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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1-07-02
  • 한국화학연구원, 스펀지로 열을 전기로 바꾸는 소재 개발
    [타임즈코리아] 구부러지고 늘어나고 압축이 돼, 열이 있는 곳 어디에든 붙여 열을 전기 에너지로 바꿔주는 열전소재가 개발됐다. 완전히 유연한 열전소재가 개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화학연구원 화학소재연구본부 조성윤 박사팀은 열원의 형태와 관계없이 어디든지 붙일 수 있는 ‘스펀지형 열전소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열을 전기로 바꿔주는 소재로 온도 차에 의해 전기가 발생한다. 일례로 발전소 굴뚝에 열전소재를 부착하면, 굴뚝 안쪽의 고온(150도)과 바깥 상온(30도)의 온도 차로 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구진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스펀지에 탄소나노튜브 용액을 코팅했다. 탄소나노튜브를 물리적으로 분산시킨 용매를 스펀지에 도포한 후, 용매를 빠르게 증발시킨 것이다.  제조방법이 간단해 대량생산에도 적합하다. 모양을 만들어주는 틀 없이 스펀지를 이용해 열전소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거푸집 없이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셈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열전소재는 무기 소재로 만들어진 탓에 유연하지 않았다. 사람의 몸이나 자동차 등 다양한 곡면의 열원에 붙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제조공정 자체도 까다롭고 복잡하다. 전 세계 연구진들은 유연한 열전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탄소나노튜브에 주목했다. 탄소나노튜브는 전기전도도가 높고 기계적 강도가 강하며, 지구상에 풍부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팀이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해 유연한 열전소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스펀지와 유사하면서도 높게 쌓을 수 있는 탄소나노튜브 폼(foam)을 만든 것이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압축 안정성 실험 결과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는 “지금까지 개발된 유연한 소재는 지지체나 전극의 유연성을 이용한 것”이었다면서 “소재 자체가 유연한 건 이번 스펀지형 열전소재가 처음이고 제조방법도 간단해 대량생산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개발된 스펀지형 열전소재는 열전소재의 전기적 특성과 스펀지 고유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10,000번 반복해도 형태는 물론이고 전기적 특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압축 전과 압축 후의 저항값이 각각 1.0Ω(옴), 0.3Ω으로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이는 스펀지에 기공이 무수히 많아 변형에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펀지의 탄성을 이용한 응용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경우, 압력이 커질수록 발전량도 덩달아 높아졌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했을 때 최대 2㎼(마이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하여, 압축 전과 비교해 발전량이 10배 정도 증가했다. 이에 대해 연구논문 1 저자인 김정원 박사는 “스펀지의 압축되고 복원되는 탄성을 활용해 몸에 부착하는 웨어러블 기기에 적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수한 기계적 성질이 요구되는 자동차 등에도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정원 박사는 “열전소재 분야 전망도 밝다. 현재 자동차에서 사용하고 난 후의 열이나 온천수를 이용한 열전발전 시작품의 실증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관련 기술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성과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에너지 소재 분야 권위지인 『나노 에너지(Nano Energy), IF:16.602』8월호에 게재됐으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창의형 융합연구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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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
    2020-09-22
  • 종속될 것인가, 회복할 것인가
      [타임즈코리아]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느린 사람은 어찌 살라는 건지, 넋이 나갈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많은 것들이 바뀌곤 한다. 이런 현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변화는 순리이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논리가 더 우세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약육강식이 진리이어야 한다. 여기에 동의할 사람들은 모두 강자라야 가능하다. 적어도 변화가 자연에 의한 것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이 자초한 변화에 순응하라는 것은 무조건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이 그만큼 편리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만큼의 행복을 확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비대 면화되어 가고 있다. 이것을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변화라고 동의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코로나19에 따른 불가피한 강요인 셈이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에 따른 변화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만남에서 누리고 싶은 행복은 사람의 DNA 속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다. 현장 공연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감흥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런 노력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 개인의 욕심이 아니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예술을 가상의 세계에 가두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 만약 가상의 세계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우리가 굳이 직접 여행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영상이나, 증강현실 그리고 가상현실 시스템만으로도 더 자세하게 보며 실감 나는 장면 속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온라인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계기로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콘텐츠를 구별하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가 파산했다는 기사가 유난히 아프게 느껴진다. 과학과 기술이 육체적 요소라면 문화와 예술은 정신적 요소이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난국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문화와 예술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예술의 존엄과 가치는 예술가들이 지켜 내야 하는 것이다. 대중화, 실용화 이런 측면들은 굳이 지키려 하지 않아도 어느 시대에나 자생해 왔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변하지 않게 하는 일,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려는 힘은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자극하여 거대한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예술의 힘이고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망가트려놓은 만남과 관계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 속에 내어주고 거기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만남과 관계를 열망하는 DNA와 인간의 지혜가 코로나19보다 더 강함을 증명하며 예전과 같은 역동성을 회복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왔듯이 이 또한 극복해 낼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코로나19를 이겨낼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이전과 같은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예술가들이여, 우리는 과학자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감동을 선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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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6
  • 인문학은 이론이 아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본질을 찾아 나선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사변적으로 흘러가면 이념이나 현상적인 집착으로 이탈하게 된다.   이런 행태는 수많은 증오와 폭력을 낳으며 씻지 못 할 마음의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남길 뿐이다.   인문학적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삶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타자와 참된 관계를 형성하는 정신을 의미한다.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사람은 ‘너’와 더불어 ‘나’라는 관계를 통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조화로움의 아름다움을 통해 공감함으로써 상대방을 이웃으로써 인식하고 수용하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문학, 역사, 철학, 종교 등의 이론을 습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그들의 아픔과 울분, 사랑과 기쁨을 공유하는 공감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인문학은 ‘너’와 더불어 존재하는 ‘관계’로서의 ‘나’를 인식하고 사랑(자비, 나눔, 배려, 공감)으로 소통하는 지혜를 깨우치고 표현하게 하는 모든 문화, 사상, 지식 등을 말한다.   인문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진리를 찾고 따른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온전히 깨닫고 그 사랑을 최선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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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정보
