의 니벨룽겐을 즐겨들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또한 아나키즘, 생철학자 베르그송의 관념론, 톨스토이의 종교적 휴머니즘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사생관에서는 매우 자연적이고 소박하였습니다. 이는 죽음이란 자연과 하나되는 것이다, 라는 견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플레하노프의 철학적 토대는 유물론이었습니다. “악인을 만드는 것은 본성이 아니라 사회제도다”라는 대명제 하에 맑스주의는 온전한 세계관이요 철학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그의 필생의 과제는 예술의 해석에 있었습니다. 예술(언어) 속에 감정, 사상이 들어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시대적 미감”이 무엇인가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사회적 조건, 즉 생산력과 생산방식에 따라 사람의 위치, 심리가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예술은 사회생활과 삶의 반영이라는 철학적 입장을 고수하기에 이릅니다. “예술은 사회적 인간의 관심이 되고 행동원인이 되는 모든 것을 묘사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말한 것처럼 예술이란 “지상에서 천국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입장과 맥을 같이 합니다.    특히 그는 예술 작품의 이념은 사회학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설파함으로써 예술은 인간의식의 발전, 사회질서의 개선에 기여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무용론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예술철학은 “예술에는 이념(자유, 평등, 민주)이 없으면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의 표현이나 예술은 인류를 위한 봉사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덕이란 타인의 행복을 통해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노동자 자신의 시, 노래, 문학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감성의 표현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오늘날의 오해와는 달리, “공산주의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임을 입증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플레하노프의 유물론적 미학의 핵심인 주관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조건(현실)이라는 데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가 이념이 빠진 예술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한 것은 예술의 기능과 목적은 인간과 사회의 발전, 그리고 이 땅에서 더 좋은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물론이든 관념론이든 이들의 철학은 지금의 세계가 아닌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분투한 실천적 이론과 이론적 실천의 조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진부한 이념의 논쟁보다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위해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화해를 통해 새로운 유토피아, 곧 이상세계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현실에서 초월로, 초월에서 현실로 그 방향이 어디든 최종목적은 인간의 삶의 조건의 해방과 인간의 의식의 개혁 두 가지가 정합적으로 맞물리는 삶의 세계가 아닐까요? 플레하노프의 경우 그것을 예술이라는 영역이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플레하노프 생애와 예술철학(강대석 지음, 사람일보)』 은 고 강대석 교수의 유작이라면 유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의 몸은 다시 물질로 돌아가 관념의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자연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그의 정신세계와 감성세계를 잘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좋은 저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원광디지털대학교 원불교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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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이 세계가 ‘호의적인 장소’(oikeios topos)가 될 수 있을까?
    [타임즈코리아] 자본주의는 새로운 세계 생태입니다. 자본주의는 자본-권력-자연을 결합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합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저렴한 자연을 구축하려 합니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시대에 저렴한 자연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요? 사회(인간 자연, 비자연 인간)와 자연(비인간 자연)에 대하여 자본은 자연을 전유(착취)하고 시간에 의한 공간의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후가 급변함에 따라서 권력구조와 생산구조 덩달아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본은 저렴한 자연을 끊임없이 탐색하여 상품생산의 축적·혁신하기 위해 비인간적 자연을 도구화하였습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자연파괴는 급증하면서 대참사를 초래하고 비자연인 인간을 닦달하여 급기야 슈퍼잡초 같은 복수를 낳았습니다.   모름지기 자본주의는 자연 전체를 관통합니다. 위가 아닌 중심부의 관통(돌파)이 문제입니다. 자본주의는 단 한 번도 유한한 자연에 대해 경비를 지불한 적이 없는 데도 말입니다. 자본주의의 축적 체계는 무상 자연 일과 유산 자본의 일로 이루어져 결국 ‘고갈의 지리학’이라는 기이한 지형을 만들어냅니다. 자본주의는 18세기 중엽부터 위기를 맞이하면서 성장의 한계와 동시에 자연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16세기 석탄 사용량의 증가, 19세기의 저렴한 자연의 확보를 통해서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철도화는 시간에 의한 공간 전유를 가능하게 했고 국가 부양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인류가 생명 그물의 종이라 한들 산업화에 따른 기계-자원의 메커니즘의 표준화에 종속되었데, 이는 지식(과학)-권력-자연-지배라는 등식의 자연스런 결과였습니다.   시계를 통한 시간의 통제는 자연의 시간을 자본의 시간에 근접하도록 유도하였고, 저렴한 식량은 더 적은 평균노동시간으로 더 많은 칼로리가 생산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녹색혁명은 실상 잡종 옥수수의 출현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무상 일, 에너지 전유, 벌집군집붕괴현상은 생물권의 특성화 문제를 양산함에 따라 사회주의적 세계 생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더불어 새로운 존재론적 정치, 곧 식량주권, 기후정의, 탈성장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는 기후변화로 저렴한 자연은 끝났다는 비관적 선언에 의한 반성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필자는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금융화로의 전횡과 심화가 불가피한 후폭풍을 지연시키는 강력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것인가?” 자본주의의 생존 가능성을 바라는 의지는 아닙니다. 현재의 자본주의가 자연 생태까지 전유한 횡포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암시입니다.   이 책은 자연에 대한 안팎의 논의를 생태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조명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독자의 인내심 있는 해독 능력이 요구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Jason W. Moor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은 노동과 자연 등의 관계를 충심어린 마음으로 실증적으로 분석했다는 데 이 책의 높은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번역자의 성실하고도 정확한 번역이 눈에 띤다는 것도 필자의 논지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맑스의 《자본》이 “노동자의 성서(Bibel)”인 것처럼, 이 책은 이미 자본화된 자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오롯한 자연과 민중의 반성적 삶을 위한 훌륭한 연구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리스어의 오이케이오스(oikeios)는 ‘가까운’, ‘친척’, ‘자신에게 속하는’, ‘고유한’, ‘적절한’ 등의 긍정적 개념들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세계가 인간이 살만한 곳, 모든 생명적 존재자에게 살가운 곳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더군다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자본주의가 이미 새로운 경제적 지평을 확장(장악)했다는 통계가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저렴한 자연이 더 가난해지기 전에 민중이 생명과 생명,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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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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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그리고 도서관에 대한 발상의 전환과 가치혁신
