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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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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2
  • 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 가지고 놀다보면 저절로 얻는 바가 있다!
    [타임즈코리아] 『철학과 비판(이종철, 도서출판 수류화개)』은 저자의 혜안이 넘치는 철학함(philosophieren)의 방식을 담은 성실한 결과물입니다. 저자는 삶의 일상에서 문제의식을 길어 올려 좋은 의식과 감각의 실천(bon sense)으로 나아갑니다. 비판(Kritik)은 모름지기 가르는 것, 곧 이성 자신이 이성의 가능성과 한계,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생각’을 그야말로 곱씹어 ‘생각하여’ 현실을 풀어가는 해석학적 통찰력은 그의 목적, 즉 에세이 철학을 잘 드러낸 듯합니다. 그는 놀이하는 장사꾼,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어린 아이처럼, 그러면서 점잖은 어른답게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essay)합니다.   글을 쓸 때는 그의 말대로 ‘진리의 순간’, 자신의 영혼과 만나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게다가 진리에의 용기(der Mut zur Wahrheit), 즉 어떤 사태에도 굴하지 않고 대면하고자 하는 저자의 올곧은 사유 실험과 현실 탐험은 철학적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저자가 임제 선사(臨濟 禪師)의 말 ‘살불살조’(殺佛殺祖)를 인용하면서 말하듯이, 내가 생각하는 것 외에는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반영일 것입니다. 오늘날 시민의 저조한 독서율과 글쓰기의 난조는 바로 매체에 매몰된 의식 때문입니다. 헤겔이 말한 ‘정신적 동물의 왕국’에 모여 엄지손가락으로 타자를 쳐가며 소통하고 정보를 검색하는 현대인에게 자기 생각, 주체의 생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일상인(das Man)에 대해 비판적인 사유를 독려하고, 편견을 반성하는 주체가 되는 것은 물론 사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도록 도와줍니다. 저자의 철학적 신념처럼 현실적이고 실천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권위에 익숙해진 일상인의 해방을 위해서 종래의 철학, 이론, 인물을 재해석하고 발전시키자고 제안합니다. 특히 저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제3세대 철학자 악셀 호네트(A. Honneth)의 인쟁투쟁이란 권리에 대한 쟁취임을 간취합니다. 인간의 자존심과 인격적 존엄과 관련되는 권리는 주격 ‘나’의 주체성을 자각하고 가치 인정에 따른 연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보편적 법칙, 즉 규정적 판단력(bestimmende Urteilskraft)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에세이 철학을 꾀하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요? 그리고 저자가 주장하는 현실문제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과 실천은 무엇일까요? 평자가 볼 때,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대상이나 사물을 무심코 공평하게 대하려면 무엇보다 내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쏠리지 않고 평정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말하는 ‘초연’[Gelassenheit, 평자주: 방기(放棄)]이란 이런 경지를 말할 수 있다. 이 개념은 ‘들어가기’(Sicheinlassen)와 ‘나가기’(Sichlosslassen)라는 양면성을 담고 있다. 전자는 ‘몰입’의 측면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거리두기’의 측면이라 할 수 있다. (…) 이것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실천적 거리’(phronesis)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들어가기와 나가기의 그 어느 지점에서 설정되는 균형적인 ‘중용’의 지혜가 그것이다”(376-377).   멀어지지도 않고 가까이 가지도 않는, 집착하지도 않고 무관심하지도 않는 그런 상태를 저자는《금강경》의 한 문장과 비교합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곧 마땅히 머무는 곳 없는 곳에서 마음을 내라는 말입니다. 하이데거의 초연이라는 개념이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로(M. Eckhart)부터 빌려온 것이라 시대착오적인 말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대의 철학적‧종교적 용어라고 치부하기 십상인 이 개념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물질과 기술과학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어 자신의 개별적 주체성이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글 속에는 자신의 마음이 녹아들기 마련입니다. 특히 에세이는 평소 저자의 생각이 오롯이 드러납니다. 독자에게 자신을 적나라하게 개방하기에 모험, 솔직함, 진정성, 그리고 사유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저자의 책에서는 법학을 전공한 후 다시 철학을 공부한 학자답게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편성과 특수성, 그리고 다시 개별성을 통한 종합으로 귀결되는 듯한 글쓰기는 그의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줍니다.   다시 “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 《중용》). 저자의 책을 가지고 놀아보니 얻은 바가 생겼습니다. 동일한 지평에서 볼 때, 이 책은 전문적인 철학함의 훈련을 하지 않은 독자에게도 철학적 사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진리에 대한 용기’가 생기도록 해 줄 이 책의 제목《철학과 비판》에서, 특히 ‘비판’(批判)에 주목할 것을 권합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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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30
  • 존재는 텅 빔(無; Leere, Nichts)이다
    [타임즈코리아] 하이데거나 노장철학을 논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사적 사유의 맥락을 해체한 인물이요, 노자와 장자는 공자와 같은 정형화된 논법을 타파한 동양철학자입니다. 굵직한 한 사람의 철학을 다 우려낸다는 것도 버거운 일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닌 이 둘을 조합한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철학자 윤병렬은 이 둘을 존재(Sein)와 도(道, Tao)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손쉽게 풀어 밝힙니다. 하이데거의 시원적 사유, 길(Weg), 침묵 언어, 무위,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 등의 유비점들을 찾아 그것을 현상학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흐름은 매끄럽습니다. 서양과 동양의 정신적 간격이 다소 멀어 보이지만,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단순한 비약이라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를 말하고, 도를 말하는 순간에 이미 존재도 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역작은 존재와 도가 결코 언어로서 규정될 수 없는 것임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르케(arche)를 규정하는 순간, 그것을 마치 다 안다고 하는 인식론적 오류에 빠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Nichts)가 단지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무가 그 자체로 물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먼저 주어져 있어야 합니다. 다만 저자는 인식론적 오만을 거두고 존재론적 겸허함의 삶을 살라고 권유하고 있는 듯합니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하게 한다”(sein-lassen)는 말이나 “도는 존재자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두 개의 언어가 번역불가능성의 근원어(Urwort)의 문제임을 깨우쳐 줍니다. 이는 존재나 도는 삶의 방식, 삶 그 자체로부터 개시해야 할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삶의 방식은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입니다.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이 대도시로 모여들고 깊이 성찰하는 삶이 점점 사라집니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의 노예가 되지 말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노자도 무위자연을 말합니다. 이는 작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퇴락한 존재인 일상인(das Man)으로 살거나 장자의 물(物)에 빠지지 않고 자연 그 자체, 혹은 세계의 근거인 존재의 목자로, 존재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존재는 말씀으로 인간에게 다가옵니다. 인간은 그 존재의 언어를 뒤따라 말하고 사유하고 응답할 뿐입니다. 존재의 말씀은 인간이 세계에 어떻게 도달해야 하는지, 세계에 길을 내줍니다. 길을 가야하고 도를 깨우쳐야 하는 인간이 존재의 빛에 의해서 살아야 하는 당위성은 존재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언어의 말 걸어옴은 우리가 어떤 경험(erfahren)을 하는 것인데, 이는 “어떤 길 위에서 걸어감을 통해 그 무엇에 다다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종국에는 다시 시원적인 말인 도, 그리고 “본래 길”(eigentlich Weg)에 이르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길을 내면서 움직이는 일입니다(Be-wëgen). 들길에서 외치는 단순하고 소박한 소리에 따라서 사는 삶,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자연, 무위자연의 소리에 따라서 사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고향을 상실했습니다. 소요유(逍遙遊)의 장자적 삶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존재물음(Seinsfrage)은 절실해집니다. 도에 대한 사유도 간절해집니다. 하이데거는 세계로 던져진 “너는 실존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세계에 대한 배려(Besorgen)와 이웃에 대한 실존적 심려(Fürsorge)로서 관계 맺음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이러한 실존적 삶의 방식은 존재의 근원에 가깝게 다가감을 요구합니다. 그 이정표를 하이데거의 존재와 노장철학의 도를 통해서 알아듣기 쉽게 비교, 분석한 이 책(『윤병렬, 하이데거와 도가의 철학, 서광사』, 2021)은 윤병렬 선생님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케 합니다.   존재 망각과 고향상실의 시대라 규정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혜안이 동양철학의 도에 대한 존재론적 삶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윤병렬 선생님의 노고와 역작에 깊이 감사할 뿐입니다.   평자가 감히 이 책의 학문적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이 주제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물론 민중도 이 책을 통해 저자의 해석학적 언어와 씨름을 해야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따라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민중들이 이 책을 읽고 생각을 모은다면(legein; logos) 하이데거와 도가철학이 예언자의 길을 찾아주는 친근한 동반자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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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9
  • 유물론도 인간의 이상세계를 지향합니다!
