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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1-07-02
  • 한국화학연구원, 스펀지로 열을 전기로 바꾸는 소재 개발
    [타임즈코리아] 구부러지고 늘어나고 압축이 돼, 열이 있는 곳 어디에든 붙여 열을 전기 에너지로 바꿔주는 열전소재가 개발됐다. 완전히 유연한 열전소재가 개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화학연구원 화학소재연구본부 조성윤 박사팀은 열원의 형태와 관계없이 어디든지 붙일 수 있는 ‘스펀지형 열전소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열을 전기로 바꿔주는 소재로 온도 차에 의해 전기가 발생한다. 일례로 발전소 굴뚝에 열전소재를 부착하면, 굴뚝 안쪽의 고온(150도)과 바깥 상온(30도)의 온도 차로 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구진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스펀지에 탄소나노튜브 용액을 코팅했다. 탄소나노튜브를 물리적으로 분산시킨 용매를 스펀지에 도포한 후, 용매를 빠르게 증발시킨 것이다.  제조방법이 간단해 대량생산에도 적합하다. 모양을 만들어주는 틀 없이 스펀지를 이용해 열전소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거푸집 없이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셈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열전소재는 무기 소재로 만들어진 탓에 유연하지 않았다. 사람의 몸이나 자동차 등 다양한 곡면의 열원에 붙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제조공정 자체도 까다롭고 복잡하다. 전 세계 연구진들은 유연한 열전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탄소나노튜브에 주목했다. 탄소나노튜브는 전기전도도가 높고 기계적 강도가 강하며, 지구상에 풍부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팀이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해 유연한 열전소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스펀지와 유사하면서도 높게 쌓을 수 있는 탄소나노튜브 폼(foam)을 만든 것이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압축 안정성 실험 결과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는 “지금까지 개발된 유연한 소재는 지지체나 전극의 유연성을 이용한 것”이었다면서 “소재 자체가 유연한 건 이번 스펀지형 열전소재가 처음이고 제조방법도 간단해 대량생산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개발된 스펀지형 열전소재는 열전소재의 전기적 특성과 스펀지 고유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10,000번 반복해도 형태는 물론이고 전기적 특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압축 전과 압축 후의 저항값이 각각 1.0Ω(옴), 0.3Ω으로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이는 스펀지에 기공이 무수히 많아 변형에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펀지의 탄성을 이용한 응용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경우, 압력이 커질수록 발전량도 덩달아 높아졌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했을 때 최대 2㎼(마이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하여, 압축 전과 비교해 발전량이 10배 정도 증가했다. 이에 대해 연구논문 1 저자인 김정원 박사는 “스펀지의 압축되고 복원되는 탄성을 활용해 몸에 부착하는 웨어러블 기기에 적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수한 기계적 성질이 요구되는 자동차 등에도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정원 박사는 “열전소재 분야 전망도 밝다. 현재 자동차에서 사용하고 난 후의 열이나 온천수를 이용한 열전발전 시작품의 실증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관련 기술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성과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에너지 소재 분야 권위지인 『나노 에너지(Nano Energy), IF:16.602』8월호에 게재됐으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창의형 융합연구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 한국뉴스
    • 과학
    2020-09-22
  • 종속될 것인가, 회복할 것인가
      [타임즈코리아]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느린 사람은 어찌 살라는 건지, 넋이 나갈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많은 것들이 바뀌곤 한다. 이런 현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변화는 순리이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논리가 더 우세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약육강식이 진리이어야 한다. 여기에 동의할 사람들은 모두 강자라야 가능하다. 적어도 변화가 자연에 의한 것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이 자초한 변화에 순응하라는 것은 무조건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이 그만큼 편리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만큼의 행복을 확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비대 면화되어 가고 있다. 이것을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변화라고 동의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코로나19에 따른 불가피한 강요인 셈이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에 따른 변화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만남에서 누리고 싶은 행복은 사람의 DNA 속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다. 현장 공연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감흥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런 노력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 개인의 욕심이 아니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예술을 가상의 세계에 가두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 만약 가상의 세계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우리가 굳이 직접 여행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영상이나, 증강현실 그리고 가상현실 시스템만으로도 더 자세하게 보며 실감 나는 장면 속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온라인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계기로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콘텐츠를 구별하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가 파산했다는 기사가 유난히 아프게 느껴진다. 