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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1-07-02
  • 한국화학연구원, 스펀지로 열을 전기로 바꾸는 소재 개발
    [타임즈코리아] 구부러지고 늘어나고 압축이 돼, 열이 있는 곳 어디에든 붙여 열을 전기 에너지로 바꿔주는 열전소재가 개발됐다. 완전히 유연한 열전소재가 개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화학연구원 화학소재연구본부 조성윤 박사팀은 열원의 형태와 관계없이 어디든지 붙일 수 있는 ‘스펀지형 열전소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열을 전기로 바꿔주는 소재로 온도 차에 의해 전기가 발생한다. 일례로 발전소 굴뚝에 열전소재를 부착하면, 굴뚝 안쪽의 고온(150도)과 바깥 상온(30도)의 온도 차로 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구진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스펀지에 탄소나노튜브 용액을 코팅했다. 탄소나노튜브를 물리적으로 분산시킨 용매를 스펀지에 도포한 후, 용매를 빠르게 증발시킨 것이다.  제조방법이 간단해 대량생산에도 적합하다. 모양을 만들어주는 틀 없이 스펀지를 이용해 열전소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거푸집 없이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셈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열전소재는 무기 소재로 만들어진 탓에 유연하지 않았다. 사람의 몸이나 자동차 등 다양한 곡면의 열원에 붙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제조공정 자체도 까다롭고 복잡하다. 전 세계 연구진들은 유연한 열전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탄소나노튜브에 주목했다. 탄소나노튜브는 전기전도도가 높고 기계적 강도가 강하며, 지구상에 풍부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팀이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해 유연한 열전소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스펀지와 유사하면서도 높게 쌓을 수 있는 탄소나노튜브 폼(foam)을 만든 것이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압축 안정성 실험 결과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는 “지금까지 개발된 유연한 소재는 지지체나 전극의 유연성을 이용한 것”이었다면서 “소재 자체가 유연한 건 이번 스펀지형 열전소재가 처음이고 제조방법도 간단해 대량생산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개발된 스펀지형 열전소재는 열전소재의 전기적 특성과 스펀지 고유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10,000번 반복해도 형태는 물론이고 전기적 특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압축 전과 압축 후의 저항값이 각각 1.0Ω(옴), 0.3Ω으로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이는 스펀지에 기공이 무수히 많아 변형에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펀지의 탄성을 이용한 응용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경우, 압력이 커질수록 발전량도 덩달아 높아졌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했을 때 최대 2㎼(마이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하여, 압축 전과 비교해 발전량이 10배 정도 증가했다. 이에 대해 연구논문 1 저자인 김정원 박사는 “스펀지의 압축되고 복원되는 탄성을 활용해 몸에 부착하는 웨어러블 기기에 적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수한 기계적 성질이 요구되는 자동차 등에도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정원 박사는 “열전소재 분야 전망도 밝다. 현재 자동차에서 사용하고 난 후의 열이나 온천수를 이용한 열전발전 시작품의 실증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관련 기술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성과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에너지 소재 분야 권위지인 『나노 에너지(Nano Energy), IF:16.602』8월호에 게재됐으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창의형 융합연구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 한국뉴스
    • 과학
    2020-09-22
  • 종속될 것인가, 회복할 것인가
      [타임즈코리아]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느린 사람은 어찌 살라는 건지, 넋이 나갈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많은 것들이 바뀌곤 한다. 이런 현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변화는 순리이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논리가 더 우세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약육강식이 진리이어야 한다. 여기에 동의할 사람들은 모두 강자라야 가능하다. 적어도 변화가 자연에 의한 것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이 자초한 변화에 순응하라는 것은 무조건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이 그만큼 편리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만큼의 행복을 확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비대 면화되어 가고 있다. 이것을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변화라고 동의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코로나19에 따른 불가피한 강요인 셈이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에 따른 변화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만남에서 누리고 싶은 행복은 사람의 DNA 속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다. 