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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1-07-02
  • 한국화학연구원, 스펀지로 열을 전기로 바꾸는 소재 개발
    [타임즈코리아] 구부러지고 늘어나고 압축이 돼, 열이 있는 곳 어디에든 붙여 열을 전기 에너지로 바꿔주는 열전소재가 개발됐다. 완전히 유연한 열전소재가 개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화학연구원 화학소재연구본부 조성윤 박사팀은 열원의 형태와 관계없이 어디든지 붙일 수 있는 ‘스펀지형 열전소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열을 전기로 바꿔주는 소재로 온도 차에 의해 전기가 발생한다. 일례로 발전소 굴뚝에 열전소재를 부착하면, 굴뚝 안쪽의 고온(150도)과 바깥 상온(30도)의 온도 차로 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구진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스펀지에 탄소나노튜브 용액을 코팅했다. 탄소나노튜브를 물리적으로 분산시킨 용매를 스펀지에 도포한 후, 용매를 빠르게 증발시킨 것이다.  제조방법이 간단해 대량생산에도 적합하다. 모양을 만들어주는 틀 없이 스펀지를 이용해 열전소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거푸집 없이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셈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열전소재는 무기 소재로 만들어진 탓에 유연하지 않았다. 사람의 몸이나 자동차 등 다양한 곡면의 열원에 붙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제조공정 자체도 까다롭고 복잡하다. 전 세계 연구진들은 유연한 열전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탄소나노튜브에 주목했다. 탄소나노튜브는 전기전도도가 높고 기계적 강도가 강하며, 지구상에 풍부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팀이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해 유연한 열전소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스펀지와 유사하면서도 높게 쌓을 수 있는 탄소나노튜브 폼(foam)을 만든 것이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압축 안정성 실험 결과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는 “지금까지 개발된 유연한 소재는 지지체나 전극의 유연성을 이용한 것”이었다면서 “소재 자체가 유연한 건 이번 스펀지형 열전소재가 처음이고 제조방법도 간단해 대량생산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개발된 스펀지형 열전소재는 열전소재의 전기적 특성과 스펀지 고유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10,000번 반복해도 형태는 물론이고 전기적 특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압축 전과 압축 후의 저항값이 각각 1.0Ω(옴), 0.3Ω으로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이는 스펀지에 기공이 무수히 많아 변형에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펀지의 탄성을 이용한 응용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경우, 압력이 커질수록 발전량도 덩달아 높아졌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했을 때 최대 2㎼(마이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하여, 압축 전과 비교해 발전량이 10배 정도 증가했다. 이에 대해 연구논문 1 저자인 김정원 박사는 “스펀지의 압축되고 복원되는 탄성을 활용해 몸에 부착하는 웨어러블 기기에 적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수한 기계적 성질이 요구되는 자동차 등에도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정원 박사는 “열전소재 분야 전망도 밝다. 현재 자동차에서 사용하고 난 후의 열이나 온천수를 이용한 열전발전 시작품의 실증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관련 기술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성과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에너지 소재 분야 권위지인 『나노 에너지(Nano Energy), IF:16.602』8월호에 게재됐으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창의형 융합연구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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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
    2020-09-22
  • 종속될 것인가, 회복할 것인가
      [타임즈코리아]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느린 사람은 어찌 살라는 건지, 넋이 나갈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많은 것들이 바뀌곤 한다. 이런 현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변화는 순리이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논리가 더 우세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약육강식이 진리이어야 한다. 여기에 동의할 사람들은 모두 강자라야 가능하다. 적어도 변화가 자연에 의한 것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이 자초한 변화에 순응하라는 것은 무조건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이 그만큼 편리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만큼의 행복을 확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비대 면화되어 가고 있다. 이것을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변화라고 동의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코로나19에 따른 불가피한 강요인 셈이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에 따른 변화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만남에서 누리고 싶은 행복은 사람의 DNA 속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다. 현장 공연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감흥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런 노력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 개인의 욕심이 아니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예술을 가상의 세계에 가두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 만약 가상의 세계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우리가 굳이 직접 여행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영상이나, 증강현실 그리고 가상현실 시스템만으로도 더 자세하게 보며 실감 나는 장면 속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온라인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계기로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콘텐츠를 구별하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가 파산했다는 기사가 유난히 아프게 느껴진다. 과학과 기술이 육체적 요소라면 문화와 예술은 정신적 요소이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난국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문화와 예술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예술의 존엄과 가치는 예술가들이 지켜 내야 하는 것이다. 대중화, 실용화 이런 측면들은 굳이 지키려 하지 않아도 어느 시대에나 자생해 왔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변하지 않게 하는 일,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려는 힘은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자극하여 거대한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예술의 힘이고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망가트려놓은 만남과 관계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 속에 내어주고 거기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만남과 관계를 열망하는 DNA와 인간의 지혜가 코로나19보다 더 강함을 증명하며 예전과 같은 역동성을 회복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왔듯이 이 또한 극복해 낼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코로나19를 이겨낼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이전과 같은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예술가들이여, 우리는 과학자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감동을 선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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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합정보
    2020-07-06
  • 인문학은 이론이 아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본질을 찾아 나선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사변적으로 흘러가면 이념이나 현상적인 집착으로 이탈하게 된다.   이런 행태는 수많은 증오와 폭력을 낳으며 씻지 못 할 마음의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남길 뿐이다.   인문학적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삶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타자와 참된 관계를 형성하는 정신을 의미한다.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사람은 ‘너’와 더불어 ‘나’라는 관계를 통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조화로움의 아름다움을 통해 공감함으로써 상대방을 이웃으로써 인식하고 수용하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문학, 역사, 철학, 종교 등의 이론을 습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그들의 아픔과 울분, 사랑과 기쁨을 공유하는 공감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인문학은 ‘너’와 더불어 존재하는 ‘관계’로서의 ‘나’를 인식하고 사랑(자비, 나눔, 배려, 공감)으로 소통하는 지혜를 깨우치고 표현하게 하는 모든 문화, 사상, 지식 등을 말한다.   인문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진리를 찾고 따른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온전히 깨닫고 그 사랑을 최선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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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정보