과학과 기술이 육체적 요소라면 문화와 예술은 정신적 요소이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난국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문화와 예술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예술의 존엄과 가치는 예술가들이 지켜 내야 하는 것이다. 대중화, 실용화 이런 측면들은 굳이 지키려 하지 않아도 어느 시대에나 자생해 왔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변하지 않게 하는 일,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려는 힘은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자극하여 거대한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예술의 힘이고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망가트려놓은 만남과 관계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 속에 내어주고 거기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만남과 관계를 열망하는 DNA와 인간의 지혜가 코로나19보다 더 강함을 증명하며 예전과 같은 역동성을 회복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왔듯이 이 또한 극복해 낼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코로나19를 이겨낼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이전과 같은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예술가들이여, 우리는 과학자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감동을 선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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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6
  • 인문학은 이론이 아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본질을 찾아 나선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사변적으로 흘러가면 이념이나 현상적인 집착으로 이탈하게 된다.   이런 행태는 수많은 증오와 폭력을 낳으며 씻지 못 할 마음의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남길 뿐이다.   인문학적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삶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타자와 참된 관계를 형성하는 정신을 의미한다.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사람은 ‘너’와 더불어 ‘나’라는 관계를 통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조화로움의 아름다움을 통해 공감함으로써 상대방을 이웃으로써 인식하고 수용하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문학, 역사, 철학, 종교 등의 이론을 습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그들의 아픔과 울분, 사랑과 기쁨을 공유하는 공감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인문학은 ‘너’와 더불어 존재하는 ‘관계’로서의 ‘나’를 인식하고 사랑(자비, 나눔, 배려, 공감)으로 소통하는 지혜를 깨우치고 표현하게 하는 모든 문화, 사상, 지식 등을 말한다.   인문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진리를 찾고 따른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온전히 깨닫고 그 사랑을 최선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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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정보
    2016-03-18
  • 현대인 허균이 살았던 과거의 삶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동부승지, 삼척 부사,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허엽(許曄)은 30년간이나 관직에 머물렀는데도 생활이 검소했고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한 인물이다.   허엽의 호는 초당(草堂)이다. 오늘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초당 순두부의 본고장이 바로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이다.         이곳에서 허엽의 아들 허균(許筠, 1569~1618)이 태어났다. 교산(蛟山) 허균은 명문가의 자제로 천재적인 두각을 나타내 모든 것이 보장된 인물이었지만, 불우한 계층을 대변하는 삶을 선택했다.   이런 까닭으로 허균은 조선시대 반역의 상징 같은 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평등사상에 눈을 뜬 허균의 급진적인 개혁 사상은 오늘날에 와서는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단과 반역을 도모하는 사회전복세력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쓴 《홍길동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허균이라는 인물을 볼 때, “역사는 현대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항상 새롭게 해석되고 평가될 수 있기에 역사를 보는 모든 이들의 시각은 상대적이다”고 말한 영국의 정치학자이며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 1892년~1982년)의 견해가 더욱더 공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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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정보
    2016-03-15

실시간 학술정보 기사

  • 액티브 에이징(Active Aging) 시대를 열자
       노년이 뿜어내는 향기와 멋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지탱하게 하는 필수적인 자양분이다.   ▲ 노년은 쌓여진 경륜과 지혜를 열정으로 용해하여 새로운 희망을 창출해내는 원숙한 멋과 향기이다.   곡식이나 과일이 잘 무르익었다는 것은 충실하게 결실하여 아름답다는 것이다. 알차게 영글어 밤송이에 꽉 들어찬 알밤이나 빨갛게 물든 감을 보노라면, 찬연함 가운데 밀려오는 감동을 받게 된다.   이런 감동을 선사하며 그윽한 삶의 여운과 향기를 발하는 노년의 삶이 액티브 에이징(Active Aging)이다. 시들고 메마른 마음으로 우울한 삶이 아니라, 열정을 불사르며 기쁨을 창출하는 삶이 액티브 에이징(Active Aging)이다.   무엇이든지 이해하면 동의할 수 있게 된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갈등하고 절망한다. 사회적으로 노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노년들 스스로 역시, 노년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이해는 본질을 흔들어 깨우는 힘이고, 상승작용의 원동력이 된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을 ‘코나투스(conatus)’라고 했다. 코나투스는 맹목적인 자기 보존적 본능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본질적 인식에 따른 힘으로 나타나는 긍정과 열정이며, 추진력이다.   누구나 더욱더 많은 코나투스를 가지게 될수록 그만큼의 활력과 역동성을 발현하게 된다. 이것은 무기력이나 허무를 소멸시키고 생명력으로 넘치게 하는 힘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모두는 노년에 대한 코나투스(conatus)를 발현해야 한다. 활기찬 노년(Active Aging)은 경륜과 새로운 열정이 이루어내는 또 한 번의 싱그러운 파종이다.   