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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1-07-02
  • 한국화학연구원, 스펀지로 열을 전기로 바꾸는 소재 개발
    [타임즈코리아] 구부러지고 늘어나고 압축이 돼, 열이 있는 곳 어디에든 붙여 열을 전기 에너지로 바꿔주는 열전소재가 개발됐다. 완전히 유연한 열전소재가 개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화학연구원 화학소재연구본부 조성윤 박사팀은 열원의 형태와 관계없이 어디든지 붙일 수 있는 ‘스펀지형 열전소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열을 전기로 바꿔주는 소재로 온도 차에 의해 전기가 발생한다. 일례로 발전소 굴뚝에 열전소재를 부착하면, 굴뚝 안쪽의 고온(150도)과 바깥 상온(30도)의 온도 차로 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구진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스펀지에 탄소나노튜브 용액을 코팅했다. 탄소나노튜브를 물리적으로 분산시킨 용매를 스펀지에 도포한 후, 용매를 빠르게 증발시킨 것이다.  제조방법이 간단해 대량생산에도 적합하다. 모양을 만들어주는 틀 없이 스펀지를 이용해 열전소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거푸집 없이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셈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열전소재는 무기 소재로 만들어진 탓에 유연하지 않았다. 사람의 몸이나 자동차 등 다양한 곡면의 열원에 붙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제조공정 자체도 까다롭고 복잡하다. 전 세계 연구진들은 유연한 열전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탄소나노튜브에 주목했다. 탄소나노튜브는 전기전도도가 높고 기계적 강도가 강하며, 지구상에 풍부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팀이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해 유연한 열전소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스펀지와 유사하면서도 높게 쌓을 수 있는 탄소나노튜브 폼(foam)을 만든 것이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압축 안정성 실험 결과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는 “지금까지 개발된 유연한 소재는 지지체나 전극의 유연성을 이용한 것”이었다면서 “소재 자체가 유연한 건 이번 스펀지형 열전소재가 처음이고 제조방법도 간단해 대량생산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개발된 스펀지형 열전소재는 열전소재의 전기적 특성과 스펀지 고유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10,000번 반복해도 형태는 물론이고 전기적 특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압축 전과 압축 후의 저항값이 각각 1.0Ω(옴), 0.3Ω으로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이는 스펀지에 기공이 무수히 많아 변형에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펀지의 탄성을 이용한 응용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경우, 압력이 커질수록 발전량도 덩달아 높아졌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했을 때 최대 2㎼(마이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하여, 압축 전과 비교해 발전량이 10배 정도 증가했다. 이에 대해 연구논문 1 저자인 김정원 박사는 “스펀지의 압축되고 복원되는 탄성을 활용해 몸에 부착하는 웨어러블 기기에 적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수한 기계적 성질이 요구되는 자동차 등에도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정원 박사는 “열전소재 분야 전망도 밝다. 현재 자동차에서 사용하고 난 후의 열이나 온천수를 이용한 열전발전 시작품의 실증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관련 기술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성과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에너지 소재 분야 권위지인 『나노 에너지(Nano Energy), IF:16.602』8월호에 게재됐으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창의형 융합연구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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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
    2020-09-22
  • 종속될 것인가, 회복할 것인가
      [타임즈코리아]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느린 사람은 어찌 살라는 건지, 넋이 나갈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많은 것들이 바뀌곤 한다. 이런 현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변화는 순리이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논리가 더 우세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약육강식이 진리이어야 한다. 여기에 동의할 사람들은 모두 강자라야 가능하다. 적어도 변화가 자연에 의한 것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이 자초한 변화에 순응하라는 것은 무조건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이 그만큼 편리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만큼의 행복을 확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비대 면화되어 가고 있다. 이것을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변화라고 동의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코로나19에 따른 불가피한 강요인 셈이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에 따른 변화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만남에서 누리고 싶은 행복은 사람의 DNA 속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다. 현장 공연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감흥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런 노력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 개인의 욕심이 아니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예술을 가상의 세계에 가두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 만약 가상의 세계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우리가 굳이 직접 여행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영상이나, 증강현실 그리고 가상현실 시스템만으로도 더 자세하게 보며 실감 나는 장면 속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온라인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계기로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콘텐츠를 구별하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가 파산했다는 기사가 유난히 아프게 느껴진다. 과학과 기술이 육체적 요소라면 문화와 예술은 정신적 요소이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난국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문화와 예술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예술의 존엄과 가치는 예술가들이 지켜 내야 하는 것이다. 대중화, 실용화 이런 측면들은 굳이 지키려 하지 않아도 어느 시대에나 자생해 왔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변하지 않게 하는 일,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려는 힘은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자극하여 거대한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예술의 힘이고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망가트려놓은 만남과 관계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 속에 내어주고 거기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만남과 관계를 열망하는 DNA와 인간의 지혜가 코로나19보다 더 강함을 증명하며 예전과 같은 역동성을 회복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왔듯이 이 또한 극복해 낼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코로나19를 이겨낼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이전과 같은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예술가들이여, 우리는 과학자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감동을 선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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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합정보
    2020-07-06
  • 인문학은 이론이 아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본질을 찾아 나선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사변적으로 흘러가면 이념이나 현상적인 집착으로 이탈하게 된다.   이런 행태는 수많은 증오와 폭력을 낳으며 씻지 못 할 마음의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남길 뿐이다.   인문학적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삶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타자와 참된 관계를 형성하는 정신을 의미한다.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사람은 ‘너’와 더불어 ‘나’라는 관계를 통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조화로움의 아름다움을 통해 공감함으로써 상대방을 이웃으로써 인식하고 수용하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문학, 역사, 철학, 종교 등의 이론을 습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그들의 아픔과 울분, 사랑과 기쁨을 공유하는 공감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인문학은 ‘너’와 더불어 존재하는 ‘관계’로서의 ‘나’를 인식하고 사랑(자비, 나눔, 배려, 공감)으로 소통하는 지혜를 깨우치고 표현하게 하는 모든 문화, 사상, 지식 등을 말한다.   인문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진리를 찾고 따른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온전히 깨닫고 그 사랑을 최선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6-03-18