    [타임즈코리아] 철학을 좀 안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유물론이나 관념론 중 어느 하나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곤 합니다. 이렇게 철학적으로 유물론이다 관념론이다, 하는 해묵은 논쟁의 역사가 인간의 갈등과 전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세계(경제적 삶의 조건)에 기반을 둔 인간의 삶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현실보다도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면서 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관념론은 애초에 그 이상세계를 그리고 항상 사물적 인간이나 물질적 현실을 넘어서려고 하였습니다. 두 입장의 시작이 어디에 있건 간에 인간의 삶을 딱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철학적, 사상적 결이 무수히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란 원래 역사적 맥락이 만들어 낸 존재입니다. 어떤 삶의 세계에 처해 있었느냐가 그의 철학을 형성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플레하노프(Georgi Plechanov, 1856-1918)라는 맑스주의 철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철학사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은 서구 유럽철학, 영미철학, 동양철학 이외의 이른바 러시아 철학이라는 변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간에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 이념적으로 러시아나 유물론의 철학을 다룬다는 것은 거의 금기시 되어 있었던 것도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철학자인 플레하노프의 삶과 생애를 예술철학적 입장에서 정리하고 풀이한 한국의 철학자가 고(故) 강대석 교수입니다. 평상시 유물론적 입장에서 철학을 해왔던 강대석 교수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 인간관과 종교론에 대해서도 해밝은 분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난 2월에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평자와 일면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학문적 관심을 갖고 멀리서 사숙을 하던 차에 그분의 궂긴 소식을 듣고는 놀람을 금치 못했습니다. 불현듯 그분의 저서에 대한 서평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플레하노프는 맑스나 레닌과도 교류를 했던 철학자입니다. 19세기의 역사가 그렇듯이 세계의 이념적 지형은 혼란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지리적 다툼 또한 매우 잦았던 때였습니다.   급격한 산업사회의 도래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갈등이 심화되고 그로인한 노동자 탄압과 인권은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플레하노프는 관념론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사회적 현실과 조건을 외면하고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관념론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몰락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플레하노프는 인문학교를 졸업하고 보병학교에 진학을 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곧 자퇴를 합니다. 그 후 페테르부크르의 광산전문학교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렇듯 그의 학력을 보면 예술철학자로서 어떤 특별한 면모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를 보면 철학자란 당대의 시대가 만들어 내는 듯합니다. 잘 알다시피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차르 전체주의 정치로 농민의 경제 해방이 요원해지게 됩니다.   이 시기 플레하노프는 망명과 도피 생활을 계속하면서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읽고, 『공산당선언』을 러시아로 번역하는 작업도 하였습니다. 빵보다 책을 더 귀중하게 생각했던 그는 “혁명적 이념 없이는 참된 의미의 혁명 노동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나키스트 바쿠닌이나 수정 맑스주의자 베른슈타인의 견해와 달리 하면서 그들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예술적 소양도 풍부했습니다.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 바그너의 니벨룽겐을 즐겨들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또한 아나키즘, 생철학자 베르그송의 관념론, 톨스토이의 종교적 휴머니즘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사생관에서는 매우 자연적이고 소박하였습니다. 이는 죽음이란 자연과 하나되는 것이다, 라는 견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플레하노프의 철학적 토대는 유물론이었습니다. “악인을 만드는 것은 본성이 아니라 사회제도다”라는 대명제 하에 맑스주의는 온전한 세계관이요 철학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그의 필생의 과제는 예술의 해석에 있었습니다. 예술(언어) 속에 감정, 사상이 들어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시대적 미감”이 무엇인가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사회적 조건, 즉 생산력과 생산방식에 따라 사람의 위치, 심리가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예술은 사회생활과 삶의 반영이라는 철학적 입장을 고수하기에 이릅니다. “예술은 사회적 인간의 관심이 되고 행동원인이 되는 모든 것을 묘사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말한 것처럼 예술이란 “지상에서 천국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입장과 맥을 같이 합니다.    특히 그는 예술 작품의 이념은 사회학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설파함으로써 예술은 인간의식의 발전, 사회질서의 개선에 기여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무용론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예술철학은 “예술에는 이념(자유, 평등, 민주)이 없으면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의 표현이나 예술은 인류를 위한 봉사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덕이란 타인의 행복을 통해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노동자 자신의 시, 노래, 문학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감성의 표현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오늘날의 오해와는 달리, “공산주의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임을 입증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플레하노프의 유물론적 미학의 핵심인 주관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조건(현실)이라는 데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가 이념이 빠진 예술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한 것은 예술의 기능과 목적은 인간과 사회의 발전, 그리고 이 땅에서 더 좋은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물론이든 관념론이든 이들의 철학은 지금의 세계가 아닌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분투한 실천적 이론과 이론적 실천의 조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진부한 이념의 논쟁보다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위해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화해를 통해 새로운 유토피아, 곧 이상세계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현실에서 초월로, 초월에서 현실로 그 방향이 어디든 최종목적은 인간의 삶의 조건의 해방과 인간의 의식의 개혁 두 가지가 정합적으로 맞물리는 삶의 세계가 아닐까요? 플레하노프의 경우 그것을 예술이라는 영역이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플레하노프 생애와 예술철학(강대석 지음, 사람일보)』 은 고 강대석 교수의 유작이라면 유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의 몸은 다시 물질로 돌아가 관념의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자연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그의 정신세계와 감성세계를 잘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좋은 저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원광디지털대학교 원불교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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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이 세계가 ‘호의적인 장소’(oikeios topos)가 될 수 있을까?
    [타임즈코리아] 자본주의는 새로운 세계 생태입니다. 자본주의는 자본-권력-자연을 결합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합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저렴한 자연을 구축하려 합니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시대에 저렴한 자연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요? 사회(인간 자연, 비자연 인간)와 자연(비인간 자연)에 대하여 자본은 자연을 전유(착취)하고 시간에 의한 공간의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후가 급변함에 따라서 권력구조와 생산구조 덩달아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본은 저렴한 자연을 끊임없이 탐색하여 상품생산의 축적·혁신하기 위해 비인간적 자연을 도구화하였습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자연파괴는 급증하면서 대참사를 초래하고 비자연인 인간을 닦달하여 급기야 슈퍼잡초 같은 복수를 낳았습니다.   모름지기 자본주의는 자연 전체를 관통합니다. 위가 아닌 중심부의 관통(돌파)이 문제입니다. 자본주의는 단 한 번도 유한한 자연에 대해 경비를 지불한 적이 없는 데도 말입니다. 자본주의의 축적 체계는 무상 자연 일과 유산 자본의 일로 이루어져 결국 ‘고갈의 지리학’이라는 기이한 지형을 만들어냅니다. 자본주의는 18세기 중엽부터 위기를 맞이하면서 성장의 한계와 동시에 자연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16세기 석탄 사용량의 증가, 19세기의 저렴한 자연의 확보를 통해서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철도화는 시간에 의한 공간 전유를 가능하게 했고 국가 부양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인류가 생명 그물의 종이라 한들 산업화에 따른 기계-자원의 메커니즘의 표준화에 종속되었데, 이는 지식(과학)-권력-자연-지배라는 등식의 자연스런 결과였습니다.   시계를 통한 시간의 통제는 자연의 시간을 자본의 시간에 근접하도록 유도하였고, 저렴한 식량은 더 적은 평균노동시간으로 더 많은 칼로리가 생산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녹색혁명은 실상 잡종 옥수수의 출현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무상 일, 에너지 전유, 벌집군집붕괴현상은 생물권의 특성화 문제를 양산함에 따라 사회주의적 세계 생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더불어 새로운 존재론적 정치, 곧 식량주권, 기후정의, 탈성장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는 기후변화로 저렴한 자연은 끝났다는 비관적 선언에 의한 반성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필자는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금융화로의 전횡과 심화가 불가피한 후폭풍을 지연시키는 강력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것인가?” 자본주의의 생존 가능성을 바라는 의지는 아닙니다. 현재의 자본주의가 자연 생태까지 전유한 횡포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암시입니다.   이 책은 자연에 대한 안팎의 논의를 생태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조명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독자의 인내심 있는 해독 능력이 요구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Jason W. Moor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은 노동과 자연 등의 관계를 충심어린 마음으로 실증적으로 분석했다는 데 이 책의 높은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번역자의 성실하고도 정확한 번역이 눈에 띤다는 것도 필자의 논지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맑스의 《자본》이 “노동자의 성서(Bibel)”인 것처럼, 이 책은 이미 자본화된 자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오롯한 자연과 민중의 반성적 삶을 위한 훌륭한 연구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리스어의 오이케이오스(oikeios)는 ‘가까운’, ‘친척’, ‘자신에게 속하는’, ‘고유한’, ‘적절한’ 등의 긍정적 개념들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세계가 인간이 살만한 곳, 모든 생명적 존재자에게 살가운 곳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더군다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자본주의가 이미 새로운 경제적 지평을 확장(장악)했다는 통계가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저렴한 자연이 더 가난해지기 전에 민중이 생명과 생명,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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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17

실시간 종합정보 기사

  • 학교폭력문제의 근본대책은 무엇일까?