하고자 하는 사람은 방법이 생각나고, 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변명만 떠오른다고 하지 않던가. 노년은 인생의 어느 시기도 흉내 낼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다. 노년의 감추어진 매력은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알아줄 것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힘이다. 휴먼 라이브러리(Human Library)에 정돈된 명저들이 바로 노년이다.   노년은 의존적 대상이 아니다. 노년을 동정하는 차원에서의 출발이라면, 그것은 이미 신선한 동력을 잃은 것이다. 노년은 쌓여진 경륜과 지혜를 열정으로 용해하여 새로운 희망을 창출해내는 원숙한 멋과 향기이다. 노년이 뿜어내는 향기와 멋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지탱하게 하는 필수적인 자양분이다.   이것은 가장 귀한 사회 공헌이다. 이를 활성화한 사회적 동력의 창출이야말로 창조 경제가 아니겠는가? 이에 대한 연구에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농경사회, 산업사회를 거쳐 지식정보사회를 이루어낸 주역들이 바로 지금 한국 사회의 노년이다.   이들을 ‘효(孝)’라는 이념에서 억지로 섬기라고 하는 것도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려워졌다. 이들이 가진 경륜과 지혜를 새로운 가치로 만들어내는 혁신이 필요하다. 마리 드 엔느젤은 그의 저서 ‘살맛나는 나이(학고재)’에서 “늙되, 늙은이가 되지 말라. 신랄해지거나 절망에 빠지지 말라. 삶에 대해 침울하고 신랄해지는 날 우리는 늙은이가 된다”라고 했다. 이런 사고의 유지가 노년들의 몫이라면, 사회적으로는 이런 사고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액티브 에이징(Active Aging)에 대한 시스템이 가동되어야 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01-28
  • 타임즈코리아 설교대학(1)
      설교학자이며, 현장 목회자인 안병만 박사안병만 박사는 외조모가 선교사로부터 처음 복음을 접한 이후 3대째 신앙을 이어오는 신앙명문가의 목회자이다. 고신대학교와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학생신앙운동(SFC)의 간사로 젊은이들의 복음화를 위해 5년 반 동안이나 캠퍼스 사역에 헌신했다. 복음의 빚진 자 된 심령으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비전과 열정에 불탄 저자는 영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하고 위클리프대학교에서 선교에 대한 기초를 다진 다음,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소재한 포체프스트룸(Pochefstroom)대학교로 건너가 학문적 결실을 거두게 된다. 그는 포체프스트룸대학교에서 ‘설교에 있어서의 적용’에 관한 논문으로 신학석사(Th.M)를 받고 이어서 ‘존 스토트(J.Stott)박사의 설교의 원리와 방법’으로 박사학위(Th.D)을 취득하였으며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과 고려신학대학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기여하고 있기도 하다. ▲ 열방교회 안병만 담임목사 1997년 말에 귀국하여 부산에 있는 수정교회를 담임하였지만 소명에 따라 아무연고도 없는 용인 수지지구의 상가에서 ‘열방교회’를 개척하여 성장을 거듭하였다. 성경의 진리를 치열하게 실천하는 교회와 선교적 열망을 불태우는 저자의 헌신은 교회의 이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 결실이 광교 신도시와 인접한 신봉동에서 도심형 전원교회의 건축으로 귀결되어졌다. 그는 이것이 마무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그 증거는 그의 어린이 사역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영어선교원, 어린이집, 어린이영어도서관 등이 새로 지은 교회의 주요 시설로 들어차 있다. 이 모든 결실들과 학문적 성과가 그의 저서들에 용해되어 있다. 저서로는 『존 스토트의 설교의 원리와 방법』(프리셉트),『하나님의 마음-요한 일서 강해서』(프리칭 아카데미), 『맛 설교학』(프리칭 아카데미), 『하나님의 복음-마가복음 강해서』(도서출판 영문),『아름다운 만남』, 『아름다운 성숙』이라는 새신자 성경공부와 양육용 교재가 있다.설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현대는 첨단 커뮤니케이션의 시대이다. 매체와 말은 많으나 진리를 전달하는 메시지에 목이 갈한 시대이다. 19세기 미국 설교자 필립 브룩스(Phillips Brooks)는 “설교는 인격을 통한 진리의 전달”이라는 말을 했다. 이런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진리가 약화되다 못해 왜곡되는 지경, 인격은 마른 땅에 물이 스미듯 성공주의에 예속된 물량화, 계량화에 흡수되어 버리고 말았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던 크기만 하면 된다는 규모적 결과주의가 제일이고 바람직한 것인 양 허세를 부리고 있다. 성경을 빙자한 자기주장식 강연화, 인본주의적 긍정이 듣는 사람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을 좋은 설교라 생각하고, 이런 설교자가 유능한 설교자로 대접 받기도 한다. 목회와 설교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먼저 올바른 방향설정부터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진정 하나님 중심적 사고와 행동으로 돌아서야 한다. 이를 위해 설교학자이며, 현장 목회자이기도한 타임즈코리아 설교대학장 안병만 박사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설교의 길을 묻고자 한다.  ▲ 안병만 박사와 인터뷰 하는 모습 (왼쪽 박요섭 타임즈코리아 대표, 오른쪽 안병만 박사) 여러 분야가 많이 있는데 어떻게 설교학에 관심을 가지고 전공을 하시게 되셨나요?저는 신학대학원를 졸업하고 SFC학생운동 간사로 6년 동안 사역을 했습니다. 그 후 외국에 나가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학생신앙운동’에 관한 연구를 하고 싶었는데 귀국했을 때, 좀 더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학문이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때 존스토트 목사(영국의 복음주의자, 설교학자)의 설교를 연구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영국에 갈 때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았고, 오직 후원에 의해서만 공부해야 했습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저희 교단의 자매학교인 남아공의 ‘포체프스트롬대학교’에 가기로 했고, 거기에서 본격적으로 설교학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석사과정에서는 설교학의 적용에 관한 부분을 연구했습니다. 박사과정에서는 석사과정의 연구를 바탕으로 존스토트 목사님의 설교 분석과 비판을 통해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미국과 영국에 많은 설교학자들이 있지만, 제가 존스토트 목사의 설교를 연구한 동기는 석사과정의 연구 자체가 설교의 적용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이 오늘 현대 사회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이 문제가 중요한데 존스토트 목사는 이 적용 부분에서 탁월하여 그 분의 설교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01-15
  • 타임즈코리아 설교대학(2)