    2016-03-18
  • 현대인 허균이 살았던 과거의 삶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동부승지, 삼척 부사,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허엽(許曄)은 30년간이나 관직에 머물렀는데도 생활이 검소했고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한 인물이다.   허엽의 호는 초당(草堂)이다. 오늘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초당 순두부의 본고장이 바로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이다.         이곳에서 허엽의 아들 허균(許筠, 1569~1618)이 태어났다. 교산(蛟山) 허균은 명문가의 자제로 천재적인 두각을 나타내 모든 것이 보장된 인물이었지만, 불우한 계층을 대변하는 삶을 선택했다.   이런 까닭으로 허균은 조선시대 반역의 상징 같은 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평등사상에 눈을 뜬 허균의 급진적인 개혁 사상은 오늘날에 와서는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단과 반역을 도모하는 사회전복세력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쓴 《홍길동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허균이라는 인물을 볼 때, “역사는 현대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항상 새롭게 해석되고 평가될 수 있기에 역사를 보는 모든 이들의 시각은 상대적이다”고 말한 영국의 정치학자이며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 1892년~1982년)의 견해가 더욱더 공감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6-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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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석헌의 종교문화비판과 종교평화(1)
    죄는 인간 실존의 균열 상태인 갈라짐이다.종교는 갈라짐의 상태에서 건짐으로 구원의 행위가 된다. ▲ 갈라짐은 ‘새로운 관계 지음’이라는 필연적인 요청을 동반한다. 새로운 종교교육(Ausbildung), 새로운 시민교양(Bildung)을 통하여 종교와 종교, 종교와 세계가 평화를 추구하고, 인간과 정치, 인간과 경제, 인간과 사회, 인간과 문화, 인간과 환경 등의 새로운 평화질서를 세우는 것이 갈림이 아닌 건짐으로의 실재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존재의 죄의식은 인간 공동체의 사회적 의식과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종교적 의식과 규범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여기서 죄를 인간의 삶에서 도덕적·윤리적 범주에서 다루는 행위의 일탈과 위반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인간의 선천적 의식과 본래적 도덕감에 대한 위법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논의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함석헌에 따르면 죄란 윤리적이라기보다 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 실존의 균열 상태에서 발생한다. “죄는 다른 것 아니요 갈라짐이다. 부모와 자식이 갈라짐, 집과 집이 갈라짐, 계급과 계급,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갈라짐, 몸과 마음의 갈라짐, 사람과 하나님의 갈라짐이다. 갈라지면 어지럽고, 어지러우면 죽는다. 거기서 건지는 것은 다시 하나 됨을 얻게 하는 것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17쪽) ‘갈라짐’의 존재론적 명암에는 해방과 분리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갈라짐의 상태는 초월적 존재와의 분리이자, 이웃과의 분리, 자연과의 분리이다. 갈라짐의 궁극적인 결과는 결국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가른다는 것은 생명적인 것의 타자 혹은 절대 타자와의 능동적, 자발적 오만에서 비롯되는 인위적인 구획지음이다. 나의 자리와 타자의 자리가 완전히 일치될 수는 없으나 최소한 조화로운 자리가 되어야 교차되는 지점과 타협점이 마련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가르기 이전의 상태로 회복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초월적 존재와 하나가 되고, 이웃 및 자연과의 하나 됨이라는 근본적인 회복이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갈라짐은 원래 상태로서의 하나가 되는 일치의 집을 짓기를 갈망한다. 그래서 갈라짐은 하나가 되고자 하는 ‘마음 짓기’와 다르지 않다. 먼저는 서로의 마음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과 마음이 만나서 논의를 함으로써 마음의 온전한 구조를 지어, 갈라짐 이전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서 조화가 인식되어야 한다.다시 말해서 갈라짐은 죄로서 죄의 상태가 분열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여 원래의 관계 지음이 해체되고 마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마음 짓기’로 돌아서는 가능성의 단초이기도 하다.죄는 철저하게 아니라고 부인하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돌아서는 실존의 유한성이다. 하지만 동시에 초월적 존재에서 자연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대화하고 설득하는 ‘화해 세움’, 즉 ‘화해 지음’이라는 일치의 구축, 일치의 만듦으로 나아가게 한다(George Weigel, 김덕영․송재룡 옮김, “요한 바오로 2세 시대의 로마 가톨릭 교회”, 세속화냐? 탈세속화냐?, 대한기독교서회, 2002,  57-58쪽).또한 갈라짐은 ‘새로운 관계 지음’이라는 필연적인 요청을 동반한다. 새로운 종교교육(Ausbildung), 새로운 시민교양(Bildung)을 통하여 종교와 종교, 종교와 세계가 평화를 추구하고, 인간과 정치, 인간과 경제, 인간과 사회, 인간과 문화, 인간과 환경 등의 새로운 평화질서를 세우는 것이 갈림이 아닌 건짐으로의 실재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우리는 그것이 곧 인류의 건짐, 구원의 행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구원은 하나를 지향한다. 모든 종교, 모든 사람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다원성을 인정하는 보편적 일치를 일컫는다. 다원성을 무시한 일치라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개별적인 자유, 의지, 행위, 종교, 영역이라는 것을 긍정하면서 인간을 품을 수 있는 보편성이 있어야 비로소 공동체의 와해를 막을 수 있다. 최소한 ‘하나’라는 보편적 인식, 보편적 구원이 담보되지 않으면 공동체는 죽음이라는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갈라짐의 마지막 부정적 상황이 죽음이라면, 그 해결책은 인류가 하나가 되는 길 이외는 다른 방도가 없다. 종교는 맨 먼저 인류에게 갈라짐이 곧 죽음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 종교가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탐욕과 분열, 갈등과 폭력을 나눔과 일치, 화합과 평화로 용해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 인류, 국가, 사회, 정치, 자연 등이 하나가 될 수 있는 현실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분열 뒤에 화합과 일치로 나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용서는 가능해도 상처는 남게 되기 때문이다. 습관을 길들인다면 먼저 짓고 세우고 싸매고 잇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유사(有史) 이래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늘 선후가 바뀐 삶을 살아왔던 것 같다. 이제부터라도 갈라짐이라는 죄를 짓지 말고, 흩어지고 분리된 것을 다시 하나로 지어 올리는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종교의 어원인 라틴어 religare(다시-묶는다)가 보여주고 있듯이 짓고 연결하는 일은 다시,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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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24
  • 삶에서의 종교경전에 대한 시대 가치적 구현