  • 현대인 허균이 살았던 과거의 삶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동부승지, 삼척 부사,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허엽(許曄)은 30년간이나 관직에 머물렀는데도 생활이 검소했고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한 인물이다.   허엽의 호는 초당(草堂)이다. 오늘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초당 순두부의 본고장이 바로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이다.         이곳에서 허엽의 아들 허균(許筠, 1569~1618)이 태어났다. 교산(蛟山) 허균은 명문가의 자제로 천재적인 두각을 나타내 모든 것이 보장된 인물이었지만, 불우한 계층을 대변하는 삶을 선택했다.   이런 까닭으로 허균은 조선시대 반역의 상징 같은 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평등사상에 눈을 뜬 허균의 급진적인 개혁 사상은 오늘날에 와서는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단과 반역을 도모하는 사회전복세력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쓴 《홍길동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허균이라는 인물을 볼 때, “역사는 현대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항상 새롭게 해석되고 평가될 수 있기에 역사를 보는 모든 이들의 시각은 상대적이다”고 말한 영국의 정치학자이며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 1892년~1982년)의 견해가 더욱더 공감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6-03-15

실시간 학술정보 기사

  • 타임즈코리아 설교대학(7)
    목회자들은 신학대학교에서 성서신학과 설교학 등을 수학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현장 목회자들은 설교에 대한 계속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한 대안이나 방법에 있어서의 견해를 말씀해주세요?저도 신학교를 다니면서 성서신학에 대한 갈증을 많이 느꼈습니다. 개인적으로 SFC(학생신앙운동) 간사 활동을 하면서 ‘프리셉트’에서 1년에 두 차례씩 여는 세미나를 통해 신학교에서 충족 받지 못한 성경연구의 많은 부분을 해소했습니다. 우리가 신학교에서 3년 동안에 교육커리큘럼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충분히 섭렵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보통 한 학기에 12번 정도 강의하게 되는데, 한 분야를 12번 정도의 강의를 듣고 공부하는 것으로 제대로 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렇다고 보면 갈증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설교는 평생을 해야 하는 데, 신학교에서 들었던 내용은 2~3년이면 다 바닥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갈증을 해소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첫 번째는 자기 스스로 연구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철저하게 성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신학생 때 못 읽었던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박희천 목사님께서 주장하신 내용 가운데 “목사되기 전에 성경 100독 해라. 100독 하지 않으면 목사 안수 받지 마라”는 이야기를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 저는 비유적으로 설교를 하나의 요리라고 봅니다. 설교에 있어서 재료는 성경입니다. 재료가 좋지 않으면 요리사가 아무리 좋아도 맛이 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안병만 박사 저서들 저는 비유적으로 설교를 하나의 요리라고 봅니다. 설교에 있어서 재료는 성경입니다. 재료가 좋지 않으면 요리사가 아무리 좋아도 맛이 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설교다운 설교를 하시는 분들을 보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각고의 노력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그와 관련된 학문과 책을 열심히 연구했기 때문에 훌륭한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저는 이것을 누에고치에 비유합니다. 누에가 집을 지을 때, 그 속이 탱탱한 것들은 좋은 집을 짓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집을 단단하게 짓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설교자가 좋은 실크와 같은 설교를 뽑아내기 위해서는 내면이 말씀으로 꽉 차있어야 합니다.두 번째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용량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되어도 나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도움을 받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타임즈코리아’가 앞으로 설교세미나에서 많은 좋은 강사를 불러 세미나를 할 때, 와서 그분의 노하우를 배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설교의 테크닉을 배운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원리와 근본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기의 토양에 맞게 집을 지을 수 있게 됩니다.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설교사역의 주체자는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을 끊임없이 의지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날마다 반응한다면, 청중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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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1-15
  • 타임즈코리아 설교대학(2)
     현대는 첨단 커뮤니케이션의 시대입니다. 다양한 매체를 감안한 설교적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당연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시대 가치적으로 만들어내고 공유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이 문화를 벗어 날 수는 없습니다. IT도 시대를 대변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자 자신이 아날로그라고 생각해서 IT를 무시하면 퇴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IT를 쫒아 가기만 해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 적절히 활용해야 합니다.저는 예전에 설교원고를 프린트해서 강대상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아이패드가 나온 이후로 종이 원고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커뮤니케이션 차원도 있지만, 제 삶의 철학 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종이의 원료가 나무이기 때문에 이것을 최소한으로 사용해야합니다. 종이의 과도한 사용은 결국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인터뷰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는 안병만 박사 그래서 저는 설교를 할 때, 원고는 아이패드를 보고 필요한 자료는 파워포인트를 활용해서 설교를 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영상세대이기 때문에 말로서 전달하는 것보다는 이런 기기나 자료들을 활용하면 커뮤니케이션 부분에서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영상이나 플레쉬 등 필요한 자료는 수시로 모집해서 설교 중에 자주 활용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너무 본질을 훼손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은 빠지고 영상만 남는다면, 이것은 잘못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말씀의 효율적 전달을 위한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청중들이 말씀을 보다 더 잘 전달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질의 시대 가치적 차원에서 이런 저런 다양한 첨단 시스템들이 복음전달에 쓰이는 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기도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껍질에 매달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충실한 준비위에 시대적 소통을 이루는 방법적 모색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이것은 비단 강대상에서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통한 전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홈페이지는 물론이고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그리고 카카오 톡 같은 것을 통해서도 복음 전달적 통로를 구축해야 합니다.이런 맥락에서 타임즈코리아 설교대학은 적극 노력할 것입니다. 지금 이 대담도 그런 차원입니다. 일 년에 몇 차례 오프라인 세미나도 실시할 것입니다. 온라인은 IT적 유익을 활용하여 목회자들의 설교적 필요를 지원할 것입니다. 단순한 설교 자료의 제공이 아니라 실제적인 힘을 갖게 될 일들을 모색할 것입니다. 많은 기도와 성원을 부탁드리며 적극 동참하여 주시면 피차 큰 열매를 거두게 될 줄로 믿습니다. 타임즈코리아 사무국으로 연락하시면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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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1-15
  • 본말 전도의 망상에서의 회복