    ‘사람책도서관’으로 영혼의 단절을 아름답게 되살려 왕성한 교류가 일어나게 함으로써 지역사회가 공감 가운데 호흡하는 유기체적 공동체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책이 영혼이라면 도서관은 사람의 몸처럼 영혼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책과 도서관은 절대 불리할 수 없는 관계이다. 도서관은 수많은 지혜가 모여 있는 지혜의 샘터와도 같다. 여기에서는 다양한 지식이 교감하며 융합하여 사람들의 심연에서 잠자는 갈망이나 사명을 자극한다. 지적인 소통이 영감을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도약을 꿈꾸게 하는 희망과 용기의 공급처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도서관이 여기에서만 머무르면, 지적 갈증에 지친 사람들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여기에서 새로움을 향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도서관이라는 샘들이 하나둘 모여서 가치혁신을 이루게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도서관은 엄청난 유익을 생산해 내는 시대적 조류를 창출해 낼 수 있게 된다.   먼저는 책과 도서관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 다른 각도, 새로운 생각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과거와 같은 틀 안에서의 생각으로는 새로운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도서관은 어느 정도 양적인 팽창을 이루긴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도서관의 사명이 흡족하게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도서관의 하드웨어와 함께 소프트웨어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여기에 사람과 사람의 온기가 서린 지혜가 서로의 가슴에 심기게 하고 자라게 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 더해져야 한다. 발상을 전환해야 과거에 보이지 않던 모습이 보인다. 생각을 바꾸어 보면, 책과 도서관에 대해 새로운 시야가 열리고 가치를 혁신할 수 있게 된다.   단순히 책을 모아 두기만 한다고 해서 도서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도서관은 다양하고 많은 정보와 지식이 살아 움직이며 새로운 영감을 창출하게 만드는 공간이어야 한다.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빌려주는 기능만을 가지고서는 이런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뜨거운 가슴을 맞대고 교류하며 공감하는 가운데 함께 살아감에 감사해 하고, 감격하며 더욱더 의미 있고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게 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도서관이 이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려면, 이에 걸맞은 변화와 협력자들이 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을 점차 늘려가며, 지역공동체의 지적역량 확대와 활력 공급의 심장부가 되어야 한다. 지역의 모든 정보를 공유하고 의제를 설정하며 구축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이런 변화의 물결을 주도하는 것이 ‘사람책’과 ‘사람책도서관’이다.     ‘사람책’과 ‘사람책도서관’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발원지이며, 주역들의 모임이다. ‘사람책’과 ‘사람책도서관’은 지역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오가며 자연스럽게 서로 만나고 교류하는 다리요, 광장이 되어야 한다. ‘사람책’과 ‘사람책도서관’은 프로보노(Pro bono·재능기부 봉사활동)를 넘어 지역공동체의 나눔, 경제, 봉사, 여론형성, 가치창출, 삶의 질 향상, 미래적 방향의 설정 등을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가는 유기체적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사는 마을과 정겨운 이웃들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정리하여 알리고 공유하는 것은 물론, 후대들이 길이길이 보고 느끼며 배우도록 보존하여 역사로 만드는 일도 ‘사람책’과 ‘사람책도서관’의 사명이다.   ‘사람책도서관’은 책을 소장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경험이나 사연 그리고 지식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을 모아서 가동하는 일련의 서비스에 대한 총칭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빌려주는 공간이라는 한정된 이미지와 역할에서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가는 도서관이다. 도서관이 지식과 경험을 나누고 공유하려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가치를 혁신한 것이다.   오늘날의 도시에는 마을이라는 공동체적 의미가 거의 사라져 버리고 행정구역상 명칭만이 내걸려 있을 뿐이다. 이것은 영혼의 교감이 단절된 영적 폐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영혼의 단절을 아름답게 되살려 왕성한 교류가 일어나게 함으로써 공감 가운데 호흡하는 유기체적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21세기 도서관이 나가야 할 방향이고 시대적 사명이다.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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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6
  • 비폭력의 철학과 희망의 정치
      비폭력의 정신은 민중을 아픔에서 회복하게 하고 정치를 치유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비폭력은 단순한 정치 수사학이 아니라 정치의 근본정신이자, 정신의 극치입니다.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가 말하고 있듯이, “모든 수사학적 형식들은 시대정신(Zeitgeist)이 되기를 갈망”(F. Moretti, 조형준 옮김, 공포의 변증법, 새물결, 2014, 429쪽)합니다. 함석헌의 정치 수사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수사학이란 “상호 주체적 진리를 확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 체계에 대해 지지를 요청하는 것이 목적”(F. Moretti, 위의 책, 397쪽)입니다.   함석헌의 정치 수사학은 비폭력의 철학적 가치 체계를 민중이 지지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비폭력은 정치적 형식이자 동시에 질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폭력의 정치 수사학은 시대정신, 시대가 요구하는 민중의 정신이요, 세계의 정신입니다. 비폭력의 정신은 바로 그러한 토대에서 민중을 아픔에서 회복하게 하고 정치를 치유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따라서 비폭력이 아닌 “힘의 철학, 폭력의 정치”로는 안 됩니다. 자신을 죽이고 타자를 인격으로 대하지 못하는 힘에 의지하는 철학은 상처와 술수와 치졸과 거짓만이 난무할 뿐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2, 인간혁명의 철학, 한길사, 1983, 36쪽).   민중의 정신이 새로운 정치철학의 바탕이 되어야 하며, 정신이 세계철학의 지향이 되어야 하고, 정신이 민중의 사유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이로써 비폭력은 정치 현실(추악함, 비도덕, 조잡함)과 정치이론을 조화시켜야 합니다.   정치적 존재(실존)와 정치적 현실 사이에 있는 틈을 좁히고 삶을 삶답게 하여주는 정치미학은 정치적 존재자들(정치적 행위자들)과 정치적 실존(민중)을 서로 편안하게 하는 비폭력으로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권력은 국가의 질서를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 개개인의 권리를 위해서 사용될 때 폭력이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그것은 국가 체제, 정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소수의 엘리트 계층을 위한 권력으로 작용하게 될 때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민중은 그들에게 정치를 맡긴 적이 없습니다. 되레 그들 자신이 정치한답시고 잡아당긴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민중이 묵인하고 인종(忍從)하고 굴종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무식이요 무성의요 무책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7쪽).   ▲ 비폭력의 정신은 민중을 아픔에서 회복하게 하고 정치를 치유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정신을 일으켜야 합니다. 