현장 공연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감흥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런 노력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 개인의 욕심이 아니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예술을 가상의 세계에 가두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 만약 가상의 세계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우리가 굳이 직접 여행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영상이나, 증강현실 그리고 가상현실 시스템만으로도 더 자세하게 보며 실감 나는 장면 속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온라인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계기로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콘텐츠를 구별하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가 파산했다는 기사가 유난히 아프게 느껴진다. 과학과 기술이 육체적 요소라면 문화와 예술은 정신적 요소이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난국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문화와 예술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예술의 존엄과 가치는 예술가들이 지켜 내야 하는 것이다. 대중화, 실용화 이런 측면들은 굳이 지키려 하지 않아도 어느 시대에나 자생해 왔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변하지 않게 하는 일,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려는 힘은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자극하여 거대한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예술의 힘이고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망가트려놓은 만남과 관계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 속에 내어주고 거기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만남과 관계를 열망하는 DNA와 인간의 지혜가 코로나19보다 더 강함을 증명하며 예전과 같은 역동성을 회복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왔듯이 이 또한 극복해 낼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코로나19를 이겨낼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이전과 같은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예술가들이여, 우리는 과학자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감동을 선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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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합정보
    2020-07-06
  • 인문학은 이론이 아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본질을 찾아 나선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사변적으로 흘러가면 이념이나 현상적인 집착으로 이탈하게 된다.   이런 행태는 수많은 증오와 폭력을 낳으며 씻지 못 할 마음의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남길 뿐이다.   인문학적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삶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타자와 참된 관계를 형성하는 정신을 의미한다.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사람은 ‘너’와 더불어 ‘나’라는 관계를 통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조화로움의 아름다움을 통해 공감함으로써 상대방을 이웃으로써 인식하고 수용하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문학, 역사, 철학, 종교 등의 이론을 습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그들의 아픔과 울분, 사랑과 기쁨을 공유하는 공감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인문학은 ‘너’와 더불어 존재하는 ‘관계’로서의 ‘나’를 인식하고 사랑(자비, 나눔, 배려, 공감)으로 소통하는 지혜를 깨우치고 표현하게 하는 모든 문화, 사상, 지식 등을 말한다.   인문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진리를 찾고 따른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온전히 깨닫고 그 사랑을 최선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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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정보
    2016-03-18
  • 현대인 허균이 살았던 과거의 삶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동부승지, 삼척 부사,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허엽(許曄)은 30년간이나 관직에 머물렀는데도 생활이 검소했고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한 인물이다.   허엽의 호는 초당(草堂)이다. 오늘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초당 순두부의 본고장이 바로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이다.         이곳에서 허엽의 아들 허균(許筠, 1569~1618)이 태어났다. 교산(蛟山) 허균은 명문가의 자제로 천재적인 두각을 나타내 모든 것이 보장된 인물이었지만, 불우한 계층을 대변하는 삶을 선택했다.   이런 까닭으로 허균은 조선시대 반역의 상징 같은 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평등사상에 눈을 뜬 허균의 급진적인 개혁 사상은 오늘날에 와서는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단과 반역을 도모하는 사회전복세력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쓴 《홍길동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허균이라는 인물을 볼 때, “역사는 현대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항상 새롭게 해석되고 평가될 수 있기에 역사를 보는 모든 이들의 시각은 상대적이다”고 말한 영국의 정치학자이며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 1892년~1982년)의 견해가 더욱더 공감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6-03-15

실시간 학술정보 기사

  • 표절은 해도 되는 것인가?