    2016-03-18
  • 현대인 허균이 살았던 과거의 삶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동부승지, 삼척 부사,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허엽(許曄)은 30년간이나 관직에 머물렀는데도 생활이 검소했고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한 인물이다.   허엽의 호는 초당(草堂)이다. 오늘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초당 순두부의 본고장이 바로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이다.         이곳에서 허엽의 아들 허균(許筠, 1569~1618)이 태어났다. 교산(蛟山) 허균은 명문가의 자제로 천재적인 두각을 나타내 모든 것이 보장된 인물이었지만, 불우한 계층을 대변하는 삶을 선택했다.   이런 까닭으로 허균은 조선시대 반역의 상징 같은 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평등사상에 눈을 뜬 허균의 급진적인 개혁 사상은 오늘날에 와서는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단과 반역을 도모하는 사회전복세력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쓴 《홍길동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허균이라는 인물을 볼 때, “역사는 현대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항상 새롭게 해석되고 평가될 수 있기에 역사를 보는 모든 이들의 시각은 상대적이다”고 말한 영국의 정치학자이며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 1892년~1982년)의 견해가 더욱더 공감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6-03-15

실시간 학술정보 기사

  • 별세신앙을 통해 길을 묻다
    지난 4일 장마철에 들어선 날씨로 비가 오락가락 하는 가운데 분당한신교회(담임목사 이윤재)에서는 이중표 목사 8주기 추모예배와 제3회 별세포럼이 열렸다. 한국기독교 선교 130주년을 한 해 앞둔 7월의 문턱에서 한국교회를 돌아보게 하는 의미 있는 행사이다. 참석자들은 이중표 목사를 그리는 마음들로 가득했다. 인간적인 아쉬움이나 연민이 아니라, 이중표 목사의 신앙과 지도자로서의 인격에 대한 시대적 필요가 더욱더 절실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중표 목사는 세상에 없다. 세상과의 이별을 고한지 8년째가 되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생사의 이별에서도 세월은 그 기억을 희미하게 만들어준다. 이중표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 8년이 되었음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가 더욱더 생생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인가.‘최학휴 목사(광주양림교회)의 사회, 조영식 목사(김포한신교회)의 기도, 박진구 목사(전주안디옥교회)의 설교(별세의 소원), 이윤재 목사(분당한신교회)의 추모사, 별세목회원의 찬양(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손창완 목사(군산세광교회)의 광고, 차창현 목사(부곡교회)의 축도’로 이루어진 추모예배에서의 모든 순서마다 이중표 목사가 외친 별세신앙의 메시지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박진구 목사의 설교를 통해 바라본 이중표 목사의 별세영성은 참석자들의 마음에 젖어들었다. “별세의 신앙은 사후의 세계가 아니라, 이제로부터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하늘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칙과 뜻을 따라 사는 복된 것이다. 이런 신앙은 결코 쓰러지지 않으며, 모두를 사랑하게 된다.”추모사를 하는 이윤재 목사는 누구보다도 그리움이 역력한 모습으로 이중표 목사를 회상하며 별세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이중표 목사님의 8주기를 맞이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 분의 영성을 더욱더 올바르게 이어갈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이중표 목사님의 자리를 이어간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만, 별세는 구호가 아니라 삶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추모예배에 이어서 김종균 목사(별세목회연구원)의 사회로 “죽어라! 그리하면 내가 살고 공동체가 산다”라는 윤성민 박사(분당한신교회, 별세목회연구원)의 발제와 이강석 박사(선교사)의 논찬, 송문식 목사(고삼교회)의 마침기도로 모든 순서가 끝났다.발제의 제목에서 말하고 있듯이 기독의 진리는 죽음과 희생을 통한 새로운 생명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인 것이다. 발제자 윤성민 박사는 이중표 목사의 생전에 분당한신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이중표 목사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다. 윤 박사는 이중표 목사의 권유와 도움으로 독일에서 유학을 하게 되었다.         윤 박사의 감회는 별세(別世)영성에 대한 연구와 실천적 확산에 대한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한국교회의 위기에 대한 해결의 모색에서도 별세(別世)영성을 통해 그 답을 찾고자 하였다. 내외적 모든 문제는 결국 ‘자신이 죽지 않음’에서 찾고 있다. ‘자신이 죽어야,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이다.윤 박사는 이것이 별세신앙을 외쳤던 이중표 목사의 영성이었으며, 바울, 마르틴 루터 등으로 이어진 교회사적 개혁신앙의 영성이기도 함을 강조한다. 논찬에 나선 이강석 박사는 윤 박사의 발제가 이중표 목사의 별세영성에 대해 개인적 별세와 별세의 교회론이라는 두 가지에서 조감하고 있음을 의미 있게 바라보면서 균형 잡힌 신앙을 강조했다.   발제에 대한 이 박사의 논찬은 이중표 목사의 별세신앙이 별세한지 8년이 지난 지금, 더욱더 생생하게 살아 있음에 주목하였다. 발제와 논찬은 이중표 목사가 개인적 별세신앙을 갈라디아서 2장 20절로 설명했음을 상기시켰다. 첫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이라는 ‘떠남의 신앙’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옛사람에서 그리스도에게로의 떠남이라는 것이다.둘째는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새 삶의 신앙’이다. 그리스도에게로 떠난 삶은 이미 이전의 삶과 결별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리스도로 인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세 번째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살림의 신앙’이다. 나만의 구원과 새로운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보답하고 세상을 향하여 구원의 도를 전파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별세의 교회론이라는 차원에서 발제자는 “기독교적 에고이즘”과 “교회공동체의 육(肉)”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 크리스토프 블름하르트의 지적을 통해 한국교회의 위기를 조명하고 있다. 중세 카톨릭교회에 대해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개신교가 아이러니하게도 중세 카톨릭교회적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잘 알려진 유명교회나 교단에서의 불법, 탈법이 매스컴에 그대로 노출되는 모습은 어떤 말로도 합리화하기 어려운 지경에 도달해 있다. 개 교회적으로는 묻지마식 교인 받기 행태가 보편화 되어버렸다. 어느 보험광고 문구처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다. 무조건 받아 준다’는 것이 교회에서 새신자를 환영하는 논리이다. 물론 타 지역에서의 이사나 불가피한 이동의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라도 전후 사정과 맥락을 잘 살피며 올바른 신앙성장을 돕는 차원에서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 상도의에도 못 미치는 교인 뺏기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상업 체인화적 시스템이며,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의 교회 물려주기 등도 여기저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이것은 한국교회가 마치 경영자연합회나 노동자연합회처럼 이익집단화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골로새서 2장 8절에는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의 방법과 학문을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길이 아님을 바울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윤 박사는 중세 카톨릭교회의 타락을 통해 한국교회를 조명해볼 때, 오늘 한국교회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회개하며 별세신앙의 자세를 갖자고 호소한다. 윤 박사는 이중표 목사는 개인의 별세뿐만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별세도 중요시하였음을 상기하고 별세영성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돌아가자고 힘주어 말했다.제3회 별세포럼을 마치고 교회당입구를 나서는 길에, 거지(巨智) 이중표 목사와 별세신앙을 생각하노라니, 이슬처럼 얼굴에 부딪히는 가랑비가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니...세상과 나는 간 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추모예배 시간에 불렀던 찬양이 가슴과 귓전에서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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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08
  • 부정(不淨)한 것은 거룩의 선택을 빼앗는다!