      사람들이 본질과 현상을 서로 왜곡하거나 아예 바꿔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인간의 모든 고민은 본말을 전도하는 망상에서 나온다.     역사의 어느 때고 철학에서 형이상학의 문제를 간과한 적은 없었지만, 현실과 시대의식을 무시한 형이상학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시대의 반성, 혹은 현실에 대해 성찰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시대와 현실, 인간의 의식에 대한 반성이 강하게 요청된 적이 있었을까 할 정도로 정신과 물질,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심각해지고 있다. 함석헌은 단순한 일상적 존재의 거짓된 형이상학과 충동적인 현실에 얽매여 인간의 정신적 삶을 가볍게 여기는 현상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인간의 모든 고민은 본말을 전도하는 망상에서 나온다. 생명이 먹을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지만 먹을 것만 있으면 사는 것처럼 망상을 하는 고로 먹을 것을 위해 걱정을 하고 몸이 의복으로 자라는 것은 아니건만 의복을 자라는 것처럼 그릇 생각하는 고로 의복을 위해 근심한다. 생명이 정말 믿음으로 사는 것인 줄을 안다면 생명보다 음식을 더 중히 여기고 몸보다 의복을 더 중히 여기는 어리석음은 행치 않을 것이다. 믿음이란 다른 것 아니요 생명의 절대 보장을 믿는 일이다. 그 근본 되는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그밖에 모든 지엽 되는 부속되는 문제가 다 떨어져나가게 되는 것이 신앙으로 인한 신생이다... 바람아 네 불 테면 불어라. 물결아 네 일 테면 일어라. 이까짓 낡은 배야 네 깨질 테면 깨져라... 천하일체 모든 불의·정의·불평을 다 아뢸 날이 분명히 올 것을 내가 아는 데야 너희가 내게 무엇이냐.”(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51-52쪽).   삶의 본질, 내면의 가치, 정치적 정의, 종교의 초월은 모두 공허로 치닫고 원초적·본능적 삶에는 노골적으로 충실하다. 인간이 이성적 삶을 등한히 여기고 외면할 때, 정치적 권력은 그 틈새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정신적 혐오를 고백하게 한다. 게다가 정치적 권력은 금지와 쾌락, 욕망 사이의 경계를 오가며 인간의 부정행위를 부추긴다. 이기적이고 사적인 이성을 추구하면 할수록 종교도, 정치도, 경제도 그 본질과는 결별하게 된다. 부차적인 문제를 절대적인 삶의 문제로 주장하고 그것을 공론화할 때 정말 중요한 공적 이성과 공적 담론은 무너진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정치·경제적 아포리아(aporia: 통로가 없고 길이 막힌 듯 해결하기 어렵게 얽힌 문제)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들이 본질과 현상을 서로 왜곡하거나 아예 바꿔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로이트(S. Freud)의 주장처럼 유아기의 강한 항문성애적 성향은 돈이나 물질에 대한 관심으로 집중되기도 한다. 일종의 자아도취적 자기 성애적 반항이나 완고한 성격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항문성애적 집착이나 완고함이 자아를 표현하는 반응이기도 하다. 하지만 항문애적 성향이 완고함(분노와 복수심)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깔끔함(신체적 결벽증, 양심과 신뢰성), 인색함(탐욕)도 항문애적 성격이기 때문이다(S. Freud, 김정일 옮김,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열린책들, 2003, 189-195, 275-282쪽).   권력, 돈, 물질 등을 아예 관심 밖의 사안으로 외면하는 것은 정치적 결벽증이요, 반대로 그것을 끌어안고 쾌락을 느낀다면 정치적 완고함이나 인색함으로 나타난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콤플렉스는 곧 배변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 수 있다는 추론적 상상이 가능하다. 이에 함석헌은 인간의 욕망, 관능적 환상, 억압의 장치를 버리라고 명령한다.   “물질을 버리지만 제도도 버려야 한다. 배가 아무리 중해도 바다에 있는 동안이지, 육지에 오른 후는 소용이 없다. 배는 내종에는 버릴 것이지, 버리고야 상륙이 되지 배를 가진 채로는 상륙은 할 수 없다. 제도 조직을 가진 채로는 하늘나라에는 못 들어간다. 우리로 하여금 이 인생의 바다를 건너게 하던 배는 그것이 한 몸이거나, 가정이거나, 교회거나, 나라거나, 크고 적음을 말할 것 없이 마지막에는 버려야 하는 것이다. 배의 목적은 배를 버리는 날이 오게 하기 위한 것. 아무리 철갑선이라도 아무리 생활 자료를 많이 실었다 하더라도 수상생활은 임시지 영원한 것은 아니다. 배는 버려야 한다. 될수록 속히 버려야 한다.”(함석헌, 위의 책, 58-59쪽).   물질은 육체를 예속하는 욕망이요, 환상이다. 제도, 헤게모니, 체제는 육욕과 정신을 억압하는 장치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담론들은 권력자를 배려하라고 강요하다 못해 환상의 나라를 소유하기까지 침묵과 금기를 강화한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배’(船)를 보고도 수줍음과 존경심으로 숭앙하면서 배에서 하달되는 명령은 순응해야 할 미덕인 양 국민적 행동이 된다.   수치심과 혐오는 오히려 권력자가 주는 작은 쾌락의 성적 욕망으로 바뀌고, 배려해야 할 것들은 금기가 되어 자아의 자유로운 표현을 억압한다. 미셸 푸코(M. Foucault)는 이와 같은 권력의 속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은 권력 자체의 중요한 부분을 숨기는 조건에서이다. 권력의 성공은 권력이 자체의 기제들 중에서 은폐하기에 이른 것에 비례한다... 권력이 문제될 때, 비밀은 남용의 성질을 결코 띠지 않을 뿐만 아니라, 권력의 작용에 필수불가결하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권력이 권력에 복종하는 이들에게 비밀을 강요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비밀이 그들에게도 불가결하기 때문일 것이다”(M. Foucault, 이규현 옮김, 성의 역사. 제1권 앎의 의지, 나남출판, 1990, 101쪽).   권력의 꼼수에 감춰진 것의 진실을 왜곡한다면 정치적 콤플렉스와 다르지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권력의 퇴행 현상은 결국 똥에 대한 트라우마, 규율과 훈련, 검열에 의한 학습이요, 금기를 깨고 싶은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는 절대로 똥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병리적 결벽증, 자신의 도덕과 양심이 모든 이들의 결정기관인 것처럼 명령하는 것은 정치적 은폐, 가면, 거부, 거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M. Foucault, 위의 책, 98-99쪽 참조).   결국 정치에는 병리만 존재할 뿐 온전한 정치적 에로스는 불가능한 것일까? 알랭 바디우(A. Badiou)는 바케트의 글을 분석하면서 사랑의 네 가지 기능을 방황(여행), 부동성, 명령, 이야기로 설명한 바가 있다(A. Badiou, 서용순·임수현 옮김, 베케트에 대하여, 민음사, 2013, 65-67쪽).   사랑이란 어둠 속으로의 여행이며, 계산 불가능한 것을 어떤 이름 속에 영원히 고정시키는 것이다. 또한 사랑이란 그 어떠한 희생과 분리와 분열 속에서도 계속하라는 명령이자, 관계의 잠재적 무한을 전해주고, 그 무한의 펼쳐짐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황금색 배지와 똥, 그리고 권력은 이와 같은 정치적 에로스가 없다. 관계의 무한, 예측 불가능한 영원한 진리, 무한의 지속적 이야기를 사심 없이 백성에게 펼치는 정치적 에로스는 지금 퇴행에 퇴행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똥’을 공동목표로 삼은 쾌락에 도취되어 있는 한 똥의 정치학, 배변의 훈련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통제, 통치, 지배라는 시스템에 갇히고 말 것이다. 더욱이 종교의 목소리 혹은 초자아의 목소리를 똥의 인색함, 완고함, 결벽증으로 막겠다면 자신의 똥의 확인은 불가능할 것이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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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정보
    2013-12-20
  • 블룸하르트 부자(父子)가 한국교회에 시사(示唆)하는 의미
      블룸하르트 부자(父子)의 삶은 통전적 영성에 대한 좋은 본보기    ▲ 왼쪽으로부터  한신대학교 권명수 교수, 한신교회 이윤재 목사, 크리스챤 콜린스 윈 교수, 윤성민 교수, 김종균 사무처장   블룸하르트(Johann Christoph Blumhardt, 1805 ~ 1880)와 그의 아들인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 (Christoph Friedrich Blumhardt, 1842-1919) 부자(父子)의 부흥은 무척 흥미롭다.   신유와 축귀가 나타났지만, 한국교회의 보수교단처럼 몰역사적이고 탈사회적이지 않았다. 아들 블룸하르트인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 (Christoph Friedrich Blumhardt, 1842-1919) 때문에 레온하르트 라가츠 (Leonhardt Ragaz)가 영향을 받아서 처음으로 종교사회학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그 당시 노동자들을 위해서 헌신했기 때문이다. 사회 안에서 종교의 역할을 찾은 것, 이것이 종교사회학이면서 동시에 한국교회가 지금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미국 베델(Bethel)대학교에서 조직신학과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는 크리스챤 콜린스 윈(Christian Collins Winn) 교수도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 해 주고 있다. 크리스토프 불름하르트에게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예수 그리스도, 곧 그분 자체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 오셔서 활동하셨던 것, 즉 역사적 예수가 곧 하나님의 나라였다. 아버지 블룸하르트인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Johann Chritosph Blumhardt)가 고트리빈 디투스(Gottliebin Dittus)라는 여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때에 부흥사들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귀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기도와 금식 그리고 성경묵상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귀신이 “예수는 승리자!”라고 외치면서 나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갑자기 “우리 역사 가운데” 임하게 된다.   루돌프 보렌(Rudolf Boren)는 축귀와 신유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신호”로 보았다.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은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축귀와 신유를 생각하지만, 루돌프 보렌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정의와 공의를 위해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신호”로 축귀와 신유를 생각했다.   기독교인들은 이 희망 가운데, 인내심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 이 희망은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다리 역할을 한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에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도 임하는 것이다.   기도는 이러한 일과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는 것을 기대하며 이루어가는 행동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저항할 때에는 바로 이런 기대함으로 행동해야 한다.   블룸하르트 부자(父子)는 통전적 영성의 좋은 예이다. 그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에는 축귀와 신유가 일어났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자신들의 사역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피조물의 회복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가난한 자들과 노동자의 인권에 있었다. 블룸하르트 부자(父子)의 신학이 한국교회에게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그리스도를 닮아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이라면,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이 시대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윤성민 박사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석사,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신학박사, 옥스포드대학교 위클리프 홀 객원연구원, 한신대학교 출강, 한신교회 부목사, 저서 : 성서해석과 설교의 프락시스(다산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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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정보