    경전의 진리가 이 시대 속에서 자라감이 되며, 동시에 살아감으로 나타나야 ▲ 종교경전의 기억, 종교경전의 사건을 재생시키는 것은 한 인간의 정신적 지속성이자 인류의 생존과 조화에도 직결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종교의 경전은 인간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것은 단지 수천 년이 된 고문서나 단순한 문자로 구성되어 있는 고루한 서책이 아니다. 종교 경전은 인류의 진리를 담지하고 있으며 신앙하는 대상에 대한 깨달음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따라서 종교 경전을 대한다는 것은 신앙하는 대상과의 조우이기도 하지만, 인류 정신 및 지혜와의 만남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종교 경전이 오늘의 세계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자라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본래 종교경전이라는 것은 개조적(個條的)인 법률서가 아니요, 자라는 힘을 가진 원리를 보여 준 것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뜻으로 본 한국역사1」』, 1984, 31쪽)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종교 경전을 읽는 주체나 해석자의 자의적인 의미 생산으로 인해 경전의 언어적 진리가 죽어버렸다. 더군다나 그중에 하나가 교리적 가르침, 혹은 교리적 해석의 문제점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러셀(B. Russell)은, “한 교리가 그 신빙성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있든지 없든지 이것을 믿어야 한다는 태도는 증거에 대한 적대심을 자아내게 하며, 우리의 편견에 맞지 않는 모든 사실에 대해서는 이성을 가로막아버린다”(B. Russell, 이재황 옮김, 종교는 필요한가, 범우사, 1987, 41쪽)고 비판한다. 하나의 책을 접한다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진리와 삶이 내게 특별한 의미와 감동, 그리고 깨달음을 준다는 것이요, 재미와 흥미, 혹은 원하는 지식이나 정보를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그것을 통해 정신을 고양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간다. 그러므로 자라는 것은 의미를 얻은 자 스스로 자라게 마련이다. 경전의 의미가 고착되지 않고, 늘 새롭게 생성될 때 자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자람은 잘 해석함을 전제로 한다. 함석헌이 “경전의 생명은 그 정신에 있으므로 늘 끊임없이 고쳐 해석하여야 한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뜻으로 본 한국역사1」』, 1984, 32쪽)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잘 해석함은 다시 텍스트를 통해 인간을 변화시키는 힘 자체로 인식할 때 겸손한 행위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해석학적 진리는 바로 끊임없이 진리의 생수를 길어 올려 지금 살아가는 여기를 살리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더욱 그래야 한다. “그들의 사명은 진리를 현대 속에 살리는 데 있다. 시대착오의 낡은 제도 속에서 질식되려는 진리를 구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뜻으로 본 한국역사1」』, 1984, 33쪽)러셀이 말한 바와 같이, 만일에 “한 사람의 정신적 계속은 습관과 기억의 계속”(B. Russell, 이재황 옮김, 종교는 필요한가, 범우사, 1987, 93쪽)이라고 한다면 종교의 경전은 인간의 삶의 습관을 바꾸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신앙 선조들이 지녔던 신앙 대상에 대한 경험을 상기하며 재생하는 차원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경험의 재생은 그 길을 따라감이다. 우리보다 앞서 역사를 산 이들의 증언들이 반복적으로 사건이 될 때, 경전의 정신이 퇴색되지 않는다. 증언과 진리를 따라감은 곧 살아감이고, 살아감은 곧 살아있음을 경전을 통해서 인식하고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 경전의 사건들을 가지고 종교인 스스로 신앙의 진보 혹은 진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삶을 습관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요, 그것의 원천은 경전 속에 담겨진 신앙의 진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한 사람의 신앙인은 믿음의 연속성과 정신의 유대성을 갖게 되는 것이고, 신앙인의 정체성으로서의 살아있음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경전적 진리를 토대로 하는 삶이자, 경전적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따라감이라는 사건이 신앙인이 나름대로 규정하는 주관적 지향성을 표출하는 길이 되면 곤란하다.신앙인의 삶의 철학과 실존의 근거는 편의성과 자의성에 있지 않다. 경전의 기억의 사건을 재생하는 것이 따라-감이요, 살아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야만 경전의 진리가 이 시대 속에서 자라감이 되며, 동시에 살아감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자라감과 살아감이 없다면 경전의 진리는 늘 현대적 진리가 될 수가 없다. 신앙인 스스로 힘써 경전의 진리를 살아감이 있어야만 유관한 모두의 정신세계가 자라가는 가치가 구현될 것이다. 러셀의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한다면, 한 사람의 기억은 재생하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사건이 될 수가 없다. 기억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 기억을 잊지 않고 자꾸 되새기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교경전의 기억, 종교경전의 사건을 재생시키는 것은 한 인간의 정신적 지속성이자 인류의 생존과 조화에도 직결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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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7
  • 보편적 세계 사상의 결핍
    삶 전체가 깨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사상 마련‘서로 사랑’, ‘너와 더불어 나’라는 공동체로서의 사상을 만들 수 있어야 ▲ 지구촌은 ‘서로 사랑’, ‘너와 더불어 나’라는 공동체로서의 사상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한 그루의 포도나무에 여러 송이가 있고 한 송이 안에 또 다른 포도 알맹이들이 뭉쳐 있다. 각각은 별개의 자신으로서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사상의 결핍 속에서 살고 있다. 사유와 사고를 계도하고 계몽하는 생각의 지표, 생각의 좌표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려지지도 않고 있다. 함석헌이 염려하고 있었던 것이 그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 그 시대가 필요로 하고 그 시대에 걸맞은 시대적 사상이 있어야 한다. 올바르면서도 깊이가 있는 시대적 사상이야말로 사람들의 삶을 이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대의 사상이 경제적 가치일 수 없고, 시대의 사상이 정치적 이념일 수 없고, 시대의 사상이 인종의 정신일 수 없고, 시대의 사상이 남녀의 인식론일 수 없다. 시대의 사상은 “보편적 세계 사상”(함석헌, 『함석헌전집1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1984, 30쪽)이어야 한다.  나라, 민족, 인종, 남녀, 좌우, 빈부 등을 떠나 하나의 이상을 꿈꾸게 해줄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것을 함석헌은 “새로운 세계 이상”(함석헌, 『함석헌전집1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1984, 30쪽)이라고 말한다. 벌고 또 벌어도 끝이 없는 물질적 욕망과 결핍, 배우고 또 배워도 채워지지 않는 학문적 절망, 만나도 해소될 수 없는 의사소통능력의 단절,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무한의 성적 욕망은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는가, 무엇을 이루고자 함인가, 무엇을 위해 살고자 함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만든다. 따라서 달라져야 하는 것은 육체, 주택, 지위, 명예, 권력, 연봉, 학벌 등이 아니라 “머리가 달라져야 한다. 달라져도 웬만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함석헌, 『함석헌전집1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1984, 30쪽) 의식과 정신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데, 이 사회와 이 세계에 대해 어떻게 희망을 논할 수 있겠는가. 국가와 사회, 그리고 세계에 대한 희망은 정치와 경제의 희망보다 앞선 의식과 정신, 즉 머리의 근본적인 변화이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상이나 의식은 삶을 깨어나게 한다. 앞에서 말한 유한적인 것의 일반은 인간의 이성과 삶을 깨어있게 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인간의 이성과 의식, 정신을 좀먹고 황폐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삶 전체가 깨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사상, 보편적인 세계 사상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것이 인간의 의식을 진보시킬 뿐만 아니라 삶을 진보시키기 때문이다. 세계를 깨어 있도록 하는 사상은 보편적인 것, 즉 나에게도 삶을 추동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타자에게도 삶을 동일하게 추동하는 것이어야 세계 사상일 수 있다. 그럴 때 인류는 더불어 진보하며 그 세계 사상 아래에서 삶을 직관하는 새로운 눈이 열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상이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욕망과 욕심으로 일관된 세계사적 위기, 그 위기 속에 어떠한 사상적 토대를 마련해 줄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한 한계를 체험하고 있다. 사람들은 정치와 경제의 위기를 말하곤 한다. 그렇다면 위기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새로운 사람이나 새로운 경제의 돌파구가 아니다. 새로운 사상, 새로운 의식, 새로운 정신으로서 국가와 민족, 사회와 세계를 이끌고 나아갈 보편적인 세계 사상, 보편적인 세계 이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본이 생각하지 않을 때에, 성이 과도한 본능에 충실할 때에, 정치적 열망이 또 다른 의식을 속일 때에, 여기에 종속 되거나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지구촌은 ‘서로 사랑’, ‘너와 더불어 나’라는 공동체로서의 사상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한 그루의 포도나무에 여러 송이가 있고 한 송이 안에 또 다른 포도 알맹이들이 뭉쳐 있다. 각각은 별개의 자신으로서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 이것이 씨알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과 타(他)에 대한 지배권의 남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상생과 공유의 한 몸이라는 공동체 의식으로서의 표출로써 싹이 트고 성장하여 결실하는 사상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전체주의적 파괴와 오류의 병폐가 침범할 수 없다. 다름이 어울려 하나를 만드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리듬에 하모니가 더해져서 아름다운 곡들로 울려퍼지기 때문이다. 런던 올림픽이 한창인 가운데 오심과 편파 판정으로 상처를 입는 여러 경우들이 발생하였다. ‘너와 더불어 나’라는 보편적 세계 사상의 토대가 결핍된 부작용이다. 상대가 ‘너와 더불어 나’가 아닌 극복하고 제압해야 할 대상이 된 탓이다. 이제 우리는 상처를 치유하고 온고지신의 마음으로 인류의 상생을 위한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내야 한다.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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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09
  • 아이는 미래의 노동력인가? 인격체인가?