    정치적 영웅주의가 아닌 진실과 신뢰의 회복이 필요 ▲ 우리는 온갖 변명과 핑계로 얼룩진 한 국회의원 모습보다는 땀 흘려 얻은 금메달을 국민들의 가슴에 안겨둔 정직하고 믿음직한 대한의 아들을 더 사랑하고 원한다. “연구할 때 어떤 것이 맘에 드는지 안 드는지를 고려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진리일 수 있는지 여부만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최대한의 지식을 동원하여 진리로 간주할 수 있는 것만을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Johann Gottlieb Fichte적어도 학자라면 자신의 생각을 독창적으로 개진하고 사유의 깊이에서 우러나온 연구 결과를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식의 전체 보고(寶庫)를 풍요롭게 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 ‘박사’가 하도 많아서 발에 차이는 게 박사라고는 하지만, 원래 박사란 자신의 연구 분야의 독창성을 인정받은 결과로서 주어지는 명예스런 직함이다. 그런데 최근에 치러진 총선에서 한 국회의원 당선자의 논문 표절 시비로 시끄럽다.당연히 정치적 이성의 판단과 국민 정서상 낙선이 됐어야 함에 불구하고 어찌된 영문인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이 된 것이다. 학자의 소양으로서도 부족한 사람임은 물론이거니와 양심을 가지고 국민의 정치 이성을 대변해야 할 사람인 국회의원의 인격과 기본 자질을 보아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한 국가에서는 대통령이 논문 표절 시비로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지 않았는가.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신하는 입법기관이다. 내연이외연(內燃而外延)라는 말이 있다. 안에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그렇다면 표절은 무방하다는 입법도 괜찮다는 것인가? 이런 문제로 사회,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면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서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그만두는 것이 잘못을 인정하는 바람직한 자세일 것이다. 더욱이 한때 태권도 국가 대표 선수로서 나라를 빛낸 인물이었던 사람이 아니가. 더더욱 그의 올곧게 보인 이미지가 유권자들의 선택에 큰 기준이 아니었던가. 그것을 부각시켜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정치 일선에 나타났는데 이것이야말로 그의 정치적 역량을 논함에 있어 그 자체로 모순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변명을 하여도 진실은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것이다. 학자가 되기 위해서 출발점을 찍은 자신의 논문에서조차도 신뢰를 할 수 없다면 앞으로 정치 일선에서 일어나는 그의 여러 정치적 사태들에 대해서 어떻게 신뢰할 수 있단 말인가. 정치는 막무가내나 영웅주의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도 안 된다. 굳이 그가 정치를 하고자 했다면 그의 경험적 지평에서 체득된 진정한 무도인의 자세 정도는 갖고서 시작했어야 마땅한 일이다. 무예를 익히는 사람들에게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는 말이 있다. 적을 제압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먼저 어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짊을 수양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가 날렵한 발차기로 상대를 제압했지만 쓰러진 상대를 따뜻하게 일으켜 주었던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국민들은 아직도 그 모습을 기억하며 일련의 사태를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는 것이다.  우리는 온갖 변명과 핑계로 얼룩진 한 국회의원 모습보다는 땀 흘려 얻은 금메달을 국민들의 가슴에 안겨둔 정직하고 믿음직한 대한의 아들을 더 사랑하고 원한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국회의원이라는 명예보다 못하지 않다.   공자(孔子)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학자라면 학자답게, 정치인이라면 정치인답게, 무도인이라면 무도인답게 처신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명예를 지켜야 한다. 그를 사랑한고 신뢰한 국민들에게 더 이상 실망을 줘서는 안 된다. 이 순간에도 정당의 정치 전략과 정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인 개인의 정치적 신념과 진리, 정의의 구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12-04-23
  • 교육은 교감(交感)이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 사귐이 있고[交] 느낌이 있는[感] 관계 형성 중요 ▲ 오늘날 교육현장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과연 얼마나 충분한 교감을 나누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의문이다. 다시 말해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 사귐이 있고[交] 느낌이 있는[感] 관계가 형성되어 원활한 사제지간의 정을 나누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위기에는 죽을 가능성이 있느니만큼 살 가능성 있다. 붙잡으면 생(生)이요 놓치면 사(死)다. 하면 복이요 못 하면 화다. 시간은 늘 위태로운 것이다. 그 뱃속에는 늘 쌍둥이가 들어 있다. 시간의 뱃속을 째 보아도 아무것도 있을 리가 없지만, 그 빈탕 속에서 생 아니면 사가 나온다.”_함석헌(1901-1989)“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에 비해 조금 불편하다는 점뿐이다.” 우리가 장애인으로부터 일반적으로 듣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표현을 진정한 마음으로 담아내기에는 그리 녹록치만은 않은 것 같다. 이 사회에서 그들이 겪는 고통과 모멸감, 혹은 비인격적인 대우 등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말이 편안하게 들릴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불리한 조건을 딛고 당당하게 일어서는 장애인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일전에 두 시각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에게도 쉽지 않은 대학 과정을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선 학교의 교사가 되었다는 한 신문 기사를 보았다. 마음 한 구석이 환해졌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마음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비춰지는 그들의 모습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위대한 스승으로 보이지는 않았을까. 