    2013-11-11
  • 근원적인 문자를 찾기 위한 해석학
      가시적인 문자와 기호의 겉-뜻과 겉-살핌이 마치 독실한 신자의 표상인 것처럼 자위하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 광고 문자, 이미지, 선전 문구 등 현대사회의 문자와 기호 또한 의도된 이데올리기로 사람들의 이성과 상상력을 조작하고 있다.   근원적인 문자(Urschrift)는 주체의 행위 이전에 주어진 시원적 사유의 가능적 표현이다. 자크 데리다(J. Derrida)가 “모든 표현 수단들은 기본적으로 문자”라고 말한 것은 신에 대한 표현조차도 인간의 언어 전달 수단인 문자에 있음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함석헌은 문자로 이루어진 성서의 속뜻을 읽어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경을 읽을 때는 글자에 붙잡히지 말고 그 산 속뜻을 읽어내도록 끊임없는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7쪽).   문자는 기호로서 일정한 대상이나 의미를 지시하고 있다. 문자는 의미의 표현수단이고 대상 자체를 표상하여 바라보게 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는 문자 자체를 숭배하거나 신성시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문자로서의 기호조차도 신의 언표라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신의 자기 계시성이 문자에 갇히게 되면, 그것이 뜻하는바 다양한 해석은 불가능하고, 결국 해석의 단일성(해석학적 전체주의)이라는 폭력에 의해 신의 해체와 신의 왜곡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기호와 기호, 문자와 문자 사이의 틈을 열고 밝혀서 신의 자기 본래성과 참 뜻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불교의 경우 그것을 탈피하기 위해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말하면서 그것의 속-뜻으로 바로 들어가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교도 경전이 문자에 얽매이는 손실을 줄이고자 해석의 가능성을 놓고 논쟁해왔다.   이와는 달리 유독 그리스도교만큼은 문자, 즉 자구에 매달려 그것이 지닌 본래적 함의를 호도하고, 심지어 그 문자와 음성적 발화까지도 특권층만이 향유하도록 함으로써, 그 해석학적 논의는 닫히고 말았다.   이와 같은 전통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어서 일정한 계층 혹은 계급집단의 발화와 해석의 독점권은 많은 신자들의 신앙과 사고, 행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독점계층조차도 문자와 기호에 매달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해석학적 주체는 문자 너머에 있는 속뜻을 파악하고 신의 자기 계시의 넉넉함, 자유로운 체험, 신의 관대함을 말하기보다 문자나 기호를 반복함으로써 신에 대한 자유로운 유희(Spiel)와 상상력(Einbildungskraft)을 방해·제한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종교의 기호와 문자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광고 문자, 이미지, 선전 문구 등 현대사회의 문자와 기호 또한 의도된 이데올로기로 사람들의 이성과 상상력을 조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말하고 있듯이, 속-뜻으로 들어가야 한다. 겉-뜻은 문자와 기호의 외양에 불과한 것으로써 주체적 사고의 겉-살핌에 지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그것은 임의적이고 단의적인 문자의 음성적 발화수단이자 지시인 것이다.   겉-뜻, 겉-살핌을 벗어나서 기호와 문자, 음성을 해체할 때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킬 수 있다. 해석(exegesis)은 일면 종래의 겉-뜻을 해체하고 속-뜻으로 들어가는(eisgesis)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자유로운 상상력은 문자를 떠나 초월적 존재를 만나게 된다. 이른바 변하는 것(기호, 문자)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속-뜻, 진리), 변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변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진리란 지축이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물결은 늘 뛰놀면서 바다는 언제나 평한 것처럼,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물결이 조그만 바람에도 흔들리는 바로 그것 때문에 언제나 변함없는 수평을 가질 수 있듯이, 진리도 쉬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을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의 모든 마음을 불살라 열과 빛을 내잔 하늘 닿는 굴뚝이다”(함석헌, 위의 책, 8쪽).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즉 진리를 만나게 된다. 진리를 나타내려면 표현수단이 있어야 한다. 문자와 기호는 진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는 불완전한 표현수단이다. 표현수단이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고 문자와 기호가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진리를 지시하고 있는 진리 수단이요, 진리의 한 측면이다. 그래서 진리는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고, 변하지 않으면서 변하는 것이다. 문자와 기호, 음성(적 발화)은 시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함석헌은 근원적인 문자 혹은 근원적인 목소리를 말한다. “성경은 양식이라기보다 산 씨알이다. 씨알이기 때문에 그 첨 형성이 없어지도록 키워내야 한다”(함석헌, 위의 책, 9쪽).   성서는 양식이라기보다 산 씨알이다. 씨알로 알아듣고 그것을 맨 처음의 음성과 문자로 인식해야 문자와 기호를 넘어서 속-뜻이 내게 들어와 나를 산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는 맨 처음의 기호와 문자를 자유로운 유희와 상상력에 따라 신을 그려내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신앙적 금기 사항이기도 했다. 신을 형상화하거나 신과 같이 될 수 없는 터부는 오래 전 신화에서도 등장한다.   그러나 금기는 초월적 신비의 욕망과 신과의 일치의 갈망을 가능케 하는 일정한 경계이기도 했다. 상상력으로 들어가는 순간 신은 문자와 기호를 넘어서 새롭게 산출되는(Produktive) 형상이요, 기억·연상되는 형상(reproduktive)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려면 문자를 탈마법화(탈주술화)해야 한다. 문자나 기호를 신의 전부라고 착각하면 건강하지 못한 광기에 사로잡힌다.   성서가 산 씨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것(속-뜻)을 자양분 삼아 인간이 살게 된다면, 맨 처음의 목소리는 결국 진리로서의 역할을 다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성서의 속-뜻이 체화될 때 로고스는 문자나 음성에 그치지 않고 형상이 된다.   맨 처음 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결국 내가 속-뜻의 사람이 되는가, 안 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가시적인 문자와 기호의 겉-뜻과 겉-살핌이 마치 독실한 신자의 표상인 것처럼 자위하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또, 그렇게 발언하고 교육하는 성직자들이 있다면 자신의 행위가 신의 부재와 신과의 멀어짐을 조장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문자가 모든 것의 표현수단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문자를 해체구성하지 않으면 호교론에 빠지거나 아전인수적 오류에 매몰된다.   문자 합리주의나 근본주의적인 죽은 문자주의, 문자 토대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문자와 기호 이면의 산 속-뜻을 읽으려고, 살아 있는 정신을 만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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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정보
    2013-10-25
  • 백성을 떠나서는 어디에도 정치는 없다!