    인간의 태어남이 인위적 조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돼삶의 공존을 전제로 해야 ▲ 인간은 그자체로서 존엄한 인격체로 인정받아야 할 존재이지 결코 노동력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이미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런 시각으로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을 경제적 가치, 경제적 척도, 경제적 행위자로 간주하려는 인식이 매우 팽배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인간이 생로병사를 스스로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만큼 오만도 없을 것이다. 그 오만의 극치는 과학이나 의학을 통하여 실증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기득권자에 의해서 주입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똑같은 논리가 인간의 출산에도 적용된다. 인간의 태어남은 인위나 작위가 아니라 신비이자 비밀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인간의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여 수단으로서의 생명으로 인식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국제연합(UN)의 기준에 따르면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이 7% 이상~14% 미만이면 고령화 사회(aging society), 14% 이상~20% 미만이면 고령 사회(aged society), 20% 이상이면 초고령 사회(super-aged society)로 분류한다. 우리나라는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이 약 11%로 고령화 사회에 속한다. 많은 정치인들과 경제 전문가들은 지금의 고령화 사회에 초점을 맞추고 저 출산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 미래의 복지나 경제적 성장 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게 이들의 견해이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녀 생산을 많이 함으로써 노동력을 확보하는 길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미래에 젊은 노동자들이 부족하여 국가 경쟁력이 약화되거나 경제적 부양 인구가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태어남을 인위, 작위적으로 조절해 보겠다는 발상은 분명히 논의의 사유와 본질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태어남을 위해 여성을 기계적으로, 인간 제조기로 접근하고 있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한마디로 말해서 여성은 아이 낳는 또 다른 생산 노동자가 아니다. 아이는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생산품도, 미래의 산업역군도 아니다. 인간은 그자체로서 존엄한 인격체로 인정받아야 할 존재이지 결코 노동력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이미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런 시각으로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을 경제적 가치, 경제적 척도, 경제적 행위자로 간주하려는 인식이 매우 팽배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저 출산에 대한 논의의 초점과 문제의식을 재설정할 필요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국가의 아동 복지를 운운하면서 근시안적인 정책을 입안하는 시행착오를 겪는 것도 이러한 현상과 맞물려 있다. 필자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국가들이 좀 더 거시적인 안목과 전체적인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본다. 이를테면 노인의 수적 증가에 대비한 아이의 출산장려와 같은 단편적인 사고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이러한 현상을 자연스러운 역사적 흐름으로 받아들이면서 상생적 공존의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노인을 사회적 부담의 대상으로 보는 시야에서 벗어나야 한다.노인이 된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인간 현상일 뿐이다. 인간의 태어남이 인위적 조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기계론적, 경제가치적 발상을 버려야 한다. 삶은 공존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인간의 나고 자람과 늙음이 숭고한 아름다움의 어울림으로 모두에게 변함없이 자리하도록 격려하고, 조정하고 이끌어감이 국가와 지도자들이 몫이 아니겠는가.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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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7-10
  • 인간은 ‘둘러 있음의 세계(Um-welt)’와 살아간다
    자연의 존재 방식을 인정하고...자연 환경을 삶의 뿌리에서부터 의식 ▲ 인간은 ‘둘러 있음의 세계’에 대한 의식의 개명(開明)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자연의 존재 방식을 인정하고, 자연 환경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가능하다는 인식, 즉 삶의 개현 혹은 계시로서의 자연 환경을 삶의 뿌리에서부터 의식해야 한다. “파괴하고 증오하고 분노할 시간은 이제 없다. 축제와 기쁨 그리고 희망으로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건설해야만 한다.” Ivan D. Illich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타자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입고 먹고 자고 배설하고, 말하고 걷고 하는 행위들은 반드시 나 혼자만의 힘과 능력,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 단지 노동 임금으로 거의 모든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도시인의 편리한 삶은 바로 타자를 인식하지 못하며 착각에 빠지도록 만든다. 심지어 우리가 생존하는 것조차 한 순간이라도 물, 흙, 바람, 불의 작용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꾸 잊고 산다. 보다 근원적인 자신의 삶의 토대가 자연이라는 것을 망각한다. 아무리 형이상학적 사변을 늘어놓고 초월을 지향한다 하더라도 삶의 지반인 자연에서 출발하지 않은 사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우리가 지금 의식주의 문제에서 조금 벗어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자연 덕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크게는 지구, 작게는 우리나라의 자연 환경의 현실을 보면 불안하고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환경론자들이 누누이 강조하고 있듯이, 미래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서는 자연을 잘 관리하고 보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년마다 과거의 기상 기록들을 갈아치우는 현상들을 목도할 때, 지금 삶의 패턴들을 반성․성찰하고 자연과 벗하는 삶의 방향을 모색해야만 한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만든다. 예년에 비해 뜨거운 기온으로 인해 장마도 늦을 거라는 예보와 함께 전국의 저수지가 바닥을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고구마, 마늘 등 농작물이 고사 직전이다. 그러다보니 감자, 양파, 대파, 무, 붉은 고추 등의 농산물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 5월부터 6월 현재까지의 강수량은 과거에 비교해 볼 때, 105년 만에 가장 적은 비가 내린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삶은 환경이 열어 밝혀 준다. 환경이 우리 삶을 현시(顯示)해 주지 않으면 잠시라도 살아갈 수 없다. 마치 종교인이 신의 계시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지속하듯이, 인간은 환경, 즉 ‘둘러 있음의 세계(Um-welt)’에 의해서 살아간다. 모든 존재는 자신을 둘러 있는 존재들로 말미암아 유기적 관계 속에서 생을 이어간다. ‘둘렀다(Um)’는 것은 자신의 시각과 이익에 따라 주변의 유기적 존재를 수단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둘러 있음’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 관계적 방식으로 자신의 고유의 자리에 있으면서 배려와 도움, 생존의 목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둘러 있음의 세계’에 대한 의식의 개명(開明)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자연의 존재 방식을 인정하고, 자연 환경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가능하다는 인식, 즉 삶의 개현 혹은 계시로서의 자연 환경을 삶의 뿌리에서부터 의식해야 한다.인간의 환경에 대한 안일함, 무딤, 나태함, 무관심 등이 불러온 결과들은 자연을 그저 하나의 대상, 잠정적 존재로서 내가 존재하는 만큼, 내가 존재하는 한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정도로 ‘둘러 있음의 세계’를 보고 있게 한다. 