    교육현장에서 폭력이 난무한다는 것은 교육시스템 자체에 심각한 문제 ▲ 각자가 잘하는 것을 찾아서 발전 시켜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극대화해서 아름답게 조화하여 나누고 베푸는 삶을 가르쳐야 한다.  학교폭력이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가 되고 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근래에 갑자기 중심적인 문제로 떠오르게 된 것은 학교폭력 피해자들이 자살과 같은 극단적 방법으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면서부터이다. 우리 사회에는 문제를 순리적으로 제기해서는 귀담아 듣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뭔가 특별하거나 극단적 방법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우세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과히 틀리지 않음이 학교폭력 문제에서도 입증된 것 같다. 자살과 같은 극단적 방법으로 말을 해야만 이 사회는 전혀 몰랐다는 듯이 갑자기 온 나라가 소동을 치고 하룻밤 사이에 무슨 대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또 그러다가도 빠르면 며칠, 길면 몇 달 안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잊어버리고 모든 것은 원상복귀 되고 만다. 그런대도 이번의 학교폭력 문제에 관한 언론의 관심은 제법 오래가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고, 뭔가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해결책이 나오게 되길 기대도 하게 된다. 그러나 학교폭력이 계속 언론의 초점이 되는 것은 그간의 대책발표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기기 때문에 꼭 긍정적인 것만도 아니다. 학교폭력의 문제가 몇몇 고립된 공간에서 일어난 우발적 사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교육현장에서 장기간에 걸쳐 일반화된 현상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급조된 몇 가지 대책들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닐 것이다.최근에 모 방송사 뉴스에서 다뤄진 학교폭력실태에 관해서 아나운서가 도저히 나이어린 청소년들의 짓이라고 믿겨지지 않는다고 언급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 아나운서의 코멘트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악하고 잔인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청소년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덜 악하고 잔인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안타깝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본질자체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공격성과 폭력성은 인간에 내재해 있는 잠재력이다. 인간은 이 부정적 잠재력이 파괴적으로 발현되지 않도록 사회적 규범을 만들어 다스려 왔다. 무엇보다 교육을 통한 순화가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 교육현장에서 폭력이 난무한다는 것은 교육시스템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의 학교는 폭력적 충동을 절제하고 타인과 더불어 공존하는 법을 익혀주지 못해왔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오히려 폭력적 충동을 강화시키고 파괴적으로 발산하도록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아이들의 인성이 제도적 학교교육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오늘의 사회는 매우 복잡한 다중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 만큼 인격 형성에 필요한 통합적 공동체가 결여된 사회라는 의미이기도하다. 과거에 아이들은 가정, 친족과 지역 공동체, 학교로 연결되는 유기적 공동체 안에서 그 일원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아이들은 그러한 유기적 공동체를 갖지 못하고 파편적 개인으로 무한경쟁 속에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다.가정과 학교 그리고 그 사이의 이런저런 틈새들이 모두 개인적 생존과 그를 위한 치열한 경쟁을 위해서만 작동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여기에는 진정한 협력과 공존의 미덕이 존재하기 어렵다. 나 외의 모든 사람들은 나의 적이며 적은 파괴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오늘의 학교 그리고 가정은 이 같은 냉혹한 개인주의를 부추기면서 그것을 교육이란 말로 정당화시키고 있지 않은가? 어떤 점에서 우리 사회는 해방이후 계속 이런 식으로 달려 왔는지 모르지만 그 정도가 극도로 심해져 이제 그 한계에 봉착하게 된 것이 아닐까? 문제가 그런 것이라면 근본문제를 외면한 급조된 대책이 진정한 대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삶의 가치관이 변하고 그에 따라 교육의 이념과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학교폭력 문제는 근절될 수 없을 것이다. 학교 폭력의 본질적 해결은 인간존중, 나누고 베푸는 삶 가르쳐야이제 무한 경쟁이라는 난폭한 버스를 멈추게 해야 한다. 학교가 취업을 위한 입시 학원화 되어가고 있다. 심지어 학문적 진리를 탐구하고 인생의 의미를 논해야 할 대학마저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학교 폭력의 본질적 해결은 인간존중이다. 이것은 사랑에서 출발한다. 성경의 가르침은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교육이 나만의 부귀영화를 목표로 미친 듯이 질주하게 하는 난폭운전을 멈추어야 한다. 이래야 사교육의 부작용도 사라진다. 양극화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교육은 사랑을 가르치고 나눔과 배려의 실천으로 서로를 잘살게 하는 법을 터득하게 해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평가 시스템이 이런 기준에 걸맞게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학입시며, 취업도 이렇게 변해야한다. 이런 제안을 하면 혹자는 꼭 들고 나오는 소리가 있다. ‘학력의 저하와 무한 경쟁에서의 도태’라는 이슈를 들고 나온다. 하지만 인간은 모든 것을 잘하게 창조되지도 않았고, 인류의 발전과 필요에 국어, 영어, 수학, 과학의 종합적 두뇌자만이 요구되지도 않는다.  굳이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 교수의 다중지능이론(Multiple Intelligences Theory)을 논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손가락의 지문하나도  같은 사람이 없다. 이만큼 인류는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된다는 것이 창조자의 뜻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현대교육의 창시자요, 근대교육의 아버지라 불리는 코메니우스(Johann Amos Comenius)의 주장을 보라.그는 ‘인생의 목적은 신의 피조물인 모든 존재와 평화를 누림’에 있다는 것을 강조 하였다. 교육목적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연적 본성과 소질의 개발’이며 생득적인 인간의 이성적, 도덕적, 종교적 요소의 가능성을 조화롭게 실현하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성, 덕성, 영성의 조화로운 육성을 강조 한 것이다. 그가 주장한 교육의 기본원리는 인간 내면에 잠재한 본능과 소질을 자연의 원리에 따라 발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그의 연구에 대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생각해야 한다. 각자가 잘하는 것을 찾아서 발전 시켜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극대화해서 아름답게 조화하여 나누고 베푸는 삶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착한 교육으로의 과감한 변화를 위한 국민적 공감, 그에 따른 정책적 의지를 촉구한다. 고 장기려 박사의 삶을 보라. 최고의 의술이라는 전문성을 지녔으면서도 평생 남을 배려했던 따뜻한 의사로서의 그의 삶을 보라.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길러내야 한다.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키가 큰 자도, 키가 작은 작도,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도 단지 다름이지 그것이 차이나 차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부에서나 곳곳에서 내놓는 학교폭력의 해법은 다 전문적인 대책이라고는 한다. 그러나 그 태생적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성경의 이 본질적 해법을 시대 가치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시스템과 정책으로의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      한기동 목사고잔제일나사렛교회 담임목사, 본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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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4-01
  •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를 바라보며 떠오르는 생각들
    핵으로 인한 위험성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대책과 결단들이 필요 ▲ 지금 핵안보정상회의는 바로 인류 전체가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도 핵으로 인해서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대책과 결단들이 필요한 것이다.  서울에서 개최되고 있는 핵안보정상회의는 총 53개국에서 참가하였다. 핵테러에 대한 국가 안보를 다지는 것을 골자로 진행되고 있는 이번 회의는 다만 핵과 관련된 사안만 처리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필자는 핵안보를 위해서 각국의 정상들이 모인 자리가 다수의 선진국의 결속을 확인하고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 그치지 않았으면 한다. 더욱이 핵 안보(security)라고는 하지만 핵의 안전성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자국에서 운영 중인 핵의 안전성 자체가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초래되는 핵 안보에 대한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고 사전에 예방하자는 논의는 회의의 핵심에서 벗어나는 얘기일 수도 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고 그 복구와 피해는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핵 안보라는 것을 단순히 자국의 핵시설을 폭파하고 핵테러를 불사하는 익명의 불순한 자들에 대한 경계와 정보나 주고받는 자리로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회의에서 원자력 발전에 대한 심도 있는 내용들이 다루어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핵에너지로 인한 산업 발달이나 원자력을 통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선진국으로 인해서 인접 다수 국가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 상호 안전성에 대한 논의들도 더불어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의 기억은 과거의 정보를 현재에 보존하여 그 흐름을 통해 미래를 예견하고, 현재의 경험을 통하여 미래의 기억까지도 가능하게 만든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기억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현재의 우리 삶의 가능성을 예측하게 만드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다시 말해서 과거의 기억은 현재와 미래에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점치게 만드는 가능한 위기, 위험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핵 자체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러한 반성과 성찰이 없이 진행되는 회의라면 이번 핵안보정상회의는 근본적으로 올바른 방향성을 잡고 논의되리라는 것을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함석헌은 “세계가 앓고 있다. 유마(維摩)는 중생의 병을 앓았다지만, 우리야말로 세계의 죽을병을 앓아야 한다. 앓는 것이 아는 일이요, 알면 살아날 것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역사와 민족 9」』, 한길사, 1983, 284쪽)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우리 시대는 지금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문제는 그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느냐 하는 사실 뿐이다. 만일 알고 있다면 처방만 잘 내리면 될 것이다. 그러면 병도 고치고 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앓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도 인류가 살아날 확률이 많을 것인데,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으면서 각국이 경제적 가치만 생각하고 여전히 핵을 고집하고 있다면 살아날 가망성이 줄어드는 것이리라.지금 핵안보정상회의는 바로 인류 전체가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도 핵으로 인해서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대책과 결단들이 필요한 것이다. 인류 전체가 병을 앓고 있고, 앞으로 그보다 더 심각한 병에 걸릴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핵을 포기하거나 대안 에너지를 개발하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어떻게 인류 전체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겠는가. 함석헌은 거듭해서 말하고 있다. “곡성직상간운소(哭聲直上干雲霄)라, 씨알의 부르짖는 소리는 사뭇 하늘을 뚫고 올라간다... 오늘은 그보다 더 악독한 것들이 지구를 나사로 조이고 허공을 독기로 덮고 대양에 독약을 흘려 넣어 생명의 씨를 온통 없애버리려고 하고 있다. 누가 이것을 우주에 외치며 한 삶의 주인에게 호소할 수 있을까?”(함석헌, 『함석헌전집 「역사와 민족 9」』, 한길사, 1983, 285쪽) 핵안보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지금,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죽어간 이들과 고통당하고 있는 이들의 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과거에 벌어진 생명 현상에 대한 아수라장은 현재에 기억으로 보존될 뿐만 아니라 상상과 가상의 사건으로 우리 앞에 늘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정확한 사건과 날짜가 각인된 핵의 역사요, 인류 죽음의 역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말한다. “세계 장래의 운명은 생각하는 씨알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렇다. 생각하는 씨알이다. 생각밖에 못하는 것이 씨알이요, 생각해야만 씨알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역사와 민족 9」』, 한길사, 1983, 285쪽) 핵안보정상회의라고 해서 핵의 문제는 이른바 국가의 수장들에게 맡겨 놓을 문제는 아닌 것이다. 이제 씨알의 기억 속에 각인된 사건들은 곧 우리의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자각과 함께 핵의 안전성에 대한 회의를 품고 세계의 씨알로서 세계의 운명과 세계의 생명 현상의 지속을 위해서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한 때라고 여겨진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본지 편집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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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3-30
  • 마을은 평화요, 자연은 민주주의다!