    거룩은 단지 종교 공동체에서 필요할 때만 읊조리는무의미한 형식 언어가 돼버린 지 오래다. ▲ 무릇 거룩과 멀어지는 삶을 산다는 것은 성직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떤 사람이라도 초월자 앞에 ‘있는 그대로’가 아닌, ‘순수 그것 자체’가 아닌 삶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종교가 예사롭지 않다. 종교의 성직 지망자가 어느 종단에서는 모자라고, 또 다른 종단에서는 넘치는 기이한 현상, 수도자의 수급 위기, WCC 개최 문제를 놓고 ‘용공좌경이니, 동성애 옹호 집단이니’ 하면서 흠집 내기에 바쁜 보수 종교단체의 행태, 성직자의 성추문과 금전 문제로 인한 구속 등, 종교나 종교 성직자의 본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리도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함석헌의 해법은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호와께 돌아가는 유일의 조건은 ‘거룩’이다. 저가 거룩한 고로 저에게 가는 자는 거룩할 수밖에 없다. 저는 반드시 많은 선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남김없이 찢어서 거룩히 구별한 심장을 원한다.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하나님만을 보는 것, 하나님만이 있는 곳을 거룩한 곳이라 한다. 저 이외의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심판의 자리에서 신생하는 자의 유일의 길은 스스로 자기를 거룩한 것으로 바치는 데 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304쪽)거룩은 오직 초월자만 생각하고 초월자에게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는 그와는 반대로 가고 있다. 초월자를 빙자해서 세상의 권력과 명예를 좇고, 초월을 핑계 삼아 성욕과 물욕을 채우려 하고 있을 뿐이다. 초월자에게는 접근 불가한 것들을 섬기고 숭배하는 행위가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종교의 뒷골목 현실에서 거룩이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신자를 얽어매기 위한 허울 좋은 종교 언어, 강압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초월자의 거룩함은 신자의 거룩함으로 통한다. 흠잡을 데 없이 온전한 상태의 삶을 추구하라는 당위명령, 정언명령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수행적 언어를 퇴색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종교적 삶이 치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거룩한 삶이란 신앙 인식, 신앙 의식의 철저함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현대 물질문명은 우리의 의식을 느슨하게 하다못해 타협하게 만든다. 실존의 절박함이 사라진 것이다. 실존의 자기 책임적 삶을 살아내고자 초월자에게 바짝 밀착된 우리의 신앙 행위는 그럴 명분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흠집이 조금 난다고 무슨 대수랴. 거룩은 단지 종교 공동체에서 필요할 때만 읊조리는 무의미한 형식 언어가 돼버린 지 오래다. 더 이상 종교의 거룩으로 적어도 윤리와 도덕을 재단하던 시대는 지나가버렸다.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대는 초월자마저도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촘촘히 얽어매고 꽉 조여진 문명과 정보, 물질의 풍요, 과잉 건강과 여가는 거룩으로 방향 잡는 것을 가만두지 않는다. 이제는 선택의 자율성, 혹은 선택의 의지에서 ‘인간의 자유’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이것과 저것의 기로에서 인간의 자유로움을 저해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생각과 실천의 방향성이 바뀔 수 있어야 한다. 거룩은 초월자의 온전함이자 자신의 순수 자유이다. 거룩에는 타율성이 섞일 수 없다. 그것은 자유 그 자체이며, 동시에 그 누구도 원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바로 그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의 상태이다. 그것이 타율이거나 그것이 아니라도 선택할 수 있고, 그것이어도 선택할 수 있다면 거룩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신의 속성도 될 수 없을뿐더러 신자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거룩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것 자체를 선택해서 살아야 할 자유이고, 그럼으로써 삶의 의미 단계가 한층 높아지는 신적 행복, 초월적 행복이 깃들어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 확신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이루어진 신자의 마땅한 도리와 인간의 자부심을 갖고 사는 체험적 결과로서 주어진다. 거룩과 관련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성직자의 자격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함석헌도 매우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데, 그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선지자의 사명은 생존하사 변함없는 우주적 권위로써 명한 것이므로 변하는 길이 없었다... 목사 중에는 영혼보다 ‘떡’을 위해 더 염려하는 이가 자못 많다. 그가 직업적 목사일지언정 참 신도의 영혼을 인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목사는 아니었다. 선지자에도 허다한 가짜 선지자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명하신 것이 아니요 자기면허 혹은 학교의 면허였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을 그들의 입에 넣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319-320쪽)함석헌은 모름지기 성직자란 인간에 의해서 주어지는 면허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초월자에 의해서 부여되는 자격이다.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 같지만 거룩한 삶, 종교적 삶의 근본적 태도와 본래성이 무너진 데에는 이 상식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성직이 포화상태가 된다거나, 역으로 수도자가 줄어든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생각이 개입된 판단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리라. 또 생각! 생각이다! 성직자의 삶이나 수도자의 삶이 신의 부르심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불편하고 어려워도 가야 할 길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순수 자유 그 자체로 접어들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에 의한 성직 면허는 신의 부르심이 아닌 제도와 편리와 행정과 물질이라는 묘한 역학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에 거룩한 것이 못된다. 오히려 불결, 부정, 오염일 뿐이다. 성직자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거룩함, 즉 온전함과 다른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순수한 그것’, ‘자유 그 자체’를 선택할 때 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바로 그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도록 하는 외부적 요인들이 많이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넘어서 그 자체 순수한 그것을 선택할 때 성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다른 모든 것들을 놓아두고 오직 초월자만을 바라보고, 초월자만을 알기를 원하는 일념을 갖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올곧은 성직자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무릇 거룩과 멀어지는 삶을 산다는 것은 성직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떤 사람이라도 초월자 앞에 ‘있는 그대로’가 아닌, ‘순수 그것 자체’가 아닌 삶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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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05
  • 원자력의 기호(sign)와 자기 테크놀로지