민중의 정신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함석헌, 위의 책, 39쪽). 민중의 정신이 일어나야 세계가 삽니다. 민중의 정신이 광기에 사로잡히라는 말이 아닙니다. 망상에 사로잡히라는 말도 아닙니다. 민중의 정신은 세계를 고치는 이상을 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정신과 의지(Wille)가 스스로 진보하고 사물이 사물 되게 하고 세계가 세계 되는 힘(A. Schopenhauer)이라면, 민중은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힘,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각되거나 의식되지 않는다고 해서 민중의 정신이 없거나 우매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어지러운 사회를 구하기 위해서는 ‘새 도덕’이 필요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40쪽). 낡은 체제 속에서의 정신과 생각을 이끌었던 도덕은 이제 더는 소용이 없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는 도덕적 분투만이 사회를 구할 수 있습니다. 폐단, 구태, 차악, 안일, 안주, 절망, 자멸로 이끄는 도덕을 도덕이라 할 수 없으니 새로운 도덕을 구현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도덕마저도 정치적 행위자들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깨이지 못한 민중이 부화뇌동하여 자신의 사적 이익에 도덕이라는 훈장과 초자아를 부르짖는 현실에서 도덕의 갱신은 필연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함석헌은 “낡은 체제에 속한 한, 너도 나도 다 악합니다”라고 단언합니다. 그런 세계 속에서 선은 특정인, 특정사상, 특정주의에 국한되기 마련입니다. 차별주의나 당파주의는 더 문제입니다(함석헌, 앞의 책, 40쪽). 정치적 무의식은 차별, 분리, 당파, 구별입니다. 통합하고 화해하고 치유할 줄 모릅니다.   정치적 무의식은 본능(id)과 현실적 자아(ego)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본능을 향해 치닫습니다. “이드와 현실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로서 자아는 너무나도 자주 아첨꾼이자 기회주의자, 거짓말쟁이가 되려는 유혹에 넘어가는데, 그것은 마치 어떤 정치가가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위치를 대중들이 좋아하는 상태로 유지시키려는 행위와 비슷하다.”(S. Freud, 박찬부 옮김, ‘자아와 이드’, 쾌락 원칙을 넘어서, 열린책들, 153-154쪽 재인용, F. Moretti, 앞의 책, 448쪽)   그러므로 정치적 실존, 정치적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도덕을 구상해야 합니다. 함석헌은 좌우도 아닌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윤리, 새로운 종교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의 궁극은 비폭력의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비폭력은 “너 나와의 대립을 초월한 것입니다. 차별상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생에 대한 절대의 존경을 그 도덕의 토대로 합니다.”(함석헌, 앞의 책, 40-41쪽)   정치는 이제 정치적 상투어를 파괴하고 정치의 상투적인 행위를 타파해야 합니다. 모든 삶의 바탕에는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대는 좌우 진영논리, 좌우 이념이 아닌 비폭력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비폭력은 자아를 존중하듯이 타자를 환대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생의 운동, 삶의 운동이라는 것을 통하여 외형의 형식과 가식을 뒤로하려고 노력합니다.   정부는 정치적으로 희생된 목숨의 안타까움과 진실을 외면하고 경제 부흥만을 부르짖습니다. 정치적 행위자들은 그저 형식과 가식, 체면, 가면만을 생각하고 민중을 짓밟으려고 합니다. 민중은 정신도 없고, 도덕도 없는 듯이 막 대합니다. 부흥도 민중 전체가 ‘감격’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감격하게 하지 않는 정치에는 쇼만 있을 뿐입니다. 감격은 앞에서 말한 타자에 대한 인식과 환대가 기초가 된 감정의 교환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41-42쪽).   산다는 것은 경제적 부흥이나 경제적 성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먹고 살 만큼 사는 우리입니다. 다만 극부와 극빈이 너무 심하니 그 둘을 조화롭게 하는 미학적 삶, 정치미학, 경제미학의 쾌감적 능력을 발휘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중 전체가 일어나는 전체 운동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민중 전체가 일어나야 합니다. 민중 전체의 정신은 “그동안 사회적인 혜택을 가장 적게 받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이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면 실질적인 기회의 평등이 실현되고 결과적으로 최대 다수의 사람이 최대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이른바 롤스의 ‘최대극대화의 원칙’(전재원, 앞의 책, 147쪽)에 입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폭력은 자기를 부정하고 타자를 긍정하는 것이며, 자기의 욕구를 포기하고 타자의 욕구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민중의 삶의 충동, 삶의 의지를 위해서 정치는 고통과 악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욕망을 단념하고 삶 자체를 관조하고 기쁨을 얻게 해야 합니다. 정치의 목적, 정치적 비폭력은 인간 앞에 있는 것들이 짓북새를 놓으며 우리를 기만하려고 하는 데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욕망하는 자아를 정확하게 보고 욕망의 동기들을 내려놓게 하는 것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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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5
  • ‘사람책도서관’으로 열어가는 아름다운 세상
      ‘나’와 ‘너’ 사이에서 진실하고 성실한 대화를 회복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곧 인간의 존재적 가치를 살리고 빛나게 하는 길이다.   도서관의 새로운 변화뿐만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대학들에서도 ‘사람책도서관’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홍수에 먹을 물이 없다’는 말처럼 SNS의 활성화와 함께 소통이 넘쳐나는 시대에 사람들은 진정한 소통에 목말라 한다. 이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급속하게 번져나가는 것이 ‘사람책도서관’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가? 이제는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지 않고도 모바일 기기(機器)들을 이용해 수많은 전자책(eBook)을 읽을 수도 있다. 이렇게 IT의 발전이 가져다준 신속과 편리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적 방식인 ‘사람책도서관’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의 존재적 가치는 사회성(sociality)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자유론(On Liberty)》을 통해 인간의 개별성과 사회성의 가치를 어떻게 하면 최선의 방법으로 조화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가 대단히 소중하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사회적 덕목과 부딪히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개별성과 사회성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극대화된 조화를 이루느냐가 그 사회의 건강성과 행복의 척도가 될 것이다. ‘인간을 본질적으로 도덕적 또는 이성적 존재라고 할 때, 그것은 이미 독립된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인간의 연결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서의 존재를 뜻하는 것이다’는 것이 독일의 철학자 루트비히 안드레아스 폰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의 주장이다.   ▲ 도서관의 새로운 변화뿐만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대학들에서도 ‘사람책도서관’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사람은 각자 창조 본래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지만, 이것이 사회 속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존재이다. 한 몸과 같은 유기적 공동체 관계를 통해 창조 본래적인 존재 의미와 가치를 발현하는 것이다.   