      현대는 첨단 커뮤니케이션의 시대입니다. 다양한 매체를 감안한 설교적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당연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시대 가치적으로 만들어내고 공유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이 문화를 벗어 날 수는 없습니다. IT도 시대를 대변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자 자신이 아날로그라고 생각해서 IT를 무시하면 퇴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IT를 쫒아 가기만 해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 적절히 활용해야 합니다.저는 예전에 설교원고를 프린트해서 강대상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아이패드가 나온 이후로 종이 원고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커뮤니케이션 차원도 있지만, 제 삶의 철학 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종이의 원료가 나무이기 때문에 이것을 최소한으로 사용해야합니다. 종이의 과도한 사용은 결국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인터뷰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는 안병만 박사 그래서 저는 설교를 할 때, 원고는 아이패드를 보고 필요한 자료는 파워포인트를 활용해서 설교를 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영상세대이기 때문에 말로서 전달하는 것보다는 이런 기기나 자료들을 활용하면 커뮤니케이션 부분에서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영상이나 플레쉬 등 필요한 자료는 수시로 모집해서 설교 중에 자주 활용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너무 본질을 훼손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은 빠지고 영상만 남는다면, 이것은 잘못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말씀의 효율적 전달을 위한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청중들이 말씀을 보다 더 잘 전달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질의 시대 가치적 차원에서 이런 저런 다양한 첨단 시스템들이 복음전달에 쓰이는 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기도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껍질에 매달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충실한 준비위에 시대적 소통을 이루는 방법적 모색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이것은 비단 강대상에서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통한 전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홈페이지는 물론이고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그리고 카카오 톡 같은 것을 통해서도 복음 전달적 통로를 구축해야 합니다.이런 맥락에서 타임즈코리아 설교대학은 적극 노력할 것입니다. 지금 이 대담도 그런 차원입니다. 일 년에 몇 차례 오프라인 세미나도 실시할 것입니다. 온라인은 IT적 유익을 활용하여 목회자들의 설교적 필요를 지원할 것입니다. 단순한 설교 자료의 제공이 아니라 실제적인 힘을 갖게 될 일들을 모색할 것입니다. 많은 기도와 성원을 부탁드리며 적극 동참하여 주시면 피차 큰 열매를 거두게 될 줄로 믿습니다. 타임즈코리아 사무국으로 연락하시면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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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1-15
  • 타임즈코리아 설교대학(3)
      19세기 미국 설교자 필립 브룩스(Phillips Brooks)는 “설교는 인격을 통한 진리의 전달”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을 빙자한 설교자의 자기주장식 강연화, 인본주의적 설득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한국교회의 다양한 현상 중에, 성도들이 설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것은 상당히 위험한 문제가 됩니다. 성도들이 설교에 대해 가져야할 바른 인식에 관한 몇 가지를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설교자는 무엇보다도 신앙과 인격을 갖추어야 됩니다. 설교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제시하는 최소한을 갖추어야 합니다.그리고 성경에 대한 정확한 사실인지, 올바른 해석과 적용에 있어 충실한 지식과 훈련이 겸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설교자들이 성경본문을 해석하는 원리적인 측면에서 잘못된 지식과 방향을 가짐으로 인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철학이나 사상을 말씀으로 빙자해서 가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본문과 관계없는 자신의 인본적인 주장이나 사상, 철학들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내용들이 설교자의 입담이나 논리로 포장되어서 성도들에게 그대로 심겨지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독극물을 마시는 것처럼 대단히 위험하다고 생각됩니다. ▲ 설교자가 고매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내는 도구로 쓰이지 않는다면 곤란합니다. 아무리 설교자의 지식이 풍부하고 화려한 입담과 고매한 인격을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내는 도구로 쓰이지 않는다면 이것은 곤란합니다. 설교와 설교자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내는 도구가 되어야지, 설교를 자신의 주장이나 인격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청중들의 심리를 교묘히 파고들면서 이를 이용해,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자기주장을 전달하는 것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설교라기보다는 자기 강연이나 연설입니다.사실 지금 한국사회는 외형적으로는 살기 좋지만, 내면적으로는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기위해 웃겨주는 설교들을 찾고 그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치유와 회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심리적인 일시의 위로와 권면, 웃기는 것과 같은 것들이 단편적이고 제한적인 치료가 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복음에 의한 유익으로 인해 얻게 되는 항구적인 치료가 되지는 못합니다.한 때 ‘도덕과 경제는 별개이다’라는 말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패한 나라가 경제적 발전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개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그 증명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설교와 인격은 별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해박한 지식과 달변, 유머와 위트, 유능한 소통 방식의 구사만 되면 좋은 설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성령의 인도하심에 순복하는 믿음과 그에 따른 인격 가운데,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려는 치열한 몸부림이 목회적 기쁨으로 승화되어 말씀의 통로로 쓰임 받는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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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1-15
  • 타임즈코리아 설교대학(4)