    “삶은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수용자가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상식적인 견해와 모자라는 지혜, 뒤떨어진 정보의 뒤범벅뿐이다... 수사학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언어는 비유적(figurative)이다. 언어는 고유의 의미, 본질에 이르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이자 청자인 우리들은 이를 자꾸만 잊어버린다.” ▲ 원자력과 기호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에 의하면 인간의 언어는 랑그(langue)와 빠롤(parole)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는 언어의 규칙이요, 후자는 언어의 행위이다. 개인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사회적 성격의 랑그는 다시 기표(시니피앙, signifiant)와 기의(시니피에, signifie)로 나눈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text)란 콘텍스트(context)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는 점이다. 기표와 기의는 콘텍스트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장미꽃이라는 기표는 사랑, 화해, 축하, 감사 등 그 기의가 무한히 확장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기호는 발신자보다 수신자의 콘텍스트 속에서 신뢰를 얻는다. “소쉬르의 기호학이 산출한 결과는... 우선 기호는 실체가 아니라 두 가지 차이군의 상관관계라는 것이다(곳치히). 그것은 인식의 표시기이며 표현이자 기표라는 것이다. 그것은 문화에 의해서 그 문화의 내용들의 항목들(기의, 그 내용의 형식)과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그 결과 약호의 이론과 기호생산 이론이 나온다. 즉 의미화작용 체계의 이론, 이데올로기적 기능의 이론, 심지어 대중조작 장치의 이론까지 등장하게 된다(에코). 여기에 빠진 것은 언어 그 자체가 순수한 기호가 아니라는 점, 즉 언어 역시 하나의 사물이라는 점이다. 언어는 음성, 즉 물질성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은 부분적으로 대상(object)이며 부분적으로는 기호이다.”(Marshall Blonsky, “개설: 기호학의 고민, 기호학의 재평가”,  Marshall Blonsky 엮음, 곽동훈 옮김, 베일 벗기기, 시각과 언어, 1995, 24)마찬가지로 ‘원자력’이라는 언어적 개념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공포와 두려움, 고통과 죽음이라는 기의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원자력이 아무리 우리의 과학기술과 문명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하나 단순히 기표가 주는 이기(利器)만 좇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정부는 끊임없는 원자력에 대한 긍정적 기호를 발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기호가 품고 있는 기의의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기호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다. 하지만 그 기호 자체에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고 의사소통이 결여되어 있다면 미래를 향한 스펙터클(spectacle)한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한들 그 의미와 가치는 소용이 없을 것이다. 특히 원자력이란 핵이라는 기표적 성격을 더불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언어가 가진 폭력성과 의존성(편리성)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원자력이라는 기표는 마치 전 세계가 공유하고 있는 자연적 메시지(natural message)인 양 자신의 기의를 숨긴다. 거기에는 정부가 시각적 양식이나 상징인 엠블럼(emblem)을 통해 국민을 기만한다. 기호가 갖고 있는 이중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경고의 엠블럼도 가능하지만, 동시에 안심의 엠블럼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로써 수신자는 자신이 받은 기호를 해독하는 매우 비판적인 해석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정부는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스펙터클한 메시지를 수신자에게 내보낸다. 어쩌면 원자력 발전소 자체가 국민들에게 일정한 신화와 환상을 심어주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이 아니면 천국이 지연될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장기간의 에너지 지속성, 영원한 진보(발전)라는 미명 아래 기호 발신의 에토스에는 관심조차도 없다. 게다가 국민들은 원자력이 갖는 마나(Mana)에 국민들이 쉽게 빠져들고 그 힘에 굴복하고 만다. “세계란 우리를 속일 수 있는 기호라고 보는 기호학은 우리에게 모든 사실에, 그리고 가장 세속적인 사실에도 천착할 필요성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슨 의미냐?”라고 물어야 한다. 마치 그리스인들이 모든 나무와 냇물에도 의미가 있다고 믿었듯이 우리의 짐 꾸러미, 광고, 정치 슬로건, 자연을 대체해버린 우리의 일상용품들에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드 세르토).”(Marshall Blonsky, 위의 책, 41쪽)이처럼 기호는 국민을 기만하고 사유하지 못하도록 하며 현상을 속인다. 원자력이라고 하는 기호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문자, 개념, 표정, 그림, 매체 등에서 발생하는 편리성 이면의 위험성과 무책임성, 심지어 죽음이라는 의미를 간파할 수 있어야만 원전에 대한 신화를 접을 수 있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기호학은 오늘날... 무언가를 표명하지 않는 실체, 우리를 조정하지 않는 약호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폭로한다.”(Marshall Blonsky, 위의 책, 77쪽)는 사실이다. 방사능, 원전 폐기물, 핵전쟁 등 온갖 최악의 가능성들을 배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전의 기호는 수신자인 우리를 조작하여 원전의 과잉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호가 가진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기호학은 모든 기호들이 겉보기에 가리키는 것들(단어들, 이지미들, 기호들)보다는 개인들이나 그들의 지도자들이 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즉 겉보기와 내용이 다른 것, 가려져 있는 비밀 등을 간파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파워엘리트는 읽고 있다. 상업, 오락, 저널리즘, 정부 등에 포진하고 있는 강력한 거물들에게는 강한 자들을 위한 보고서와 초안들, 토론, 결정-언어, 랑가주(langage)-이 있다. 그 언어는 조용한 방에서 발화되고, 물론 치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치장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곳에서 한참 멀어져서 온갖 화상들(그림, 텔레비전, 아름다운 필체, 잡지, 예술 등)로 승화된 것이다.”(Marshall Blonsky, 위의 책, 53, 75쪽)자크 라캉(J. Lacan)의 논리를 빌린다면 기호란 상상계(the Imaginary)에 불과하다. 의미(작용)가 아닌 가벼운 최면 상태에 홀린 마비상태에 있는 것처럼 현실과 미래를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많은 전력을 소모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지향하겠다면 그 실재계(the Real)는 무리와 무지 앞에 황망하게 무너질 것이다. 그러기 전에 지금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를 위한 아고라(agora)가 왜 필요한가?’와 ‘원전 가동 중단, 원전 비리, 전력 위기 등의 그 담론이 의미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를 곱씹어 봐야 할 일이다. 더불어 함석헌의 기술문명에 대한 우려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광풍이 한 번 노하기만 하면 기술 어디로 갔는지 지식 어디로 갔는지 경험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조차 없고 모양은 일변하여 버린다. 그리하여 맘대로 이용한다던 바람은 인제는 맞출 수도 없고 도리어 그 폭위(暴威)하에 전연 굴복하여 그 하는 대로 맡겨두고 밀려갈 수밖에 없어진다. 소위 문명의 힘을 가지고 자연을 정복한다는 것은 대개 이러한 것이다... 지식을 믿던 인간의 지식의 밑바닥이 드러나고 기술을 믿던 인간의 기술이 끝이 나는 날은 저에게 죽음을 의미하는 날이다. 해와 별이 보이지 않는 것은 해와 별이 없어져서가 아니다. 눈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믿던 것을 다 잃어버리고 절망의 밑바닥에 떨어질 때 그전에 모든 사물 모든 이치를 그렇게 똑똑히 보노라고 자랑하던 교만한 눈이 그 안광을 잃어버린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48-49쪽)  이에 미셸 푸코(M. Foucault)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의식을 이렇게 말한다.“자신만의 수단으로 자신의 몸, 자신의 영혼, 자신의 생각, 자신의 행동 등에 영향을 끼치는 기술, 그리하여 자신을 변형시키고 자신을 수정하여 어떤 완벽, 행복, 순수, 초자연적 힘의 상태를 얻는 기술이 있는 것... 이 자아 테크놀로지는 진실과 관련된 어떤 사항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즉 무엇이 진실인지를 배우는 것, 진실을 발견하는 것, 진실을 깨우치는 것, 진실을 말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M. Foucault, “섹슈얼리티와 고독”, Marshall Blonsky 엮음, 위의 책, 168쪽) 따라서 그가 주장한 ‘자아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원자력에너지의 조작인식, 핵에 대한 의존인식에서 탈피하여 스스로 삶을 조망하고 탈핵에 근거한 생태적 삶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정부와 세계, 그리고 원전자본의 기호적 조작은 하나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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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6-13
  • 죽어라! 그리하면 내가 살고 공동체가 산다.