사회와 분리된 인간이라는 가정은 창조 본래적 목적과도 어긋나는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도덕이나 지성도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 성장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말은 인간과 함께 있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존립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나와 너(Ich und Du)》에서 인격적인 만남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공존성과 함께 인격 상호 간의 관계성과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부버를 일컬어 ‘만남·관계·대화’의 철학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만남·관계·대화’와 같은 것들이 깨어진 세계에서는 ‘나’와 ‘너’를 말하는 기쁨도 상실하게 된다.   ‘나’와 ‘너’의 인격적인 만남이 무너진 사회는 얇은 얼음판 위로 걸어가는 사람들처럼 불행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나’와 ‘너’ 사이에서 진실하고 성실한 대화를 회복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곧 인간의 존재적 가치를 살리고 빛나게 하는 길이다.   삼각형이라는 것은 세 변이 세 개의 각을 이루어야 존재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세 개의 변으로 분리될 때에는 이미 삼각형이 아니다. 이것이 삼각형의 실존적 존재방식이다. 인간도 ‘너와 더불어 나’라는 ‘우리’를 통해서만 실존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세미나'에서 강의 하는 저자 박요섭 박사     컴퓨터를 작동시키려면 이미 운영체계(operating system)가 설치되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이미 사람의 내면에 본질적으로 사회라는 구성요소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많은 사람이 공동체라는 개념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당위적인 가치와 미덕이라는 긍정 편향적 이해만큼은 경계해야 한다. 공동체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와 긍정 편향은 몰개성화의 초래와 전체주의적 오류를 불러올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책도서관’은 진심과 열정을 바탕으로 공감 가운데 조화를 이루며 모두에게 행복과 희망을 안겨 주는 채널이 되어야 한다. ‘사람책도서관’이 만들어내는 메시지가 자기중심주의에서 발로하는 이데올로기의 관철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여서는 안 된다. 모두에게 행복과 희망을 안겨주는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결과를 향해 나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람책도서관’이 구현하고 발전시켜야 할 자세는 어떤 것인가.   ⑴ 상승적 적극성이 필요하다. 일방적 요구나 비난적 자세가 아닌 ‘더불어’와 ‘상생’을 힘차게 이루어 가야 한다. 나눔과 공감을 만들어 내는 열망으로 모두를 설레게 해야 한다.   ⑵ 언제나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탐색이나 장벽이 필요하지 않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 날마다 편협한 자기중심적 이데올로기를 제거해야 한다. 인간 사랑에 기반을 둔 넓은 세계관, 포용, 배려, 존중이 숨 쉬는 나눔과 공감의 능력이 날마다 성장하게 해야 한다.     ⑶ 확신성이 필요하다. 예측 가능성은 신뢰에서 비롯된다. 신뢰가 없으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사람들이 교통 법규 준수에 대해 신뢰할 수 없다면, 운전도 불가능하게 된다. 그야말로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반면에 신뢰를 줄 수 있다면, 상대방의 모든 것을 자신의 가치혁신을 위한 자산으로 가동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농부가 풍성한 수확을 확신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좋은 씨앗을 뿌리고, 진실하게 가꾸어 나가면, 땅과 자연의 모든 것이 농부의 가치가 되어 준다. 착하고 성실한 농부라면, 자연과 땅이 베풀어 주는 결실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죄의 습성으로 기울어진 심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기대와 소망대로 듣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바람직한 의사소통은 이런 욕구를 봄에 눈이 녹는 것처럼 소리 없이 변화시켜 새로운 희망으로 채워간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양성이 아름답게 용해되는 넓은 세계관 속으로 행복하게 젖어들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저자 박요섭 박사     박요섭 소개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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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2
  •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민중과 정치철학
       정치적 실존은 하늘의 뜻[天命]을 민중들과 함께 실현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나라의 주체가 민중이듯이 정치적 주체도 항상 민중입니다. 그럼에도 민중을 정치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정치가를 정치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치의 본질을 호도하는 것입니다. 민중의 뜻과 생각이 달라진다면 정치 또한 달라져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물론 민중의 뜻과 생각이 항상 정치적 이상을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 이상 역시 민중의 뜻과 생각을 근본으로 하여 설정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정치가 완전히 달라지려면 민중의 깨인 의식과 행동을 정치의 실존적 참여의 주체로서, 그들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사람의 역사, 곧 정치의 역사는 주체인 민중에 의해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정치와 역사는 잠정적으로 모험입니다. 내딛지 않은 길을 가려 하기 때문에 위험한 모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정치 현실은 실존적으로 민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위험의 소지, 모험해야만 하는 필연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적 실존들이 단지 권력 쟁투나 밥그릇 싸움을 하기 위한 것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정치 세계가 갖고 있는 우연성이나 부정성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정치는 민중의 삶과 역사가 진보하기 위한 것이고, 의미 실현입니다. 진보하기 위해서는 늘 새로워야 합니다.   함석헌은 늘 ‘생각’을 말합니다.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민중, 이 민중은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서 기억하고 상상하며 성찰하는 존재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28쪽).   민중은 이렇게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반성하면서, 자신이 가진 이성과 감성으로 새로운 역사를 기획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민중의 실존적 지향, 시간성 안에서의 인식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지배자는 지금까지 보수적이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민중의 생각을 조직적으로 짓밟아 왔습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역사의 걸음을 방해하는 악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과학적으로 하는 투쟁 그것이 곧 정치요 혁명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28쪽)라고 말합니다.   ▲ 정치적 실존은 하늘의 뜻[天命]을 민중들과 함께 실현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민중 스스로 정치적 실존이나 정치적 주체가 되려면 새로운 인간, 즉 자기 극복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계몽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진화해 나가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민중은 낱개로서, 개별로서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개별이 존재한다는 것은 공존재적, 함께 있음으로 존재하는 것임으로 전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류, 종교, 도덕, 정의 등 전체와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전체 연관성입니다. 민중으로서의 전체를 살리는 것이 혁명입니다. 민중과 전체 사이의 거리가 소멸하는 것, 그것이 혁명입니다. 민중은 전체로서 세계에 나타납니다. 그렇게 될 때 국가주의에 의해서 개별적 민중이 와해하지 않습니다. 민중이 전체의 핵심이자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민중은 국가가 아닙니다. 민중은 생각이고 깨어난 의식입니다. 생각과 의식이 사람의 규정이라면, 그 전체의 인격이 곧 민중이 될 수 있습니다. 조직이나 체제도 아닙니다. 민중은 생각하는 존재 전체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1쪽 참조)   이제 새 인류의 도래를 고대해야 합니다. 