      목회와 설교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올바른 방향설정의 전제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목회에 있어서의 중심축은 설교입니다. 설교를 잘하면 성도들이 행복하고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외의 성경공부나 제자훈련, 친교 등은 설교에 대한 연장이고 확장입니다. 목회에서의 실제적인 중심축은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설교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하고 성경을 묵상하며 끊임없이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를 따라 배우고 익히는 것은 목회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그 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삶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칩니다. 성도들의 삶의 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조직신학, 구약신학, 신약신학, 교회사 등 많은 과목들은 신학의 기초를 세우는데 필요하지만 결국은 그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잘 전달하기 위한 자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 목회에 있어서의 중심축은 설교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가 성장했다고 하면 설교보다는 어떤 프로그램으로 성장했는지, 그 프로그램에만 관심이 있어 그것을 좇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을 시행한 교회와 본인의 교회는 다르기 때문에 성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프로그램도 필요하고 많은 유익을 주기도합니다. 그러나 설교가 그 중심이 되어야 프로그램들도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지 프로그램으로 그렇게 되기는 어렵습니다. 조금 과한 표현이 될 수도 있지만 ‘목회는 설교다’라는 정도로 설교를 생각했으면 합니다.결국 설교가 목회의 중심축이지, 다른 프로그램들은 중심축이 아니기 때문에 목회자는 설교에 목숨을 걸어야 목회가 성공적인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수적 증가에 기준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 회복되고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심겨야 그것이 행복이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회자는 설교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목회와 설교라는 관점에서 올바른 방향설정의 전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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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1-15
  • 타임즈코리아 설교대학(5)
      설교와 성경적 진리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의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신앙과 인격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유명한 설교학자인 알프레드 깁스(Alfred P. Gibbs)는 “설교자와 그의 설교는 분리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설교자 자신이 곧 설교라는 것입니다(Preaching is Preacher). 다시 말해서 설교에 있어 설교자의 인격과 그의 삶의 모습은 설교와 결코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의 내포적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에서의 전달자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그는 그에 상응하는 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의술과 함께 그에 합당한 윤리의식 가운데 의료행위를 해야 합니다. 법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올바른 모든 분야들은 그와 연관하여 해당하는 행위를 하려면 반드시 윤리성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이렇다고 보면 설교자에게 있어서의 반듯한 신앙과 인격적 구비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 설교자가 OHP의 본체처럼 깨끗하고 정결하며 거룩하여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설교자가 전하는 말씀이 청중들에게 그대로 투영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설교자의 인격이 온전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그것이 성도들에게 비춰질 때는 흠집이 생겨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설교자라면 “생명수는 정화된 통로로 흘러야 하고, 생명의 떡 또한 정결한 손으로 나누어져야 한다”는 메릴 웅거(Merill Unger)의 말을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직접 음성을 들려줄 능력이 없어서 설교자를 힘을 빌리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교의 힘이 설교자의 학식이나 달변, 기교와 같은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부수적이고 보조적인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설교라는 행위보다도, 설교자에게 집중하신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교수님들이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설교자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고 말입니다. 학생 때는 그 말씀이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목사 안수를 받고 설교학을 전공한 후 교회에서 설교를 하다가 보니, 청산유수같이 하는 설교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설교를 우려내는 설교자의 삶이 설교가 되어야 성도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변화를 이끌어 내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우리가 착각하는 것은 설교의 테크닉을 배워서, 그것을 활용해 설교를 잘하기만 하면 성도들이 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던 분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그렇게 10년을 설교해도 성도가 변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저는 그 분에게 당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강해설교로 유명하신 데니스 레인(Denis J. V. Lane) 목사님이 강해설교 세미나에서 설교를 ‘OHP’에 대한 비유를 가지고 정의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OHP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있는데, 하나는 필름, 두 번째는 본체, 세 번째는 스크린입니다. 필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고, 본체는 설교자, 스크린은 청중으로 보는 것입니다. OHP의 전원을 켜고 필름을 올려놓았을 때, 본체가 깨끗하면 스크린에도 글자와 화면이 깨끗하게 보입니다.다시 말해서 설교자가 OHP의 본체처럼 깨끗하고 정결하며 거룩하여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설교자가 전하는 말씀이 청중들에게 그대로 투영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설교자의 인격이 온전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그것이 성도들에게 비춰질 때는 흠집이 생겨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설교도 잘 준비해야 하지만, 먼저 설교자 자신이 인격적으로 잘 준비되어져야 합니다. 이런 전제가 선행된 후에 설교가 이루어지면 성도들은 설교자의 메시지를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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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1-15