그러나 나를 향해, 서로를 위해 둘러 있던 생명 존재로서의 친구들인 자연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고통․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나의 순간순간의 행위가 자연에 부담을 주고 해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근본부터 의심해 보는 환경의식을 가져야 함과 습관적 환경주의자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야만 ‘둘러 있음의 세계’를 해방시킬 수 있으며, 그 해방이 지배, 파괴, 변형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유엔지속가능개발회의 ‘리우 20’의 화두는 ‘비만’이 되었다. 20년 새 인류는 1인당 연간육류소비가 34kg에서 43kg으로 급증했고, 그로 인해 과체중이거나 비만인 사람이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이산화탄소를 더 많이 배출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과다한 열량 소비는 식량 공급을 불안하게 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수치와 통계의 변화가 알려주는 것이 때로는 인위적이고 작위적이더라도 생의 시간 속에서, 그것도 단시간 내에 기록 갱신을 하는 상황에서 자연 환경의 변화를 그냥 관망할 수만은 없다. 말가죽으로 시체를 싼다, 즉 군인은 전쟁터에서 죽을 각오로 임해야 한다는 ‘마혁과시’(馬革裹屍)라는 말처럼, 지금 환경을 살리고 지켜야 하는 마음 자세가 마치 전쟁을 당면한 것 같은 마음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안불망위’(安不忘危), 편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환경 위기와 환경적 죽음, 그리고 그 어려움이 닥치기 전에 개인과 국가는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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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6-28
  • 이념보다 생(生)을 앞세우라
    이념은 보조물, 인간은 생(生) 그 자체로 존재 ▲ 이념은 선도 악도 아니다. 이념이 맡아가진 그 형식 때문에 다만 그렇게 될 뿐이다. 이념은 시대적 산물이다. 또한 존재의 부산물, 삶의 소산물이기도 하다. 아니 조에 부스케(J. Bousquet)의 말을 빌려 말한다면, ‘보조물’에 불과하다. 그것을 마치 주산물인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인간이 생(生)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일이 아닌가.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의 지평을 벗어날 수가 없다. 또한 인간의 경험은 경험 가능한 세계에 대한 경험일 수밖에 없다. 경험은 경험된 것으로서의 그것, 혹은 그것에 대한 진술이다. 따라서 경험에 대한 인식은 미래를 확정짓지도 단정 짓지도 못한다. 오직 과거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한 감각에 대해서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경험은 사건들의 지평이다. 사건에 있어 일어나고 다가오는 지평은 모두에게 동일하지 않다. 동일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사건에 대한 감각적 경험의 절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경험은 경험된 세계에 대한 지평 해석 및 의미의 한계와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타자와 공유된 절대적 지평이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경험을 절대화할 수 없고 경험에 대한 인식을 도그마(dogma)화할 수 없는 까닭이다. 사건과 더불어 의식이 발생하면서 의식이 사건 속에서 현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건에 대해서 감각하고 의식할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사건은 일어난다기보다 다가오는 것이다. 개별적 인간에게 사건은 다가가서 그 사건의 해명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때 사건 해명을 위한 1차적 조건이 감각적 경험이라는 것이다. 감각적 경험을 의식하고 해명하는 것은 그것을 일반화하는 작업, 즉 이성을 통해 ‘개념화’ 해야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다. 보편화는 경험한 사건을 해명하기 위한 이성적 행위의 2차적 조건이다. 여기에서 개입되는 것이 인간의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 등의 어느 일정한 ‘관점’이다. “시간의 연쇄 속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우리의 영혼 혹은 마음이 그것에 대해 우리에게 묻자마자 바로 미지의 것이 되어 버린다...”(J. Bousquet, 김관오 옮김, 달몰이, 아르테, 2007, 78쪽) 그러나 관점이 사건을 만나면 몰주체성으로 변한다. 사건 혹은 사건의 경험이 생(生)의 근저를 맴돌면서 주체를 뒤흔들기 때문이다.  이념 논쟁, 색깔 논쟁으로 정국(政局)이 소모전을 벌이고 있다. 민초들의 삶이 이념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 되는 생(生) 그 자체의 존재론적 위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념은 선도 악도 아니다. 이념이 맡아가진 그 형식 때문에 다만 그렇게 될 뿐이다. 이념은 시대적 산물이다. 또한 존재의 부산물, 삶의 소산물이기도 하다. 아니 조에 부스케(J. Bousquet)의 말을 빌려 말한다면, ‘보조물’에 불과하다. 그것을 마치 주산물인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인간이 생(生)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일이 아닌가.이념이라는 것이 삶의 감각적 경험, 그리고 사건으로서의 경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어떤 이념도 절대화될 수 없다. 하나의 이념은 또 다른 이념과 대립하면서 한쪽을 유배시킨다. 그러나 이념으로 인해서 오히려 생(生) 그 자체가 유배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이념이 생(生)을 강제하는 거짓된 상상력으로 작동하거나, 생(生)이 생(生)되게 하는데 장애가 된다면 이념은 청산해야 한다. 아울러 인간으로 하여금 생을 밀착시키고 사건으로서의 경험 세계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사유의식이 있어야 생이 조각나지 않을 것이다. 생에서 이탈하는 사건, 생을 기만하는 의식 속에 있는 나는 과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조에 부스케의 말을 거듭 인용하면, “인식의 의식은 그의 감정이 향해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도덕적 균형을 만들어야 한다.”(J. Bousquet, 김관오 옮김, 달몰이, 아르테, 2007, 83쪽) 인간은 끊임없는 의식의 고양을 위해 이성과 의식의 깊이로 상승해가야 한다. 의식의 진보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마땅한 것이지만, 이념적 진보나 보수는 필연적이지 않다. 생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는 또 다른 이념의 논쟁 역시 자신의 역사적 감각 경험을 절대화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념은 사건의 해명을 기만하고 생과 사건보다 우선하려는 욕망이 크기 때문에 난만(爛漫)한 이념의 궁핍이야말로 우리가 소유해야 할 권리일지도 모른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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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6-20
  • 자기 본래적 회복을 이루자
    '어떤 것'에 향해 있기보다는 인간의 존재론적 삶을 지향해야 ▲ 인간 안에서 부르는 존재의 목소리로 향하기보다 인간 바깥의 변하는 사물, 대상, 조건에 자신의 존재를 맡긴다. 이렇게 그리로 향하는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인간 고유의 존재로 서 있음과 살아감을 포기하고 스스로 대상으로 전락하는 삶을 자초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 혹은 다양한 대상을 향해 있음(being-toward-something)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대상이란 어떤 것, 어떤 사물, 어떤 사건, 어떤 일 등 인간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것 일반을 지칭한다. 인간은 관심의 대상이나 사건으로 인해서 이미 마음에 두고 있고, 이미 몸이 가 있으며, 이미 영혼이 빼앗긴 상태가 된다. 그로 인해서 인간 실존의 자리인 ‘있음’은 ‘던져져 있음’, ‘무방비 상태로 처해 있음’이 된다. 관심 대상과 있음의 거리는 멀 수도 있고, 가까울 수도 있다. 단 ‘향함’(toward)이라는 지향성, 방향성, 목적성, 추구함, 갈망함, 욕망함 등을 통한 감각, 지각, 그리고 지성의 작용이 어떠한 상황, 조건,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삶의 지향과 방향성 등의 목적성은 ‘어떤 것’(something)에 대한 인식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가 관건이 될 수 있다. 그것을 사물성, 물질성, 유한성, 가변성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정신성, 무한성, 불변성으로 할 것이냐이다. 그렇게 될 때 인간이 처해 있음의 실존에 변화가 생기며 삶의 초월이 발생한다. 물론 ‘어떤 것’은 느닷없이 다가온다. 인간의 관심 대상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늘 앞에 나타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감각, 지각, 지성이 사태를 파악하기에 앞서 나타난다. 