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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1-07-02
  • 한국화학연구원, 스펀지로 열을 전기로 바꾸는 소재 개발
    [타임즈코리아] 구부러지고 늘어나고 압축이 돼, 열이 있는 곳 어디에든 붙여 열을 전기 에너지로 바꿔주는 열전소재가 개발됐다. 완전히 유연한 열전소재가 개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화학연구원 화학소재연구본부 조성윤 박사팀은 열원의 형태와 관계없이 어디든지 붙일 수 있는 ‘스펀지형 열전소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열을 전기로 바꿔주는 소재로 온도 차에 의해 전기가 발생한다. 일례로 발전소 굴뚝에 열전소재를 부착하면, 굴뚝 안쪽의 고온(150도)과 바깥 상온(30도)의 온도 차로 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구진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스펀지에 탄소나노튜브 용액을 코팅했다. 탄소나노튜브를 물리적으로 분산시킨 용매를 스펀지에 도포한 후, 용매를 빠르게 증발시킨 것이다.  제조방법이 간단해 대량생산에도 적합하다. 모양을 만들어주는 틀 없이 스펀지를 이용해 열전소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거푸집 없이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셈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열전소재는 무기 소재로 만들어진 탓에 유연하지 않았다. 사람의 몸이나 자동차 등 다양한 곡면의 열원에 붙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제조공정 자체도 까다롭고 복잡하다. 전 세계 연구진들은 유연한 열전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탄소나노튜브에 주목했다. 탄소나노튜브는 전기전도도가 높고 기계적 강도가 강하며, 지구상에 풍부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팀이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해 유연한 열전소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스펀지와 유사하면서도 높게 쌓을 수 있는 탄소나노튜브 폼(foam)을 만든 것이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압축 안정성 실험 결과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는 “지금까지 개발된 유연한 소재는 지지체나 전극의 유연성을 이용한 것”이었다면서 “소재 자체가 유연한 건 이번 스펀지형 열전소재가 처음이고 제조방법도 간단해 대량생산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개발된 스펀지형 열전소재는 열전소재의 전기적 특성과 스펀지 고유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10,000번 반복해도 형태는 물론이고 전기적 특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압축 전과 압축 후의 저항값이 각각 1.0Ω(옴), 0.3Ω으로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이는 스펀지에 기공이 무수히 많아 변형에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펀지의 탄성을 이용한 응용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경우, 압력이 커질수록 발전량도 덩달아 높아졌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했을 때 최대 2㎼(마이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하여, 압축 전과 비교해 발전량이 10배 정도 증가했다. 이에 대해 연구논문 1 저자인 김정원 박사는 “스펀지의 압축되고 복원되는 탄성을 활용해 몸에 부착하는 웨어러블 기기에 적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수한 기계적 성질이 요구되는 자동차 등에도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정원 박사는 “열전소재 분야 전망도 밝다. 현재 자동차에서 사용하고 난 후의 열이나 온천수를 이용한 열전발전 시작품의 실증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관련 기술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성과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에너지 소재 분야 권위지인 『나노 에너지(Nano Energy), IF:16.602』8월호에 게재됐으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창의형 융합연구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 한국뉴스
    • 과학
    2020-09-22
  • 종속될 것인가, 회복할 것인가
      [타임즈코리아]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느린 사람은 어찌 살라는 건지, 넋이 나갈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많은 것들이 바뀌곤 한다. 이런 현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변화는 순리이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논리가 더 우세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약육강식이 진리이어야 한다. 여기에 동의할 사람들은 모두 강자라야 가능하다. 적어도 변화가 자연에 의한 것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이 자초한 변화에 순응하라는 것은 무조건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이 그만큼 편리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만큼의 행복을 확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비대 면화되어 가고 있다. 이것을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변화라고 동의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코로나19에 따른 불가피한 강요인 셈이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에 따른 변화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만남에서 누리고 싶은 행복은 사람의 DNA 속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다. 현장 공연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감흥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런 노력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 개인의 욕심이 아니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예술을 가상의 세계에 가두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 만약 가상의 세계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우리가 굳이 직접 여행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영상이나, 증강현실 그리고 가상현실 시스템만으로도 더 자세하게 보며 실감 나는 장면 속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온라인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계기로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콘텐츠를 구별하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가 파산했다는 기사가 유난히 아프게 느껴진다. 과학과 기술이 육체적 요소라면 문화와 예술은 정신적 요소이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난국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문화와 예술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예술의 존엄과 가치는 예술가들이 지켜 내야 하는 것이다. 대중화, 실용화 이런 측면들은 굳이 지키려 하지 않아도 어느 시대에나 자생해 왔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변하지 않게 하는 일,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려는 힘은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자극하여 거대한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예술의 힘이고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망가트려놓은 만남과 관계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 속에 내어주고 거기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만남과 관계를 열망하는 DNA와 인간의 지혜가 코로나19보다 더 강함을 증명하며 예전과 같은 역동성을 회복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왔듯이 이 또한 극복해 낼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코로나19를 이겨낼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이전과 같은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예술가들이여, 우리는 과학자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감동을 선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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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합정보
    2020-07-06
  • 인문학은 이론이 아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본질을 찾아 나선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사변적으로 흘러가면 이념이나 현상적인 집착으로 이탈하게 된다.   이런 행태는 수많은 증오와 폭력을 낳으며 씻지 못 할 마음의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남길 뿐이다.   인문학적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삶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타자와 참된 관계를 형성하는 정신을 의미한다.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사람은 ‘너’와 더불어 ‘나’라는 관계를 통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조화로움의 아름다움을 통해 공감함으로써 상대방을 이웃으로써 인식하고 수용하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문학, 역사, 철학, 종교 등의 이론을 습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그들의 아픔과 울분, 사랑과 기쁨을 공유하는 공감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인문학은 ‘너’와 더불어 존재하는 ‘관계’로서의 ‘나’를 인식하고 사랑(자비, 나눔, 배려, 공감)으로 소통하는 지혜를 깨우치고 표현하게 하는 모든 문화, 사상, 지식 등을 말한다.   인문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진리를 찾고 따른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온전히 깨닫고 그 사랑을 최선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6-03-18
  • 현대인 허균이 살았던 과거의 삶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동부승지, 삼척 부사,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허엽(許曄)은 30년간이나 관직에 머물렀는데도 생활이 검소했고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한 인물이다.   허엽의 호는 초당(草堂)이다. 오늘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초당 순두부의 본고장이 바로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이다.         이곳에서 허엽의 아들 허균(許筠, 1569~1618)이 태어났다. 교산(蛟山) 허균은 명문가의 자제로 천재적인 두각을 나타내 모든 것이 보장된 인물이었지만, 불우한 계층을 대변하는 삶을 선택했다.   이런 까닭으로 허균은 조선시대 반역의 상징 같은 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평등사상에 눈을 뜬 허균의 급진적인 개혁 사상은 오늘날에 와서는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단과 반역을 도모하는 사회전복세력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쓴 《홍길동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허균이라는 인물을 볼 때, “역사는 현대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항상 새롭게 해석되고 평가될 수 있기에 역사를 보는 모든 이들의 시각은 상대적이다”고 말한 영국의 정치학자이며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 1892년~1982년)의 견해가 더욱더 공감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6-03-15

실시간 학술정보 기사

  • 진정한 나와 세계와의 관계