현대 창조영성가 매튜 폭스(M. Fox)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강한 체험은 늘 자비를 인식하고 익히고 성장시켜 가는 수련장이다... 고통은 내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합당한 자비를 위한 수련장이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인생에 있어서 수련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했기에 그들의 장애는 자신들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장애가 단절이 아니라 교감을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교육현장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과연 얼마나 충분한 교감을 나누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의문이다. 다시 말해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 사귐이 있고[交] 느낌이 있는[感] 관계가 형성되어 원활한 사제지간의 정을 나누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고통을 삶의 수련으로 여겼던 그들에게 있어서 교육은 교감(交感)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비록 눈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사람들에 비해서 더 잘 보는 교사, 더 잘 듣는 교사, 더 잘 느끼는 교사로서 제자들에게는 귀감이 되고 있을 것이다. 또한 제자들이 그들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단지 지식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 믿는다.마음과 마음이 서로 사귀고 느끼는 것에서 신뢰가 싹트고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교사와 학생의 마음이 서로 무너져 버린 교실에서 교육의 이상을 찾는다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어렵기만 하다. 함석헌은 “교육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는, 즉 거저 주는 것이 아니고는 그 효과를 낼 수 없다. 그런데 교사 노릇을 직업으로 하게 되면 하는 교사 자신의 맘속에도 희생 봉사에서 오는 고상한 감격은 있을 수 없고 아주 냉랭한 지식, 기술적인 것을 주는 데 그칠 수밖에 없고, 받는 피교육자도 저 사람은 우리에게서 값을 받고 가르쳐주는 사람이라는 심리가 암암리에 들어가게 되면 가장 중요한 인격 발달의 양식이 되고 고상한 심정의 전달을 받는 것이 없게 된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서풍의 노래5」』, 한길사, 1984, 193쪽)라고 비판했다. 마음을 느끼지 못하고 지식 전수에 그치는 교육이 가져온 폐해는 교실의 황폐화뿐이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사귀고 느끼는 것에서 신뢰가 싹트고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교육(자)의 폭력과 학교 폭력의 배경에는 상호간의 신뢰 문제가 깔려 있다. 인간의 신뢰는 마음의 교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신뢰의 장벽이 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입시 경쟁, 출세주의, 물질만능주의, 이기주의 등이다. 이를 다시 공동사회를 위한 타자에 대한 배려, 상호이익을 추구하는 선, 정신의 함양을 우선시 하는 인간으로 바꾸면서 공동사회 안에서 공동의 지식, 공동의 자녀, 공동의 인격, 공동의 선이라는 가치를 내세우는 인식이 필요하다. 더불어 교사는 학생을 대함에 있어 하나의 교육 대상이나 피교육생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언제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에서 말한 시각 장애 교사들의 공통점은 학생들의 목소리와 이미지를 파악하여 학생 하나하나를 인격체로 대하려는 심성(心誠)으로 참교육의 색깔을 입힐 줄 아는 교사들이었다.   시각 장애를 갖고 있는 자신들이 입게 되는 상처에 대해서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학생들을 성숙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았다는 데에 주목을 해야 한다. 눈은 사물을 파악하는 데 일차적인 기능을 하는 인간의 감각 기관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시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인간 심성이 더욱 중요한 교육의 매체가 되었던 것이다. 함석헌의 말을 빌리면 그들의 마음에 혹은 교육철학에는 ‘덕[밝은 속알]이 있었던 것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서풍의 노래5」』, 한길사, 1984, 186쪽) 그들은 덕으로서 학생들을 대하고 덕으로서 교육하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교사는 자신의 덕스러움으로 인해서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 학생들이 인정하는 덕이 있는 교사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요즈음 우리 교육의 현실 속에서 사(私)는 있는데 공(公)은 없다. 이익만 찾을 뿐이고 덕을 앞세우려는 교육자를 만나기가 점점 더 어렵다고 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교육한다는 것의 기본은 남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자기교육이 우선이다. 자기교육이 먼저 되어야 남을 교육할 수 있다. 그래야 자기뿐만 아니라 전체를 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함석헌이 “교육은 인간 살림의 알파요 오메가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서풍의 노래5」』, 한길사, 1984, 172쪽)라고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교실이 살아야 한다. 교실의 주체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이다. 그런데 교육의 주체인 학생들의 마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좋은 교육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시각 장애 교사들의 사례에서와 같이 교육은 그 무엇보다도 교감(交感)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해야 할 것이다. 함께 생각하고 호흡하고 배려하며 동행하려는 따뜻한 교감을 통하여 우리 교육의 아름다운 내일을 엿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김대식 -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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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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