그것은 가끔 나타남이 아니라 매순간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등장한다. 그런 경우 그 어떤 것에 대한 인식과 판단을 종합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관심의 대상으로 ‘향함’은 끌려간다. 의식이 빼앗긴 채 끌려간다. 그러기 전에 인간은 관심의 대상에 대한 선 이해, 선 판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신성, 무한성, 불변성의 범주적 삶, 타고나면서 부여된 삶의 철학을 확고하게 갖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처해 있음’, ‘빠져 있음’으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삶의 구렁텅이 속에 존재하고 말 것이다. 흐느적거리고, 흐리멍덩한 쾌락적인 삶은 이미 어떤 대상, 사물성에 이끌려 향해 있음의 실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떤-것’(some-thing)에 대해 자각했다는 것은 동시에 향해-가고-있음(being-toward)을 의미한다. 사태에 대해서 인식, 지각, 감각함으로써 이미 끌려가고 있고, 이미 빠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끌려가고 있음과 빠져가고 있음이라는 인간의 수동적 행위에 대한 언술과는 반대로 끌고 가고 있음, 곁에 가고 있음, 혹은 함께 가고 있음이라는 삶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도적이고 주체적인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일, 사건, 사물에서 불변, 무한, 정신, 초월이라는 생의 범주로의 이행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관심 대상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그 자체로부터 자유를 획득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향해 감’은 ‘있음’이라는 존재의 실존을 규정하고 확정하는 과정이다. 한국 사회의 주말이나 밤의 모습은 ‘어떤 것’으로 향해 가는 인간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주말이면 만취 사회가 되는 도시, 주폭으로 변하는 밤 문화, 이성은 혼미해져서 비틀거리는 사회, 유흥가와 환락가로 넘쳐나는 대학가가 이를 대변한다. 하루 술 소비량에서 맥주 952만 7397병, 소주 896만 5068병, 하루 술 먹는 사람이 598만 7061명이라는 통계가 ‘어떤 것’으로 ‘향해 감’의 상태를 잘 말해준다. 자기 존재의 확인, 변화하는 사건 속에 자기 자신을 맡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몰입, 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어 감, 욕망을 수동적으로 재생산해 감의 상태를 드러내는 단면이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사회의 음주 문화를 완전히 대변하는 말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것, 대상성, 물질성을 향하는 존재, 향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주는 충분한 지표가 된다고 본다. 인간 존재는 이미 처해 있음의 상황에 직면에 있는 것이다. 인간 안에서 부르는 존재의 목소리로 향하기보다 인간 바깥의 변하는 사물, 대상, 조건에 자신의 존재를 맡긴다. 이렇게 그리로 향하는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인간 고유의 존재로 서 있음과 살아감을 포기하고 스스로 대상으로 전락하는 삶을 자초하고 있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말한다. “그 어떤 인간이든 간에 모두가, 자기 이상의 존재인 것이다... 어떤 사람도 완전히 그 자신이 된 선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자기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을 신뢰한다면, ‘어떤 것’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고 향해 있기보다는 홀로 있음, 이야기 함, 배려(돌봄), 이성, 자기 성찰, 전체를 바라봄이라는 인간의 존재론적 삶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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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6-15
  • 몸의 주체성 회복을 위해 생각함
    몸이 해석의 대상이 아닌 변혁과 자기 주체적 외현임을 상기해야 ▲ 개인이든 국가이든 몸적 주체성을 구속하고 억압할 권리는 없다. 몸이 갖고 있는 한 개체로서의 은밀한 역사를 전체주의로 환원하면서 정치적 수단의 몸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몸을 통한 인간다운 인간을 역행하는 것이다. 몸은 인간의 존재 양식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인간의 몸이야말로 세계 내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외현적인 사실을 의미한다. 몸은 세계에 나타남이다. 그래서 몸은 어떠한 억압과 구속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존재다. 자신의 몸은 곧 주체다. 자기에게 자기로서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도 주체로서 나타나 있다.몸을 타자화시킬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몸이 타자와 만나고 세계 안에 있다고 해서 몸의 주체적 경험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할 수 없다. 만남에는 ‘나’라는 몸적 주체가 만남 자체를 직접적으로 구현하기 때문에, 타자를 구속하고 억압할 경우 진정한 만남은 성립할 수 없다. 그것은 주체의 몸적 경험을 말살하는 것이고 몸적 경험의 시공간을 빼앗는 것이다. 몸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인간 개별자가 직접성을 표현하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몸이라는 주체가 갖는 경험과 경험하는 시공간의 특수한 맥락 때문이다.몸은 결코 사물화될 수가 없다. 몸은 누구에게나 신성함과 순수함의 상징이다. 그러한 몸이 경험하는 것은 기억이며 흔적이다. 몸의 살은 기쁨, 슬픔, 노여움, 즐거움, 상처, 고통, 증오 등의 삶의 총체적 감정․기분․정서를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노동 경험, 성적 경험은 자발적 행위나 능동적 행위를 통한 자기 존재의 확장과 확인이다. 이것이 사회적 교류가 아닌 수동적, 강제적 행위라면 기억의 장소로서의 몸의 경험은 억압당하고 말 것이다. 가브리엘 마르셀(G. Marcel)이 말한 것처럼, “나는 나의 육체”라고 말할 수 있는 몸적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몸이 타자화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는 나의 육체”라는 현상학적 선언은, 몸의 근원적 관계 혹은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아닌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다. 나아가 몸이 타자화, 사물화될 수 없다는 것은 몸의 정치화에 대한 거부를 포함한다. 이것은 앞에서 말했다시피 몸이 타자화, 사유화될 수 없다는 몸적 주체성의 보다 강력한 자기 선택적 발언이다. 개별자를 몸으로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단순한 몸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몸은 몸뚱이, 즉 사회 공동체나 국가 공동체를 대변하는 민족적 신체성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이 말은 몸이 단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소유와 사용가능성을 넘어서 국가적 차원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몸은 민족적 신체성이라는 측면에서 때로는 전쟁의 희생물, 종교적 희생물, 의학적 희생물 등으로 굴러떨어질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민족적 신체성으로서의 몸은 굴욕적으로 타자들에 짓밟히면서 유린당하는 성욕적 희생물, 노동의 희생물이 될 수가 있다. 이렇듯 개별적인 몸적 주체성은 거대한 민족적 신체성에 종속되어 자신의 몸적 주체성을 주장하지 못함으로써 몸의 필연적 해방을 지향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개인이든 국가이든 몸적 주체성을 구속하고 억압할 권리는 없다. 몸이 갖고 있는 한 개체로서의 은밀한 역사를 전체주의로 환원하면서 정치적 수단의 몸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몸을 통한 인간다운 인간을 역행하는 것이다.이념의 희생물이 되거나 성적 희생물이 된다 하더라도 몸은 세계를 정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염시킨다. 이념은 정신을, 성은 몸을, 노동은 세계를 정결하게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 고유의 맘짓과 몸짓이다. 과거 이런 정결을 오염으로 만들어버린 국가가 있다. 바로 일본이라는 나라다. 지난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선조들은 성과 노동의 경험에서 몸적 주체성을 빼앗기고 타자화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몸부림을 치면서 희생물로서의 몸이 되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결국 민족적 신체성은 점령을 당하고 말았다. 몸적 주체성이 강탈당한 결과는 역사적 시공간 안에서 몸과 정신의 보상을 외치는 뼈아픈 현실의 경험뿐이다. 일제강점기에 성노예(위안부; 근로정신대)로 자신의 몸적 주체성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게 오늘의 상황이다. 