      세계에 대한 관심은 지각과 의식을 넘어선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종교적 지향성은 바깥(외적) 세계의 관심보다 오히려 내적 세계 혹은 내면세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항상 외물(外物)을 향하여 있음이 아니라 인간 안의 정신·영혼을 향하여 있음을 지향합니다.   함석헌이 ‘홀로-있음’이라는 존재론적 신앙 태도를 강조하는 것도, “홀로”라는 종교인 내면의 자기 투쟁적인 헌신이 필요하므로 그런 것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19, 영원의 뱃길, 한길사, 1985, 396쪽). 홀로라고 하는 것이 자기 고립과 자기 소외를 자처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독단적이고도 독선적인 코기토(Cogito·인식주관 또는 인격주체)를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종교의 속으로 들어가는 침잠을 의미합니다.   ▲ 종교적 지향성을 달리해야만 종교 본연의 신앙 내용과 실천이 나올 수 있습니다     자기 확신이나 자기 판단도 없으면서 공동체적인 맹신과 맹목으로 은거와 자기 침묵을 수행하지 못하는 종교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의식과 신앙인식을 바로 대면하지 못합니다. 종교적 지향성을 달리해야만 종교 본연의 신앙 내용과 실천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는 그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상대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함석헌이 지적하듯이, 자기 자신, 곧 “나를 문제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겉살림”으로만 일관할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96쪽).   무릇 종교현상은 그것을 통하여 나의 나됨과 세계의 규명, 즉 진정한 나와 세계(속의 나)와의 관계를 알아보려고 하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나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자는 현상학적인 태도일 수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의식과 인식에 앞서서 나를 지각하거나 알지 못하는 한 세계를 늘 왜곡된 상태로 볼 것입니다.   겉살림이나 바깥 세계에 대한 관심은 지각된 나, 지각하는 나, 의식된 나, 의식하는 나, 그리고 지각과 의식을 넘어선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따라서 종교인은 고독해야 합니다. 세계와 사물에 앞서 자신의 신앙의식이 나타남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이고 본질적으로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99쪽). 세계와 사물을 추방하고 자기의식과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지각된 존재 그 자체, 의식 그 자체를 밝히려면 고독·은둔·침묵·관상을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08-14
  •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목적 언행과 실천을 바라보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통해 무엇을 깨닫고, 어떤 성찰적 실천을 해야 할지 함께 생각하며 변화의 길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검소함과 사랑의 사목적 언행과 실천으로 어느 때보다 기대감이 높습니다. 한국 방문에서는 어떤 행보와 영향이 발생할지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마르셀(G. Marcel)은 신앙과 자유 사이에는 내적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신앙은 그 자체로 다른 사람들과 신에게 약속의 이행을 다짐하는 자유로운 활동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명제적 진리에 대한 지적(知的)인 동의라기보다는 신뢰가 더 본질적입니다.   마르셀은 ‘~라고 믿는 것’과 ‘~을 믿는 것’을 구별합니다. 신앙은 ‘~라고 믿는 것’과 관련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은 ‘~라는 명제’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을 믿는 것’을 통해서만 표현됩니다.   다른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신뢰감을 심어 준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대가 나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고, 나의 희망에 보답할 것이며, 나의 희망을 성취시켜 줄 것을 확신합니다. 또한,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과의 신뢰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마르셀은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신뢰와 약속 이행의 접합을 간절히 기원하면서 자유롭게 신과의 계약관계에 들어갑니다... 마르셀에게 있어 초월은, 시간상의 초월(단순한 수평적 초월)이 아닙니다. 초월에는 수직적 차원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것에로의 초월입니다. 초월의 경험은 초월적인 존재자의 삶에 참여함으로써만 성취됩니다.”(전재원, 로고스와 필로소피아, 경북대학교출판부, 2014, 90-91쪽)   ▲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통해 무엇을 깨닫고, 어떤 성찰적 실천을 해야 할지 함께 생각하며 변화의 길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한적이고 시간적인 것을 넘어서 영원한 것에 대한 초월을 추구한 마르셀의 존재철학처럼, 지금까지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이 종교 서사와 서술, 그리고 그 내용을 생활세계에서 살아보려고 무진 애를 쓴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개인의 자율성과 신앙의 현상과 판단, 그리고 타자에 대한 본능과 초자아의 갈림길에서 잘못된 선택과 이기적인 발언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리고 종교의 현실이 어두울수록 종교지도자들의 불신과 이중성은 날로 더해가는 듯합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을 간파한 교황이 자신의 사목적 행보를 통해 온 지구적 차원에서 가톨릭의 신앙 쇄신을 꾀하려고 한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아직도 이념의 갈등과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통해 무엇을 깨닫고, 어떤 성찰적 실천을 해야 할지 함께 생각하며 변화의 길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생각이 획일화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와 이념을 떠나서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조셉 캠벨은 언젠가 진정한 사람 하나가 세상에 다시 활기를 가져다준다”(Davidson Loehr, 정연복 옮김,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 샨티, 2007, 80쪽)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취임과 그 이후의 사목적 언행과 실천이 부디 세계를 바꾸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의 현존재적 종교 행위, 그리고 사목적 결단과 발언마저도 한갓 종교와 신앙의 허위, 종교적 가식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08-04
  • 교황방문에 대한 여러 생각과 종교의 난감함과 한계
       너그럽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다양성 속에 일치를 만드는 방문이 되었으면 합니다.   2014년 8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교황의 방문이 수고스러운 행사로 그치지 않으려면, 포용과 관용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가톨릭은 갈라짐이라는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끌어안지도 못하고 형제라는 의미지향과 제도지향으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교회사적 한계, 정치적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적 의지·의미와 감각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너그러운·여유로운 시선을 보여주기 위한 방문이 되었으면 합니다. ‘보이기’와 ‘보기’로 일관한다면 방문은 그저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석헌은 초월자에 대한 상상력의 수행에서 신앙 감정의 사건이 발생된다고 믿습니다. 상상력은 개별자들에게 모두 주어져 있는 자율성이지 특정 계층에게만 허용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자유로운 사건과 행위를 막아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상력과 그에 대한 해석, 그리고 신앙 지침은 특권 계층에게 있는 것처럼 통제하고 선언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되면 개별자의 신앙 감정 혹은 신앙 체험이 특권 계층에 의해 해석되기 전까지는 잠재적·잠정적인 채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육신으로는 거리가 떨어졌고 성령으로 또 역사상으로 나타난 이들을 통하여 그들의 발자취를 마음에 모아 그들을 믿고 될수록 예수에게로 가까이 하여 실감이 나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80-381쪽)   ▲ 될수록 예수에게로 가까이 하여 실감이 나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신앙의 가능성은, 신앙의 정신화는 그 자체가 과도하게 오염되어 있거나 개인화되어 타자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한 적법한·적절한 서사가 될 수 있습니다. 특권 계층의 정신화도 아닌 권위로 도배가 된 신앙의 양식만이 마치 신앙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모든 종교인을 어린이 취급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역사적 선조들의 발자취는 독단의 아버지나 초자아적 아버지가 아니라 목가적·유목적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는 학습되거나 검열되거나 거세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특권 계층은 거짓말을 통해서라도 그들의 욕망을 억압하려고 하지만, 아이는 더 이상 자신의 결핍을 위험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모두에게는 신앙의 서술(서사) 양식인 경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그 참 진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종교 서사의 범주와 내용은 침묵하지 않고 만인에게 열려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그 서사와 진리 서술을 삶과 현실로 번역하고 옮길 때, 즉 삶으로 살 때 그 자체가 드러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깨달으려면 우리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열리지 않고는 성경의 참 가르침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철두철미하게 현실에 참여하여 그 속에서 하느님의 참 말씀을 드러내는 것”(함석헌, 위의 책, 381쪽) 또한 중요합니다. 종교의 서사 범주와 내용인 경전은 생활세계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삶과 세계를 복원합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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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정보
    2014-07-31
  • 민중의 생각과 미래
      인간의 이성과 의식은 그 개인이 안에서부터 스스로 가지고 있으면서 끌어내는 것이지, 바깥의 조직이나 체제가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인류사에서 정치적 플롯을 보면 민중이 주인이 되었던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민중이 핵심이 되어 민중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그리고 민중의 생각에 의해서 정치가 이루어진 적이 없는 것입니다.   민중은 다만 일개 국가의 도구나 지배 계급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민중의 의식은 자발적으로 발로된 것이 아닙니다. 지배 계급 혹은 소수 엘리트 계층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그 지식과 의식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민중의 말은 민중의 말이 아니었고, 민중의 생각은 민중의 생각이 아닌 지배 계급의 그것이었습니다. 함석헌은 일찌감치 이를 깨닫고 “소수 사람이 지배하는 역사가 아니라 민중 자체가 결단하고 사는 세상”, 즉 ‘훌륭한 이들이 생각해 준대로 사는 세상이 되어선 안 된다’(함석헌, 함석헌전집 19, 영원한 뱃길, 한길사, 1985, 367쪽)고 설파합니다.   민중이 소수 엘리트와 지배 계급의 생각 ‘안에(in)·사이에(inter)’있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그들의 관심에 이끌려지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함께(with), 그들의 생각에 의해서(by), 그들의 생각 안에(in)에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민중은 민중과 함께, 민중에 의해서, 민중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between) 그들 안에 놓이게 됩니다(M. Roth, The Poetics of Resistance, Evanston, Illinois: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6, p. 53). 그래서 함석헌은 정치가들의 권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면서, “인류의 귀한 점이 생각하는 데 있는데 생각하는 게 참 어렵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민중의 생각은 민중 스스로 깨우친 생각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마저도 타자에게 지배된 것이고 그로 인해서 작동·조작된 것이라면 민중은 생각이 없는 존재입니다. 