    “죽어라! 그래야 예수가 산다.”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고 다시금 별세의 영성을 붙잡아야만 한다.   윤성민 박사(한신신학대학원 외래교수)1)   ▲ 한신교회 홈페이지 화면캡처와 편집 I. 들어가는 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다. 바울의 구원론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sein in Christus)’는 몹시도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그 동안 신학적인 토론이 적었다.2) 2002년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인 프리데리케 뉘쎌(Friederike Nüssel) 교수가 『Ich lebe, doch nun nicht ich, sondern Christus lebt in mir (Gal 2,20a)』 라는 제목으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성서구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를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정리해 놓은 바 있다.   우리는 우선 이 구절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해석되어 왔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여기에 관해서 존재론적인 해석들이 많았으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강조되었고, 루터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적 의미로까지 확장시켰다. 또한 고 이중표 목사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통해서 ‘별세의 영성’을 말하였다. 독특한 자기부정을 기독교 역사에서 말한 사람은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이다. 그는 ‘죽어라! 그래야 예수가 산다’고 말하였다. 이 파라독스(paradox)와 같은 표현이 그 당시의 교회들을 살렸다. 이제부터 필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어떤 해석들이 있어왔는지 논의하려고 한다.   II. 바울이 말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우리는 행위가 아닌 오직 은혜로 의로움을 얻는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통해서 사도로서 자기 고백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갈 2:20, 4:19, 롬 8:10 그리고 고후 13:5을 통해서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믿음 안에서의 존재’라 일컬었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기독교인’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는 존재보다 “삶”이 강조된다는 점이다.3)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를 원했다. 갈라디아인들을 믿음 안에서 더 강하게 성장시키기 위해서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더 자세히 설명하게 된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19절을 보면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해서 죽었다고 고백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함이었다. 신앙인으로서 바울은 새로운 삶으로 자유롭게 되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으면 율법과 죄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존재’, 그 존재는 삶을 강조하는 신학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거기에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의미가 비로소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서 스스로 희생하셨다!’ 이것에 첫 번째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 사랑 위에 기독교의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원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옛 사람의 삶, 율법의 행위로 스스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삶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의롭다 함이 율법으로 된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게 죽으신 것이 된다(갈2:21b).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라고 고백한 것은, 이전처럼 율법 아래의 옛 사람으로 살지 않겠다는 고백이다.4) 기독교의 구원론은 바울의 이 고백에 그 기초를 놓는다.   III. 루터가 본 갈라디아서 2장 20절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대한 루터의 해석은 1535년에 출판되었다. 1531년, 루터는 갈라디아서에 대해서 강의했는데 그 강의의 내용이 1535년에 출판된 것이다. 루터는 예수 안에서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를 위해서 사는 존재를 고백한다. 바울이 고백한 ‘나’는 ‘더 이상의 내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나는 내 자신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바울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루터의 해석은 이렇다. “바울은 예수 안에서, 예수의 존재였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섞이었고 그리고 바울 안에 존재하였다. 생명! 내가 새로운 삶을 살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나는 하나이다.” 루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용접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과 인간은 서로 맞대고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접합된 존재로 이해하였다.5) 한국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표현대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써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구분되셨는데 예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자일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참된 인간적인 존재로 계신다고 설명하였다. 구원론은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를 구분하고 차이점을 말한다. 그리고 기독론의 도그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과 인격의 하나됨, 인간과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예수와 내가 하나 된다는 것은 구원론 안에서 그리고 기독론적으로 해석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존재가 된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존재가 된 것이다.6) 많은 신학자들이 이 부분에 관해서 여러 논증을 하였다.   그런데 루터의 해석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신학으로 발전된다. 이것의 핵심이 바로 성만찬의 교리이다. 루터는 기독교인들이 믿음으로 성만찬에 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몸이 우리에게 허락된다고 설명하였다. 결국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관한 루터의 해석은 개인을 넘어선 공동체를 위한 해석이었고 그 정점은 성만찬에 있었다.7) 천주교의 교회론은, 죄 사함 받은 신자는 그리스도와 공동체를 통해서 그 존재가 새롭게 됨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 한국 기독교는 천주교 사제들의 이 정신을 배워야 한다. 우리 한국교회는 하나이다! 기독교인들이 기억해야 할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에게로 오셨다는 점이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나’라는 존재를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체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존재에 대해 그리스도의 화해적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루터는 공동체 안에서의 기독교인에 강조점을 두었다. 기독교 공동체 구조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내가 산다” 그리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 하지만 “내가 아니다!” 나는 새로운 나로서 증거 될 수 있다.8) 그리고 나는 공동체와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IV. 고 이중표 목사가 체험한 별세(別世)의 은혜   필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개인과 공동체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싶다. 우선, 고 이중표 목사가 언급한 별세의 고백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성화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알아보겠다. 앞서 말했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중요하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 위에서 천국을 체험하는 삶이 중요하다. 고 이중표 목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죽은 후의 세계는 약속일뿐이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힘든 일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천국을 체험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천국은 죽은 후에 가는 영혼의 천국이 아닙니다. 