    마을이나 환경은 이익과는 관련이 없다. 다만 그것들은 살아야 하고 살아줘야 하는 관계 속에 있는 것들이다. ▲ 마을이란 공동체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집단의 이익과 상관없이, 혹은 그 이익이 상충된다 하더라도 대화하고 조율하면서 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마을이란 공동체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집단의 이익과 상관없이, 혹은 그 이익이 상충된다 하더라도 대화하고 조율하면서 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런 공동체의 맹점은 어느 특정 개인의 이익을 앞세워서 갈등을 일으킬 때는 존속하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더군다나 그 이익이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 얼마든지 자체의 의사소통으로 건전한 논의가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사심어린 마음이 외부의 조건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면 그 마음은 이기심의 발로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 여기서 외부의 조건이라 하면 국가, 정치, 경제, 전쟁, 테러 등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함석헌은 ‘국가주의를 청산하지 않으면 인류의 구원이 없다. 나라 때문에 살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세계사에 있어 가장 큰 우상은 지배주의의 권력 국가”라고 비판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인간의 자유를 저해하는 체제가 설령 국가라 하더라도 거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하는 일이라면, 혹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인간 개개인이 추구해야 하는 권리와 자유는 뒷전으로 해도 된다는 것인가. 함석헌은 그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지배적인 권력을 내세워 국가를 통해서 국민의 자유를 억압한다면 더 이상 국가는 소용이 없다는 논리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 권리, 살 자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타자의 살 권리와 살 자유를 빼앗아 가면서까지 권리와 자유를 쟁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느 누구의 땅이든 그 땅을 사사로이 점유하겠다는 것에는 타당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 명분이 행여 자신의 사적 관심과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삶의 권리와 자유를 누리는 것과는 상반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이나 환경은 이익과는 관련이 없다. 다만 그것들은 살아야 하고 살아줘야 하는 관계 속에 있는 것들이다. 초점을 보다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국익이 되는 어떤 것이라도-전쟁, 무기 수입과 수출, 평화를 가장한 일체의 폭력과 행위와 대처 등-인간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행복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미래는 현재에서 배태되는 시간의 예견과 뒤 미룸이다. 현재의 평화가 담보되지 않은 상황은 미래의 평화도 요원할 수밖에 없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지금의 시간성이 서로 연대하고 화합하지 않는 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설득력을 상실한다. 사람을 위한 민주주의와 평등도 필요하지만 자연을 배려하고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적 사고도 반드시 필요하다.  설득력을 상실한 인간의 장소성은 실존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신뢰는 설 자리를 찾아 헤맨다. 바닥을 뒹굴고 사람과 사람의 몸짓이 칼이 되고 도끼가 될 때 상처는 깊어가기만 한다. 무엇을 위한 삶-자리다툼과 삶-자리 양보여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의 깊이를 뒤로 한 채 오직 이익이 상충되는 지점에서 칼날을 세우고 있을 뿐이다. 더는 물러설 수 없는 경계에서 문득 살아야 할 것과 살려내야 할 것과 살아주어야 할 것들을 생각해보면 안 되는 것일까? 내가 아닌 타자가, 인간이 아닌 자연이, 서슬이 시퍼런 무기가 아닌 우주를 떠올린다면 안 되는 것일까? 지금 강정마을의 사태는 바로 제주지역공동체라는 특정의 장소에 군사시설이 들어온다는 것에 대한 대립과 반목으로 비춰지지만 실상은 군사시설만이 아니라 아시아 지역 공동체의 평화와 제주지역 개인의 자유와도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에 보다 더 예민할 수밖에 없다.  기지건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다른 전략과 장치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시민들은 주거라는 장소의 평화를 박탈당한다는 악감정이 너무 강하게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이를 해소하고 소통, 설득하지 않고서는 문제 해결은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강정마을이 처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지금 당장 생각해봐야 할 것들이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본지 편집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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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3-21
  • 다문화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
    다양성 속에 일치‘나’라는 단독자로서의 욕심과 편리가 아니라타자인 ‘너’와의 관계를 통해 ‘나’라는 주체를 인식 ▲ 분리와 대립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조화와 화합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대한민국은 장기 체류 외국인들의 등록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는 시대에 도달했다. 다문화사회라는 물결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과 분리와 대립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조화와 화합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모두가 어울려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아가야 하는 일들을 연구하고 실천해야 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외국인들을 만나게 된다. 공단 지역에는 일자리를 찾아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농어촌에는 결혼 이주 여성들이 대다수다. 이들의 삶은 경제적 육체적인 어려움만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살던 나라와 부모형제에게서 떨어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달프고 힘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주어지는 차별과 불평등적 여건들은 이들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것이다. 행여 이들이 우리의 부족한 노동력이나 결혼 상대자를 채우는 사람들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구상에 그 누구라도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종 차별적 우월주의는 죄악이다. 남성과 여성은 물론 남녀노소 장애인과 비장애인, 동양인과 서양인으로 인한 그 어떤 장벽이나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된다.  100만 명이 넘어서고 있는 국내 체류 외국인의 이주배경도 다양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한국사회 적응을 위한 정책적 지원은 물론 국민적 관심과 배려가 절실히 요구 되고 있다. 이에 대한 정책은 크게 동화주의와 다문화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동화주의 정책은 기존의 주류 사회에 유입 된 비주류 문화를 주류 문화 속으로 녹아들게 한다는 것이다. 비주류들은 주류의 문화와 가치며 사회질서, 언어 등을 받아들여 그 속에 융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주류인 소수집단이 주류 가운데로 녹아든다는 의미에서 용광로(melting pot)정책이라고도 한다.  다문화주의 정책은 비주류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다양한 문화와 가치를 인정하고 그들과 교류하고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비주류들을 인위적으로 융해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갈등과 충돌을 막고 다양성을 통한 발전을 이루어 가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 그릇에 여러 가지 야채를 뒤섞어 놓는다는 의미에서 샐러드 볼(salad ball)정책이라는 말도 한다. 여기에서는 비주류 소수 문화가 다수의 주류문화에 흡수되어 융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공존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이분법적으로 어느 것이 좋은 지를 선택하게 하려는 발상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사람의 생각으로 초래 된 것은 무엇이든 결코 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Different, But Equal(다르지만, 같다)’, 그리고 ‘다양성 속에 일치’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다름을 차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름을 차이라고 여긴 자들에 의해 계급이 만들어지고 지배와 피지배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런 몹쓸 유물은 이제 버려야 한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진정한 의미의 주체는 타인에 대해 열려 있고 타인을 위해 고통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나’라는 단독자로서의 욕심과 편리가 아니라 타자인 ‘너’와의 관계를 통해 ‘나’라는 주체를 인식하라는 것이다. 이럴 때 비로소 나와 다른 타자를 수용하고 거기에 나를 투여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열린 사유가 펼쳐지게 된다는 것이다.  대화는 상대를 전제로 한다. 대화가 가능하려면 상호적이어야 한다. 상호적 수용은 ‘나’로 출발하는 자기부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이는 단절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사회적 갈등을 풀어가려면 타인에 대해 열려 있고 타인을 위해서 고통도 받을 수 있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문화 시대의 해법을 찾으려면 ‘동화주의냐?’ ‘다문화주의냐?’ 이런 차원의 답답한 도그마(dogma)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프랑스, 영국, 독일에서는 갈등, 테러 등으로 인해 다문화주의에 대한 실패를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동화주의가 답이 될 수 있는가? 이 역시 다소의 차이는 있어도 대립에서 벗어 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들은 다문화 정책의 반면교사가 되어주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타자와 다름에 대한 새로운 사유가 필요하다. “진리는 만유인력의 법칙이 아니라 만유인력에도 불구하고 새가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는 것”이라는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말이 있다. 어떤 이론이나 정책이며 제도를 초월하는 상생적 발상과 그 실행이 필요하다. 우리는 한국 사회가 은연중 가지고 있는 다문화적 편견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피부색에 대한 배타적 자세, 동남아인들이나 흑인들에 대한 존중감의 결여가 혹여라도 자리하고 있다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라 일등주의, 외모 지상주의, 성적 지상주의 등과 같이 단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생각하는 편견의 잣대를 버려야 한다. 창조의 섭리는 다양성이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의 지문 하나가 같은 사람이 없다. 그러나 감정과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일치를 가지고 있다. 그 안에는 분명 동·식물과는 다른 사랑과 배려, 나눔과 포용을 할 수 있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해법을 논함에 있어 이론이나 법칙아래 묶일 수 없는 이유이다.  정치적 논리나 이해타산에 따라 내놓게 되는 해법이 해결의 길이 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태생적 한계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럼 그들을 배려하고 보살펴서 외로움이나 상처를 달래주며 잘살게 해보자는 온정주의를 말하자는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이런 저런 이론을 더하고 빼고 나누고 곱하여 생성한 융합이론이나 정책을 대안으로 삼자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서 있는 것은 수많은 다양성이 하나의 흐름 속에 조화를 이룬 것   ▲ 다문화 가족은 정책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존재가치를 확인 받는 ‘너’요, ‘우리’라는 생명력을 가질 때 가장 복 되고 아름다운 해법으로 열매 맺게 될 것이다.  인류문명의 도도한 흐름 속에 여러 모양이 하나로 어울려 큰 물줄기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몸속에 각 장기들을 보자. 각각의 고유한 기능을 변함없이 가지고 제 기능을 발휘하지만 한 몸을 이루는데 아무런 충돌도 없다. 서로의 성공을 돕는 ‘너와 더불어 나’를 하나로 인식하여 살기 때문이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계절의 흐름에 따라,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순환처럼 소리 없이 발하는 아름다운 함성 가운데, 함께 생명력을 꽃피우는 시류를 형성하자는 것이다. 지나친 감성주의적 발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나 사람의 삶은 차가운 기계적 논리가 아니라 따뜻한 사랑의 노래가 아니던가?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의 저서 <자연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The sense of Wonder)>를 보면 저자와 4살짜리 어린아이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그 어린아이에게 억지로 자연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자연을 마주대할 때의 경탄의 감정들이 그 어린아이의 가슴 속에 자라게 하려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또 다른 저서인 <침묵의 봄(Silent Spring)>은 환경에 대한 인류의 시야와 변화를 바꾼 책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그녀의 문장들은 강압적이거나 저돌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환경과 자연에 대한 반성적 운동을 불러일으키며 인류의 사고와 시선을 바꾸어놓고 있지 않는가? 환경을 이야기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접근적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을 제도로 통제하겠다는 오만을 버려야 한다. 피부는 달라도 고운 핏줄을 타고 흐르는 사랑의 울림과 생명의 소리를 들어보자는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의 다문화정책이 이런 저런 논쟁 속에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된다. 첫째, 이념적 잣대가 아니라, 참신한 아이디어들이 담긴 올곧은 기준이 필요하다. 둘째, 여기저기로 흩어진 정책이나 사업들을 종합적으로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 셋째, 이벤트나 전시성이 아닌, 지속적인 관심 가운데 생애 연속적 차원에서 실시되어야 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사랑이요, 나눔이다. 성경의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사마리아인(The Good Samaritan)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회학에서는 어떤 형편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어려움이나 고난에 처한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을 ‘선한사마리아인’이라고 일컫는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 나라에서 ‘선한사마리아인의 법’이 속속 제정되고 있기도 하다. 왜 성경은 이런 해법을 제시했을까?  역사의 흐름을 볼 때, 우리도 어제는 강도 만난 이웃이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마땅히 ‘선한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동화주의든, 다문화주의든 그 방법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 안에 들어 있는 진실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단 다문화 시대뿐만이 아니라, 언제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할지라도 사랑의 의도가 그 출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류가 스스로 인간 창조에 대한 거룩한 선포를 엄숙하게 수용할 때, 이웃 사랑은 너무나 귀하고 당연한 것이 되며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문화가족은 정책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존재가치를 확인 받는 ‘너’요, ‘우리’라는 생명력을 가질 때 가장 복 되고 아름다운 해법으로 열매 맺게 될 것이다. 박요섭본지 대표/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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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3-18
  • 남의 성공을 도와 내 성공, 우리의 성공을 이루자!