그나마 강제 징용피해자로 일본 기업(미쓰비시와 신일본제철)에 몸적 주체성이 종속되었던 분들이, 그들을 상대로 손해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나의 몸이 있다.’ ‘나의 몸이 존재한다’는 발언은 세계와 관계 맺음의 방식으로, 몸이 세계를 지향하는 주체성의 언표이다. 그것은 세계의 기저(基底)인 기체(주체, subjectum)가 몸적 사고를 통해 세계를 구성하고 해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와 만나고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은 몸이 사유를 통해 세계에서 자기 자리의 위치를 점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의 질곡에도 불구하고 몸에 대한 인식과 상처를 다독이는 행위는 몸이 세계를 해석하고 자신의 시공간을 새롭게 확보하겠다는 의지로 봐야 한다. 이제 더 이상 몸이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변혁과 자기 주체적 외현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하는 시점에 있는 듯하다. 그 이유는 그동안 몸적 주체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과거에 경험한 몸의 기억들을 애써 치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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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6-07
  • 속도에 굶주림과 속도의 무의미
    시간이 때와 때 사이를 의미하는 것은 삶의 속도와 빠름을 조절하는 걸침이 있다는 말 ▲ 시간이 때와 때 사이를 의미하는 것은 삶의 속도와 빠름을 조절하는 걸침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상실할 때 삶의 일정한 때, 중요한 때, 쉬어야 할 때, 가족과 함께 할 때, 내 안을 성찰할 때를 영원히 갖지 못할 것이다. 모든 때를 경제적 가치로 환원해버리는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빠름 혹은 빠르기의 정도에 익숙해져 버린 시대다. 빠름은 단순히 느림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삶이 기계화가 되어가게 하는 근대적 산물이다. 빠르지 않으면 안 되는 조급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심리는 본능이라 하기에는 기계적, 문명적 습관에 많이 젖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욕구가 본능적으로 혹은 이성적 빠름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욕구를 넘어 욕망이 기계적 빠름에 순응한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빠른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속도에 밀려 이성마저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끊임없이 무장해제를 하고 자기를 놓아 버리게 한다. 빠름은 기계적 현상이자 인위적, 조작적 시스템이다. 더 나아가 빠름은 경제적 가치이다. 빠름은 심리적 만족감과 노동의 효율성이다. 빠름은 학습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데 중요한 척도가 된다. 빠름은 ‘올바르냐, 도덕적이냐, 배려냐’하는 것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때와 때 사이, 즉 시간의 틈 사이를 어떻게 하면 공백이 없게 할 것이냐’에만 관심을 갖는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때는 쉼, 짬, 느림이 있는 시간의 완성이나 시간의 충만은 필요 없다. 오로지 때와 때를 멈춤이 없이 지속적으로 메우고 활동해서 경제적 삶의 이윤을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간(자기만의 때)도 빠름이라는 문명적 구조에 희생당할 수밖에 없다. 빠름을 유지시키고 빠름을 만들어내기 위해 환경적, 생명적, 관계적 손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를 생각해 보라. 빠름이 좋다 하지만 그 빠름을 추구하는 욕망 때문에 한쪽에서는 느리게 살 권리, 생명과 함께 할 권리를 빼앗긴다. 그래서 빠름은 한편 잠정적 긍정이지만, 다른 한편 영원한 부정이다. 빠름은 긍정을 요구하지만 그 긍정은 단순한 긍정이 아니라 계속되고 강요되는 순응적인 긍정이 된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느림 혹은 생리적, 인간적 시간은 그 빠름의 시간 속에 영원히 묻혀 버리고 만다. 빠름은 우리의 몸시간이 아니다. 인간은 몸이라는 제한된 실체를 가지고 있다. 몸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정신은 지금껏 계속되어 왔고, 그 형이상학적 실체가 정신임을 확인하였지만 몸을 떠나서 실현된 적이 한 번도 없다. 유한한 몸, 한계가 있는 몸은 신체적 구조를 통해 세계와 조우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의 의식을 발현하였다. 거기에는 움직임, 즉 운동의 동적 상황에서조차도 자신의 몸세계를 떠나서, 혹은 벗어나서 이루어질 수 없는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세계와 자연스럽게 만나는 인격체로 삼으려 하기보다 몸을 기계화한다거나 몸을 대신 할 기계나 매체로 몸 자체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동시에 세계를 재편성하려고 한다. ‘삼성전자’에서는 그래핀(graphene)을 이용해서 이제까지보다 더 빠른 데이터 처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발표해서 차세대 반도체 시장의 전망을 밝게 했다. 그래핀 반도체는 컴퓨터에서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복잡한 계산 작업을 할 때, 오래 기다릴 필요 없이 순식간에 데이터 처리를 가능하게 해준다. 또한 한국철도기술연구원에서는 시속 430km의 차세대 고속열차 ‘해무’를 선보였다. 이른바 속도 경쟁에서 프랑스, 독일, 일본, 중국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보도를 접할 때마다 속도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함께, 속도에 대해 집착하는 인간에 대해 사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갈수록 점점 빠름을 선호하면서 그 빠름을 선(善)하다고 하는 인간의 인식은 어떤 때[시간]와 자리[장소]에 머물지 않고 주시하지 않음, 주의 깊게 보지 않음, 눈여겨보지 않음, 생각을 두지 않음이다. 둘러-있음의-세계(Um-welt)에 관심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속도는 우리를 끌고-감이요, 위험이자 들이닥침이다. 끌어오지 못하고 끌려가고 있다. 그로 인해 몸은 빠름의 도구에 의해 더 빠름을 요청한다. 몸은 바빠지며, 삶은 시간에 의해 조각나고, 생활세계는 가벼움에 빠진다. 삶을 효율성, 경제성으로만 평가, 인식하는 세계가 될 때 삶은 깊이 없는 형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수치화, 계량화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빠름이 다급함, 조급함, 황급함으로 치닫게 되어 삶이 경황없음으로 추락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시간이 때와 때 사이를 의미하는 것은 삶의 속도와 빠름을 조절하는 걸침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상실할 때 삶의 일정한 때, 중요한 때, 쉬어야 할 때, 가족과 함께 할 때, 내 안을 성찰할 때를 영원히 갖지 못할 것이다. 모든 때를 경제적 가치로 환원해버리는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더더욱 말이다.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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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30
  • 교육, 누구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교육은 그 사람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내신 성적 경쟁, 스펙 쌓기 등은 교육을 전리품 쟁취로 전락 ▲ 교사는 검투사에게 기능을 가르치고, 상대를 더 잘 제압할 수 있는 자를 선발하는 사람이 아니다. 학교는 생사를 건 경쟁에서의 승리를 부추기는 검투장이 아니다. 이 상태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교육과 학교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교육’이라는 정의는 견해와 기준에 따라서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핵심적 귀결은 인간을 대상으로 어떤 지식이나 기술 등을 가르치고 지도한다는 것과 그 가운데 인격을 길러주는 것까지 병행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인간형성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일컫는 말이 교육이라는 것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 교육이라는 것은 탄생과 함께 그 출발을 같이하게 된다. 인간의 성장에 있어 교육은 그 사람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한다. 이와 관련하여 교육이 지향하게 되는 가치와 목적은 그가 속한 사회라는 공동체의 성격 형성에도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학교교육과 입시라는 현실을 비춰보자. 우리나라의 교육기본법 제2조에는 “교육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기본이념을 명시하고 있다.