개별적 존재, 민중의 자유가 보장되는 전체, 생각을 전체로서 하는 사회를 꿈꾸어야 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1쪽)   사르트르는 말합니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본질에 선행하는 것으로, 본질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존재의 본질은 인간의 자유 속에서 공중에 매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것에서 ‘인간존재’의 ‘존재’와 구별할 수는 없다.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그런 다음에’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와 인간이 ‘자유라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Jean-Paul Sartre, 정소성 옮김,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2009, 78쪽)   민중의 생각과 정신을 무화시키려 하지 말고 스스로 깨우칠 수 있는 실존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민중이 전체라는 의식, 민중이 단순히 관념이 아니라 민중이 정치 현실이자 정치 주체라는 인식이 정치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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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5
  • 봄 그리고 깨어 생각함
       민중이 깨어 생각하고 스스로 정신을 계몽할 수 있다면 역사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함석헌이 말하는 ‘봄’이라는 것, ‘본다’라는 것은 단순히 시지각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봄’의 부정성으로서의 ‘안 봄’과 ‘참 봄’의 부정성으로서의 ‘겉 봄’을 구분하고 있습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2, 인간혁명의 철학, 한길사, 1983, 11쪽). 그러면서 지금의 시대가 참 봄이 아니라 겉 봄의 시대라고 비판합니다. 어쩌면 그의 봄(시각 및 인식)의 철학은 시지각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식론적이며 계보학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본다’(see, voir)는 행위는 인식론적으로 ‘안다’(savoir)라는 정보의 습득과 남김 없는 타자의 파악, 그에 따른 조정과 ‘소유’(avoir)까지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정말 본다는 것은 안 봄, 즉 비폭력적인 무시선적인 태도가 진정한 봄이라고 합니다. 흘끗 봄, 사적 관심이나 이익을 가지고 타자를 바라보는 행위는 타자에 대해서 거리를 한껏 좁혀 인식론적으로 포착, 자기 것화 하려고 하기 때문에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존재를 인식하되 완벽하게 인식하겠다는 것은 오만입니다. 시각적으로, 시신경 안으로 들어온 정보는 지극히 선택적 정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보는 즉시 우리는 판단의 과정 속에서 타자를 전부 이해했다고, 세계를 다 알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함석헌이 말한 ‘겉 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지금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죽어서도 생각은 계속해야 합니다. 뚫어봄은 생각하는 데서 나옵니다”(함석헌, 위의 책, 12쪽). 생각은 존재의 기본 행위, 존재의 근원적 본질을 특징짓는 행위입니다. 생각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무슨 생각이든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한다고 해서 다 생각이 아닙니다. 생각은 현상을 깊게 뚫어 볼 수 있는 사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정신과 사상이 모이게 되면 인류를 보는, 세계와 역사를 해석하고 역사를 보는 시선과 생각이 달라져 결국에는 혁명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한 번의 생각이 영구불변한 생각일 수 없듯이 생각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합니다. 변해야 생각입니다. 하지만 생각 없이 생각을 하면 생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모순, 즉 ‘무생각’이 되고 맙니다. 생각이 아예 없는 것입니다. 뚫어봄, 즉 세계와 현상을 올바르게 꿰뚫어보는 인식론적 통찰력을 올바르게 갖지 않는 이상, 그것을 생각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정보를 갖고 판단하고 이해하는 오성적 인식으로는 부족합니다. 자기 동일성인 이성을 가지고 사태를 정직하고,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비판력이 있어야 합니다.   함석헌이 왜 남들이 다 싫어하는 사상의 넝마주의를 자처했을까요? 왜 인생의 넝마주의, 역사의 넝마주의가 되겠다고 주저 없이 말했던 것일까요? 그 근저에 “혁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쓰레기를 줍는 넝마가 곧 혁명이기 때문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14-15쪽).   생각을 통하여 흩어져 범주화·종합되지 않은 온갖 사상의 쓰레기, 정신의 쓰레기를 한곳으로 모으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 쓰레기가 인류를 지탱하는 사유와 정신,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함석헌 스스로 민중의 사유를 결집시키고 한곳으로 모아 생각하게 하는 선구자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넝마주의자는 아무나 될 수가 없습니다. 쓰레기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그 생각과 시선이 제대로 된 쓰레기를 모음, 곧 사상과 정신, 역사의 넝마주의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정신과 사상이 모이게 되면 인류를 보는, 세계와 역사를 해석하고 역사를 보는 시선과 생각이 달라져 결국에는 혁명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민중이 깨어 생각하고 스스로 정신을 계몽할 수 있다면 역사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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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20
  • 종교적 세계의 몽롱한 경지에서 벗어나려면
      순수한 의식과 생각, 반성적 신앙의식을 향해 의식과 실천을 지향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야만 맹목과 몽환, 그리고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의식은 순수하지 못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신이 지각하는 것이 순수하지 못한 외물적 관심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의식과 지각은 매 순간 순수의식을 자각하려 하지 않는 이상, 예기치 못한 맹목,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말한 “종교적 세계의 몽롱한 경지”(공포의 변증법, 새물결, 2014, 247쪽)로 빠져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순수한 의식과 생각, 반성적 신앙의식을 향해 의식과 실천을 지향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야만 맹목과 몽환, 그리고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종교인이 의식하고 있는 것이, 종교인의 사고방식이 순수하게 나타남 그 자체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지각된 것 그 자체인가를 매 순간 깨닫지 않으면 의식의 부재(absence)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의식이 만들어 놓은 초월자의 형상이나 표상을 배거해야 합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19, 영원의 뱃길, 한길사, 404-405쪽). 그것을 순수의식의 나타남이라고 착각하고 믿음의 본질로 받아들이게 되면 편견과 아집, 오류의 신앙진술만이 난무하게 됩니다. 그것을 참이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하나님의 말씀은 ‘올바른 말’, ‘자유를 주는 말’,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나게 하는 위로가 되는 말’, ‘장래를 보고 희망을 품는 말’”이라고 단언하면서 오늘날 종교 현실을 보면 거짓말만 있고 진실은 없다고 한탄하며 그 원인이 말씀의 기근 속에 있음을 비판했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407쪽).   물론 말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말은 없습니다. 상업용 언어, 마케팅 언어, 값싼 언어 등으로 초월자를 개시하고 현시하려고 하지만 그런 언어로는 초월자의 나타남, 초월자는 현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존재한다고 잘못 인식하여 말씀의 배후에 무언가가 숨어 존재한다고 철석같이 믿는 것을 보면 종교는 죽음의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 경전을 비추어가면서 우물을 깊이 파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참말은 옳은 말입니다. 종교의 언어는 옳은 말이어야 합니다. 말씀의 기근 속에 참된 말을 발견하기 위해서 다시 “마음의 지하수”를 캐야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다시 들어가 그 속에서 참말을 만나야 합니다. 