  • 타임즈코리아 설교대학(6)
      목회자들의 인격의 문제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는데요. 방송, TV, 인터넷 등 언론매체들을 보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한 목회자들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매우 안타깝습니다. 수년간 범죄를 감추고 설교를 수행한 것입니다. 그것을 대수롭게 않게 여기며 누구나 저지르는 실수처럼 일반화하여 범죄적 심각성을 희석하기도 합니다. 진리 전달의 통로로써의 설교자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것과 관련해서 말씀해 주십시오.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설교자가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렇게 전해야 하느냐? 당연히 전해야 하겠죠.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범죄를 계속 저지르면서 순간적으로 회개한다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비도덕적인 삶을 살면서 진리를 전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저는 그 부분에 있어서 부정적입니다.그런데 오늘날 벌어지는 현상은 그렇게 하면서 교회를 담임했는데, 교인이 많이 모이고, 많이 성장하면 그것이 마치 정당성을 확보한 것처럼 여겨버립니다. 이런 논리지요. 일반적인 사람들이 볼 때는 문제가 있었다면, 그 설교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먹혀들어 교회가 그렇게 성장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그렇다면 부패정권이나 비리를 저지른 기업이라도 돈만 벌면 정당하다는 것인가요? 예를 들어 소위 짝퉁제품을 만들거나 원산지를 속여서라도 부를 창출하기만 하면 성공한 것이고, 경영적 능력이 탁월한 CEO라고 할 수 있나요?  한국교회에서의 큰 병폐 가운데 하나는 교회에 많은 사람이 모이게 하면, 그 분이 좋은 설교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명이 앉아있던지 열 명이 앉아 있던지 그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전하는 사람이 훌륭한 설교자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목회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수적 성장이라는 잣대로만 교회를 본다면 이는 큰 문제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전도를 못해서, 큰 교회를 못 만들어서 우리에게 그것을 부탁한다고 하는 것 같은 괴상하고 어불성설적 논리가 싹트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보다도 설교자를 보신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범죄와 함께 설교를 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이고 자가당착의 이율배반(antinomy)적 행태라는 것을 직시해야합니다. 범죄를 저지르며 진리를 외친다면, 이것은 자가당착을 넘어서 웃음거리며,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되고 맙니다. 그렇다고 설교자의 인본주의적 완벽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선 설교자의 양심과 경건, 하나님 말씀의 메신저(messenger)로서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해야합니다. 거룩해야합니다. 순결해야합니다. 그렇게 할 때, 진리가 바르게 전달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전하며, 올바른 인격과 올바른 삶을 살면서 전하는 사람이라고 꼭 성도의 숫자가 많을 거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은 인본주의적 사고는 물신주의적 병폐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많든지, 적든지 보다도 ‘하나님 앞에서’라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제가 책을 읽는 가운데 본 내용입니다. 어떤 선교사님이 아프리카에 가서 10년 동안 바울사도처럼 사력을 다해서 선교를 했는데, 한 명의 영혼도 주님께로 인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로서의 좌절에 빠졌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젊음을 바치고, 모든 생애를 바쳐서 복음을 전하는데 어떻게 한 명의 영혼도 주님께로 인도 할 수 없습니까? 저는 진짜 자질이 없는 선교사입니다”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감동을 주셨다고 합니다. “네가 지금은 10년 동안 씨를 뿌려 놓은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추수 때가 되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된다.” 그런 위로를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 선교사님이 10년 동안 선교한 것이 실패한 것입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단 설교자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나날이 더 성화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설교자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해야합니다. 거룩해야합니다. 순결해야합니다. 그렇게 할 때, 진리가 바르게 전달되게 됩니다. 더럽고, 추하게 행동하면서 진리를 전달하는 데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사이비 집단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거기에 모여든 사람들에게는 독을 먹이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성령님께서 진리를 깨닫게 하여, 바른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다 독을 먹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원전사고나 불산 누출 지역에 사는 한 오염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정말 심각하게 성장주의, 부흥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풀러신학교에서 교회성장학을 가르쳤던 교수가 지금 후회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성장에 대해 자기가 잘못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부흥과 성장은 내면의 변화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 인원이 많고 규모가 큰 매머드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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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1-15
  • 타임즈코리아 설교대학(7)