그렇다면 우리의 학교교육의 현실이 과연 이런 기본이념에 충실하게 부합하는 교육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거창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같은 학교, 같은 반 친구들 사이에서라도 서로 유익하게 하고 함께 발전하려는 진심어린 교육이 과연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지나치다 못해, 살벌한 내신 성적 경쟁, 스펙 쌓기 등은 교육을 전리품 쟁취를 위한 승리의 도구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학교 간 경쟁을 유도하여 공교육을 개선한다는 발상은 교육을 경제 사상적 패러다임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육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역행이다. 학교가 기업처럼 성적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곳인가? 하지만 현실은 이런 암묵적 합의에 대한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 학교를 서열화하고 계층 간, 지역 간 불평등을 조장하고, 심화시켜 나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이 자신을 위하는 것인 줄로 알고 그렇게 한다. 그러나 속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다고 한 것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자업자득이 되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게 된다.교육의 세태를 일컫는 세간의 이야기에 ‘할아버지의 재력,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 동생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교육을 통한 부의 세습과 이기적 힘의 창출을 위해 필요한 요건을 잘 적시한 것이다. 아무리 세태가 이러하다 해도 이것을 막아주고 바르게 회복시켜줄 최후의 보루가 교사들이다. 그런데 교사들마저 세태에 동조하고 더 나아가 이 일의 안내자로 나선다면 교권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다.교사는 검투사에게 기능을 가르치고, 상대를 더 잘 제압할 수 있는 자를 선발하는 사람이 아니다. 학교는 생사를 건 경쟁에서의 승리를 부추기는 검투장이 아니다. 이 상태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교육과 학교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여기에는 기준이 필요하다. 이것은 교육이라는 가치와 해석의 문제이다. 여기에 대한 정체성의 확립과 실천적 의지를 기르고, 그 출발을 가르치는 곳이 학교다.아울러 입시는 나눔과 균형, 참과 성실, 다양성의 발현을 견인하는 창구가 되어야 한다. 입시가 승자와 패자, 우수자와 비우수자, 등급을 구분하는 분류 심사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약육강식적 성공주의의 저변에서 열을 올리며 시중드는 실적주의가 성적지상주의라는 암세포를 만들어 인간을 서열화하고 있다. 몰라서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고위 공직자나 지도층 인사들의 비리와 범죄를 보라. 깨닫고 실천하는 양심의 발현에 이상(異常)이 생긴 것이다. 도덕 교과서는 그 사회의 사람들이 본받고 따라야 할 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문제는 적용이라는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양심과 도덕으로 작동해야할 지성세포들이 변형을 일으키며, 표리부동하게 이기심이라는 독기를 뿜어내며 공동체의 생명력을 잠식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를 막아서서 치유하며 회복시켜야 할 의사들이, 성직자들이며, 교사들이고,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자기 이익 앞에서 더 민감하고 약삭빠르다면 이것은 정상적인 생명적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못하는 사회가 된다.약육강식적 적자생존의 논리가 작동하는 세계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다. 동식물의 세계에나 작동하는 법칙이다. 이는 상대를 이길 힘이 없거나 적응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멸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슬그머니 획일적 평등주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수자는 우수자대로 아름다운 것이다. 이것이 상대적 우월감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탁월함을 발하여 상대적으로 연약한 자들을 돌보고 베풀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마음껏 꽃 피워야 한다.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에게, 이것이 한계에 따른 체념과 비굴한 수용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연약하고 부족하다는 것도 상대적일뿐이다. 그것이 절대적일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 자체로 서로에게 소중한 의미가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본질적으로는 그 어떤 우열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모두는 서로 배려와 사랑을 나누고 칭찬하고 감사하며 함께 조화해야한다. 이것은 자신에게 부여된 능력과 아름다움을 통해 어울림을 만듦은 물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베풂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은 존재자체로서의 어울림과 깨우침, 사랑과 나눔의 통로교육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모두를 위한 것이다. 누구의 전유물이나 독점품이 아니다. 교육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 세상에서의 존재자체로서의 어울림과 조화로의 발현에 대한 깨우침이며, 사랑과 나눔의 통로로서의 약동을 위한 구동력의 공급이다. 이런 맥락에서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말하는 교권과 학생의 인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에 걸맞은 법적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을 토대로 하여 성적문제, 입시문제의 기준을 제시하고 가동해야 한다. 이것은 모두에게 다 좋은 기쁨의 노래가 되어줄 것이다. 이 곡을 합창하는 자들이나 바라보며 듣는 사람들 모두가 아름다움과 즐거움 가운데 인간됨과 삶의 행복 속에 감격할 것이다. ‘내가, 우리가 더 유리하게’라는 이기주의를 감추고 모양만 그럴듯하게 내뱉는 주장이라면 끝없는 대립과 파괴를 양산할 뿐이다. 보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너를 이겨서 내가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좋은 곳에서 살기위한 수단’이 교육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어느 지역은 입시정책과 주변 학교나 학원들 때문에 집값이 오르내린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혹자는 민주자유 국가요, 자본주의사회에서 적법한 방법으로 먹이고 입히며 가르치겠다는데, 왜 그렇게 잔소리냐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나 독재 권력이 집권하는 국가에서의 모든 행위나 시행이 그들의 법에 적법하다고 하여, 인간존중과 인류공영에 위해(危害)를 가해도 과연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인가? 법이라는 것도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인간의 본질적 존재가치와 인류공동체의 아름다움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교육, 과연 누구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양심을 오염시키는 가슴속 탐욕의 덩어리를 제거해내야 한다.  공부를 잘하거나 그렇지 못한 것이 대립적 관계를 조성하는 갈등의 씨앗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서로 돕고 나누고 베푸는 조화와 아름다움이 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도덕 교과서의 이론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되게 하는 것이 교육이다. 그리고 그 실천을 경험하게 하는 곳이 학교가 되어야 한다. 바야흐로 넝쿨장미의 꽃송이들이 아름답게 만발하는 계절이다. 이것을 우열경쟁의 결과로 해석한다면 만사를 다 갈등적 안목에서 바라보는 사람이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배려하는 것이, 내가 상대보다 좀 더 우수하다는 발상에서 비롯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사람의 당연한 존재적 의미이고, 모든 사람들과의 상호적인 것으로 온갖 꽃들의 만발처럼 아름다운 향연이 되게 해야 한다.교육은 ‘나와 너, 우리’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아름답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회복과 실천이 번져나가게 하는 착한 교육과 좋은 학교, 진실하고 용기 있는 선생님들이 일어나 빛을 발해야한다. 부모들 또한 이런 교육에 책임감을 가지고 소임을 다해야 한다. 아울러 배우는 자들은 이에 순수하게 반응하여 꽃을 피우고 결실하며 아름답고 복되게 세대를 이어가야 한다.  박요섭 박사본지 대표/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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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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