신앙의식의 근거는 참말입니다. 신앙의식의 법칙은 옳은 말입니다. 속 깊은 말 속에, 순수한 말 속에서 나타남 그 자체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말이 터져 나와서 그야말로 말씀을 말하는 이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현상, 신앙현상은 종교 언어와 종교적·신앙적 사건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속에 참말이 있는지, 거짓말이 있는지는 “경전”을 비춘 말인지 아닌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말하는 주체, 곧 발화자가 종교서술, 종교서사를 말할 때는 반드시 “경전을 비추어가면서 우물을 깊이 파는”(함석헌, 위의 책, 409쪽) 자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경전에 참 길이 있고 신앙의식의 발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벗어난 말은 거짓입니다. 해석은 있을 수 있으나 순수의식에 의해서 나타난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는 발화자는 거짓입니다. 종교인을 모두 거짓된 길로 인도하는 것이고 삶의 근거를 거짓말로 구성되도록 의도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사적 정신에 따라서 공적 정신을 파괴하는 행위가 종교(적 현상)에서도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마치 사적인 영혼에만 관심을 기울이거나 반대로 사적인 영혼을 무지하게 만드는 종교 혹은 공적인 영혼을 좌지우지하는 종교로 인해서 공적 영혼은 병들고 사적인 영혼은 깨어나지 못하는 삶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Hannah Arendt, 김선욱 옮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200쪽).   앞에서 종교 지향성은 외물이 아니라 내적 세계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입니다. “현란한 광채를 꿈꾸는” 정신입니다. 가능한 한 순수의식이어야 합니다. 마음의 근저에 순수함과 맞닿아 나타남 그 자체는 인간의 삶과 신앙을 일깨웁니다. 말로써도 순수한 나타남 그 자체를 다 서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내면의 의식의 심층으로 내려가 완전한 고독 속에서 초월자를 독대해야 하는 신앙태도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말을 조심하십시오. 더불어 말을 듣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 분별하십시오. 발화자가 나타남 그 자체, 존재 그 자체와 상관하면서 나타난 말씀인지를, 신앙 반성에 입각한 말인지를 잘 인식해야 합니다. 더불어 아직 한 번도 가본 길이 아니지만, 그 낯선 길을 경전에 기대어 가보도록 안내하고 그 경전에서 ‘생명의 길’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발화자와 청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진리의 길, 낯선 길은 침묵만 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 “수런수런”, “두런두런”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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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9
  • 진정한 나와 세계와의 관계
      세계에 대한 관심은 지각과 의식을 넘어선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종교적 지향성은 바깥(외적) 세계의 관심보다 오히려 내적 세계 혹은 내면세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항상 외물(外物)을 향하여 있음이 아니라 인간 안의 정신·영혼을 향하여 있음을 지향합니다.   함석헌이 ‘홀로-있음’이라는 존재론적 신앙 태도를 강조하는 것도, “홀로”라는 종교인 내면의 자기 투쟁적인 헌신이 필요하므로 그런 것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19, 영원의 뱃길, 한길사, 1985, 396쪽). 홀로라고 하는 것이 자기 고립과 자기 소외를 자처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독단적이고도 독선적인 코기토(Cogito·인식주관 또는 인격주체)를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종교의 속으로 들어가는 침잠을 의미합니다.   ▲ 종교적 지향성을 달리해야만 종교 본연의 신앙 내용과 실천이 나올 수 있습니다     자기 확신이나 자기 판단도 없으면서 공동체적인 맹신과 맹목으로 은거와 자기 침묵을 수행하지 못하는 종교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의식과 신앙인식을 바로 대면하지 못합니다. 종교적 지향성을 달리해야만 종교 본연의 신앙 내용과 실천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는 그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상대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함석헌이 지적하듯이, 자기 자신, 곧 “나를 문제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겉살림”으로만 일관할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96쪽).   무릇 종교현상은 그것을 통하여 나의 나됨과 세계의 규명, 즉 진정한 나와 세계(속의 나)와의 관계를 알아보려고 하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나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자는 현상학적인 태도일 수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의식과 인식에 앞서서 나를 지각하거나 알지 못하는 한 세계를 늘 왜곡된 상태로 볼 것입니다.   겉살림이나 바깥 세계에 대한 관심은 지각된 나, 지각하는 나, 의식된 나, 의식하는 나, 그리고 지각과 의식을 넘어선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따라서 종교인은 고독해야 합니다. 세계와 사물에 앞서 자신의 신앙의식이 나타남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이고 본질적으로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99쪽). 세계와 사물을 추방하고 자기의식과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지각된 존재 그 자체, 의식 그 자체를 밝히려면 고독·은둔·침묵·관상을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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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4
  •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목적 언행과 실천을 바라보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통해 무엇을 깨닫고, 어떤 성찰적 실천을 해야 할지 함께 생각하며 변화의 길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검소함과 사랑의 사목적 언행과 실천으로 어느 때보다 기대감이 높습니다. 한국 방문에서는 어떤 행보와 영향이 발생할지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마르셀(G. Marcel)은 신앙과 자유 사이에는 내적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신앙은 그 자체로 다른 사람들과 신에게 약속의 이행을 다짐하는 자유로운 활동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명제적 진리에 대한 지적(知的)인 동의라기보다는 신뢰가 더 본질적입니다.   마르셀은 ‘~라고 믿는 것’과 ‘~을 믿는 것’을 구별합니다. 신앙은 ‘~라고 믿는 것’과 관련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은 ‘~라는 명제’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을 믿는 것’을 통해서만 표현됩니다.   다른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신뢰감을 심어 준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대가 나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고, 나의 희망에 보답할 것이며, 나의 희망을 성취시켜 줄 것을 확신합니다. 또한,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과의 신뢰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마르셀은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신뢰와 약속 이행의 접합을 간절히 기원하면서 자유롭게 신과의 계약관계에 들어갑니다... 마르셀에게 있어 초월은, 시간상의 초월(단순한 수평적 초월)이 아닙니다. 초월에는 수직적 차원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것에로의 초월입니다. 초월의 경험은 초월적인 존재자의 삶에 참여함으로써만 성취됩니다.”