민중의 생각은 역사를 꿰뚫어 바로 볼 수 있는 주체적 의식이자 개별적 존재가 얻게 되는 각성의 원천입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존재론적 위치를 잃지 않고 늘 생생하게 그 자리를 탐색하고 확인하는 것이며, 미래로부터 앞당겨 오는 의식을 현재에 도래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것은 늘 오고 있고 도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타자의 의식에 자신의 생각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생각을 국가에만 한정시켜서도, 국가에 의해서 지배되어서도 안 됩니다. 함석헌이 적시하고 있는 것처럼, “‘나라’라는 것은 이해가 상반되는 단체들이 있어 세워진 것이지 국민들이 계약을 하거나 협력을 하기 위하여 된 것은 아니다... 애기가 자란 다음에는 부모나 선생이 간섭할 수 없게 된다”(함석헌, 앞의 책, 372쪽)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민중의 생각이 성숙해지고 민중의 주체의식이 강해질수록 국가(주의)가 그것을 침해하거나 간섭할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의 이성과 의식은 그 개인이 안에서부터 스스로 가지고 있으면서 끌어내는 것이지, 바깥의 조직이나 체제가 주입하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개인의 의식과 이성이 상충될 때, 집단의 이념이 서로 다를 때, 그것을 어떻게 하나로 묶어놓을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생겨난 것이 국가라는 최종산물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좀 더 외연이 확장된 것뿐이지, 나를 대표하거나 나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또 다른 개인의 생각과 충돌하는 ‘나’와 대립이 생기고 갈등이 발생할 때, 하나의 통합된 ‘나’로서 집단적인 ‘나’의 생각과 조화를 이루고 타협·양보할 수 있는 ‘나’이지, ‘나’의 생각이 말살되거나 사라지는 ‘나’가 아니기 때문에 국가라도 ‘나’의 생각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함석헌이 “인간은 ‘나’를 가져야 한다.”(함석헌, 위의 책, 371쪽)고 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는 소통하는 ‘나’, 대화하는 ‘나’이어야 합니다. “생각은 소통되는 데 있습니다... 개인 사이의 대화, 민족이 대화를 통해서 내 것 네 것보다 놓은 데로 나갈 수 있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369쪽)   소통과 대화를 통해서 더 높은 ‘나’로 나아가야 작은 ‘나’, 작은 ‘너’에서 ‘큰 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세계국가주의”입니다. “나는 세계국가주의자다... 온 세계가 한 나라가 되기 전에는 이 세계에는 전쟁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싸움이 그쳐야 평화가 온다.”(함석헌, 위의 책, 371쪽)   ▲ 앞으로는 전체가 생각하는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생각이 서로 다른 나와 맞서기(gegen)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민족이라는 것도 다른 민족과 맞선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민중이 참여하는 역사”(함석헌, 위의 책, 371쪽)로서 서로가 서로를 맞서는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온 세계가 하나가 되는 평화로운 나라, 평화로운 세계를 말합니다.   나의 경험은 곧 세계의 경험이고 세계의 경험은 나의 경험입니다. 나와 세계, 나의 민족과 세계국가가 서로 맞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은 나의 민족의 생각, 나의 말은 나의 민족의 말로서만 경험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국가적·세계민중적 경험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중요합니다.   “지금의 민중은 국가주의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를 지배해온 것은 민족사상이었지만 이것은 민족이 말한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의 지배자가 그렇게 말을 붙여온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68쪽) 민족의 이데올로기, 민족의 경계, 민족의 의식이 과연 민중의 것이었는가를 되짚어봐야 합니다. 그것이 지배자의 것이었다면 탈피해야 합니다. 지배 계급에 의해서 명명되고 규정된 것이 모아지고(legein) 말하여진 혹은 읽힌 것(legen, lesen)이 민족사상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함석헌이 지적하고 있듯이, “민중이란 민족이 다르다고 해서 적의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68쪽) 민중은 적의가 없습니다. 민중의 생각은 민족주의, 민족의 이념을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민중의 생각은 열려 있습니다. 민중이 읽고 민중이 모아(legein) 비은폐시키려고(un-concealment) 하는 것은 세계국가주의 혹은 세계민중주의입니다. 항상 관계를 생각하며 평화를 말하는(logos) 주체는 지배 계급이 아니라 민중입니다.   경계와 구분, 차별을 철폐하고 영원히 고착화되어 있는 적대감을 하나의 의식, 하나의 통일된 생각으로 품으려고 하는 것이 민중입니다. 더군다나 민중이 생각하는 것은 국가, 민족, 이념이 아니라 ‘인간성’입니다. “이 세상에 인류가 살아가는 것은... 인간 속에 있는 서로서로의 인간성이 자기를 능히 희생해서라도 서로서로 같이 살아가자 하는 인간성이지, 이것이 사회와 국가를 유지해가는 힘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68쪽)   민중의 공통된 인간이 상호성을 보장하고 각 사회와 국가를 유지합니다. 인간성이 담보되지 않은 국가는 폭력을 행사하게 되고 사이적 존재와 타자적 국가에 대한 호혜성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민중을 통해서 세계국가주의(세계민중주의)는 각 민중의 앞에 함께 서 있도록, 하나로 모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국가주의(세계민중주의)는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서로의 앞에 함께 서 있지 못할 것입니다.   그 희생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영적인 데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적인 데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점에 느낄 수 있는, 영적인 것에 갈 수 있는 것이 인간일 것입니다... 인류에게 지식이 있지만 지식만이 아니고 도덕적인 점 영적인 점이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에 접하는 그 점이 대화의 참 중요한 점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69쪽)   자신을 희생하여 세계국가주의를 만들어가려면 민중 각 개인이 철저하게 영적·도덕적·정신적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유연성, 즉 서로가 서로에게 고체적 부딪침을 방지하려면, 그래서 세계국가주의를 형성하려면, 영적·도덕적·정신적 존재에 토대를 두고 대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계국가주의를 위한 또 하나의 가능성은 개인의 생각이 전체 생각(전체주의와는 분명히 다른)이 되어야 합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에버하르트 윙엘(E. Jüngel)은 말합니다. “선이란 우리가 무조건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진리입니다. 선이란 다른 사람을 평준화하지 않는 것, 획일적으로 다른 삶을 배척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악이란 남과 함께 사는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J. Moltmann, 이신건 옮김, 나는 어떻게 변하였는가, 한들, 1998, 137쪽) 또한 함석헌은 “지금까지는 개인이 생각하는 역사였지만 이 앞으로는 전체가 생각하는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함석헌, 위의 책, 373쪽)고 말합니다.   개별적 존재의 사유만으로 세계국가주의가 될 수 있고, 세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은 부족합니다. ‘전체’가 ‘생각’해야 합니다. ‘전체’가 선을 지향해야, ‘전체’가 사고해야 하고 ‘전체’가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생각이 세계국가주의를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체’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입니다. 생각이 있고 전체가 있는 것이지 전체가 있고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 민중이 깨어나서 생각할 수 있다면 전체는 얼마든지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과 같이 국제적인 협력을 심각히 요구하는 시대는 없는 것 같다. 이 국제적인 협력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국가주의(Nationalism)이다. 앞에서 새 종교 새 국가관이 나와야 한다는 말은 민중의 역사, 민중의 종교, 즉 몇몇 사람들의, 지배 계급의, 독재자의 역사나 종교가 아닌 온 평민의 역사,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373쪽)   국가주의를 넘어야, 국가주의를 폭로해야(비은폐) 새 종교, 새 국가관, 즉 민중이 중심이 되는 종교, 민중이 중심이 되는 국가가 나올 수 있습니다. 지배 계급에 의존하지 않는 민중만이 초월자의 새로운 생각을 말할 수 있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민중의 소리만이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전언(message)을 말할 수 있습니다. 민중만이 국가라는 숙명적인 틀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가 모든 것(전체, One is All)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민중은 지배가 아니라 각 개인을 위한 주인으로 모이기 때문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07-23
  • 자본을 넘어 정신세계로의 상승과 이성의 시대
      종교적 정신의 향유, 종교적 정신에 의한 저항, 종교적 사랑, 종교적 지혜, 종교적 자유가 자본의 환상과 강요를 부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살게 할 것입니다.    영문학자이자 비교문학자인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가 간파했듯이, 지금의 세계는 드라큘라(자본가)와 프랑켄슈타인(노동자)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흡혈귀 드라큘라는 죽지 않고 산 사람의 피를 빨아 먹고 한 방울의 피도 허비하지도 않습니다.   자본가들에게 “악마들의 종족”인 프롤레타리아 괴물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시민권을 갖기 원하지만, 부르주아 계급은 그러한 괴물이 두려워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이 세계를 지배할지도, 영원히 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입니다(F. Moretti, 조형준 옮김, 공포의 변증법, 새물결, 2014, 22-34쪽).   흉측하게 생긴 비참한 사람(노동자)과 잔혹한 소유자(자본가)(F. Moretti, 위의 책, 20쪽)의 계급 갈등은 신자유주의라는 독점자본주의에 의해서 노동자의 착취와 고통의 심연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면서 부르주아 계급은 근로소득이 아닌 자신의 자산을 이용하여 불로소득을 확장하게 되는 불한당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꼬집습니다. “육이나 정신의 세계에서도 일은 해야 합니다. 일은 노력하는 것, 즉 나를 쓰는 것입니다. 고생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간디는 매일 두 시간 이상을 물레를 돌리며 일을 했는데 여기에 그의 놀라운 점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일을 하고 먹도록 되어 있는데 오로지 정치 경제 구조는 일하지 않고도 먹게끔 되어 있는 데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 불한당 계급이 생김으로 해서 세상엔 점점 차별이 생기고, 부정과 부패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한 뱃길 19, 한길사, 1985, 360쪽)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결국 부르주아 계급, 즉 흡혈귀 드라큘라의 승리로 끝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산 자를 죽이면서 피를 빨아 먹는 흡혈귀는 산 자가 사라지는 순간, 흡혈귀도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단순한 논리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흡혈귀의 사냥 본능을 저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욕망의 어두움과 자본의 페티시즘(fetishism·物神崇拜)의 극복은 빛과 이성(理性)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일소시키고 드라큘라와 맞설 수 있는 정신입니다.   자본에 대한 꿈에서 깨어나서 오로지 정신만이 희망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만이 흡혈귀 자본가를 이길 수 있습니다. “문명이 발달하려면 기계화를 인정해야 되는데, 그 대신에 정신생활이 독립적인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개체가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60쪽)   정신적 주체, 인간의 절대적 가치를 우선으로 하고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자본의 광기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무엇에 매여 있는가를 스스로 인식하고 자신도 드라큘라의 후손(종족)이 되려는 야릇한 충동과 억압된 물신적 콤플렉스를 이겨내야 합니다. 