지금 현세에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후의 천국은 약속이요, 현세에서 천국을 앞당겨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9)   한국에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피안적인 저 세상이 아닌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 별세신학에서도 그리스도의 안에서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 ‘별세(別世)’를 말할 때에 別은 다를 ‘별’이고 世는 세상 ‘세’ 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십자가의 능력으로 나의 옛 자아는 죽고, 부활의 능력으로 새로운 자아로 살아갈 때에 기독교인은 이 땅 위에서 삶과 사역의 새로운 의미와 뜻을 발견하게 된다. 고 이중표 목사는 목사가 먼저 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목사가 먼저 죽을 때에 그 목회자를 보고 교인들이 그 뒤를 따라서 자신 안에서 죽어야 할 모습과 옛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고 이중표 목사도 자신이 먼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도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문제가 많은 교인이 있어서 그를 새사람으로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나도 그를 고칠 능력이 없어 별세(죽었다)하였다. 고칠 능력은 없었지만 죽을 능력은 있었노라. 그 사람을 고치는 것보다 네가 죽는 것이 쉬우리라” 그때부터 고 이중표 목사는 본인이 먼저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10) 문제가 있는 교인을 놓고 기도하던 이중표 목사에게 주님은 응답으로 교인을 고쳐놓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먼저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경험에 따라 그는, 목사는 교인을 고치려 하지 말고 목사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11)   목회자의 최대의 과제는 먼저 별세의 증인이 되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별세를 통하여 구원을 성취하듯 목회자는 별세를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별세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을 별세시키셨듯 목회자가 먼저 별세되어야 교인들도 별세하게 됩니다.12)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의 눈 안에 있는 티는 보아도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는 행동보다 말로써 상처를 받는 곳이다. 상처를 받았을 때에 기독교인들은 먼저 자신이 죽어야 할 모습들을 찾아야 한다. 분명 우리 안에는 사람이기에 죽어야 할 모습이 있다. 그 모습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아 힘이 들고, 그 모습 때문에 내 자신이 힘들어진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의 상처는 담임목사에게 향할 때가 많다. 목사는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인내하고 참는 경우가 많지만 목사가 받는 상처와 스트레스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예수전도단에서는 이렇게 교육시킨다. 상처를 주는 그 사람의 모습이 내 안에 있기에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내 안에서 찾고 깨뜨리기 위해서 이 시험을 허락하신 것이라고. 사역자로 살아가기에는 내 안에 깨져야 할 모습, 죽어야 할 모습들이 있다. 영성이 깊다는 말은 자신의 죄에 민감하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기에 자신의 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 힘으로 옛 자아가 죽을 수 있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나의 옛 자아는 죽고 부활의 능력으로 새로운 자아가 거듭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별세의 은혜이다. 기쁨으로 우리는 날마다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살 때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 고 이중표 목사 또한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오늘날 교회는 많으나 이 세상이 전혀 변화되지 않는 것은 목사가 별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별세는 목사가 능력을 받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한때 권능과 능력으로 이 세상을 휩쓸던 종들이 타락하는 것은, 권능은 받았으나 별세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심판 날에 별세의 사람을 찾으실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였을지라도 별세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예수께서 외면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별세의 주님이시요, 별세의 영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 주시기 때문입니다.13)   목사만 죽어서도 안 된다. 장로도 죽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날마다 십자가에서 옛 자아가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교회에서 섬기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사람을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 지체들을 세우는 마음이 아닌 지체를 깎아 내리고자 하는 마음, 주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도록 내어드리는 마음이 아닌 자신이 군림하고자 하는 마음들을 옛 자아의 속성들이다. 이런 것들은 죽어야 한다. 죽어야지만 내가 살고 교회가 사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깊이 살펴보면서 고개를 드는 옛 자아의 모습을 찾고, 그런 모습이 죽게 해 달라고 날마다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별세의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필자는 브루더호프 공동체(Bruderhof Community, place of brothers란 의미의 독일어) 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 가지를 약속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없는 데에서 그 사람에 대한 허물(한국말로 하면 뒷담화)을 말하지 않는다는 약속이다. 그 사람이 범죄를 하면 직접 그 사람한테 가서 말을 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가서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권면을 한다. 필자는 한국교회가 이러한 모습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행동보다는 말로써 상처를 많이 받는다. 기독교인들은 남의 모습을 보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모습 중에서 죽어야 할 모습을 먼저 찾고 회개해야 한다. 기독교인은 날마다 성화된 성숙한 삶을 사모하면서 자신 안에서 죽고 깨어져야 할 부분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교인들이 많은 교회는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 한신교회 홈페이지 화면캡처와 편집 V.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가 외친 “죽어라! 그래야 예수가 산다!”     필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해석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마틴 루터는 이 말씀을 공동체적인 의미까지 확장시켰다. 기독교 역사에서 ‘별세’와 비슷한 사상을 말한 목사가 있다. 그가 바로 아들 블룸하르트인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Christoph Friedrich Blumhardt)이다. 그의 삶은 4 시기로 나눈다. 처음 그는 아버지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Johann Christoph Blumhardt)처럼 “예수는 승리자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는 점차 자신에게 찾아 온 사람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이기적인 동기를 발견하게 된다.14) 부흥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고 기도가 응답되는 놀라운 경험들을 체험하는데, 문제는 자신의 행복과 야망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 주님을 우리 사람의 종으로 이용하려는 이기심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대의를 위해서 우리가 주님의 종노릇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한 성공적인 사역 뒤에 숨어있는 영웅주의, 즉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모습보다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려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15) 결국 마지막에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초점을 맞춘다. 설교자가 빠질 수 있는 유혹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영웅주의이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모습을 보고 ‘기독교적 에고이즘’을 발견하였다. “네 자신과 너의 모든 곤궁함을 보지 말라. 차라리 하나님 나라의 곤궁함을 보아라.”16) 인간의 행복, 야망 그리고 계획을 위해서 주님을 우리의 종으로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대의(大義)를 위해서 우리가 주님의 종노릇하라.17) 그는 이 기독교적 에고이즘이야말로 교회의 진정한 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육(肉)’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이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영이 죽는다고 말하였다.   모든 기독교적인 육(肉)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이 기독교적인 육은 늦기 전에 죽이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영을 죽여 버린다…지금 나는 주님이 우리들 곁에서 육으로 발생하는 것을 죽이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이고 계신 것을 기뻐한다.18)   한국교회에서 이런 모습이 죽도록 우리는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크리스토프는 이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열성과 헌신을 교단이나 종파에 돌리는 것을 교회성(Kirchlichkeit)으로 보았다. 