      목회자들은 신학대학교에서 성서신학과 설교학 등을 수학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현장 목회자들은 설교에 대한 계속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한 대안이나 방법에 있어서의 견해를 말씀해주세요?저도 신학교를 다니면서 성서신학에 대한 갈증을 많이 느꼈습니다. 개인적으로 SFC(학생신앙운동) 간사 활동을 하면서 ‘프리셉트’에서 1년에 두 차례씩 여는 세미나를 통해 신학교에서 충족 받지 못한 성경연구의 많은 부분을 해소했습니다. 우리가 신학교에서 3년 동안에 교육커리큘럼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충분히 섭렵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보통 한 학기에 12번 정도 강의하게 되는데, 한 분야를 12번 정도의 강의를 듣고 공부하는 것으로 제대로 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렇다고 보면 갈증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설교는 평생을 해야 하는 데, 신학교에서 들었던 내용은 2~3년이면 다 바닥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갈증을 해소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첫 번째는 자기 스스로 연구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철저하게 성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신학생 때 못 읽었던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박희천 목사님께서 주장하신 내용 가운데 “목사되기 전에 성경 100독 해라. 100독 하지 않으면 목사 안수 받지 마라”는 이야기를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 저는 비유적으로 설교를 하나의 요리라고 봅니다. 설교에 있어서 재료는 성경입니다. 재료가 좋지 않으면 요리사가 아무리 좋아도 맛이 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안병만 박사 저서들 저는 비유적으로 설교를 하나의 요리라고 봅니다. 설교에 있어서 재료는 성경입니다. 재료가 좋지 않으면 요리사가 아무리 좋아도 맛이 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설교다운 설교를 하시는 분들을 보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각고의 노력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그와 관련된 학문과 책을 열심히 연구했기 때문에 훌륭한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저는 이것을 누에고치에 비유합니다. 누에가 집을 지을 때, 그 속이 탱탱한 것들은 좋은 집을 짓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집을 단단하게 짓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설교자가 좋은 실크와 같은 설교를 뽑아내기 위해서는 내면이 말씀으로 꽉 차있어야 합니다.두 번째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용량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되어도 나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도움을 받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타임즈코리아’가 앞으로 설교세미나에서 많은 좋은 강사를 불러 세미나를 할 때, 와서 그분의 노하우를 배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설교의 테크닉을 배운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원리와 근본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기의 토양에 맞게 집을 지을 수 있게 됩니다.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설교사역의 주체자는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을 끊임없이 의지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날마다 반응한다면, 청중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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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1-15
  • 타임즈코리아 설교대학(8)
      여기저기에서 각자 ‘특별하다, 획기적이다’는 설교방법론에 대한 프로그램들을 광고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고액의 비용까지 요구합니다. 과연 정말로 특별하고 획기적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사실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특별하다 하면 방법론적인 면에서 조금 특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설교학자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받은 재능이 남과는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 조금 특별하다고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설교는 테크닉이 아니고 본질입니다. 요즘에 특별하다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이지 않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광고하는 것이지 가서 보면 특별하지 않습니다. 제 후배가 4년 전에 어떤 교회에서 특별한 세미나가 있다고 해서, 부산에서 올라와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3시간 강의를 듣고 난 다음, 저에게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만났더니 그 후배가 말하기를 광고에는 세미나가 특별하다고 했는데, 참석해보니 특별한 게 하나도 없다고 불평을 했습니다.실제로 특별하다고 하는 세미나에 바른 가치관과 목회관을 가진 사람이 가서 참석해 보면 절대로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싼 돈을 주고 특별하다고 하는 세미나에 참석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 더 좋습니다. 오히려 진실 된 사람들과 그룹을 만들어 서로 나누면서 성장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건강하게 가는 바른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 실제로 특별하다고 하는 세미나에 바른 가치관과 목회관을 가진 사람이 가서 참석해 보면 절대로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싼 돈을 주고 특별하다고 하는 세미나에 참석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 더 좋습니다. 오히려 진실 된 사람들과 그룹을 만들어 서로 나누면서 성장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저도 여러 가지 세미나를 참석해 보았지만, 저는 그곳에서 이야기하는 것들과 똑같이 하지 않습니다. 그분들의 테크닉을 배우지 않고 원리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각자가 목회하는 토양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예를 잘 듭니다.청도에 가면 반시(盤柿)라는 감이 있습니다. 