    나만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네가 있음에 내가 있고, 내가 있음에 네가 있다”는 세상 4. 11 총선을 앞두고 있다. 여야가 공천을 마무리하고 있다. 자기당의 공천에서도 불협화음이 있고 탈당도 불사하는 일들이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선거가 돌입되면 총력전이 펼쳐질 것이다. 선거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해 온 흑색선전, 비방, 허위사실 유포 같은 일들이 이 번 선거에서만큼은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이런 바람대로 현실화되리라는 것에는 쉽게 동의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4월 12일 아침에는 당선자와 낙선자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당선자와 낙선자는 있겠지만 그것이 승자와 패자로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승자와 패자라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하고 있다. 그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 사실 승자와 패자라는 말은 전쟁에서나 쓰일 수 있는 말이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저학년의 시험에 ‘운동경기의 목적은 오직 승자와 패자를 가르기 위한 것이다.’이런 보기가 나왔다면 과연 여기에 ‘맞다’는 표시를 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은 가르치는 내용과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배움과 실천에서의 괴리를 모르는 사이에 몸에 익히게 되는 것이다. 순수했던 그들의 마음이 멍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점점 더 순수성을 잃어가게 된다. 이런 것이 자정능력마저 상실하게 되면 권모술수를 자행하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지난 달 22일에 우리나라 올림픽 축구 대표 팀과 오만(Oman) 팀 사이에 경기가 있었다. 오만(Oman) 팀이 질 것 같은 분위기가 되자 운동장으로 물병이 날라들고 심지어 우리 대표 팀의 한 선수는 폭죽의 파편에 맞아 쓰러지기도 했다. 과연 이것이 올림픽 정신인가? TV에서 아이들과 올림픽 경기를 시청하다가 민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중계자들이 전쟁을 방불케 하는 과격한 군사용어를 서슴지 않고 남발한다는 것이다. 근대 올림픽 경기의 창시자요, 교육자였던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이 대회를 통해 여러 나라 청년들을 하나 되게 함으로써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도록 하겠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작금의 올림픽이 이런 정신을 더 발전 시켜나가고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있겠는가?  선거는 지도자를 뽑는 축제의 장이다. 그렇다면 상대 후보라도 잘하는 것이 있다면 박수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아름답고 훌륭한 리더십, 우리의 복 된 미래를 위해 자신이 출마한 명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면 나보다 더 훌륭한 지도자가 있음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그런데 얄팍한 우월감에 도취되어 우쭐거리는 마음에서 나선 것이라면 자신보다 나은 사람의 꼴은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결국 그 사람의 태도에서 그 의도가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우월감에서 나선 사람이 당선 된다면 그것은 군림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심하면 지배와 피지배적 발상을 가질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무슨 봉사와 섬김이 나오겠는가? 누구나 다 출마의 변은 봉사와 섬김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성실과 실천을 믿어달라고 한다. 지난 1월 20일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18대 국회의원들 공약에 대한 실천의 분석 결과를 발표하였다. 공석 4명을 제외한 241명 가운데 응답한 국회의원 197명의 4,516개 공약에서 완료된 것은 3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65%는 사실상 어렵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여러 변수들도 있을 테니, 이해하자고 하더라도 65%와 35%가 바뀌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지울 길이 없다.  이 번 선거만큼은 다시 한 번 믿고 싶다. 불신은 또 다른 불신을 초래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것을 왜곡 된 시선이라고만 몰아붙이기에는 불신을 초래하기에 자명한 사실들이 너무 많이 있어왔다는 것이다. 굳이 늑대와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불신이 이어지면 허무주의를 양산하게 된다.  이제 다시 한 번 새롭게 나가기위하여 또 한 번의 힘을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보다 못한 퇴보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나만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수많은 금은보화와 먹을 것이 지천에 널린 곳이라도 무인도에서 혼자의 삶이라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네가 있음에 내가 있고, 내가 있음에 네가 있네.”라는 노래 가사도 있다. 이분법적 논리가 아니라 다양성 속에 하나라는 화합의 사고가 필요 ‘너와 더불어 나’가 아니고서는 사실 존재적 의미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존중해야 한다. 다름은 차이가 아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흑인과 백인, 동양인과 서양인 그 누구도 보다 더 우월한 존재는 없다. 다름이라는 아름다움일 뿐이다. 이 다양성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 조화요, 행복이다. 이것이 남의 성공을 도와야 하는 이유다. 남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이고 우리의 성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무한 경쟁이니, 생존전략이니 이런 말들을 삼가야 한다. 일등주의, 성적지상주의는 패배자가 존재하게 만든다. 이것은 남의 성공을 도와 나의 성공을 이루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라는 동·식물적 논리가 적용 되고 만다. 이것의 끝은 전쟁이요, 멸망으로의 길이다. 과연 누가 이런 세상을 원하겠는가? 그렇다면 답은 정해졌다. 남의 성공을 도와야 나의 성공이 가능한 것이다.  이 땅에 그 어느 것 하나 하찮은 것은 없다. 모두가 소중하다. 우리의 신체도 그렇다. 1986년 1월 발사 된 미국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출발 73초 만에 폭발하고 말았던 사건이 있다. 우주 최강국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탑승자 7명의 고귀한 생명이 희생 된 것이다. 나중에 대서양에 추락한 우주선의 잔해물 분석을 통해 밝혀진 원인은 안타까움을 더했던 것이다. 연료의 누출을 막는 용도로 로켓의 이음새에 쓰인 오링(O-ring)이라는 작은 부품의 설계 결함이 원인으로 밝혀졌던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무시 되어서는 안 된다는 진한 교훈을 남긴 사건이다.  이제 우리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아니라 다양성 속에 하나라는 화합의 사고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모두를 소중하게 여기고 서로가 서로의 성공을 돕게 되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우리민족은 서로 돕고 나누는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두레, 향약이 있었다. 진실한 애민의 세종대왕의 정신이 한글과 많은 과학기술로 숨 쉬고 있다. 이순신의 지혜와 충정, 다산의 탁월함과 반듯한 목민관의 본보기도 진정한 우리의 전통이라 할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도 과학기술부의 부활을 공약화 하고 나섰다. 많은 국민들의 생각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모두의 화합과 하나 된 거대한 힘의 발현을 위하여 그야말로 ‘국민소통부’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이번 선거를 위한 각 당의 공천에서도 소위 ‘SNS(Social Network Service)역량지수’를 반영 하지 않았던가? 상시 민심의 사정과 현실적 상황을 반영하는 따뜻한 소통의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서로의 성공을 돕는 나라, 국민의 성공을 돕는 나라, 모두가 공생 공영하는 나라, 이것이야말로 그 어디에서도 이루지 못한 경쟁력이요,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힘을 발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줄 것이다.  박요섭본지 대표/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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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3-14
  • 양극화의 좌절을 넘어
    1%만을 위한 제도와 정책을 가지고모두를 위한 것으로 말하는 확인 편향에서벗어나지 않는 이상 양극화의 해소는 너무나 먼 이야기다.  지난 1월 25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거대한 전환-새로운 모델 형성’을 주제로 세계경제포럼(WEF)이 열렸다.  참석한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와 전망은 행복한 미래를 예견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문제는 양극화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그 어디에서도 상생이며 공생공영은 요원한 것이다. 양극화의 심화는 그저 성장적 지체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의 심각성은 인간의 의욕과 희망을 송두리째 짓밟아 버린다는데 있다.  199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아마티아 센(Amartya Sen) 교수는 개인의 자유를 사회적 약속으로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양극화의 심화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적 약속이 그 만큼 무너져 있다는 것이다.  센(Amartya Sen) 교수는 ‘삶의 질’을 발전의 잣대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삶의 질이란 각자의 역량력을 제한 없이 발휘하며 경제생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자기의사를 마음 놓고 표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개인의 자유를 논한다면 그것은 이미 보장 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이나 믿는 것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모든 정보를 해석하고 판단하여 범주화하고 결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를 확인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한다. 이런 시야를 가지고 근거가 빈약한 장밋빛 전망을 내놓으며 양극화란 그저 몇몇 소외계층이나 저소득층의 울분정도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심각한 착각이요, 매몰이다.  시력과 맞는 안경을 써야 제대로 볼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똑같은 현실도 엉뚱하게 왜곡 된 상태로 둔갑하게 된다. 인간은 함께 살면서 너와 나의 의미를 확인 하는 가운데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다. 1%만을 위한 제도와 정책을 가지고 모두를 위한 것으로 말하는 확인 편향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양극화의 해소는 너무나 먼 이야기다.  시장에 나가보면 상인들의 표정은 우울하다 못해 체념과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지난 달 24일 통계청이 발표한 ‘연간 가계동향’을 보면 소득분배와 관련된 모든 지표들이 일제히 악화됐다. 소득 불균형 상태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1에 가까울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는 것인데 0.311로 나타났다. 조사 지난해 0.310보다 더 나빠졌다는 것이다. 가처분소득 기준 상대적 빈곤율도 전년의 14.9%보다 더 올라 15.2%로 나빠졌다. 총소득의 38.8%를 소득 상위 20%가 점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달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자영업 종사자는 663만 여명이라고 한다. 신규 취업자 10명 가운데 3명이 자영업이라는 것이다. 우리와 국민소득이 비슷한 OECD 국가에 비해 223만 여명이나 과잉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제활동 인구의 4분의 1이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말이다.  MBC TV의 PD수첩은 <2012년 신년기획, 서민 경제 진단> 3부작을 통해 우리나라 중산층의 실태와 미래를 전망 한바 있다. 10명중 3명의 자영업자는 폐업을 고민하고 있으며 빚더미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뼈 빠지게 일해도 빚만 늘어나게 되는 구조적 모순에서 허덕이는 이들에게 ‘모든 게 당신 탓이다.’, ‘열심히 하다보면 좋은 날도 온다.’ 이런 말은 그들의 시린 상처를 더욱 아프게 할 뿐일 것이다. 더욱이 이것을 상대적 빈곤감이라는 굴레로 덮어씌우기엔 가혹한 것이고 그 병증이 심각하다는 말이다. 청년실업은 물론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가장, 소득의 불평등, 교육의 붕괴와 같은 것들이 다 양극화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이다.  올해의 다보스포럼 총회에서도 이런 실패적 현상에 대해 ‘죄를 지었다’는 고해성사를 했다. 그렇다면 그야말로 모두를 위한 본질적 변혁과 대안이 필요하다. ‘더 잘 살기 위해 참자.’, ‘미래에 투자하자.’ 이런 식의 구호라면 총제적인 위기를 스스로 초래하고 말 것이다.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들의 탓으로만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한미FTA와 관련한 문제에서만 보더라도 왜 특정분야에게 이익이 발생함에도, 불이익이 발생하는 부분에게는 국민의 세금으로 보조해야하는가?  형제들이 어려움을 극복해보겠다고 공부 잘하는 맏이를 밀어줬더니, 잘 살게 되어서는 나 몰라라 한다는 못 된 형의 이야기가 많은 공감을 사는 이유는 뭘까?  구조적인 모순의 해결이 필요하다.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 1944)의 저자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시장경제에만 맡겨 놓는 것에 대해 ‘일종의 유토피아적 망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시장의 논리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자유와 이상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비극을 낳고 실패라는 결과에 절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거대한 전환’이란 과연 무엇일까?  