현대사회가 자본의 공포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인간 상실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그것을 유도하는 매커니즘을 타파해야 합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도덕을 인간의 본능으로 봄으로써, “도덕성은 우리의 조상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여러 적응적 문제들을 풀고자 선택된 보편적인 심리 기제의 산물”(전중환, 오래된 연장통, 사이언스북스, 2010, 192쪽)이라고 말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설 수 있는 인간의 힘은 정신, 곧 도덕적 본능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착취와 고통, 억압이 만연되어 있는 상황을 타개해나가기 위해서는 인간이 가진 보편적 심리적 기제, 도덕적 직관(moral intuition)-이것은 분노, 감사, 죄책감, 동정 등과 같은 도덕적 정서에 의해서 작동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불확실하고 위험한 세계에서 살아남고자 어떤 사건의 옳고 그름에 대해 빠르고 즉각적인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도덕적 추론(moral reasoning)은 정서의 개입이 거의 없이 합리적 이성에 의해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전중환은 진화론적으로 인간의 도덕적 판단은 도덕적 추론보다 도덕적 직관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합니다-이 앞서 있어야 합니다(전중환, 위의 책, 190-191쪽).   그래서 자본의 미몽에서 깨어나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물질적 도착이지, 프랑켄슈타인 괴물로 규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괴물은 의식하는 인간, 자유로운 인간,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을 꿈꿀 수 없다는 공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와 같은 욕구와 욕망은 버리면 안 됩니다.   ▲ 종교적 정신의 향유, 종교적 정신에 의한 저항, 종교적 사랑, 종교적 지혜, 종교적 자유가 자본의 환상과 강요를 부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살게 할 것입니다.     종교는 그러한 희망을 만들어주는 역할은 합니다. 종교는 인간 자신과 삶을 자각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력으로 라는 점입니다. 의식적 정신, 자기 의지라는 겁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내가 노력해서 깨닫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에서 그런 폐단이 많은데 신앙이야말로 자기 스스로 해야지 남의 것을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처음에는 모방해서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끝까지 모방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모방하면 그것은 죽은 것이지 산 것이 아닙니다.”(함석헌, 앞의 책, 361쪽)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종교가 맹목적으로, 자신의 의지도 저버린 채 모방으로 치닫게 되면 안 됩니다. 함석헌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모방은 모방으로 끝나야지 그 자체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종교는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지탱이나 유지가 아닙니다. 초탈과 돌파(breakthrough)입니다. 자신의 삶을 변형시키고 형태를 바꾸는 작업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현상유지(status quo)가 종교의 목적이 아닙니다. 종교는 존재 변화입니다. 자본의 지배와 물질 중심의 문화 현상(현실)을 신앙의 눈으로 해석하고, 자본의 신비화에 대항한 종교 창시자의 영성을 내면화하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한 발 더 나아가서 거기에 머물지 말고 신앙적 이성에 호소하고 자본의 공포와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자기 정신의 고양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흡혈귀로부터 도망을 치거나 잡혀서 피를 빨리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그 힘이 은폐된 강력한 위협을 무화(無化)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초월자에 대한 근본성찰에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충동을 흡혈귀의 그것보다 더 두려워할 때에 죽음의 파국을 막을 수 있습니다. 흡혈귀의 생존 욕망은 인간 자신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욕망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자본을 숭고하다고 인식하는 순간, 자신의 내면적 이성의 숭고함이 파괴된다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라지면, 욕망하는 내가 무(無)가 되면 흡혈귀 역시 그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낼 대상을 찾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의 최고의 자리가 자기의 자유를 부정하는 데 있다는 것, 즉 내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무력하게 내버리는 것으로 내 마음을 완전히 비게 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올 수 있게 됩니다.”(함석헌, 위의 책, 361)   함석헌이 자신을 무력하게 내버려두라는 것은 자본의 숭고함과 신비함을 무력화시키라는 말과 같습니다. 나를 무력화시키고, 내 안에서 꿈틀대는 욕망을 잠재울 때 타자의 욕망의 흐름도 와해됩니다. 그것을 위해서 단순히 종교의 힘을 빌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는 인간의 본래성, 즉 자신을 무화시키는 것을 통해 자신의 본모습을 찾으라고 종용합니다.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항상 인간의 본질을 깨닫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나를 비워야 초월자로 채울 수 있다는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숭고함은 인간 바깥의 대상이나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흡혈귀적 욕망을 버리면, 내 안의 숭고 그 자체와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의식의 바깥에 있는 대상을 욕망하려하지 말고 도덕적 이념의 근원인 자기 내면 정신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말합니다. “참 죽음은 자기를 죽이는 것, 스스로 기쁘게 죽는 것이어야 참 죽음인데 죽음을 죽음으로 알아서는 죽지 못합니다. 참 생명은 죽어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61쪽)   죽어도 죽지 않은 길, 그것만이 우리가 흡혈귀 드라큘라를 멸종시키고, 타자의 권력 의지가 지칭하는 악마들의 종족까지도 의심하며 새로운 질서, 새로운 성찰로 경로를 바꿀 수 있습니다. “정신세계로의 상승”만이 우리의 참 생명이 될 수 있습니다. 정신은 죽일 수도, 죽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본이나 물질은 종교의 대립적 욕망입니다. 그 욕망은 인간을 계속해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것이 무서우면 무서울수록 인간은 교화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프랑코 모레티의 말을 빌린다면, “공포의 변증법”입니다. 자본의 공포가 인간을 위협하며 죽이려 할 때에 거기에 굴욕적으로 도피하거나 정신적 무릎을 꿇게 되는 공포야말로 더 큰 공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그 공포를 근본적으로 무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 토대는 무엇일까요? 종교적 근본정신의 회귀입니다. 설령 진화심리학들이 “종교는 하나의 진화적 적응이 아니라, 다른 보편적인 심리적 적응들에 우연히 딸린 부산물로서 종교본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우리’와 ‘너희’를 엄격하게 구별하여 내 집단을 챙기고 다른 집단을 배척하는 동맹심리(coalitional psychology)가 종교적 헌신을 부수적으로 낳는다.”(전중환, 앞의 책, 217-220쪽)고 할지라도, 함석헌이 말하듯이, “우리의 양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그를 먹음으로 산다.”(함석헌, 앞의 책, 362쪽)는 것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종교적 정신의 향유, 종교적 정신에 의한 저항, 종교적 사랑, 종교적 지혜, 종교적 자유가 자본의 환상과 강요를 부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살게 할 것입니다. 그들이 정신의 양식(糧食)으로 먹었던 것, 성인(聖人)들이 생각했던 것, 성인들의 정신적 자취가 새로운 사회체를 구성함으로써, 영원히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적 서사의 발생처, 기원, 발생자의 그림을 그리는(Bildung, 교양) 서사의 체계가 온전히 체득되고, 종교 서사의 세계와 나의 생활세계가 완전히 일치되어 있는 것, 정신의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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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15
  • 가상(假象)의 생철학적 기적과 의미 서사
       기적은 사적 이기심이나 이익을 벗어던지고 초월자의 뜻에 맡길 때 일어난다.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답해야 한다.”(Viktor E. Frankl, 박현용 옮김, 빅토르 프랑클 회상록.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 책세상, 2012, 205쪽)   종교적 서사(narrative)가 어떤 기적을 규명·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종교현상과 종교체험은 기적의 연속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교가 초월적인 존재에게 염원하는 바를 발원하면 자연 질서 속에서 강력한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적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한 물음보다는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관심에 더 집중되어 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기적에 대한 근본물음, 즉 ‘기적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기보다는 사적 관심, 사적 이익에 따라 개인의 신변을 유리한 쪽으로 변경하기 위해서 초월적 존재에 발원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우만(Z. Bauman)은 이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인간은 논리학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적 때문에 신을 필요로 합니다. 신의 투명성과 일상적 모습 때문이 아니라 불가사의함과 예견 불가능성 때문에 말이죠. 사건들의 흐름을 뒤집어버릴 수 있는 신의 능력 때문에 말이죠. 사물들의 질서에 노예적으로 복종하는 대신-인간은 그렇게 하도록 강요되며, 또 대부분의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렇게 하고 있지요-그것을 한 켠으로 밀어젖힐 수 있는 신의 능력 때문에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의 이해와 행동 능력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저 모든 무시무시한, 겉보기로는 감각이 없고 말이 없는 맹목적 힘들을 설명하고, 바라기로는 길들이고 순치시키기 위해서입니다.”(Z. Bauman, 조형준 옮김, 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 새물결, 2014, 227쪽)   ▲ 기적은 사적 이기심이나 이익을 벗어던지고 초월자의 뜻에 맡길 때 일어납니다.     이를 가볍게 여기지 않은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적의 의미는 ‘어떻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왜’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기적을 많이 행한대도 그것으로 인간의 건강문제, 경제문제, 정치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행하신 것은 그것으로 어떤 뜻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한 뱃길 19, 한길사, 1985, 355쪽)   기적은 이유와 까닭의 문제요, 뜻의 문제라는 겁니다. 기적을 행하는 자가 발원하는 자를 위해서 마음껏 자기 실력과 능력을 뽐내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종교적 기적의 서사는 도대체 왜 그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초점이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사건 혹은 어느 정도 바랐던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는 분명한 뜻이 있게 마련입니다. 로고테라피(의미요법)의 창시자 빅토르 프랑클(Viktor E. Frankl)이 말한 것처럼,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어떤 궁극적인 의미, 다시 말해 초월적인 의미를 가져야만 한다. 인간은 그 초월적인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그저 믿어야만 한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Viktor E. Frankl, 박현용 옮김, 빅토르 프랑클 회상록.