(전재원, 로고스와 필로소피아, 경북대학교출판부, 2014, 90-91쪽)   ▲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통해 무엇을 깨닫고, 어떤 성찰적 실천을 해야 할지 함께 생각하며 변화의 길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한적이고 시간적인 것을 넘어서 영원한 것에 대한 초월을 추구한 마르셀의 존재철학처럼, 지금까지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이 종교 서사와 서술, 그리고 그 내용을 생활세계에서 살아보려고 무진 애를 쓴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개인의 자율성과 신앙의 현상과 판단, 그리고 타자에 대한 본능과 초자아의 갈림길에서 잘못된 선택과 이기적인 발언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리고 종교의 현실이 어두울수록 종교지도자들의 불신과 이중성은 날로 더해가는 듯합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을 간파한 교황이 자신의 사목적 행보를 통해 온 지구적 차원에서 가톨릭의 신앙 쇄신을 꾀하려고 한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아직도 이념의 갈등과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통해 무엇을 깨닫고, 어떤 성찰적 실천을 해야 할지 함께 생각하며 변화의 길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생각이 획일화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와 이념을 떠나서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조셉 캠벨은 언젠가 진정한 사람 하나가 세상에 다시 활기를 가져다준다”(Davidson Loehr, 정연복 옮김,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 샨티, 2007, 80쪽)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취임과 그 이후의 사목적 언행과 실천이 부디 세계를 바꾸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의 현존재적 종교 행위, 그리고 사목적 결단과 발언마저도 한갓 종교와 신앙의 허위, 종교적 가식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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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04
  • 교황방문에 대한 여러 생각과 종교의 난감함과 한계
       너그럽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다양성 속에 일치를 만드는 방문이 되었으면 합니다.   2014년 8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교황의 방문이 수고스러운 행사로 그치지 않으려면, 포용과 관용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가톨릭은 갈라짐이라는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끌어안지도 못하고 형제라는 의미지향과 제도지향으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교회사적 한계, 정치적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적 의지·의미와 감각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너그러운·여유로운 시선을 보여주기 위한 방문이 되었으면 합니다. ‘보이기’와 ‘보기’로 일관한다면 방문은 그저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석헌은 초월자에 대한 상상력의 수행에서 신앙 감정의 사건이 발생된다고 믿습니다. 상상력은 개별자들에게 모두 주어져 있는 자율성이지 특정 계층에게만 허용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자유로운 사건과 행위를 막아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상력과 그에 대한 해석, 그리고 신앙 지침은 특권 계층에게 있는 것처럼 통제하고 선언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되면 개별자의 신앙 감정 혹은 신앙 체험이 특권 계층에 의해 해석되기 전까지는 잠재적·잠정적인 채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육신으로는 거리가 떨어졌고 성령으로 또 역사상으로 나타난 이들을 통하여 그들의 발자취를 마음에 모아 그들을 믿고 될수록 예수에게로 가까이 하여 실감이 나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80-381쪽)   ▲ 될수록 예수에게로 가까이 하여 실감이 나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신앙의 가능성은, 신앙의 정신화는 그 자체가 과도하게 오염되어 있거나 개인화되어 타자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한 적법한·적절한 서사가 될 수 있습니다. 특권 계층의 정신화도 아닌 권위로 도배가 된 신앙의 양식만이 마치 신앙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모든 종교인을 어린이 취급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역사적 선조들의 발자취는 독단의 아버지나 초자아적 아버지가 아니라 목가적·유목적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는 학습되거나 검열되거나 거세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특권 계층은 거짓말을 통해서라도 그들의 욕망을 억압하려고 하지만, 아이는 더 이상 자신의 결핍을 위험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모두에게는 신앙의 서술(서사) 양식인 경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그 참 진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종교 서사의 범주와 내용은 침묵하지 않고 만인에게 열려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그 서사와 진리 서술을 삶과 현실로 번역하고 옮길 때, 즉 삶으로 살 때 그 자체가 드러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깨달으려면 우리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열리지 않고는 성경의 참 가르침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철두철미하게 현실에 참여하여 그 속에서 하느님의 참 말씀을 드러내는 것”(함석헌, 위의 책, 381쪽) 또한 중요합니다. 종교의 서사 범주와 내용인 경전은 생활세계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삶과 세계를 복원합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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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정보
    2014-07-31
  • 민중의 생각과 미래
      인간의 이성과 의식은 그 개인이 안에서부터 스스로 가지고 있으면서 끌어내는 것이지, 바깥의 조직이나 체제가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인류사에서 정치적 플롯을 보면 민중이 주인이 되었던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민중이 핵심이 되어 민중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그리고 민중의 생각에 의해서 정치가 이루어진 적이 없는 것입니다.   민중은 다만 일개 국가의 도구나 지배 계급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민중의 의식은 자발적으로 발로된 것이 아닙니다. 지배 계급 혹은 소수 엘리트 계층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그 지식과 의식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민중의 말은 민중의 말이 아니었고, 민중의 생각은 민중의 생각이 아닌 지배 계급의 그것이었습니다. 함석헌은 일찌감치 이를 깨닫고 “소수 사람이 지배하는 역사가 아니라 민중 자체가 결단하고 사는 세상”, 즉 ‘훌륭한 이들이 생각해 준대로 사는 세상이 되어선 안 된다’(함석헌, 함석헌전집 19, 영원한 뱃길, 한길사, 1985, 367쪽)고 설파합니다.   민중이 소수 엘리트와 지배 계급의 생각 ‘안에(in)·사이에(inter)’있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그들의 관심에 이끌려지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함께(with), 그들의 생각에 의해서(by), 그들의 생각 안에(in)에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민중은 민중과 함께, 민중에 의해서, 민중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between) 그들 안에 놓이게 됩니다(M. Roth, The Poetics of Resistance, Evanston, Illinois: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6, p. 53). 그래서 함석헌은 정치가들의 권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면서, “인류의 귀한 점이 생각하는 데 있는데 생각하는 게 참 어렵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민중의 생각은 민중 스스로 깨우친 생각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마저도 타자에게 지배된 것이고 그로 인해서 작동·조작된 것이라면 민중은 생각이 없는 존재입니다. 민중의 생각은 역사를 꿰뚫어 바로 볼 수 있는 주체적 의식이자 개별적 존재가 얻게 되는 각성의 원천입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존재론적 위치를 잃지 않고 늘 생생하게 그 자리를 탐색하고 확인하는 것이며, 미래로부터 앞당겨 오는 의식을 현재에 도래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것은 늘 오고 있고 도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타자의 의식에 자신의 생각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생각을 국가에만 한정시켜서도, 국가에 의해서 지배되어서도 안 됩니다. 함석헌이 적시하고 있는 것처럼, “‘나라’라는 것은 이해가 상반되는 단체들이 있어 세워진 것이지 국민들이 계약을 하거나 협력을 하기 위하여 된 것은 아니다... 