글로벌 금융위기를 가장 먼저 정확하게 예측하면서, Mr. Doom(비관론자)이라는 별명을 얻은 미국 뉴욕대학교 교수인 경제학자 누리엘 루비니(Nouriel Roubini)는 향후 10 여 년 간의 어려움을 전망하기도 한다.  양극화의 심각성은 역사적 맥락과 그 줄기를 같이하여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후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역사의 물줄기를 거스른다면 그것은 인류적 저항에 부딪히고 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양극화의 문제를 정치 공학적 잣대로 해결하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소위 말해서 이것은 ‘꼼수’일뿐이라는 것이다.  '너와 더불어 나’만이사람됨의 존재적 가치를 확인 받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 인류역사에서 위기는 항상 기회를 선물했다. 지금이야말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낼 수 있는 인류적 지혜가 필요한 시기다. 1%에게 편중 된 부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비단 한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중소기업 살리기 운동, 전통시장 찾기 행사’ 아니면 소위 ‘재벌 기업 군기잡기’ 이런 정치적 접근으로는 문제를 악화 시킬 뿐이다. 사람을 사랑하고 배려하며 서로 나누는 일을 만들고, 섬기는 진심의 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양극화의 해소는 파이를 더 키워보자는 접근으로는 어렵다. ‘더’가 아닌 ‘나눔’이 필요하다.   이제까지 그럴 듯한 수많은 경제학적 이론들과 정치적 이념들이 등장하고 사라졌다. 하지만 이론과 논리로 해결하려는 발상에는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모순이 드러났다. 그렇다고 좌절해서는 안 된다. 죄가 있기에 속죄와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해답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낮은 곳으로 임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어야 한다.  그런데 입만 열면 하나님을 찾았던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이 그토록 찾았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이다.  오늘 날에도 이런 신앙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음에도 자신만큼은 누구보다도 신실한 신앙인이라고 자부한다. 그렇다면 입만 열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을 외치는 사람들의 진실한 속내는 과연 어떠한지 그 평가는 모두의 상상에 맡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불이익은 눈곱만큼도 참지 못하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 것을 볼 때 씁쓸하다. 그야말로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스캔들인 셈이다. 절벽을 만난 것처럼 한계적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해결책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모두가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희생을 통해 수많은 열매로 거듭나면 나눌 수 있다.  소득이 신성한 것은 나눔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키움이 아름다운 것도 베풂의 기쁨과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양극화의 좌절을 넘어서 환희의 언덕으로 가려면 인류의 지혜가 배려와 나눔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너와 더불어 나’만이 사람됨의 존재적 가치를 확인 받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박요섭본지 대표/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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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3-13
  • 성적 지상주의에 멍드는 미래
      오직 경쟁에서 이기는 자 만이 정복하여 누리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논리가 서슬이 시퍼렇게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다.  새 학기가 시작 되었다. 새로운 시작과 만남에 대한 긴장에도 그저 즐겁기만 한 아이들의 청아한 웃음소리가 교정을 가득 메워야 할 때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시대에 뒤처진 사람의 공허한 바람인 듯 치부되는 분위기다. 이제 고등학교에 막 등교를 시작한 고1 새내기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신선함은 자취를 감추었다. 원인은 고3 수험생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대학입시에 대한 부담이 고1 새내기들에게까지 확대된 탓이다. 문제는 수시에 대한 비중의 확대다. 주요 대학들이 수시에서 70%이상을 선발할 계획이다. 서울대학교에서는 2013학년도부터 전체 선발에서의 수시선발 비중을 80%까지 늘리기로 했다. 현행 대학입시에서의 주요전형요소는 크게 대학수학능력시험과 내신 성적이다. 여기에서 70~80%나 되는 수시선발은 최저등급 적용정도를 제외하면 사실 수능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이렇다보니 고1부터 내신 성적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이야 학생의 본분이고 국가의 미래라는 이야기를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러나 본질은 이것이 아니다. 과도한 경쟁과 부담으로 진정한 경쟁력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들에게 있어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펴고 집중해서 공부도 하고, 겯고틀며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서로 돕고 나누며 우정을 쌓는 것 또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소리는 그야말로 가당치 않은 헛소리가 된지 옛날인 듯한 세태다. 담임선생님들과의 상담을 마친 신입생 학부모들의 모습에서는 진한 압박감이 베어 나온다. 성적 이야기가 거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치열한 내신 경쟁은 물론, 전국의 60~70만이 다 경쟁자라는 것이다.  새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라는 말이 아련한 흑백 사진의 촌스러움처럼 머리를 스친다. 이런 과도한 경쟁이 단기적인 차원에서는 나름 앞선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삶의 질이란 논할 틈새조차도 찾을 수 없게 된다. 오직 경쟁에서 이기는 자 만이 정복하여 누리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논리가 서슬이 시퍼렇게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결코 사람의 삶의 방식이 아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데 이것이 이들의 미래란 말인가? 이런 멍든 미래는 점점 더 각박한 세태를 양산하고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난 소외와 패배감을 위험수위로 몰아갈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본 회퍼(Bonhoeffer)는 히틀러를 향해, 미친 버스 운전사를 끌어내려야 한다고 외쳤다. 이제 우리는 잘못 된 행진을 멈추어서 뒤를 돌아보고, 지속가능한 상생의 성장을 만들어야 한다. 지구촌 최대의 공용어는 나눔이다. 서로 사랑하고 나누는 삶을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소중한 가치로 가르치고 물려주어야 한다.  이것은 기성세대들이 감당해야 할 일들이다. 지난해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한 고교생이 8개월 동안이나 시신을 방치한 사건이 발생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원인은 성적지상주의로 인한 폐해였다. 극단적인 사건이기는 하나 우리는 이것을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과연 성적이 어머니와 아들의 천륜마저도 무참하게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이란 말인가? 초등학생들의 장래 희망이라는 한 설문 조사에서 공무원이란 응답이 가장 많았다는 사실은 기특하다는 생각보다는 가슴을 아프게 했다.  선생님들은 성적이나 올려주는 기능의 전달자들이 아니다. 가르침이라는 것은 그것으로 인류를 이롭게 하며, ‘너와 더불어 나’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게 하는 성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교육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들이 대학교로 진학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 그 현상은 더욱 심화될 뿐이다. 지난 날 대학은 취업준비의 사관학교가 아니었다. 밤이 새도록 진리를 탐구하고 인간애의 실현을 고민하였다. 때론 자기의 마땅한 권리도 포기한 채, 정의를 외치며 불의에 당당히 맞서기도 했다. 유구한 역사의 흐름에서 인권을 위해, 자유를 위해 많은 선열들이 피를 흘리고 몸을 바쳤다. 그렇게 만들어진 복지가 이기심으로 빚을 바래서는 안 된다. 이육사의 광야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의 양심이, 유관순의 뜨거운 저항의 몸부림이, 여공들의 안타까운 노동의 현실을 대변하려 했던 청년 전태일의 목소리가 온 몸으로 전해오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가치를 지키고 또 새롭게 만들어가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 필요하다. 우리의 소중하고 어여쁜 청소년들을 개인적 영달의 경쟁 속으로 몰아넣는 성적지상주의를 멈추어야 한다. 성적지상주의가 아름답고 뛰어난 경쟁력을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이야기다. 상생의 하모니를 이루는 복지를 창출하기에도 역부족인 태생적 한계를 배태(胚胎)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고난과 위기를 극복한 지혜롭고 정(情)이 넘치는 민족이다. 이것을 오늘에 되살려 발전시키는 가치혁신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교육정책을 조변석개(朝變夕改)적으로 주물럭거리는 정치적 포퓰리즘(populism)의 대상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여야와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보다 더 아름답고 복된 역사의 흐름으로 함께 만들어가야 할 생명적 호흡인 것이다. 소위 4.11 총선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그리고 연말에는 대통령선거가 치러지게 된다. 이 선택이 또 하나의 편 가르기가 아닌 우리의 삶의 질,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실현하는 새로운 도약의 주축돌이 되기를 바란다.  이 2012년의 새봄에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라는 조병화 시인의 ‘해마다 봄이 되면’이라는 시구가 움츠렸던 가슴을 설렘으로 새롭게 하지 않는가?   박요섭 본지 대표/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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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3-11
  • 경제성장만이 살 길 아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물질적 가치를 향유하며, 어떻게 하면 함께 행복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그에 대한 배려와 기회를 주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다.     분배냐 성장이냐 하는 해묵은 이분법적 경제논리에 대한 논쟁은 선거 때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매번 거듭되는 한국정치의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분배를 말하면서 그것을 위한 경제적 장치, 즉 부의 균등 소유 같은 정책이 잘 시행되거나 정착된 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에 경제성장을 운운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기득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한 뜻 없는 발언과 무책임한 공약이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전체 사회가 인간의 먹는 문제와 직결된 행복지수를 어떻게 높일 수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자문해보아야 한다.   환경경제학자 이정전 교수는 최근 그의 저서에서 1인당 국민소득과 행복 사이의 상관관계를 규명했는데, 이를 ‘경제성장 효용체감 곡선’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 이하일 때는 소득이 늘어날수록 개인의 행복지수도 높아지지만,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소득이 늘더라도 개인의 행복이 별로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경제학적 측면에서 행복이나 경제를 조명하는 논지는 매우 설득력이 있다. 인간이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까지는 갖기 위해 노력하는 그 자체가 행복하고 가치가 있겠지만 성취하는 순간 행복보다는 오히려 또 다른 공허와 궁핍을 더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행복과 부(富) 자체보다는 지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삶의 의미가 더 값진 것이다.   갖는 순간 다시 우리의 욕망은 저만치 달아나 버린다. 다시 그것을 좇고 또 좇아서 가지면 가질수록 그 기쁨과 행복은 이미 예전의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최근 일본에서도 탈성장론(脫成長論)이 고개를 들고 있다고 한다. 이미 성장의 정상에 올라와 있으니 하산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수출을 통해서 성장하려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임금 하락이 불가피하고, 기업이 성장해도 국내 고용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따라서 정부예산을 의료, 복지, 교육, 신에너지 등에 집중투자해서 내수를 확대함으로써 국민들의 행복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경제성장을 추구하던 것에서 방향을 바꾸고 이제는 그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내려 놔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성숙한 이성적 판단인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앞으로는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이 물질적 가치를 향유하고 행복할 수 있을지 그에 대한 배려와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리라 본다. 혹자는 성장이 있어야 분배가 있을 수 있지 않느냐고 반박한다. 가진 게 있어야 퍼줄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많이 가진 자가 있어서 그것을 퍼준다는 관념보다 많이 가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게 가진 자들도 가질 수 있도록 양보하고 기회를 주는 것이 공정하고 공존하는 사회가 되는 좋은 길일 것이다. 