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 책세상, 2012, 79쪽)라고 받아들인다면, 기적에는 궁극적인 어떤 의미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에는 “초월적인 의미”로서의 기적과도 같은 운명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과 삶에 대한 서사는 이미 의미 연관 구조 속에서 기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기적 서술과 기적 고백으로 할 것인가 말 것인가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마치 삶에서 뜻이 현현한다면, 삶에 뜻이 없는 것이 있을 수 없다고 가정한다면 삶은 기적의 연속이라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기적의 서술은 삶의 뜻을 발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빅토르 프랑클이 생사가 오가는 죽음의 강제수용소에서 삶의 의미와 해답을 찾으면서 그것을 잊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살아야 할 의지는 삶의 뜻을 발견할 때 매순간 기적 같은 사건들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함석헌의 이야기를 더 들어봅시다. “예수님이 기적을 많이 행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낡은 질서 속에 평안하다 하고 있다가 말라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것을 깨치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미 있는 질서가 깨지면 사람은 다시 깊이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면 새 시대가 열리고 그 새 시대에 맞추려면 노력하게 되고 그 노력 가운데 역사의 진보가 있어 생명은 일단 높은 데 가게 됩니다.”(함석헌, 앞의 책, 356쪽)   그가 말하는 속뜻은 기적이란 종래의 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 생명의 질서, 진보의 질서를 전개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기존의 질서, 현 질서를 고수하려 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깨우쳐 꿰뚫고 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뜻, 새로운 의미를 위해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의지를 강하게 하지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소이연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 체제와 질서 속에서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질서란 한번 만들어지면 좋은 것도 있지만, 사람을 부자연스럽게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들이 있어서 결국 구속과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생명의 진보와 생명의 진화가 멈추게 됩니다.   “이 세상의 근본 질서는 너, 나, 네 것, 내 것을 구별하는 데 있습니다... 쓰면 없어진다, 네 것은 네 것이고 내 것은 내 것이라는 그대로가 진리가 아니다 하는 것을 알려주자는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57쪽) 질서는 구분, 구별, 차별로 치닫게 됩니다.   비판적인 시각에서 볼 때, 질서가 계급을 정당화하고 빈부의 격차를 당연시하며 통제를 가장한 폭력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설령 그것을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종래의 질서를 개혁하려는 의지와 행동이 좌절되곤 합니다.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는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Viktor E. Frankl, 앞의 책, 71쪽) 그러므로 기적은 그러한 것들을 뒤집는 데 있습니다. 예수의 기적 서사/사화가 말하는 것은 단지 자연 질서를 역행하는 비과학적 서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적은 철저하게 삶의 왜곡된 현상에 대해서 바로 잡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현대의 문제를 순 경제, 정치적으로만 생각해서는 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문제가 문제되는 근본 까닭은 사람은 물질로만은 살 수 없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인간이 된 점은 도덕적인 것이 그 인격의 핵심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함석헌, 앞의 책, 357쪽)   오늘날 삶의 질서와 척도는 경제적 힘과 가치, 즉 돈에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계의 근본 질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초월자에게 물질적 축적을 위한 발원을 하기 마련입니다. 물질적인 축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물질적 질서에 편승하기만 하면 되니 말입니다. 빅토르 프랑클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꺼리를 던져줍니다.   “사람에게는 돈이 필요하지만, 돈을 소유하는 진정한 의미는 돈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있다는 것이 소박한 내 생각이다.”(Viktor E. Frankl, 앞의 책, 184쪽)   돈을 생각하지 않는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것을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가 보여주었습니다.   인간적인 질서는, 인간적인 삶은 도덕적 가치와 인격에 있습니다. 모든 삶은 그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물질적 토대 위에서 도덕이나 인격이 설 수 없습니다. 도덕과 인격의 구조 속에서 나눔과 베풂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빅토르 프랑클의 다음의 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니힐리스트들의 신랄한 냉소와 냉소주의자들의 니힐리즘에 반대한다... 그 악순환의 고리(circulus vitiosus)를 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한 가지이다. 즉 폭로하는 자를 폭로하는 것... 폭로를 멈출 수 없는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진정성을, 즉 인간의 인간적인 것을 평가절하하는 무의식적인 경향만이 폭로된다.”(Viktor E. Frankl, 앞의 책, 196-197쪽)   인간적 세상을 위한 폭로. 폭로는 새로운 질서로의 편입을 가능하게 합니다. 달리 말하면 기적 같은 사건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기적이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도덕적 가치, 인격적 성숙을 우선으로 하는 인간적인 세상을 이루게 될 때, 그렇게 인정, 서술할 수 있습니다.   초월자의 역사 개입을 통해 시공간의 잉여를 확보함으로써 삶의 허무와 공백을 메우는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마술이나 요술도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공백은 존재의 낡은 질서 속에 계속 머무르는 것입니다. 낡은 질서는 바우만이 말하는 “인간 쓰레기”가 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의미 없는 잉여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기적을 받아들이는 심리는 나의 판단을 완전히 버리고 순전히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태도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서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생명의 약진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함석헌, 앞의 책, 358쪽)   기적은 사적 이기심이나 이익을 벗어던지고 초월자의 뜻에 맡길 때 일어납니다. 이른바 “생명의 약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기적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생명이 계속 살도록 맡기는 일입니다.   생명은 거듭 사는 것입니다. 생명은 쉬지 않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인생을 살라고 생각하라. 첫 번째 인생을 잘못해서 모두 망쳤는데, 두 번째 인생을 살면서도 지난번의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라. 실제로 책임감은 그런 가상의 자서전을 거쳐 진짜 자신의 삶으로 옮겨 가게 된다.”(Viktor E. Frankl, 앞의 책, 193쪽)   의미의 연속, 의미의 질서가 깨지면 새로운 질서를 필요로 합니다. 물론 하나의 질서를 깨고 또 다른 질서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기적은 그 불안을 극복하고 새로운 실존으로의 도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적 기적의 서사 구조나 종교 기적 서술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실존의 변화입니다. 상황이나 조건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실존적 인식의 변화가 기적이었습니다. 이것을 달리 실존적 의미 구조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와 관계 맺고 있는 나의 의미, 관계적 의미에 초월자의 뜻을 온전히 흡수해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에 바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비로소 초월자의 뜻에 자신의 실존을 맡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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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10
  • 내적 삶의 구원과 종교적 발화의 진정성
        진정한 신앙은 죽어서 본 모습이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로 탈바꿈되어야 한다.    인간이 종교-내-존재 혹은 신앙-내-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그것은 말로서 만도 아니요 글로서 만도 아닌 행동으로서 증명해내는 일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말하기와 글쓰기를 넘어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 행동이 종교 안, 신앙 안에 있다고 말해줍니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가 종교 노릇을 못하고 인간의 존재가 종교의식, 즉 종교 내적 존재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이 아예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그런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이유를 함석헌은, 그리스도교가 민중의 의식, 민중의 정신을 선도하지 못하고 감격을 주지 못하면서 단지 현상유지에만 급급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1985, 319쪽).   모든 인간은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종교인 혹은 그리스도인만이라도 종교 내적 삶이 가능하도록 해야 하는 그것은 고사하고 민중의 정신을 깨우지 못하는 종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종교적 실존의 가능성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종교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정신이고 의식이고 영입니다. 종교가 그것을 표현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힘이 없다면 인간의 정신 성장은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문사철(文史哲)의 종말을 고하는 이때에, 그나마 명맥을 유지한다는 것이 겨우 자본의 시녀 역할이나 하고, 자기 계발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상황에서 종교는 고도의 정신세계를 그려줄 수 있고 제시해줄 수 있는 보루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신적·감정적 감격을 불러일으키려면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으로부터의 성찰이 전제되어야 호소력이 있습니다.   종교가 종교 본연의 역할, 즉 정신적 계몽은 하지 않고 도리어 조직과 체계와 건물과 형식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안간힘을 쓴다면 종교는 희망이 없습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종교 내적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종교 지향적 삶을 살고, 종교를 갈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는 토대는 오직 종교가 정신에 목적을 두고 있을 때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종교가 종교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조직체로서의 종교가 죽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조직·체제·건물·외형·물질 등의 가변적이고 가시적인 데에 치중하는 종교가 본질에 충실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민중의 의식은 변하고 또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데, 종교는 여전히 외양의 큰 건물, 세력 확장, 예산 증액, 자본주의적 성공신화, 성과위주의 목표를 지향한다면 시대를 역행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시대를 잘못 읽고 있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부흥이나 개량가지고서는 안 된다.’고 비판합니다. 