      소위 목자라 하는 것이 잘못되면 사람의 겉만 아니라 속까지, 일부분의 사람만 아니라 나라나 인류 전체를 그릇되게 한다.   ▲ 목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분투적인 몸부림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   약속은 있지 않은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든다. 반면에 있는 것을 있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은 거짓이고 속임수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치적 언어와 문자 이면의 의미와 영향,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깊이 숙고하는 것을 습관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목자는 물신숭배의 해독 불가능한 기호를 문자화, 언어화한다. 문제는 물신숭배와 권력의 관계성이다. 민주주의와도 전혀 관계가 없는 물신의 거짓 기호를 독해하지 못한 백성의 무지는 엄청난 위험을 초래하게 된다.   목자에게는 이 무지와 거짓에 대해, 백성들을 가르치고 보호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의 창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말과 글이 서로 맞지 않으니,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세종대왕)가 이것을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쉽게 익혀 편히 사용하기를 바란다.”   567년이 지난 지금에 보아도 어떻게 이렇게도 백성을 사랑한 성군이란 말인가! 귀하고, 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리석고 무지한 백성은 권력자들에게서 발언된 말과 기호가 거짓인데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것이다.   다음은 함석헌의 말이다.   “우리가 먼저 할 것은 힘의 숭배, 돈의 숭배를 그만두는 일이다. 오늘 세계를 이렇게 만든 것은 군국주의, 제국주의, 산업주의의 국가관이다... 큰 배가 지나간 뒤에 작은 배가 그 물결을 겪듯이 앞서 해먹고 간 힘 숭배 돈 숭배자들이 일으키고 간 죄악의 결과를 당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형편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앞의 것을 따라가려 부국강병만 외고 있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양심이 예민하고서 소위 강력한 목자 될 수는 없다. 성인들이 정치 못한 것이 이 때문이다. 소위 지도력이란 결국 자기 생각을 남에게 요구하는 일이다. 인간의 정신연령이 낮은 때는 그럴 수 있었다.   이제는 이미 그것이 사회악의 근본인 것을 안 시대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을 계속해서는 아니 된다... 제법 진리 비슷하면서도 모든 사회악을 만들어내는 근본이 소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인데 이것을 내세워서 하나의 이기심으로 인해 모인 단체 위에 씨로 하여금 거짓으로 꾸며 따라가게 한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서풍의 노래 5, 한길사, 1984, 143쪽).   공리주의적 발언과 마치 신의 친필인 양 공언된 문자는 백성에게 강요, 강제, 요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설령 그것이 약속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약속은 이성의 자기 신뢰를 통한 인간 이성의 자기 발언과 인격의 확신과 확증이다. 그래서 약속은 개인에게는 신념과 성실의 문제, 타자에게는 믿음과 희망의 문제이다.   신의 약속을 철썩 같이 믿은 백성들은 그 약속의 언저리에 자신의 삶과 생명을 얹어놓고 기다린다. 약속은 다만 희미한 흔적이나 아물거리는 기억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표현이며 실현과 책임이다. 그렇다면 목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분투적인 몸부림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   실현하지 못할 약속이면서도 목자라고해서 언어화하고 의식적으로 실행가능하다고 백성들에게 호언장담하는 독선은 그야말로 흔적도 없는 음성의 찌꺼기나 다름이 없다. 약속은 자기 자신과의 문제이자 타자와의 관계성의 상징이다. 따라서 약속은 이미 세계 내부적인 의미와 세계 구성적인 의미 그리고 백성의 마음과의 관계에서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공유된, 공통된 구원의 공공성이다.   “참 지도자는 내가 한다는 의식이 없다... 자기를 믿고 자기가 위대하여 모든 것을 독점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될수록 모든 사람의 스스로 하는 것을 막고 자기 것만을 억지로 내세우려 한다. 그러므로 선전하고, 달래고 강제하고 속이는 것까지 꺼리지 않는다. 사람은 깊을수록 조용하다”(함석헌, 위의 책, 145쪽).   왜 목자는 모든 일을 자기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분명히 목자는 기적을 일으키는 만능의 기계적 신(deus ex machina)이 될 수 없다. 목자에게 필요한 소양은 이성과 합의, 소통과 경청이다. 그러한 바탕에 서 있는 목자라야 군림, 독재, 독선, 위선이 아닌 섬김과 배려의 참된 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   “거짓 목자는 다스리는 자요, 지배하는 자요, 사람을 폭력을 써서 몰아치는 자지만, 참 목자는 가르쳐주는 자요, 같이 짐을 져주는 자요, 받들어 섬기는 자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스스로 할 수 있게 하는 자다”(함석헌, 위의 책, 144쪽).   가시적 혹은 비가시적 정치의 이미지를 통해서 그 누구보다도 독단에 치우친 목자는 백성의 짐을 지고 가는 듯하지만 실상은 백성의 눈을 가리고 짐을 지게 하는 사람이다. 두려움과 공포는 실체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두터운 장막 뒤에 감추어진 진짜 실체를 모르는 미욱하고 연약한 백성은 보이는 것만이 참이라 믿으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을 느낀다.   그럼에도 정치 경제적 모험이나 실험을 모르는 백성들의 소박함은 형이상학적 가치나 이상도 중요하지만 국가가 계도와 계몽을 통해서 자신들의 짐을 나누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목자는 자신의 말과 문자 속 약속들의 위선과 거짓을 참으로 세우고, 백성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세상을 밝게 만들려면 마음을 알아주어야 한다. 약한 국민일수록 그렇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가물거리는 등잔도 끄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다... 마음이 맑으면 맑은 것을 뵈고 마음이 흐리면 흐린 것이 뵌다. 그렇건만 생각 없는 마음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모른다... 전체의 참을 볼 수 있는 눈이 맑은 눈이요 전체를 모르고 부분만 보는 눈은 흐린 눈이다.   나만 아니라 남을 아는, 이제만 아니라 영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보면 역사는 결코 사납고 강한 자의 것이 아니고 착하고 부드러운 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경에게 빛을 말할 수 없듯이 믿지 않는 자에게 정신의 세계를 말할 수 없다”(함석헌, 위의 책, 146쪽, 148쪽).   목자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문제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전체를 조망하고 영원을 바라볼 수 있는 진정성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함석헌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백성을 위한 마음이 없다는 것은 결국 생각 없는 정치를 하고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음과 생각을 다듬고 자신의 왜곡된 흔적은 지우고, 약속한 흔적들을 확연히 드러낼 수 있는 목자가 백성들로 하여금 축제의 춤을 추게 할 것이다. 백성들 또한 과거의 감상적 정치의 화신을 지금의 목자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거짓 목자가 되라고 하는 것이다.   적어도 올바른 경험적 인격자라면 그러한 정치적 상징과 정치적 존재자에게 순종의 파토스를 드러낼 수 없지 않겠는가. 그것이 정치적 오류라면 오류요, 정치적 오염이라면 오염이다. 백성 스스로의 정치적 무의지와 무능력을 거기서 드러내고자 하는가?   “오늘의 인류는 스스로 문명인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보기 싫고 듣기 싫은 더러운 것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은 소위 목자라는 소리다. 물건이 더러우면 사람의 몸을 더럽힐 수 있고 일이 더러우면 몇 사람을 상처 낼 수가 있으나 소위 목자라 하는 것이 잘못되면 사람의 겉만 아니라 속까지, 일부분의 사람만 아니라 나라나 인류 전체를 그릇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는 거짓 목자의 시대다.   스스로 문명이라 자랑하느니만큼 그만큼 도리어 어둠이요 야만적이다. 그러므로 현대를 건지는 길의 중요한 하나는 우리 속에 품은 목자의 모습을 밝히는 일이다. 요새를 오염의 시대다 공해의 시대다 하지만 오염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오염은 그 그리는 목자의 모습으로 인해 되는 오염이다”(함석헌, 위의 책, 139-140쪽).   정치 없는 백성은 있을 수 있지만, 백성 없는 정치는 있을 수 없다. 노자(老子)는 배부르고 등 따뜻해도(鼓腹擊壤) 군주가 누구인지 모르게 하는 정치를, 맹자(孟子)는 정치 행위의 근본에 백성을 두는 민본정치(民本政治)를 외쳤다.   고금을 막론하고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정치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백성에 대한 정치적 불감증에 걸리다 못해 잔인한 정치적 축제를 즐기는 목자와 그리고 정치인들에게 백성을 위한 성스러운 흔적은 정말 비어 있는(vacuus) 것일까?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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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0-15
  • 전쟁 미화 비판과 비폭력적인 평화
      비폭력적 평화가 확보되지 못한다면 인간의 자유와 미래,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바람직한 삶의 행복은 꿈꿀 수도 없다.   ▲ 어떤 명분을 댄다고 하더라도 평화를 유린하고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전쟁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어떤 경우라도 전쟁은 악이다. 전쟁은 또 하나의 정치 형태라는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와 같은 논리를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명분을 댄다고 하더라도 평화를 유린하고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전쟁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전쟁으로 남의 나라를 점령하고 인권을 빼앗고 목숨까지 앗아가는 것은 합리화가 전혀 불가능한 죄악이다.   따라서 전쟁은 메모리얼(memorial), 즉 기념이나 기억이 될 수 없다. 비록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기에 오늘에 되새기고 반드시 그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않도록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기 위한 메모리얼일지라도, 그것은 인간이 극복하지 못하는 반복적인 트라우마나 폭력 콤플렉스를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더군다나 전쟁이 일어난 것도, 폭력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지속적으로 되새김질하여 그 아픈 상흔을 건드리면서 전쟁 경험자와 비경험자 사이의 간극을 심화시키는 일은 건강한 정치적 태도가 아니다.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전쟁 후 스트레스장애를 겪고 있는 이들에게 가하는 폭력이고, 그것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와 같은 일에 지극히 안일한 태도를 갖고 있다는 냉엄한 채찍질이나 혹독한 꾸지람과도 같은 것이기에 동일한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데올로기의 양극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이념적 체계라도 완벽하거나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념으로 인한 뼈아픈 상처와 고통을 당한 사람들에게 그 이념은 악이다. 