누구나 그 기회를 균등하게 누려보는 것. 그것이 정의의 기초가 아니던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와 같은 탈성장에 대한 외침은 인간이 더 이상 자본이라는 존재의 주인이 아니라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자본 스스로가 이익과 분배를 가져오는 경제적 행위자가 된 것처럼 인식될 수도 있으나, 자본 자체가 주인 노릇을 할 수는 없다.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의 노예가 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자기 권리와 권리 투쟁의 현상이 세계 이곳저곳에서 목격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의 목표는 자본 자체라기보다는 자본가에게 있는 것이다.   동네 구멍가게와 빵집을 문 닫게 하고 소시민의 생존 기회와 권리조차도 박탈하고 그들이 가진 것조차도 독과점하려는 자본 기업의 횡포는 바로 상도(商道)에 어긋나는 행위 일뿐만 아니라 무한 성장의 욕망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유린한 것이다. 적어도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지배 야욕을 드러내는 것이 경제 행위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먹는 것만큼은-경제(economics)라는 말이 가정, 가족이라는 oikos라는 그리스어에 어원을 두고 있듯이-그야말로 생계를 보장하고 나눌 수 있도록 놔둘 수 있어야 한다.   먹음의 본능을 이용하여 인간을 치사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분노와 복수의 칼을 가는 성장의 욕망은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 성장이란 자연과 인간의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바 그 둘은 결코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구의 유한성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지구 위에 인간, 인간 위에 자본이 군림하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자본, 인간, 그리고 지구의 관계를 좀 더 종합적, 성찰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본지 편집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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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3-09
  • 오늘의 교회를 돌아본다
      이미 현실로 존재하는 대안적인 교회상, 더욱 발전시켜나가야 할 대안적인 교회상은 어떤 것일까?   ▲ 생명과 인권을 옹호하는 교회, 천안살림교회 최형묵목사   십 수 년 전 서울 강남의 한 대로에서 운전하던 차가 고장 났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긴급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공중전화를 찾기 시작했다. 평소 그렇게 많아 보이던 공중전화 박스는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한 여름 뙤약볕까지 내리쬐고 있는 터라 곧바로 목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공중전화도 찾아야겠지만 우선 목이 급했다. 가게를 찾으려 하니 역시 보이지 않았다.   차가 고장 나 속이 타는 상황에서 당장 긴급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전화도, 갈증을 해결할 음료수도 구할 수 없었으니 더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헤매다 근처 아파트단지에 들어가 겨우 가게와 공중전화를 찾아 사태를 해결하였다. 평온한 상황에서 돌이켜보면 사실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겠지만 당시로서는 사막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필요한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풍요롭고 번화한 도시 한 가운데서 사막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기억은 지금도 뇌리에 박혀 있다. 마치 그런 상황일까? 심심치 않게 상담을 받는다. 신앙상담과 함께 마땅한 교회를 찾는 상담이다. 전화로, 이메일로, 때로는 교회 홈페이지를 통해 상담을 해 온다. 상담해 오는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도 다양하다. 커피숍보다 교회가 더 많다는데, 외국인들이 볼 때 가장 경이로운 풍경 가운데 하나가 즐비한 교회 십자가 탑일 정도로 교회가 많다는데, 마땅한 교회를 찾기 위해 생면부지의 목사에게 상담을 해 오는 사연이 무엇일까?   물론, 그렇게 갈급한 심정으로 교회를 찾아나서는 이들이 비율로 따지자면 정확히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가 많은 사회에서 새로운 교회를 찾아나서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오늘 한국교회 현실을 되돌아보게 해 주는 중요한 징후임에 틀림없다.   오늘 한국교회가 세간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는 것과 함께 교회 내에서 이른바 ‘수평이동’이 이뤄지고 있는 것은 오늘 한국교회의 실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하나의 현상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기존교회에 대해 실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자체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이들이 의미 있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존교회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면서 새로운 대안적 교회상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교인들의 수평이동이, 교세확장을 곧바로 전도 내지는 복음화로 이해하는 시각에서는 답보상태에 있는 한국교회의 위기현상의 한 형태로만 보이겠지만, 교회의 질적인 발전과 성숙을 통한 진정한 복음화를 기대하는 시각에서는 오히려 그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여주는 현상으로 인식될 수 있다. 바로 이 엇갈리는 시각이 교차하는 기로에 오늘 한국교회가 서 있다.먼저 많은 이들이 기존교회에 대해 충성을 철회하고 새로운 교회를 찾아나서는 사연을 생각해본다. 교파를 막론하고, 또는 이른바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한국교회 교인들은 대개 공통의 교회생활과 신앙의 기반을 갖고 있다. ‘언덕 위에 작은 예배당’, ‘교회 종소리’... 교회가 시골에 위치해 있든 도시에 위치해 있든, 규모가 크든 작든, 실제 종소리를 울렸든 아니면 차임벨을 울렸든, 과거 교회는 대개 그런 이미지로 그려졌다.   언덕 위라는 이미지가 말하듯 뭔가 특별한 영역이지만 종소리가 울려 퍼지듯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는 존재로서 교회를, 사람들은 경험하고 각인하였다. 그런 교회가 과연 어떤 교회인지 역사적으로, 실체적으로 분석하자면 더 많은 말을 해야 할 것이다. 그 교회는 새로운 문물을 전파하는 통로로서 시대를 선도하기도 했고, 위기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에서 고단한 영혼들을 위로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고, 갈피를 잡지 못하던 사람들이 정성을 쏟는 구심 역할을 하기도 했고, 어린이와 청소년 및 젊은이들의 문화센터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여러 측면에서 ‘어머니 교회’로서 역할을 맡았다. 어떤 교회든 크게 다르지 않은 그런 배경 속에서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키워왔다.   그런데 그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아예 교회를 떠나버리는 사람도 적지 않고, 앞서 말했듯 새로운 교회를 찾아나서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기존교회를 떠나는 이들에게는 저마다 동기가 있겠지만, 크게 보면 대개 공통된 몇 가지 이유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기존교회가 신앙의 성장에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교회에서 믿음은 거의 맹신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교회에서는 신앙에 관한 근본적 물음이나 다른 의견이 허용되지 않는다. 기존의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다른 의견을 제기하는 것은 믿음 없는 행위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흔히 한국교회의 반지성주의 또는 근본주의 신앙으로 일컬어지는 현상이다. 인간 정신의 발전은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의 과정, 곧 끊임없는 물음의 과정을 통해 이뤄졌건만 교회에서는 그것이 금기시된다.  유대교 랍비들의 성서해석에 관한 원칙 가운데 하나는 신성모독을 범할 때까지 물음을 던진다고 하는 것이라 한다. 그것은 믿고자 하는 진리를 철저히 탐구하는 정신으로서, 결코 불신의 행위가 아니라 털끝만큼이라도 남아 있을 수 있는 의심의 소지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진정한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기껏해야 목사의 독단 또는 교권의 독단에 지나지 않은 것이 진리로 옹호되고 그에 대한 맹목적 순종만이 강요되는 교회의 풍토에서 성찰의 여지는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신앙의 성장 또한 가로막힐 수밖에 없다. 어린아이의 신앙만이 강요되는 풍토에서 성숙한 성찰적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두 번째는 교회가 시대를 선도하는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여기서 시대를 선도한다는 것은 통속적 유행을 따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옭아매는 관습과 제도, 풍토를 극복하고 인간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과거 교회가 새로운 문물의 통로가 되고, 젊은이들의 소통의 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회 전반에 그러한 기풍을 일으키는 데 선도적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예컨대 정치제도 또는 사회문화적 기풍과 관련하여 과연 오늘의 교회가 사회를 선도한다고 볼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 아주 단적인 예를 꼬집어 말하자면, 오늘날 장로교의 당회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교회의 정치적 구조는 개별교회 단위에서 총회에 이르기까지 엄격한 권위주의적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구조를 고착화시키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교회는 평신도의 정치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점에서 획기적인 전환의 성격을 띠었다. 회중의 대표로서 장로를 뽑아 교회정치의 책임을 부여한 장로교회는 확실히 새롭게 싹튼 근대정신을 반영하였다. 그렇게 교회는 회중 대표의 정치참여를 보장함으로써 대의제에 기초한 공화정의 선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대의제 정치는 위기를 맞고 있다. 정치 현실에서 대의기관은 민의를 대변하는 장치라기보다는 소수의 독과점 세력의 권력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독점적 군주제에 비해 상대적 진보성을 지녔던 대의제는 이제 그 적실성을 검토 받아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 까닭에 민주주의를 제대로 구현하려는 방안이 다각적으로 모색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시대정신이다. 그러나 교회의 정치구조는 요지부동이다.   교회 회중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여성의 대표권은 그 정치구조에서 거의 배제되어 있고, 젊은 층의 대표권은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언젠가 교단 총회의 장면을 인터넷 생방송으로 지켜 본 적이 있는데, 청년의 대표권 보장 문제가 안건으로 상정되어 잠시 열띤 토론이 이뤄지는가 싶었는데 한마디의 발언으로 토론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칼빈의 장로교 정치원리가 뭐냐? 그것을 뒤흔드는 논의가 말이 되느냐?’ 그 한마디였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탄식할 수밖에 없었는데, 교회가 그런 권위주의적 풍토를 지속하는 한 시대를 선도할 수는 없다. 그런 교회가 어떻게 사회에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고 젊은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세 번째는 오늘의 교회는 공공성을 상실해가고 있다.근래 들어 한국교회 주류세력은 마치 이익집단처럼 자기주장을 펼치며 행세하는 경향을 농후하게 띠고 있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쟁점마다 한국교회 주류세력은 자기주장을 적극적으로 표명하며, 사안마다 스스로의 기준을 절대적 기준인 양 내세웠다. 예컨대 주5일근무제, 양심적 병역거부, 출판물과 영화 등 예술 작품 문제, 사립학교법, 차별금지법 등에 관한 태도에서 자기이해에 민감한 태도를 보였고, 세계적 차원에서도 논란된 해외선교 문제와 관련해서도 자기중심적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최근 한 대형교회가 공용도로마저 사실상 사유화하는 방식으로 건축을 진행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교회의 이런 양상은 스스로 공공성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주고 있고, 따라서 소통능력의 부재를 드러내주고 있다. 심지어는 교회들 사이에서조차 공존공영의 의지가 없음을 드러내 주는 사례들도 숱하다. 수천억 원을 들여 교회당 짓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웬만한 교회는 거의 예외 없이 셔틀버스를 운행함으로써 주변의 대다수 영세한 교회들의 존립 위기상황을 빚어내고 있다.   시장의 질서에서조차 통용되는 독과점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가 교회들 사이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실정이다. 시장의 상도(商道)보다 못한 질서가 교회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문제는 정작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는 교회들만이 아니라 영세한 교회들마저도 사실상 대형화된 그 교회들의 관행을 선망하는 가운데 닮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생각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새로운 대안을 찾아나서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기존교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존교회에 몸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족관계, 또는 규모의 논리를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는 교회 안에서 인적 관계를 쉽사리 떨치기 어려운 현실 때문에 그 잠정적 타협상황은 한동안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사회적 신인도가 더 추락하는 한편 덩달아 구성원의 고령화가 진행될 즈음에는 그 인적 관계가 힘을 잃게 되고, 머지않아 아직 위기를 체감하지 못한 대형화된 교회의 위기는 현저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뻔히 예측되는 그 위기상황은 미봉책으로 타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지금 그 위기가 감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안을 찾는 것이 마땅하다 할 것이다. 