그는 이 모습도 죽어야만 그리스도의 영이 살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교회공동체의 육(Christiliche Fleichsgebilden)을 지적하였다. 인간의 육을 제도화하려는 시도를 말한다.19) 한국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찾는다면 ‘세습’을 꼽을 수 있다. 이것이 죽지 않으면 한국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은 활동하지 않으실 것이다.   VI. 결론: 우리는 다시 죽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사도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기독교인들은 죄와 싸우기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본 회퍼가 말한 값 싼 은혜가 넘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은혜가 은혜 되게 하려면 내 안에 있는 옛 자아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나의 힘으로는 내 자신이 변화될 수 없다. 오직 부활의 능력으로 변화 받을 수 있다. 이 별세의 영성을 통해서 우리는 성화된 삶을 살 수 있다. 교회 공동체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직분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서 죽어야 할 모습을 찾는 일이다. 이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성서는 개인과 공동체를 하나로 본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다.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의 헌신으로 세운 교회가 너무나도 비대해져서 블룸하르트가 말하는 기독교적인 육, 교회공동체의 육 그리고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필자는 설교가들이 강대상 위에서 이러한 것들을 교묘히 이용하는 모습을 종종 보아왔다. 이런 모습들이 죽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살 수 없다. 이런 모습이 죽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다시 살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금 별세의 영성을 붙잡아야 한다.   필자는 확신한다. 교회 안에서 내 자신이 먼저 죽으면 우리 공동체는 살 것이다. 교회를 위한다면서 남을 정죄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내 안에 있는 법이다. 날마다 내 안에 있는 기독교적인 이기심을 찾고 회개해야 한다. 설교자는 이것을 교묘하게 이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모습이 죽지 않고서는 예수의 대의(大義)를 이룰 수 없다. 블룸하르트가 말한 기독교적인 육(肉)이 한국교회 안에 너무나도 많이 있다. 요즘 터져 나오는 사건들을 보면 인간적인 욕심, 욕망 그리고 야망이 그 모티브가 될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기독교적인 육(肉) 때문에 한국교회가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외치고 싶다.   “죽어라! 그래야 예수가 산다.”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고 다시금 별세의 영성을 붙잡아야만 한다. 필자는 필자의 옛 자아와 이기심 그리고 육(肉)된 모든 모습들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런 모습들이 죽기를 원한다. 그리고 부활의 능력으로 새로운 자아가 되기를 사모한다. 그리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기독교적인 육(肉)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한국교회로 거듭나기를 기도한다. 1) 독일 Heidelberg대학교 Dr.Teol. 예수영성대학 담당교수.  2) Friederike Nüssel, >>Ich lebe, doch nun nicht ich, sondern Christus lebt in mir<< (Gal 2,20a). (Zeitschrift für Theologie und Kirche, Bd. 99, 2002), 480. 3) Ibid. 4) Ibid., 483-487. 5) Ibid., 487-487. 6) Ibid., 497-499. 7) Ibid., 493-497. 8) Ibid., 501. 9) 이중표, 별세의 목회 (서울: 쿰란출판사, 1995), 13.  10) Ibid., 22. 11) Ibid., 23. 12) Ibid., 21. 13) Ibid., 21. 14) 손규태 편저, 혁명적 신앙인들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19-20. 15) 이신건,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의 생애와 사상,” 선교와 신학 제19집(1994), 294. 16) 이노우에 요시오 저, 원제 미상, 전호윤 역, 블룸하르트 부자 (서울: 설우사, 1987), 188-191. 17) 이신건, op. cit., 295. 18) Ibid., 294.  19) 손규태, op. cit., 21.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3-06-11
  • 귀화시험에 대한 개선의 필요
    전문가들의 이론적,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귀화시험에 대한 개선안 마련 시급 ▲ 귀화시험의 절차와 출제 문제, 면접관의 자질에 대해 숙고하지 않고 시행되는 시험은 다양한 국적 출신의 외국 응시자들을 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교과서를 참고해 시험 문제를 출제, 관리하는 법무부 국적난민과 직원들 대신하여 전문가들의 이론적,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귀화시험에 대한 개선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할 것이다.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 보세요.”“‘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외워 말해 보세요.”이것은 귀화시험에 단골로 등장하는 기출문제이다.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들이다. 그렇다면 이것에 올바른 답을 할 수 있는 한국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애국가 가사의 철자를 틀리지 않고 쓸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많지 않을 것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문’ 역시 다문화 시대에 맞게 개정했기 때문에 그 내용을 바르게 숙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문제가 귀화시험에 출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매년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귀화를 신청하는 외국인은 무려 5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들은 귀화 시험에 응시하기에 앞서 거주 기간이나 경제능력, 신원 증명과 같은 기본 조건이 우선시 되어야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필기시험은 총 20문제로 한국어 지식, 사회, 역사에 관련된 내용이 출제되고, 100점 만점에 60점 이상을 받아야 면접시험의 자격이 부여된다. 하지만 시험에 응시했던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낸다. 시험 문제가 터무니없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를 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귀화시험을 행하는 목적이 무엇이기에 이런 유형의 문제가 출제되는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시험 문제의 내용을 살펴보면 시험이 한국어 능력과 사회적응 능력 등을 측정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새로운 나라에 거주하며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한국어 능력과 일반 상식은 그들의 사회 적응력을 확인하는 데 필요할 수 있다. 또한 귀화시험은 국적을 취득하고자 하는 외국인들을 국적 취득 대상자로 수용할 것인가 또는 배제할 것인가를 구별할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귀화시험을 주관하는 법무부는 시험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으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한국어 능력수준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만약 시험의 목적이 전자와 같이 언어시험의 순수한 기능을 충실히 따르고자 하는 것이라면 출제되는 문제가 그들의 언어능력과 사회적응능력을 판단하기에 적합한지 충분히 검토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보다는 적합한 외국인 선별이 시험의 일차적인 목적이라면 굳이 한국어로 된 시험을 통해 그들의 자격을 측정할 필요성은 적어진다. 시험 현장에 통역자를 배치해 그들의 모국어를 통해서도 그들의 소양이나 신원에 대한 배경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에서 현재 시행되고 있는 귀화시험은 어떤 목적도 명시적으로 이행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시험의 문제 유형이 모두 한국어로 출제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언어능력과 일반 상식을 타당하게 측정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귀화시험 응시자들의 대부분은 중국 동포들과 아시아 결혼이주여성들이다. 시험의 목적이 한국 시민이 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가진 외국인을 선별하는 것이라면 시험은 난이도가 높고, 부적합한 문제를 통해 굳이 응시자들을 떨어뜨릴 목적으로 이행될 이유가 없다. 선별을 목적으로 사용되는 시험이 절차가 까다롭고, 문제도 예측이 어렵고 황당하다면 오히려 우리 사회에 공헌할 만한 외국인까지 선별 과정에서 배제시킬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귀화시험의 절차와 출제 문제, 면접관의 자질에 대해 숙고하지 않고 시행되는 시험은 다양한 국적 출신의 외국 응시자들을 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교과서를 참고해 시험 문제를 출제, 관리하는 법무부 국적난민과 직원들 대신하여 전문가들의 이론적,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귀화시험에 대한 개선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시험을 통해 우리가 의도하는 국적 취득 대상자를 적절히 선별할 수 없게 된다. 시험 응시자들은 반복적으로 시험 준비에 시달리며 정신적, 육체적 노고를 감수해야 하는 희생자가 되고 말 것이다.  박성원 삼성인력개발원과 국, 내외 대학의 한국어 교육기관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해 왔다. 유럽인과 결혼해 다문화 가정에서 다문화, 다언어를 실제 공간에서 체험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다문화-다중언어를 위한 언어문화운동을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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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정보