철저한 회개와 자기 성찰이 있지 않으면 안 되며, 근본부터 새로 움트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처음으로 돌아가 토대부터 새롭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예전에 고수했던 구태, 즉 부흥론을 벗어던지고 신앙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언명대로 죽고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죽어서 본 모습이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로 탈바꿈되어야 하는데, 그래야 본질이 살고 본질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인데, 죽지 않으려고 하니까 문제가 됩니다(함석헌, 위의 책, 320-321쪽).    ▲ 시대가 맥락을 잘못 해석하더라도 종교는 그것들을 무한히 끊임없이 초극하려는 의지를 가질 때 가능합니다.     낡은 종교를 해체해야 합니다. 본질에 부합하지 않는 기업형·상업형·자본형·홍보형·관광형 종교를 해체하여 새롭게 재구성해야 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21쪽).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신을 앞세우고 정신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는 종교는 모두 해체되어야만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종교적 실존의 올곧은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시대가 다 타협을 하고, 시대가 자본을 중시하고 시대가 무비판적이고, 시대가 진보하지 않고 안주하고, 시대가 맥락을 잘못 해석하더라도 종교는 그것들을 무한히 끊임없이 초극하려는 의지를 가질 때 가능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가 자신의 시대를 초극하려고 할 때 발전이 있어왔습니다. 자신의 시대를 넘어서는 종교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시대에 안접(安接)하고 타협하려고 했던 종교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323쪽).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종교가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이 시대를 초극할 수 있을까요?   “갈릴래아 어부의 씨”, “소박한 자유 독립의 신앙”을 가진 실존이 되는 일이 중요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24쪽). 갈릴래아의 정신적 바탕, 갈릴래아 제자들의 감동을 간직한 종교인, 갈릴래아 제자들의 순수와 열정을 계승한 종교인, 처음 즉 신앙의 본질을 찾고 그것에 충후(忠厚)한 종교인이 되어야 표본이 되고 사표가 됩니다. 정신의 좌표, 신앙의 기수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어떤 체제·강제·조직·계급과는 상관없는 자유로운 종교인이 요청됩니다. 종교는 자유입니다. 종교는 억압(抑壓)이나 농반(籠絆)이나 기속(羈束)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종교적 삶에 대해서 자기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책임을 지는 종교인이 될 때, 종교가 성숙할 수 있습니다.   당분간의 지지와 의존, 지도는 필요할지는 몰라도, 정신의 성년이 되었을 때는 더 이상 자유로운 신앙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개인이 신 앞에서 단독자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가 건강하고 성숙하려면 개별적인 종교적 실존들이 제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개인이 깨어야 종교 총합의 정신이 깨이게 됩니다. 우리의 실존적 토대와 근거는 오직 예수에게만 두면 됩니다. “예수는 진리의 세계, 생명의 세계를 말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29쪽)   진리와 생명을 깨우쳐 주는 종교가 참을 지향합니다. 종교 발언과 종교 신앙의 방향이 항상 근원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종교 본연이 색깔을 잃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종교가 참 종교인가 거짓 종교인가의 판별을 종교가 추구하는 본질을 지속적으로 묻고 그에 부합하려고 하는지에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종교 논리의 참 거짓의 여부는 종교의 형식·규모·교리·조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본질, 종교 그 자체, 종교 그 원형, 종교 그 사태로 자꾸 거슬러 올라가려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종교가 담지하고 있는 최초의 그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종교가 종교 발언과 종교 행위도 정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의 본질을 주관적 신념과 계획된 발언, 의도된 방향에 두지 말고 내면과 영혼 속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있다면, 우리 영혼 속에서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있다면 속임 없고, 껍데기 없는 우리 영혼밖에 없다.”(함석헌, 위의 책, 333쪽).     ▲ 진정한 신앙은 죽어서 본 모습이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로 탈바꿈되어야 한다.     종교적 언표는 즉흥적일 수 없고 자의적일 수 없습니다. 종교 전문가 혹은 종교 지도자라 할지라도 종교적 언표에는 책임과 겸손이 뒤따라야 합니다. 언표 속에 진심과 진실, 진리가 내포되지 않고 단지 거짓된 언표와 자의적 해석에 입각한 진리 선동적 발화로 일관할 경우 초월자의 만남이 오해가 되거나 잘못된 정보와 확신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종교적 발언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내면의 초월자, 내면의 누미노제(Numinose·순수한 비합리적, 종교적인 성스러움)와 진정한 만남을 통한 숙고된 발언이 아니라면 진정성이 결여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는 종교적인 공적 발언과 언표, 곧 전도는 지극히 개별적이고 주관적 확신에서 나온 사적 진리 체험 행위라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는 너희 위해 하는 것도 아니요, 씨 뿌린 자 위해 하는 것도 아니요, 아버지를 위해 명하신 대로 하는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335-336쪽)   이렇듯 겸허한 언표만이 타자를 배려하는 종교가 될 수 있고 타자를 이해하는 종교적 실존이 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선교가 사(私)가 아니라 공(公)이 되고, 노력이 아니라 초월자에 대한 헌신된 태도로 비치기 위해서는 각 개별자 안에 있는 종교적 신념을 존중해야 합니다.   진리는 공동체와 공동체, 개별자와 개별자 사이의 소통불가능한 아포리아(Aporia·해결 방안을 찾을 수 없는 난관)가 아닙니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진리는 선물입니다.”(Jean-Paul Sartre, 정소정 옮김,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2009, 9쪽)   그러므로 진리 언표의 주장에 대해서 자신의 절대적 언어 놀이 공간이 중요한 만큼 타자의 진리 언표 주장에 대한 공간을 선물로서 인식, 공유할 수 있는 종교적 진리 담론의 상호주관적 의사소통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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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30
  • 교회여! 상업화를 버려라
      복음이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리고 불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복음을 종교 사업의 수단이요, 교회 규모의 확장 수단으로 생각하는 복음 판매 상인들의 태도 때문이다.    복음(福音)은 그리스 어원적으로 ‘기쁜 소식’(euangelion, good news) 혹은 ‘좋은 소식’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교적 시각에서 보자면 예수 그 자체가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고,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가 민중들에게 기쁨과 구원과 해방과 화해를 가지고 온 것처럼,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도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종교에게는 그야말로 순기능적인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석헌은 헐값에 “복음이 팔린다.”고 비판합니다. 복음이 터무니없는 상술적인 자본의 가치에 매매가 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복음이 타자의 기쁨, 구원, 해방, 화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업 행위로 전락이 되어 버렸습니다. 판매하는 복음상인도 문제이거니와 복음을 사서 사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복음의 구입자도 문제입니다.   그들 모두가 복음을 왜곡하고 매도하고 복음을 퇴색시키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한 뱃길 19, 한길사, 1985, 312-313쪽). 함석헌은 더 나아가 복음은 증거될 뿐이지 강요하거나 판매될 것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복음상인은 “영혼을 구할 능력도 권세도 없다.”라고 봅니다. 복음은 몸으로 증거하고 마음으로 새겨야 합니다. 복음은 타자에게 강압적으로 반드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은 자칫 판매가 됩니다.   ▲ 복음은 몸으로 증거하고 마음으로 새겨야 합니다.     공자는 『논어』 「술이」편(「述而」編)에서 ‘묵이지지’(黙而識之)라는 말을 했습니다. 진리를 알게 되었다고 경박하게 떠들어 댈 것이 아니라, 우선 마음에 두고두고 새겨야 합니다.   증거라고 하는 것이 마치 입으로, 말로 떠들어 대는 것이어야 할 것 같지만, 예수의 말씀과 행업을 몸으로 살아내지 않고는 무용지물입니다. 복음도 해석학을 통하여 이해하고 감정이입이 되어야 합니다.   말을 이해하고 문자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나의 눈과 마음을 언어 사용자의 눈높이로 맞춰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복음을 해석해서 말을 전해야 하는 대상, 즉 타자가 누구인지, 나와 마주 서 있는 타자가 누구인지를 해석해야 하고, 그보다 앞서 나 자신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져야 나에 대한 이해와 타자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적절한 복음이 발생하는 적합한 장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제하지 않고, 해석학적 이해가 없이 복음을 말만 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며, 약장수와 같은, 물건을 팔기 위해 인간을 수단으로 여기는 매매 행위만이 발생할 뿐입니다.   여기에서 복음을 위한 상도(商道)를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어차피 상도를 말한다고 해도 복음을 매매하기 위한 상술에 불과할 것이니 말입니다.   복음은 사건(ereignis)이요, 발생(geschehen)입니다. 예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 독특하면서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이것이 증거가 말로만 하는 행위로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복음이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리고 불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복음을 종교 사업의 수단이요 교회 규모의 확장 수단으로 생각하는 복음 판매 상인들의 태도 때문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14쪽).   지금까지 교회는 복음을 교회 사업을 위해서, 교회 세력을 불리기 위해서 말해왔습니다. 타자의 마음과 상황과 처지가 어떠한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음 판매 상인의 자기 성찰적 해석도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복음을 소비해주는 청중이 중요할 뿐입니다. 어떻게 복음을 소비하도록 할 것인가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함석헌은 말합니다. “복음은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살 수도 없고 살 필요도 없다.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복음이라고는 할 수 없다. 복음이 복음된 소이는 대가 없이 누구나 받을 수 있다는 데 있다.”(함석헌, 위의 책, 314쪽)   복음은 무상(無償)입니다. 복음은 무차별적입니다. 그러니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복음이 대가가 있는 것이라면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은 부자나 가난한 자, 지배자나 피지배자, 남자나 여자, 어른이나 어린이 등 누구에게만 열려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누구든지 만날 수 있었고, 예수는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에 대한 이야기, 즉 복음을 들으려면 헌금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복음에 값을 지불하도록 한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사람의 근본을 바꾸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되도록 하는 모집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315쪽). 