기존교회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선 이들의 행보는 그 대안의 발걸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 한국교회의 미래를 대비하고자 한다면, 오늘의 위기상황을 깨닫고 대안을 추구하는 교회들이 지혜를 모으고 힘을 모으는 일이 지금 절실하다. 그렇다면 이제 대안적인 교회의 방향을 탐색해야 할 차례이다. 대안적인 교회의 시도들은 이미 진행되고 있고, 교회 간 수평이동은 대안적인 교회의 기반을 더욱 강화시켜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이미 현실로 존재하는 대안적인 교회상, 더욱 발전시켜나가야 할 대안적인 교회상은 어떤 것일까? 우선은 앞서 지적한 기존교회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것이 그 방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그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대안의 방향을 시사 한 만큼 간략히 그 의의를 재삼 확인하는 수준에서 그 내용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 맹목적인 신앙의 강요로 신앙의 성장을 저해하는 교회의 문제점을 극복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묻고 깨닫는 성찰적 신앙이 가능한 교회로의 변화를 뜻한다. 의심받지 않은 진리가 지배하는 현실은 숨 막히는 현실이다. 중세기의 교권의 지배, 현대의 전체주의 지배가 그 단적인 예이다.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구현으로서 교회 공동체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숨을 쉴 수 있어야 하고, 그 자유로운 영혼들이 함께 찾아나가는 진리의 길이 보장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시대를 선도하는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앞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권위주의적 정치구조를 하나의 예로 들었지만, 사실은 경제적 삶의 방식, 그리고 문화적 삶의 기풍 전반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의 이윤추구가 최고의 지배적 가치가 되어 있고, 정치권력과 생활문화 등 전반이 오로지 그 가치에 종속되어 있는 현실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시대를 선도하는 교회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전쟁과도 같은 일상의 삶의 현장에 나서기 위해 전의를 불태우도록 거드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되어버린 그 일상적 삶의 방식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이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전파하는 교회의 본질적 역할이다. 세 번째로 사실상 이익집단이 되어 있는 교회에서 공공성을 회복하는 과제는 교회의 뼈아픈 각성과 함께 구체적인 교회내부의 구조변동을 동반하는 과제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기중심적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동일성의 원리는 매우 강고하게 자리한 하나의 경향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만일 그것만이 유일한 법칙이라면 인간의 삶, 인간의 문명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낯선 타자와의 관계를 맺는 방식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그 관계를 규율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구성함으로써 인간의 삶은 지금까지 존속 가능했다. 더욱이 기독교 신앙은 절대 타자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해서 성립한다.   그것은 동시에 인간들 사이에서의 공평한 관계를 형성하는 전제조건이 되기도 한다. 그러한 신앙을 전제한다면 현실의 사회적 구성원의 일부로서 교회는 마땅히 당대 사람들의 삶을 규율하는 공공성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교회가 그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폐쇄적인 체제를 지향하는 데서 소통 가능한 개방적인 체제를 지향해야 한다. 그 과제는 현실의 교회를 유지하는 구조 전반의 변화를 시도함으로써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도 교회의 대안을 생각하자면 더 많은 과제들이 있을 수 있고, 또한 앞서 말한 하나하나의 과제들만 하더라도 그와 관련하여 검토해야 할 더 많은 세부적인 과제들을 안고 있다. 하지만 개략적인 방향을 찾는다는 점에서 그 대강의 과제를 생각해본 셈이다. 이미 적지 않은 교회들이 대안적인 실천을 지향하고 있고, 그 시도들은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를 넘어서는 희망의 새싹으로 성장해나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대비하고자 한다면, 오늘의 위기상황을 깨닫고 대안을 추구하는 교회들이 지혜를 모으고 힘을 모으는 일이 지금 절실하다.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담임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신학과 졸업,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조직신학 전공) 졸업, 한신대학교 대학원 신학박사(Ph. D.) 과정 기독교윤리 전공: 박사논문 “한국 경제개발과 민주주의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평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청년회 서울연합회 상임총무, 한국기독교장로회 청년회 전국연합회 성서연구 위원 및 위원장,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신학 위원 및 위원장, 한국기독교사회운동연합 신학 위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신학연구 위원, 한국기독교장로회 초원교회 청년회 지도교사, 한국신학연구소 연구원 및 『신학사상』 편집장, 한국기독교장로회 천안교회 부목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대표,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교회와 사회 위원, 한국노동정책연구소 이사, <미래를여는아이들>(천안지역아동센터후원모임)공동대표 등을 역임, 현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운영위원, <미래를 여는 아이들>(천안지역아동센터후원모임) 이사, 계간 『진보평론』 편집위원, 현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앙과 직제 위원, 현재 한신대학교 외래교수(학부 및 신학대학원 출강)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12-03-08
  • 탈북자에 대한 관심과 구원의 동시성
    그들이 다시 북한으로 넘겨질 경우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바이다. 구금된 사람들이 어서 속히 자유의 몸이 되어 진정한 해방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한다.  북한 동포들이 최소한의 음식물조차 먹지 못해 굶어 죽어간다는 보도는 물자가 넘쳐나며 마음껏 먹고 사는 우리에게 큰 부담감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 되었다. 이러한 차에 최근 중국국경을 넘어 탈출한 북한이탈 주민들이 중국의 비협조로 난민지위를 얻지 못해 다시 북송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은 우리를 참담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위험한 상황을 인지한 박선영 의원(자유선진당)이 깡마른 몸으로 단식투쟁을 감행하면서 다시 한 번 국제적인 이슈가 되었다. 결국 실신하여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탈북주민들이 자유를 얻기를 학수고대하는 모습은 참으로 절절한 드라마와 흡사하여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중국당국은 해결의지를 보이지 않아 답답하다. 중국당국은 그들이 경제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국경을 넘은 경제사범으로 취급하여 난민지위를 허락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북한과의 혈맹관계를 유지해온 터라 중국의 입장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다시 북한으로 넘겨질 경우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바이다. 북송되었다 다시 탈출한 이탈주민들의 증언은 우리의 염려가 사실임을 확인시켜주었다. 구금된 사람들이 어서 속히 자유의 몸이 되어 진정한 해방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은 자유와 해방일 것이다. 자유와 해방이라는 단어만을 뇌까려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필자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그처럼 인간은 최고의 가치를 숭상하고 누릴 존재인 것이다. 더구나 굶어죽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야말로 참된 구원의 일부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번 사건은 다시없는 회개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주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질적인 성숙을 기하는 사순절(Lent) 기간을 지나는 시점에서 박선영 의원이 단식투쟁을 하다가 실신했다는 보도는 정의(正義)에 대하여 말은 무성한데, 실천력이 부족한 우리사회에 통렬한 비판과 무거운 책임감을 갖도록 촉구하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박 의원이 어서 회복되어 국회의원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 국가발전을 위하여 크게 이바지하기를 바란다.  이참에 기독교의 고유가치인 예수를 통한 참된 구원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구원은 죄, 죽음, 그리고 무의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의미를 함의한다는 파울 틸리히(Paul Tillich)의 지적은 성서가 가르치는 기독교의 기본사상에 근접하는 좋은 암시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구원은 최우선적으로 생존(生存)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1세기 당시의 사람들 가운데 수없이 많은 이들도 북한 동포들과 같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러 어쩔 도리 없이 떠돌이신세로 전전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절실한 구원은 우선 먹을 음식으로 곪은 배를 채우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예수의 기적인 오병이어의 사건이다. 수많은 군중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동시적으로 요구되는 현실적인 필요의 공급이었다. 구원을 이분법적으로 오해되거나 곡해된 영적인 차원만을 강변하는 것은 복음의 진정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오류를 나타날 수 있으니 유의할 일이다.“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자랑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1세기 당시의 경제상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제한된 재화’(limited goods)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오늘의 지구에서도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와 과거의 다른 점은 1세기에는 대부분 어려운 처지여서 누가 누구를 돕는다는 복지개념이 매우 희박했다. 그러기에 지금처럼 쓸 것이 너무 많아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1세기의 민중들이 처한 현실을 온전히 동질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아픔과 안타까움을 몸으로 함께 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라고 강조했다. 또한 어떤 쓸 것을 하나 이상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것을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이들에게 양도하라고 주문했다. 매우 실제적인 제시를 하는데, 이 점을 가볍게 보거나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 또한 예수는 나누어준 것에 대해서도 도로 받을 것을 기대하거나 억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서 다시 되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나누어준 것을 도로 받아내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죄인이나 마찬가지로 선언했다. 예수가 강조한 본의를 분명히 새겨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윤리적 철저성이 부족한 것이 아닌지 심히 안타깝다. 예수가 제시한 교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개념은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통치하는 정의가 살아 숨 쉬는 그런 세상의 질서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정확하게 작동하여 정의와 평화가 활성화되어 공평한 사회가 건설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를 수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믿음과 행동의 일치를 이루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 실천력을 담보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지식을 소유했더라도 도무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허접한 공중누각을 자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수많은 정보와 자료가 넘쳐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자랑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몸으로 앎을 적극적으로 체현하지 못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기에 그렇다.  행동이 부족하면 한마디의 기도를 통해서라도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응원할 수 있기를 바라며, 동시에 예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많아져 우리가 사는 땅이 평화로운 환경에서 참된 인권의 가치를 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축제의 자리가 되기를 희망한다. 중국당국에 붙잡혀 긴장 속에서 북송될 처지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상황이 호전되어 자유의 세계에서 해방과 환희를 누리게 될 날을 기원한다. 윤철원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장 본지 편집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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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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