정치는 이념의 틈바구니를 교묘하게 파고들어서 편을 가르고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선악의 기준과 정의를 제멋대로 떡 주무르듯 한다.   정전 협정을 체결한 지 수십 년이 지났건만 전쟁에 대한 메모리얼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메모리얼에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도 강요되는 선전을 학습하게 된다. 전쟁을 미화하고 참전자를 전쟁영웅으로 추켜세우는 국가적 행사는 도를 넘어선다.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애국심이나 국방에 흠집을 내는 비국민(?)으로 낙인이 찍힌다.   로빈 마이어스(Robin R. Meyers) 목사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꼬집는다. “전쟁을 미화하고 군인들을 신성한 존재로 만드는 일에 열중하는 미디어 산업은 어디에서나 인기가 있다... 예수님의 처음 따르미들과는 달리, 오늘날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곧바로 우리의 “제복을 입은 용감한 젊은이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들은 참된 양심적인 반대자들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군인들에게) 감사할 줄 모르며 비애국적인 존재들로 간주된다.”(Robin R. Meyers, 김준우 옮김, 언더그라운드 교회, 한국기독교연구소, 2013, 174쪽)   따라서 이제는 비폭력적인 평화가 바로 선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때이다. 그냥 평화가 아니라, 비폭력적 평화다. 로빈 마이어스가 말하고 있듯이, 그것이 종교적 정신, 즉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비폭력은 기독교인들을 위한 선택사항이 아니다. 비폭력은 본질에 속한다. .... 비폭력적 평화주의의 특성이 근본적으로 체제변혁적인 것처럼, 그 특성은 미래의 교회를 위해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본질이다.”(Robin R. Meyers, 김준우 옮김, 언더그라운드 교회, 한국기독교연구소, 2013, 181쪽)   비폭력이 예수의 정신이었고,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적 근간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비폭력적 평화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폭력에 대해서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며, 전쟁에 대해서 응징으로 맞서지 않고, 테러에 대해서 보복으로 맞서지 않는 소극적(동태적) 평화에서 아예 상대를 끌어안는 적극적인 평화가 필요하다. 지금의 평화정책은 사실 평화정치의 구현이 아니라, 내가 의도하는 노선과 정치, 전략을 용인하거나 수용하지 않으면 반평화적 축으로 단정 짓는 것이다.   함석헌은 상대의 양심을 일깨워서 무기를 내려놓고 사람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비폭력의 비결이라고 말한다(함석헌, 함석헌 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125쪽). 모두가 평화로운 세계가 되려면 무기를 내려놓고, 인권을 짓밟는 행위를 멈추고, 분노를 잠재워야 한다. 나아가 보다 더 근원적으로 그런 감정과 행위가 발생할 수 있는 타자의 내면으로 들어가 ‘아니오’(안 돼)라고 깨닫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평화주의자라면 자기희생은 본래부터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우리가 싸우는 것은 저쪽을, 사회의 약한 것들은 세상에서 없애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저들이 나의 이웃이기 때문에, 우리와 한 몸을 이루는 한 지체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약하고 어리석은 자라도 버려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는 싸움입니다. 사랑의 싸움이기 때문에 첫 번에 잘못하면 그 잘못한 것을 말해줘야 하지요. 안 들으면 들을 때까지 해야지요. 죽일 수는 없습니다. 만일 죽인다면, 아무리 내가 옳더라도, 그가 죽기 전에 죽이는 내가 먼저 죽어버립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88-89쪽)   평화는 ‘자기희생’이 뒤따른다. 폭력, 전쟁, 테러, 비난 앞에 저항하는 개별적 존재의 자발적 희생 없이 평화가 구현되지 않는다. 그 희생이란 궁극에는 죽음일 수도 있다. 자기의 죽음으로 평화를 구현한 예수의 희생처럼, 우리도 폭력, 전쟁, 테러에 대한 잘못을 말하고 또 말하면서 사랑의 싸움을 하는 것이다. 그 언어와 행위로 인해 타자의 양심을 깨운다면 “전체를 건지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함석헌, 위의 책, 89쪽)이라는 함석헌의 말처럼, 나도 타자도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궁극의 평화는 어느 개인만의, 어느 한 나라만의 평화가 아니라 전체의 평화, 전체의 자유, 전체의 사랑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평화 때문에 전쟁을 하는 것이라는 명분은 용납될 수가 없다. 최소한 침략에 의한 방어 목적의 전쟁은 있을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전쟁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평화가 될 수가 없다. 반면에 평화는 살림이다. 평화는 생명이다. 그런데 평화를 강조해야 할 시기에 전쟁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는 역설은 납득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서 전쟁을 미화해서 정치적 전략으로 사용하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전쟁으로 인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아니 그들의 이성과 육체는 남용, 오용, 사용되었다. 뜻 없이 백성들만 고통과 죽음을 겪었다. 이제는 평화를 위해서 저마다의 희생을 해야 한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전쟁은 나의 전쟁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내가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 피할 수도, 도망을 칠 수도,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곧 나의 선택적 행위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선택할 수가 있다. 나는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을 선택할 수가 있다.   내가 존재하는 한 나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폭력적 전쟁이냐, 비폭력적 평화냐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언어이자 자유요, 결단이자 이성이다. 비폭력적 평화, 그것은 결코 추상적 현실이 아니다. 그로인해 앞으로 국가의 평화, 녹색의 평화, 종교의 평화가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폭력적 평화가 확보되지 못한다면 인간의 자유와 미래,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바람직한 삶의 행복은 꿈꿀 수도 없다. 비폭력적 평화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인류는 영원히 동물적 본능의 투쟁과 다툼, 그리고 싸움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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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20
  • 다 없는 사랑을 하는 인간
      다함은 모든 종교를 뛰어 넘는 실천들, 즉 교리나 신념(신앙), 혹은 이론보다 우위에 있는 인류 보편적인 실천에서 나타난다.     ▲ 다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괸다는 것, 그것으로써 모든 것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종교적 행위에서 온 몸, 온 맘, 온 정성을 다해서 신을 섬기고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 근거 혹은 초월자를 향해서 다함이 없는 사랑을 하는 것이리라. ‘다하다’는 것은 곧 완성했다, 성취했다, 끝인 그것으로서 더는 할 일이 없다는 것인데, 그야말로 전적투신이다. 성서는 그렇게 말한다. 마음, 정성, 힘(마음, 목숨, 뜻; heart, soul, mind; kardia, psyche, dianoia)을 다하여 섬기라고(신명 6,5; 마태 22, 37). 그만큼 전심전력, 전력투구하여 실재(Reality)를 섬기라는 것이다. 함석헌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이미 예수를 믿는다고 했으니까 수년 동안 철저히 해봐야 돼. 철저히. 좌우간 내 있는 힘까지 다해야 돼. 그래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몸을 다해서 해봐라. 그 ‘다’라는 말이 무서운 말이에요. 건성으로 다다, “하나님 아버지, 간절히 빕니다. 우리 몸과 맘을 다해서 드린 기돕니다.” 천만에! 나는 그런 기도는 못해요. 다가 어디? 다란 끝이 없어요. 맹자도 진기심자(盡己心者)는 지기성(知其性)이라, 제 마음을 다한 사람은 바탕을 안다, 지기성(知其性)이면 지천(知天)이라, 제 성품을 알면 하늘도 안다고 그랬어. 그런 거 다 굉장히 어려운 밑천이 먹은 거, 체험한 거예요. 그러니 그 진짜가 어떤 거냐? ‘다한다’는 게 어떤 거냐?... 네 속에서 네 혁명이나 어서, 네가 새 사람이 되도록 어서, 그럭하면 아마 이 민족이 살 길이 있겠지”(함석헌, 함석헌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48-49쪽).   함석헌은 애초에 이것이 매우 어렵다고 시인한다. 그러면서 ‘다한다’는 것을 인간 안에서의 혁명, 인간이 새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방향을 일러준다. 다한다고 하는데 다한다는 것은 결국 각 개인 안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혁명,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근본적 열정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다한다’(enden, leisten, sorgen)는 것은 마음의 혁명, 새 인간의 혁명 아니고서는 안 된다. 존재근거를 발견하고, 그 존재를 자신의 삶에 전부로서 인식하고, 삶으로 체현(embody)하는 것은 설렁설렁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 안에서 근본적인 마음이 하늘의 명령으로 불일 듯 거듭나지 않고는 절대 다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함이 있는 존재라고, 다하고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가 없다. 다만 그에 대한 표본을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 Rahner)의 말대로, 그리스도는 ‘다 된 인간’이고, 사람들은 ‘되어 가는 그리스도’다.”(길희성,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휴, 2013, 135쪽). 