반시라는 이름은 소반이나 쟁반처럼 납작한 모양이라는 뜻인데, 씨가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청도에 사는 제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청도에는 감에 씨가 없는데 특별한 종류가 있느냐고 물으니 특별한 종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외지에서 감나무를 가져다가 청도에다 심으면 다 반시가 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런 품종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청도지역의 지리적 조건으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서 타 지역의 감나무 숫꽃가루가 날아올 수가 없고, 개화기에 안개가 많아서 꽃가루를 옮겨야 하는 곤충들의 활동이 제한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감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처럼,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것으로 소화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나 테크닉을 배워서 도입해도 자신이 사역하는 목회 토양에 따라서 다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테크닉과 방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그 원리를 배우서 자신의 목회 토양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000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는 이미 그 원리는 다 있습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는 교회를 가르치는 세 가지 교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성경, 둘째는 성령님, 셋째는 전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 이미 원리를 주셨고, 그것들은 전통과 함께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통을 깨고, 내가 특별하다고 말하는 것은 많은 문제를 양산하기 쉽습니다. 오늘날 한국목회자들이 이런 사실들을 잘 이해하면 특별하다는 것에 속지 않을 것입니다. ‘타임즈코리아’에서 하는 설교세미나도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원리와 근본을 이야기하는 것이니, 그것을 잘 소화해서 적용하도록 더 열망을 가지고 지원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을 일컬어 특별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능할 수도 있겠지요. 이론과 현장을 겸비한 좋은 학자와 목회자들이 실제적이고 역동적인 내용들을 제시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잘 배워서 목회 현장에 적용하면 좋은 설교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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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1-15
  • 타임즈코리아 설교대학(9)
      목회자들이 특별하다고 광고하는 설교세미나에 가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고, 이런 곳에 가게 되는 목회자들을 위한 대안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필요하고 좋은 세미나라면 기회가 닿는 대로 배우고 연구해야하겠지요. 목회자들을 위한 대표적인 세미나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준비해야 한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런데 원리와 방법을 개발해서 실제적으로 교회에 접목하고, 성공한 사례들에 대한 것들은 우리가 들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잘 소화하여 각자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굉장히 바람직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대로 베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베낀다는 자체가 이미 부적합성을 노출하는 것입니다. 원리를 배워서 자신의 것으로 새롭게 창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예를 들어 ‘제자훈련’같은 경우는 강남적인 특성을 잘 고려하고 디자인했기 때문에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들의 지적, 생활적, 문화적 토양이 제자훈련을 할 수 있는 적합한 배경이 되었었다는 것이지요. 옥한흠 목사님이 미국에서 ‘네비게이토선교회’의 제자훈련을 연구해서 자신의 목양지에 잘 접목했기 때문에 성공 한 사례입니다. ‘전도폭발훈련’은 미국에서 임상을 거쳐 효과적인 방법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에, 각 교회가 전도에 초점을 맞추어서 사역을 하기 원한다면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원리를 소화해서 자신과 사역하는 목양지에 맞게 디자인하여, 새로운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건전하고 증명된 세미나에 참석해서 그 원리를 배워가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목회 현장의 다양한 욕구를 채워주는 데에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프로그램이나 설교적 테크닉보다도, 중심은 목회자 자신이 삶으로 토해내는 설교로 성도들을 이끌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진설명 - 타임즈코리아 지역취재기자들과 함께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지금 저희 교회에서는 ‘쉐마’ 교육을 합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의 공부에 너무 치중해서, 아이들의 신앙생활과 교회출석을 등한시 합니다. 이런 폐해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교회에는 연세 많은 어르신들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이에 대한 대안으로 저희는 교회가 하는 사역들을 부모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정에서도 동역하게 합니다. 이런 시스템은 가정이 건실하게 되고, 가정에서부터 신앙과 전통이 이어지게 만들어 줍니다. ‘쉐마’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우리가 신약의 지상 명령만 중요시 여겨 열방으로만 갔지 가정으로는 가지 못했습니다. ‘쉐마’를 잘 적용하면 가정이 튼튼해지고, 결국 교회가 건강하게 됩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이런 프로그램을 그대로 복사해가듯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원리를 배워서 자신에게 맞는, 자신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건전하고 증명된 세미나에 참석해서 그 원리를 배워가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목회 현장의 다양한 욕구를 채워주는 데에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프로그램이나 설교적 테크닉보다도, 중심은 목회자 자신이 삶으로 토해내는 설교로 성도들을 이끌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성경읽기, 묵상, 성경연구, 전문적인 공부, 세미나, 기도, 커뮤니케이션, 글쓰기 등을 즐거움 가운데, 자신이 소화할 만큼 기쁨으로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이런 자세로 한다면 주님 안에서 실패나 좌절은 없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라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여주실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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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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