복음은 돈이 있고 계급이 있다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자본가라고 해서 복음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대가가 없습니다. 파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삶으로 구현해야 할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대가가 없지만 듣는 이의 성찰과 행동변화를 요구합니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의 삶을 남김없이 배워서 또 한 사람의 예수로, 또 한 사람의 예수 따르미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거듭난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모, 처자, 형제자매 등을 버리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포기와 따름의(이 수반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수양도 아니요 개량도 아니다.”(함석헌, 위의 책, 316쪽) “예수를 믿어 풍부한 교양을 얻으려는 자는 가라. 사회에 유익한 사업을 하려는 자도 가라. 무슨 이익을 얻으려는 자는 첫째로 가라. 예수는 오직 자기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자기에 의하여 새로 살기를 원하는 자만을 허락한다. 크리스천은(문자대로) 생명을 버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함석헌, 위의 책, 317쪽)   종교인은 거짓된 자기 자신을 축조하지 말고 오직 신앙의 진실한 자기 자신을 축조하도록 해야 합니다. 종교를 교양의 도구로 생각하고, 종교를 사업의 수단으로 여기고, 종교를 통해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이들은 거짓된 자기 자신을 축조하는 사람입니다. 참 종교인은 그러한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에 의해 자기 자신을 축조하고 참된 자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매매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것의 포기, 심지어 생명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타자를 헌금의 대상이나 세력 확장으로 환원시키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타자와 더불어 한 몸이 되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로 인해서 얻게 된 새로운 삶만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버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생명의 포기는 다시 생명이 살아나기 위해서입니다.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소유가 아닙니다. 복음이 매매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사적 소유를 전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적 소유가 되어 판매 및 구입, 소비가 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공적이기 때문입니다.   ▲ 모두를 위한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 값싼 대가를 지불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종교에 대한 모욕입니다.     모두를 위한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 값싼 대가를 지불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종교에 대한 모욕입니다. 대가라면 오직 고통과 죽음, 그리고 그로인한 생명과 구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교양입니다-깨달음에 의한 의지(will)만이 작동될 뿐입니다. 깨달음의 의지가 강할 때 매매의 의지와 욕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함석헌의 깨달음의 의지, 십자가의 의지는 지배도, 독식도, 강제도 없는 적극적인 개인의 자유를 위한 것이기에 아나키즘적입니다. 어느 누구도 매매를 위한 특권이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정치학자이자 저널리스트였던 크리스토퍼 히친스(C. Hichens)는 “신도들을 속여먹기 좋은 장난감쯤으로 취급하는 종교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광경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두려움과 불안감에 휩싸인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믿으라며 이용하는 광경. 그렇다면 기도를 둘러싼 논쟁에서 도덕적 위기가 가까이 다가올 것 같은 순간에 우리 무신론자들이 가엾다는 표정을 짓더라도 너무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Christopher Hichens, 김승욱 옮김,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알마, 2014, 48쪽)고 말했습니다.   히친스는 속이는 종교, 인간의 두려움을 감소시키고 위안을 주는 대가로 복음을 판매하는 종교에 대해 냉소를 퍼붓습니다. 죽음의 상황에서도 그가 종교에 대해서 끝까지 무신론적 입장을 고수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혹 종교의 기만과 거짓, 그리고 술수로 복음을 헐값으로 취급하는 복음판매상과 복음 구매자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의지(will)하고 의욕하는 복음은 좌판대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으로서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포장한 시뮬라크르(Simulacre·흉내, 시늉, 복제의 복제물)가 아닙니다.   복음판매상과 복음구매자는 모든 그 시뮬라크르를 판매·소비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종교인은 말합니다. “나는 원한다. 십자가에의 의지를!”, “나는 행한다. 생명을 버리는 의지를!”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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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6
  • 욕망 주체의 욕망, 그리고 정치적 정의(正義)와 봉사
       국가 권력은 욕망의 대상이나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민중에 대한 봉사와 윤리적 실현에 있어야 합니다.     프로이트(S. Freud)의 정신분석학에서 ‘동일화’ 혹은 ‘동일시’(identification)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일정한 모델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동일시의 모델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아버지입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서 커다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 하며 아버지처럼 존재하고 아버지를 대신하려고 하면서 아버지를 이상화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욕망을 계승하여 아버지가 욕망하려는 것을 욕망합니다. 이른바 욕망의 모방이자 모방의 욕망입니다(R. Girard, 김진식·박무호 옮김, 폭력과 성스러움, 민음사, 1993, 254-257쪽).   그런데 여기서 주체의 욕망은 아버지가 욕망하는 것과 갈등을 일으킵니다. 아버지의 욕망 대상은 곧 어머니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초자아는 욕망의 주체에게 명령합니다. ‘너의 모델인 아버지처럼 그렇게 되어라. 너의 모델인 아버지처럼 그렇게 되지 마라.’ ‘그가 하는 모든 것을 하지 마라. 많은 것들은 오직 그에게만 허용되어 있다.’고 타부를 강화함으로써 주체의 초자아를 발달시킵니다(R. Girard, 위의 책, 267-270쪽).   우리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토대로 그녀/그의 욕망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그녀/그의 욕망은 모방된 것이고 학습된 것이고 전염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욕망을 주체 욕망과 동일시함으로써 자발적 욕망이 아닌 비자발적 욕망이 된 것입니다. 자신의 성적 리비도는 모방본능이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그녀/그의 초자아는 비정상적으로 발달하여서 아버지의 금기사항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모델처럼 되라. 아버지처럼 그렇게 되어라. 모델처럼 되지 마라. 너의 아버지처럼 그렇게 되지 마라.’ 그러면서 그녀/그는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외칩니다(R. Girard, 위의 책, 265쪽). 아버지의 욕망을 마치 주체 욕망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완벽하게 동일시합니다. 심지어 그녀/그는 폭력의 욕망마저도 주체 욕망으로 받아들입니다. 폭력을 은폐시키려고 아버지의 욕망의 대상을 욕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지만, 그녀/그는 오히려 폭력도 모방을 하고 맙니다.   아버지의 욕망 대상은 어머니이지만, 어머니는 애초에 주체 욕망의 욕망이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욕망 대상을 공유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체 욕망은 ‘찬탈의 욕망’을 숨기지도, 포기하지도 못하고 마침내 쟁취하고 맙니다. 그녀/그의 욕망은 국가 권력, 정치적 욕망이었음이 드러났고, 폭력의 모방은 현실적인 폭력으로 나타났습니다(R. Girard, 위의 책, 261, 495쪽).   그러나 그녀/그는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금지 명령을 일부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하는 것 모두를 하지 마라. 많은 것들은 오직 그에게만 허용되어 있다.” 설령 그녀/그가 아버지의 모방 본능에 사로잡혀 있다고는 하나 완전히 아버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녀/그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녀/그를 보고 아버지의 현현이라 해도 완벽한 모방은 불가능합니다. 아니 모방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욕망 주체는 그럴 수 없습니다. 많은 것들은 오직 그(아버지)에게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만 속해 있는 것을 한다는 것은 영원한 타부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금기로 남겨 놓으라는 명령을 어길 경우 남는 것은 좌절, 비통, 그리고 죽음입니다.   금기가 금기인 것으로 확인되는 순간은 이성의 간지(理性의 奸智, List der Vernunft)에 의해서입니다. 헤겔(G. W. F. Hegel)은 세계정신, 즉 이성은 자신의 역사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욕망에 사로잡힌 한 개인을 수단으로 이용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성의 그 목적을 다 달성하게 되면 그 개인을 헌신짝 버리듯이 내팽개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성의 간교한 지혜입니다.   아버지의 욕망을 주체 욕망으로 동일시해서 국가 권력과 정치 욕망으로 발전시킨 것은 분명한 모방 본능이지만, 역사의 어느 순간 이성은 그녀/그의 욕망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때가 올 것입니다.     탁월한 역사가 마이네케(F. Meinecke)는 국가 권력이란 “한 민족이 생존하기 위한 물질적 요구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인류 최고의 정신적·영적인 가치, 즉 문화와 종교에 대해 보일 수 있는 봉사를 통해서만 정당화된다.”고 말하면서 국가의 이념(윤리)가 현실(권력)이 종합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F. Meinecke, 이광주 옮김, 국가권력의 이념사, 한길사, 2010, 19, 38쪽).   국가 권력은 욕망의 대상이나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민중에 대한 봉사와 윤리적 실현에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국가 권력의 수장은 수확자가 아닙니다. 역사 전체로 보자면 권력자는 민중과 함께 씨를 뿌리는 자입니다. 좋은 씨를 선택해서 좋은 땅에-혹여 척박한 땅이라 할지라도-파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거두는 것은 그녀/그의 몫이 아니라, 주재자[민중]의 몫입니다.   ▲ 파종할 자가 수확자까지 되려고 하는 것은 교만이요 욕망주체의 바깥 영역입니다. 역사의 긴 시간, 촘촘히 씨줄과 날줄이 얽혀져서, 사건과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파종한 것들이 하나 둘씩 수확이 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역사는 수확의 역사가 아니요 파종의 역사다. 그리고 기약 없이 물 위에 파종하는 것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4, 311쪽). 이처럼 파종할 자가 수확자까지 되려고 하는 것은 교만이요 욕망주체의 바깥 영역입니다. 역사의 긴 시간, 촘촘히 씨줄과 날줄이 얽혀져서, 사건과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파종한 것들이 하나 둘씩 수확이 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당대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역사에서 욕심은 금물입니다. 모두가 파종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우리의 수확은 영원하고 무한한 값을 가진 것이다.”라고 말했는지 모릅니다(함석헌, 위의 책, 311쪽).   파종자는 “물 위에 씨를 뿌리는 이 대담! 영원의 추수일을 기다리는 이 끈기! 전우주과정으로써 일장의 승부로 삼은 이 웅대!”가 필요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나머지는 주재자[민중]에게 맡겨야 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11쪽). 오직 파종자는 “정의”를 욕망해야 합니다. 파종자의 정의는 이깁니다. 