그리스도는 ‘다 된 인간’이다. 다시 말해서 다함으로서 다 된 인간이다. 초월적 실재에 대해서 다함으로써 자신을 봉헌한 것이 인간으로서의 완성, 다 됨, 완전히 됨, 온전한 됨이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인간은 그저 ‘다’(완성)를 향해 되어 가는 인간이다. 완전한 존재(be)로서 초월적 실재에게 다가서고(coming) 있는 중이다. 이렇게 완전한 존재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성인’이다. 성인은 완전한 존재 가능이다. 완전한 존재는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라면, 자신의 전생애를 바쳐 다함이 있는 존재로서 살아가고자 했던 사람들이 성인이기 때문에 그들은 완전한 존재 가능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성의 세계에서 말하는 참나란 우연적 산물인 개인의 특성이나 재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참나는 인간이면 누구나 타고난 본연의 인간성 자체다... 성인(聖人)이란 곧 참사람을 일컫기 때문이다... 성인은 별다른 존재가 아니라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다. 인간의 인간성을 제대로 자각하고 실현한 존재다”(길희성, 위의 책, 39, 134쪽).   ‘가장 인간다운 인간’, ‘인간의 인간성을 자각한 존재’, ‘참사람’은 초월적 실재에 대해서 다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표상이다. 다함은 자신의 내적인 마음의 혁명을 이루어 참나를 깨달은 새로운 인간의 행위이다. 그렇다면 그 다함의 궁극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독과 침묵이다. 자신의 내면적인 고독과 침묵을 좋아할 수 있어야 한다. 고독과 침묵은 인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초월적 실재가 들어설 시공간을 주기 위함이다. 다함의 행위는 나를 위한 행위는 없고 오직 초월적 실재를 위한 삶만이 있기 때문에 고독과 침묵은 영성의 필연이다. “영성과 고독이 함께 간다면 영성과 침묵도 떼려야 떼기 어려운 짝을 이룬다... 고독과 침묵은 같이 가며 자발적 고독은 자발적 침묵을 위함이다... 생각은 홀로 하는 말이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다. 그래서 진정한 침묵은 생각마저 멈추는 무념의 경지까지 나아가야 한다”(길희성, 위의 책, 195쪽).   생각을 멈춰야 초월적 실재가 들어설 자리가 있다. 실재는 생각이나 사념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생각하면 할수록 실재에 대한 깨달음에는 방해가 된다. 따라서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생각한다가 맞을 것이다. 생각은 자신에게서 피어나는 깨달음이어야 하는데, 자칫 이에 미치지 못하는 생각을 함으로써 편견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다함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해보면 다함이 되기 위해서 나의 생각이 있으면 안 된다. 단지 생각의 흐름을 관찰하고 종국에는 생각을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초월자의 뜻, 초월자의 마음, 초월자의 사랑으로 일념이 되어야, 무념의 상태에서 다함이 가능하다. 그래서 고독과 침묵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고독과 침묵은 자기 심연(실재)과의 대면을 가능케 하고 초월적 실재가 머무는 장소(locus)를 확보할 여지를 준다. 말하고 또 말하는 데 익숙하고 이제는 그 말 안 함이 오히려 병리(질병)가 되어 버리는 사회에서 고독과 침묵은 단순히 치유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인생에서도 다하고 더 나아가서 완전한 존재, 초월적 존재에게도 다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마지막으로 이 다함의 구체적 삶의 형태 혹은 신앙 형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것은 정의, 평화, 사랑, 자연 등으로 나타난다. 길희성은 이렇게 말한다.   “종교다원주의자들 가운데는 이론이나 사상의 차원보다는 실천의 차원에서 다원주의론을 펴는 사람도 있다. 실천적 종교다원주의에 따르면, 종교의 궁극적 일치는 어떤 종교적 경험이나 교리, 사상 또는 궁극적 실재에서보다는 정의와 사랑 같은 실천적 차원에서 찾는다... 정의, 평화, 사랑, 자유, 해방, 자연, 인간의 복리라는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구원의 이상 앞에서 과거나 현재 존재하는 종교는 모두 불완전하다... 실천적 종교다원주의는 진리보다 사랑의 우선성을 주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사랑이 진리다”(길희성, 위의 책, 177-180쪽).   다함은 모든 종교를 뛰어 넘는 실천들, 즉 교리나 신념(신앙), 혹은 이론보다 우위에 있는 인류 보편적인 실천에서 나타난다. 실재에 대해서 다함은 실재 안에서 포괄하고 있는 진리, 곧 사랑이 전부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다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괸다는 것, 그것으로써 모든 것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교설, 교리, 신학도 필요하지 않다. 다함. 그 끝을 보았는가? 그 끝을 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사랑하라!’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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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09
  • 정치적 존재의 삶과 바르게 사는 인간
    또 다시 “잘”이라는 근대적 경제성장으로의 회귀 속에 매몰되어 “바르게”라는 삶의 가치를 도외시한다면, 종래에는 자기의 권리마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 말 혹은 언어란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면서 인간의 사유를 형성하고 삶을 창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말하지 않는 정치는 없을 것이고, 역으로 정치 없는 말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말과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하지만 말을 잘못 사용하면 오해와 갈등, 세계 이해의 불가능성, 상호 소통 불가능성 등을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언어가 갖고 있는 불확정성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말 혹은 언어란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면서 인간의 사유를 형성하고 삶을 창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이규호, 말의 힘, 좋은 날, 1998, 58-60쪽)  이러한 언어철학적 의미에서 본다면, 정치적 상황에서 말이라는 것은 맥락과 소통이 중요한데, 정부나 정치가들이 하는 말을 유심히 살펴보면 전혀 맥락과 맞지 않는 말들을 하고 있다. 맥락과 맞지 않는다는 말은 소통이 안 된다는 말도 된다. 말(기표)은 퍼뜨리되 의미(기의)는 헷갈리고 조작되는 말들을 자꾸 발언한다. 말은 적게 하되 국민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이따금 복지, 행복, 국정원, NLL, 종북, 역사의식 등 정부가 쏟아내는 말들은 말의 파시즘, 즉 언어의 전체주의화, 과거 정권으로의 회귀를 연상하는 것들이다. 이 사회는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하다는 이상한 논리에 빠져서 대부분의 책, 강연, 강의 등이 행복과 연관이 되지 않으면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말의 파시즘, 정서의 파시즘, 과거 정부가 이루지 못한 미완의 파시즘을 완성하려고 하는 것일까? 복지라는 것도 그렇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복지가 단순히 물질적 복지만을 말하는 것이 분명히 아닌데도, 우리는 물질적 복지의 양을 늘리면 그것이 곧 복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민주주의는 국민 혹은 민중들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에 균형을 맞춘다는 것쯤은 상식이다. 최장집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필자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는 민중(people)의 광범한 정치참여에 의한 공적 결정과 그 결정을 집행하는, 일련의 규칙 또는 제도를 가지며, 이를 통하여 그것은 정치의 영역에서 민중의 권력으로 표현되고 사회의 영역에서 민중의 물질적, 문화적, 정신적 삶의 질적 고양이 담보되는 정치적 체계를 말한다.”(최장집, 한국민주주의의 이론, 한길사, 1993, 4쪽)따라서 민주주의의 복지는 독일의 사회학자 랄프 다렌도르프(R. Dahrendorf)가 말하는 정치적 참여와 과정, 정치적 기회와 통로의 확대를 의미하는 사회적 시민권에서 물질적 급부(provisions)만 강조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물질적 급부를 통해서 복지와 사회보장을 확대하면 사회적 시민권이 확대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측정 가능한 양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사느냐에 있다기보다 정치적 삶의 측면에서 질적인 삶, 즉 ‘도덕적 자율성과 평등의식에서 기초한 삶’을 사느냐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최장집, 민중에서 시민으로, 돌베개, 2009, 124, 168-169쪽)그렇다면 그 질적인 삶의 척도와 근본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함석헌이 말한 것처럼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이 되어야 한다.“잘 살아보자는 것, 소위 잘 산다는 얘기 하는 것 그게 지배적인 관념인 되는 건, 그건 아무리 선진국이라 해도, 그리고 또 선진국에서 하는 일이지만, 그게 무조건 좋은 얘기인 줄로만 알지만은 않아야 돼. 그런데 국가에서 썩 잘 애용하는 표어, 곧잘 내세운다는 것이 “우린 복지국가 건설한다.” 난 그 복지국가란 소리 아주 듣기 싫어. 새벽이면 거의 매일이다시피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하는 요놈의 소리가 참 듣기 싫어. 얼마나 잘 살아보겠다고 그래. 그거 얼마나 지독한 사람들이야. “바로 살아보세, 바로 살아보세”하고 가르친다면 잘 살 수 있지만,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하면 다 나쁜 놈 되고 만다 그 말이야. 잘 살기 위해서는 무소불위(無所不爲)예요. 못할 게 없어요. 잘 살기 위해선...... 그래 ‘잘’이란 좋은 의미로도 쓰이지만 나쁜 의미로도 쓰이는 거야. 그런데 그것이 아주 우리의 인생관이 돼가지고, 정부가 그걸로 일부러 고치려고 하고 있어. 서양 선진국이란 것도 역시 그런, 사회 복지라는 것, 그것만 강조해. 옛날에는 그렇지 않아요. 사람으로서 도리에 이르느냐, 아니냐.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함석헌, 함석헌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74-75쪽)복지(wellbeing/welfare)라고 하는 것은 잘(well) 먹는 것(fare)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복지는 삶의 양이 아니라 삶의 질이다. 영어 단어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being)의 문제다. 