애기가 자란 다음에는 부모나 선생이 간섭할 수 없게 된다”(함석헌, 앞의 책, 372쪽)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민중의 생각이 성숙해지고 민중의 주체의식이 강해질수록 국가(주의)가 그것을 침해하거나 간섭할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의 이성과 의식은 그 개인이 안에서부터 스스로 가지고 있으면서 끌어내는 것이지, 바깥의 조직이나 체제가 주입하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개인의 의식과 이성이 상충될 때, 집단의 이념이 서로 다를 때, 그것을 어떻게 하나로 묶어놓을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생겨난 것이 국가라는 최종산물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좀 더 외연이 확장된 것뿐이지, 나를 대표하거나 나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또 다른 개인의 생각과 충돌하는 ‘나’와 대립이 생기고 갈등이 발생할 때, 하나의 통합된 ‘나’로서 집단적인 ‘나’의 생각과 조화를 이루고 타협·양보할 수 있는 ‘나’이지, ‘나’의 생각이 말살되거나 사라지는 ‘나’가 아니기 때문에 국가라도 ‘나’의 생각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함석헌이 “인간은 ‘나’를 가져야 한다.”(함석헌, 위의 책, 371쪽)고 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는 소통하는 ‘나’, 대화하는 ‘나’이어야 합니다. “생각은 소통되는 데 있습니다... 개인 사이의 대화, 민족이 대화를 통해서 내 것 네 것보다 놓은 데로 나갈 수 있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369쪽)   소통과 대화를 통해서 더 높은 ‘나’로 나아가야 작은 ‘나’, 작은 ‘너’에서 ‘큰 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세계국가주의”입니다. “나는 세계국가주의자다... 온 세계가 한 나라가 되기 전에는 이 세계에는 전쟁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싸움이 그쳐야 평화가 온다.”(함석헌, 위의 책, 371쪽)   ▲ 앞으로는 전체가 생각하는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생각이 서로 다른 나와 맞서기(gegen)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민족이라는 것도 다른 민족과 맞선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민중이 참여하는 역사”(함석헌, 위의 책, 371쪽)로서 서로가 서로를 맞서는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온 세계가 하나가 되는 평화로운 나라, 평화로운 세계를 말합니다.   나의 경험은 곧 세계의 경험이고 세계의 경험은 나의 경험입니다. 나와 세계, 나의 민족과 세계국가가 서로 맞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은 나의 민족의 생각, 나의 말은 나의 민족의 말로서만 경험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국가적·세계민중적 경험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중요합니다.   “지금의 민중은 국가주의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를 지배해온 것은 민족사상이었지만 이것은 민족이 말한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의 지배자가 그렇게 말을 붙여온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68쪽) 민족의 이데올로기, 민족의 경계, 민족의 의식이 과연 민중의 것이었는가를 되짚어봐야 합니다. 그것이 지배자의 것이었다면 탈피해야 합니다. 지배 계급에 의해서 명명되고 규정된 것이 모아지고(legein) 말하여진 혹은 읽힌 것(legen, lesen)이 민족사상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함석헌이 지적하고 있듯이, “민중이란 민족이 다르다고 해서 적의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68쪽) 민중은 적의가 없습니다. 민중의 생각은 민족주의, 민족의 이념을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민중의 생각은 열려 있습니다. 민중이 읽고 민중이 모아(legein) 비은폐시키려고(un-concealment) 하는 것은 세계국가주의 혹은 세계민중주의입니다. 항상 관계를 생각하며 평화를 말하는(logos) 주체는 지배 계급이 아니라 민중입니다.   경계와 구분, 차별을 철폐하고 영원히 고착화되어 있는 적대감을 하나의 의식, 하나의 통일된 생각으로 품으려고 하는 것이 민중입니다. 더군다나 민중이 생각하는 것은 국가, 민족, 이념이 아니라 ‘인간성’입니다. “이 세상에 인류가 살아가는 것은... 인간 속에 있는 서로서로의 인간성이 자기를 능히 희생해서라도 서로서로 같이 살아가자 하는 인간성이지, 이것이 사회와 국가를 유지해가는 힘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68쪽)   민중의 공통된 인간이 상호성을 보장하고 각 사회와 국가를 유지합니다. 인간성이 담보되지 않은 국가는 폭력을 행사하게 되고 사이적 존재와 타자적 국가에 대한 호혜성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민중을 통해서 세계국가주의(세계민중주의)는 각 민중의 앞에 함께 서 있도록, 하나로 모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국가주의(세계민중주의)는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서로의 앞에 함께 서 있지 못할 것입니다.   그 희생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영적인 데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적인 데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점에 느낄 수 있는, 영적인 것에 갈 수 있는 것이 인간일 것입니다... 인류에게 지식이 있지만 지식만이 아니고 도덕적인 점 영적인 점이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에 접하는 그 점이 대화의 참 중요한 점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69쪽)   자신을 희생하여 세계국가주의를 만들어가려면 민중 각 개인이 철저하게 영적·도덕적·정신적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유연성, 즉 서로가 서로에게 고체적 부딪침을 방지하려면, 그래서 세계국가주의를 형성하려면, 영적·도덕적·정신적 존재에 토대를 두고 대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계국가주의를 위한 또 하나의 가능성은 개인의 생각이 전체 생각(전체주의와는 분명히 다른)이 되어야 합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에버하르트 윙엘(E. Jüngel)은 말합니다. “선이란 우리가 무조건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진리입니다. 선이란 다른 사람을 평준화하지 않는 것, 획일적으로 다른 삶을 배척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악이란 남과 함께 사는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J. Moltmann, 이신건 옮김, 나는 어떻게 변하였는가, 한들, 1998, 137쪽) 또한 함석헌은 “지금까지는 개인이 생각하는 역사였지만 이 앞으로는 전체가 생각하는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함석헌, 위의 책, 373쪽)고 말합니다.   개별적 존재의 사유만으로 세계국가주의가 될 수 있고, 세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은 부족합니다. ‘전체’가 ‘생각’해야 합니다. ‘전체’가 선을 지향해야, ‘전체’가 사고해야 하고 ‘전체’가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생각이 세계국가주의를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체’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입니다. 생각이 있고 전체가 있는 것이지 전체가 있고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 민중이 깨어나서 생각할 수 있다면 전체는 얼마든지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과 같이 국제적인 협력을 심각히 요구하는 시대는 없는 것 같다. 이 국제적인 협력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국가주의(Nationalism)이다. 앞에서 새 종교 새 국가관이 나와야 한다는 말은 민중의 역사, 민중의 종교, 즉 몇몇 사람들의, 지배 계급의, 독재자의 역사나 종교가 아닌 온 평민의 역사,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373쪽)   국가주의를 넘어야, 국가주의를 폭로해야(비은폐) 새 종교, 새 국가관, 즉 민중이 중심이 되는 종교, 민중이 중심이 되는 국가가 나올 수 있습니다. 지배 계급에 의존하지 않는 민중만이 초월자의 새로운 생각을 말할 수 있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민중의 소리만이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전언(message)을 말할 수 있습니다. 민중만이 국가라는 숙명적인 틀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가 모든 것(전체, One is All)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민중은 지배가 아니라 각 개인을 위한 주인으로 모이기 때문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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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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