정의를 찾는 자가 종국에는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325쪽). 정의에 바탕 위에 서서 정치를 해야 합니다. 정의는 민중의 편입니다.   파종자는 민중과 더불어 정의를 파종하고 실현하는 민중의 봉사자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함석헌은 이렇게 고발합니다. “네 양심은 마비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정의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 사회를 본다면 이 건국을 끓이노라 부글부글하는 이 가마 속을 들여다본다면 적어도 부정의가 어디 있는 것은 보았어야 할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325-326쪽).   파종자(욕망 주체)는 양심성찰도 필요합니다.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눈살펴야 합니다. 데면데면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 구석구석, 나라 구석구석에 부정의가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욕망 주체는 자신을 아버지의 화신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될 경우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폭력의 전염성과 모방도 성적 리비도로서의 모방 본능 안에 각인되어 폭력적 정치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정의에 눈을 감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사회적 부정의로 일관한다면 역사의 파종은 고사하고 존재자인 민중에 의해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의 존재란 바로 그것이 ‘나타나는’ 것”(Jean Paul Sartre, 정소성 옮김,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2009, 12쪽)입니다. 민중은 욕망 주체의 병리를 원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바 양심, 존재하는바 정의가 그녀/그의 나타남이기를 원합니다. 그녀/그는 민중이 나타내기를 원하는 바를 나타내야 합니다.   욕망 주체의 욕망 대상과 민중의 욕망 대상이 동일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욕망 주체의 욕망과 아버지의 욕망을 동일시해서 마치 민중이 그 욕망을 바랄 것이라고 생각하고, 현실 욕망으로 호도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민중 역시 자기가 나타내기를 바라는 정치 본질의 현상과 아버지의 욕망이 동일하기를 바라는 욕망을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폭력과 희생도 우매한 민중 자신의 욕망을 위해 정당화될 수 있고,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정치현상의 수확자는 민중을 어리석은 희생양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민중은 정말 그녀/그가 민중을 위해서 봉사하고 정의를 구현하려고 애를 쓰는지, 헌법에 기초하여 파종하는지를 감시하고 또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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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12
  • 희생양 메커니즘과 정의(正義) 사유(思惟)
      사유는 생명이요, 욕망은 죽음입니다.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존재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4, 302쪽). 어쩌면 모든 생명적인 것들(숨탄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함석헌이 말하고 있는 것이 종교적인 의미에서 영혼의 생명일 수도 있고, 그것을 넘어선 다의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영혼의 생명성만 아니라 생명적인 것들의 본질인 본래적 생명입니다. 살고자 하는 의지, 살고자하는 욕구, 그것은 단지 영혼의 사안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생명적인 것의 직접적 현상은 무엇일까요? 말(saying) 혹은 말-하기입니다. 음성적 발화, 발성적 기관에 의한 소리-말 이전에 사유를 담은 뜻-말, 말을 하는 행위 전체가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말은 운명과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내짐입니다. 말은 메시지, 즉 전언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보내짐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은 목적과 방향을 지시하고 길을 냅니다. 말은 적어도 인간의 말인 이상 한갓 소리-말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발생/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말에는 생명이 있고, 생명적인 존재는 역사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Michael Roth, The Politics of Resistance: Heidegger’s Line,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6, p. 79).   그렇다면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의, 즉 정의입니다. 정의가 바로 서야 역사는 모든 인류 앞에 떳떳할 수 있습니다. 정의가 구현되지 않는 인간의 역사를 역사라 말할 수 없으며, 불의의 역사 또한 인간에게 도달한 치욕과 자존심의 훼손이라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은 “하나님의 의의 법칙, 그는 사랑이신 동시에 의다.”라고 말하면서 ‘의는 신앙에 의해서 깨달을 수 있다.’고 봅니다(함석헌, 앞의 책, 302-303).   우리가 적어도 초월적 존재를 상정한다면 그가 의도하는 지향성은 정의라는 형이상학적 가치일 것입니다. 인간 초월의 가능성을 신의 존재 가능성과 일치시킬 수 있다면 인간은 정의를 추구해야 하고, 정의를 위해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일깨워줍니다.   함석헌에 의하면, 신의 정의는 열강의 정의, 권력의 정의가 아니라, 인간의 맘을 다스리는 정의, 인류의 역사를 지배하는 정의, 영원을 향한 생명을 주는 정의라고 풀이합니다. 다시 말하면 정의는 강자가 만들어가고 강자에 의해서 길을 내는 정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02쪽). 그것은 마음과 마음이 맞닿아 있어서 정신의 흐름을 주도하고 생명을 천시하지 않는 약자를 위한 정의일 것입니다.   “복음은, 영혼 내부의 사실이다.” ‘구원을 얻는 자 먼저 의를 구한다.’(함석헌, 위의 책, 304쪽)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정신을 깨달은 자, 정신을 차린 자, 내면의 정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가 복음을 올바로 받아들인 자이고 구원을 얻은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운명은 말의 운명이고 존재의 기반을 둔 인간의 사유는 역사의 길, 정신적 역사의 길, 정신적 사유의 길을 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생명을 위하여 의를 구하라.”라고 말할 때, 모든 생명적인 것들이 소생하기 위해서는 정의가 필요합니다.   정의를 밑바탕에 둔 생명만이 인간의 존재방식의 독특함을 나타내 준다는 것입니다. 정의의 목적은 생명입니다. 정의는 생명의 길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장애가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입니다. 욕망은 먹기 위해서 먹고, 자기 위해서 자고, 입기 위해서 입습니다.   ▲ 정의의 목적은 생명입니다. 정의는 생명의 길을 내야 합니다.     “욕망이 욕망을 낳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298쪽). 욕망은 욕망 위에 욕망을 더합니다. 욕망은 욕망을 위해서 스스로 불의의 길을 냅니다. 욕망은 욕망을 위해서 죽음을 낳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욕망은 정치적 욕망, 자본의 욕망, 군사적 욕망 등이 인간의 근원적인 생존의 욕구를 유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 죽임의 욕망, 살인의 욕망으로 치환되었습니다.   말이 본래의 말이 되고 시간이 유일한 시간이 되고 공간이 자신의 공간이 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말(saying)은 이미 사건이 되었습니다. 말은 행위(행동)가 되었습니다. 말도 행동이고 말없음도 행동입니다. 살아 있는 자의 말도 행동이고, 죽어 있는 자의 말없음도 행동을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사유로서 말이 밖으로 던져낸 것은 사유의 외현입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든 4·16 세월호 참사이든 그들의 희생과 아픔은 모두에게 본질적으로 동일함에서 시작되는 다양한 사유를 쏟아내게 합니다. 사유는 바깥으로 나타난 흔적을 새기는 것이며 기억이고 무한히 뻗어 있습니다.   생명적인 것들은 이렇듯 길 위에 무한히 열어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유만이 인간의 욕망을 거슬러 생명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사유만이 인간의 정의의 길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사유만이 길을 잃지 않고 길을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유는 길을 길로서 존재하도록 만듭니다. 길을 도래하게 하고 흔적을 지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유와 욕망은 끊임없는 투쟁과 갈등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유는 역사의 지평에서 끝없는 길을 뻗게 할 것이고, 욕망은 길을 폐쇄할 것입니다. 욕망은 말함에 대해서 결코 듣지 않을 것이고, 정의에 대해서는 눈을 감을 것입니다. 사유는 열려 있음이요, 욕망은 닫혀 있습니다.   사유는 생명이요, 욕망은 죽음입니다. 말-하기는 사유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사유는 앞을-향해-말함입니다. 사유는 항상 생명을-향해-말하기입니다. 그러므로 사유는 죽을 수 없습니다. 설령 생명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말을 하는 자는 생명적 존재입니다. 사유가 미래를 향해 있다고 할 때,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고 할 때, 그 사유는 말-없음의 말, 말-있음의 말을 통해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4·16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말-없음과 말-있음은 모두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명은 정의를 말하고 있으며, 생명적인 존재는 반드시 정의를 말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실존들입니다. 실존은 지속적으로 역사적 시공간에 참여하고 관계를 맺는 존재로서, 결코 텅 빈 존재들이 아닙니다. 말-없는 존재로서의 생명적 존재와 말-있음의 존재로의 생명적 존재는 차이는 있으나 둘 다 미래를 (향해) 여는 존재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폭력은 계속해서 희생물만을 향하므로 애초의 대상을 시야에서 놓쳐버린다.”, “희생제의는 공동체 전체를 그들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며, 폭력의 방향을 공동체 전체로부터 돌려서 외부의 희생물에게로 향하게 한다는 것이다.”, “희생 덕택에 백성은 동요하지 않고 계속 평정을 유지하므로 이 희생제의가 국가의 단합을 강화한다는 것이다”(Rene Girard, 김진식· 박무호 옮김, 폭력과 성스러움, 민음사, 1993, 16, 19-20쪽).   이처럼 공동체의 오염과 그로 인한 속죄를 위해서 욕망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사람들, 욕망을 위해 살인과 살해도 마다하지 않는 국가에게는 더 이상 보존해야 할 생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Rene Girard, 위의 책, 142-144쪽). 희생양은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재갈을 물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말할 자격도 없습니다. 희생양은 전체주의와 군림자를 위해서만 필요한 존재이기에 그들의 말하기(speaking)는 말-하기(saying)로 끝이 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소리는 때에 따라서는 들리지 않습니다. 살해자와 살인자는 희생양의 말-하기(saying)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늘 수단이요, 국가공동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사용가치면 충분합니다. 그들만의 시공간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그들의 희생은 기억조차 되지 않습니다. 아니 기억이나 흔적이 남으면 안 됩니다.   신에게 바쳐지는 재물은 성스러워서 공동체의 오염을 완전히 속죄하기만 하면 될 뿐, 면피 당사자인 주체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들의(그것의) 폭력은 묵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모든 생명존재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내가 살아간다는 것을 말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은 그러한 부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생명존재들은 욕망 고발(말-하기)와 정의 사유에 대해 멈춤이 없어야 합니다. 더 이상의 희생양이 필요치 않은 인간의 삶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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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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