자꾸 많이, 좋은 것을 소유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가지고 높은 데 올라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함석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살 것인가 하는 존재의 문제가 곧 복지의 본래적인 의미라는 것이다. 최장집이 염려하는 목소리를 좀 더 들어보자.“인간적인 가치를 구현하고, 한 사회의 문화적·사회적·사회경제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을 위해서 개인과 사회가 동원되고 한 사회의 개인적·집단적 가치가 규정되며 그 비중에 따라 가치의 위계 구조가 만들어지는 상황이 도래했다. 인간의 가치, 민주주의의 가치, 환경의 가치, 평화의 가치가 경제 성장의 가치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인식되는 수단-목적의 전치 현상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최장집, 민중에서 시민으로, 돌베개, 2009, 142쪽)정치의 가치 전도 현상은 위험 수위를 넘어서 인간이 정치사회적 존재라면 응당 추구해야 하는 근본적인 삶의 태도가 완전히 바뀐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치적 존재인 인간이 사회적 삶을 살아가면서 가장 우선으로 두어야 하는 가치가 또 다시 “잘”이라는 근대의 경제성장으로의 회귀 속에 매몰되어 “바르게”라는 삶의 가치를 도외시한다면 정치의 본질,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인간 혹은 민중, 시민의 자기 권리마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민중의 정치적 행위, 정치적 삶은 국가로부터의 어떤 혜택을 받는 수혜 대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의 존재로서 바르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와 연관하여 국가는 일정한 정치적 언어로 과거 미완의 파시즘을 선전하고 선동하는 것을 멈추고 국민들에게 바르게 살도록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야 할 책무가 있다. 거듭 이야기 하지만, 잘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르게 사는 것’이다. 그것을 국민에게 말할 수 있고 강조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함석헌이 말했던 주장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이야기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시대에도 울림이 있는 것은 그의 예언자적 외침이 잘 들어맞기 때문이라기보다 우리 자신의 사유가, 우리의 정치적 의식과 삶이 너무나 진부해서이지 않을까?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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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22
  • 초월자의 발화와 종교인의 이성적 신앙
    이성을 계발하고 그것을 통해서 신앙에로, 초월자에게로 향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을 무신앙이나 비신앙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인간의 믿음은 초월자의 언어를 깨닫고, 그 언어를 자신의 삶의 근간으로 삼는 데까지 나아간다. 성서는 초월자의 언어로 되어 있는 일종의 암호와도 같다. 그것은 풀어 밝혀야 이해될 수 있는 언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은 초월자의 언어를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한 인식과 행위의 기능으로써 작용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초월자의 언어 자체와 초월자의 언어로부터 유출(emanation)되는 것 사이의 구분, 즉 무시간적인 영원성이냐 아니면 시간적 유한성이냐를 식별하는 일이다. 인간의 믿음은 초월자의 언어를 깨닫고, 그 언어를 자신의 삶의 근간으로 삼는 데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그 언어가 초월자 자체인지 아니면 초월자로부터 유출된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종교인은 강론자(설교자)로부터 발화(發話, utterance)된 언어 혹은 해석된 언어를 초월자의 말(logos)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성서를 초월자의 것, 초월자에게 속해 있는 것으로 보는 것과 초월자의 언어가 시간적인 유한 세계에 들어와 가변적 형태의 언어가 되는 것의 차이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간은 신앙에 있어서도 이성을 통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그저 성경에서 그랬다고, 그래서 무조건 받아들이는 걸로 하면 정성은 있는 것 같은데 이해 못해요. 그러니까 믿기도 해야 하지만 이해가 있어야 해요. 우리 이성으로 “아, 그렇지”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인간이란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것이라야 깊이 내 속에 들어와 내 의지가 움직이고 실행에까지 힘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치 모르고 그저 믿으라니까 믿는 거 좋지 않아요... 내게 이롭다니까 그러는 거지 도덕적으로 수긍을 한 게 아니에요. 그러기 때문에 사람인 다음에는 그 점을 인간의 일을 따져야 해요... 결코 인간 이성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게 아니라 그 말이에요. 인간 이성을 잘 이해하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할 수 있어요. 아주 이치에 맞지 않고 되는 대로, 그런 게 아니에요.”(함석헌, 함석헌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19쪽)함석헌은 성서 혹은 해석되어진 언어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한다. 그것은 불완전한 신앙인식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성서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을 수용·수긍·긍정·실천이라는 신앙적 태도, 다시 말하면 신앙의 실천이성적 행위, 혹은 도덕적 행위로 나갈 때 온전한 믿음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함석헌은 믿음을 인식(이해)과 실천(도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신앙에 이성이 요청된다고 하는 것은 초월자의 발화를 바로 신앙화하기만 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냐 아니면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실천적 행위로까지 끌고 갈 것이냐를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초월자는 비상식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신앙적인 공통감각에 호소하여 모두가 그렇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어떤 신앙형식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이지 않다면 초월자도 상식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함석헌이 우리 자신의 이성을 잘 이해하면 초월자가 하신 일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의미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인간이성의 성숙성과 건전성이다. 건강하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한 이성이 상식적이라 말할 수 없고 보편적이라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초월자의 발화가 설득력이 있으려면 그 발화를 수용하고 실천하는 종교 공동체 구성원들의 이성이 성숙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그들의 행위가 상식이 될 수 있고 그 속에서 초월자의 발화 행위를 볼 수 있다. 발화 행위가 지각된다는 것은 곧 지각된 존재의 개현(開顯) 가능성과 더불어 그 개현으로 말미암아 인간 존재의 자기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래서 초월자의 발화에 대한 인식은 인간 가능성의 인식이라 말할 수 있다. 상식(common sense)이란 인간과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갖춰야 할 공통적 의미, 공통적인 감성, 공동체적인 감각이며 보편성, 평균성의 잣대와도 같다. 인간 가능성이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초월자의 발화를 이성과 도덕으로 구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의 이성과 도덕을 보면 초월자의 일하심, 초월자의 나타남 또한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초월자의 발화, 즉 성서가 참의 실재인가 아니면 거짓의 가상인가, 존재인가 비존재인가를 판별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이성과 도덕으로도 전자임이 여실히 입명되는 것이다. 성서는 초월자의 자기 계시 혹은 자기 드러내 보임인데, 이것은 초월자의 발화를 이해할 수 없다면 드러내 보임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발화의 무의미함은 결국 무조건적 수용이나 무조건적 긍정이나 다름이 없다. 이해할 수 없는 발화 주체나 발화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무지몽매함이 발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이성은 인식능력을 통하여 발화 주체와 발화의 이해를 필연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가 이성을 거부하고 멀리하는 것은 발화 주체와 발화, 즉 초월자와 초월자의 언어를 파악할 가능성을 저버리는 것이다. 발화 주체와 발화가 초월자의 의미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아닌 것인지는 이성의 이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성은 쉼 없는 질문 가운데 초월자와 초월자의 발화와 마주서있다. 이 선험적 이성은 초월자 그 자체를 사유하고 신앙적 실천과 도덕적 실천의 가능성을 위해 발화에 대해서 이해하고 동시에 진리를 통일하고 비진리를 구별·분리한다. 또한 이성의 능력을 간파하고 그것을 잘 활용하는 종교 공동체일수록 초월자가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를 더욱더 잘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고로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성을 계발하고 그것을 통해서 신앙에로, 초월자에게로 향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을 무신앙이나 비신앙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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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정보
    201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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