    2013-05-24
  • 혁명적 인간, 혁명하는 인간
    “이제 혁명은 개인을 넘어서 세계 전체를 살리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무엇보다도 먼저 개인을다시-만드는 일(재-형성, re-form)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 모름지기 혁명은 씨알로부터 일어나야 한다. 그것도 하늘로부터 명(命)을 받아서, 하늘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은 결단코 혁명이 아니다. 혁명(革命). 혁명(reformation)은 그릇[형식]을 바꿔서 통째로 내용물[질료]까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함석헌은 “달라지되 어느 한 부분만 아니라 전체를 왼통 뜯어 고치는 일”, “새 출발을 하는 일”(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25쪽)이라고 말한다. 혁명은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고쳐야 한다는 말인데, 과거의 혁명은 완전한 혁명이 되지 못하고 늘 불완전한 혁명으로 그치고 말았다. 특히 한국현대사의 비극인 5․16을 혁명이라고 하나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군사 쿠데타였다. 씨알에 의해서 밑에서부터 일어난 혁명이 아니라, 무력을 앞세운 힘의 폭력이었던 것이다. 그 사건으로 무엇이 달라졌단 말인가? 그것을 과연 새 출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5.16군사정변이 ‘새로움’, ‘새’라는 수식어를 달 수 없는 것은 그로 인해 새워진 정권이 곧 군사정권, 군사독재라는 결과물을 낳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한 군인이 국가 수장의 탈을 쓰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모름지기 혁명은 씨알로부터 일어나야 한다. 그것도 하늘로부터 명(命)을 받아서, 하늘로부터 말씀을 받아서(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25쪽)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은 결단코 혁명이 아니다. 그것이 5․16 군사정변을 혁명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이다. 씨알이 주인이 되는 시기, 씨알의 의식이 깨이는 시기, 씨알의 정신이 자주성을 갖는 시기, 씨알이 생각을 펼치는 시기가 퇴보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4․19혁명의 불완전성 때문에 빚어진 현상도 없지 않을 것이긴 하다. 5․16군사정변의 폐해가 인간의 정신이 깨이고 자신이 역사의 주인이 됨으로써 씨알이 역사철학을 형성하는 시기를 늦추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26-27쪽). 그래서 함석헌은 비판한다. “민중이 일어서야겠는데, 일어서지 않기 때문에 군인이 일어선 것이다... 일어설 것은 군인이 아니요, 민중이다... 사람이 아니란다고 감정을 내는 학생이나 군인은 참 사람은 못 된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61, 66쪽)반면에 5․18민주화운동은 어떤가? 그 사건은 하늘로부터, 씨알로부터 이루어진 혁명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함석헌이 말했듯이, “생명의 길은 언제나 모험의 길”(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27쪽)이다. 혁명에는 바로 생명의 길로 접어드는 필연적인 과정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픔과 고통,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참극이 일어난 것이라면 섣부른 판단일까.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고 정치권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의 군사독재, 언론통제, 민주정치 인사의 투옥, 계엄령, 휴교령 등에 맞선 그 당시 저항운동은 역사의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비폭력으로 시작된 시위였다가 무장시민군이 형성되면서 엄청난 희생이 발생한 사건이 되었지만, 그것은 엄연한 ‘시민혁명’-영국의 청교도혁명(1640~60), 미국의 독립혁명(1775~83), 프랑스혁명(1789~94), 독일의 3월 혁명(1848), 러시아의 2월 혁명(1917) 등과는 다르다 하더라도-이었던 셈이다. “민중의 노함은 하나님의 불”(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56쪽)이라는 말처럼, 시민이 주축이 된 혁명, 하늘의 뜻, 하늘의 소리를 씨알 전체에게 주었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이라는 시민혁명은 국가, 세계, 생명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를 택한 사건이다. “혁명의 목적은 공(公)을 살리기 위해 사(私)를 죽이는 데 있습니다.” 프랑스의 혁명정신 속에 살았고 민주주의 투사였던 빅토르 위고는 폭동과 혁명을 구별해 말하면서 “폭동은 물질적 동기로 일어나는 것이고 혁명은 정신적 동기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신이 무엇입니까? 공(公)을 위하는 것이 정신입니다. 그런데 공이 무엇입니까? 천하위공(天下爲公)입니다. 세계가 공입니다... 살아도 인류 전체가 같이 살고 죽어도 인류 전체가 같이 죽게 된 것이 오늘의 세계의 현실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30쪽) 이제 혁명은 개인을 넘어서 세계 전체를 살리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무엇보다도 먼저 개인을 다시-만드는 일(재-형성, re-form)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야 개인에게서 시작하는 혁명은 한 개인을 넘어서 사회, 국가, 세계로 뻗어 나갈 수가 있다. 개인에게 머무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다. 하늘 뜻을 새롭게 펼치는 것이 아니라 한갓 개오(改悟)에서 멈추고 만다. 한 현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로부터 시작하라고 했지 자기에게서 그치라고 하지는 않았다. 자기를 출발점으로 삼되 목표삼지는 말라는 말이다. 자기를 파악하되 자기에 사로잡히지는 말라는 말이다.”(Martin Buber, 장익 옮김, 하씨딤의 가르침에 따른 인간의 길, 분도출판사, 1978, 40쪽) 물론 개인을 새롭게 만들지 못하는 혁명은 공동체를 새롭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 모두가 처해진 상황과 위치를 전혀 알지 못한다.“랍비 하녹이 한 이야기다. 옛날에 아주 멍텅구리가 하나 살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옷을 찾아 입기가 너무 어려워, 밤이 되면 이튿날 깨면서 또 고생할 생각이 끔찍해서 잠자리에 들기를 꺼릴 정도였다. 그러다가 하루저녁 큰 노력을 하여 연필과 종이를 갖다 놓고 옷을 한 가지씩 벗는 대로 어디다 놓았는지를 정확히 적어 두었다. 그 이튿날 아침 매우 만족한 그는 종이 조각을 들고 “모자”하고 읽으면 모자가 있어서 머리에 쓸 수 있었고, “바지”하면 바지도 있어서 입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옷을 다 입도록 계속했다. “자, 그건 다 좋았는데 나 자신은 어디 있지”하고 크게 당황하면서 물었다. “내가 도대체 세상 어디에 있는 거지”하면서 두리번거렸으나 자기는 찾지를 못했다. “우리가 바로 그 모양이에요”하고 랍비는 말했다.”(Martin Buber, 장익 옮김, 하씨딤의 가르침에 따른 인간의 길, 분도출판사, 1978, 37-38쪽)그 어느 때보다 지금, 자기를 부정하지 않는 인간, 자기 존재도 모르는 인간을 위한 “인간 개조”, 즉 자기 초월을 하면서 인간 자신을 뜯어 고치는 혁명이 전체로서 일어나야 한다. 그 “혁명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대중운동이 아니면 안 된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65-66, 74쪽)“이제 혁명은 전체의 협동으로서만 될 수 있습니다. 가령 아주 알기 쉬운 실례를 하나 든다면 핵무기 문제입니다... 개인의 참 발달을 막고 병들게 하는 것은 개인주의와 그것의 변태인 집단주의입니다. 개인의 정말 발달은 전체가 개체 안에 있고 개체가 전체 안에 있는 사회에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국가주의를 배격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지금 국가가 전체를 가장하고 속이는 그 우상숭배주의 때문에 인간의 물질적․정신적․영적 에너지는 얼마나 쓸데  없이 소모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단순히 세계의 발달만 아니라... 새 인류가 나타날 가능성까지도 내다보고 있는 이 진화의 시점인데, 그러한 돌변화는 개체의 자유가 절대로 보장이 되는 전체 안에서만, 말을 바꾸어 한다면 생각을 전체로서 하는 사회에서만 될 수 있습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30-31쪽)세계는 지금 생명의 위기, 환경의 위기, 문명의 위기, 경제의 위기, 정치의 위기, 교육의 위기 등 인간 전체, 세계 전체의 위기에 직면에 있다. 그야말로 위기의 시대다. 이러한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개조, 인간 자체의 혁명인 것이다. 국가의 혁명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세계를 전체로 보고 전체로서의 혁명, 전체로서의 인간 혁명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국가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소진되고 있는 여러 현상들 이면을 짚어내는 ‘생각의 혁명’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근간) 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3-05-23
  • 언어로 맺어진 모자(母子)간의 유대
    언어는 단지 밥벌이를 위한 수단만이 아니다자신의 정체성과 소속한 공동체 내에서의 유대감을 확인시켜 주는 문화적 자본이며,삶의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고 사고하는 데에 있어서 자신의 실존처럼이나 중요한 것이다 ▲ 부모의 모국어를 자녀들에게 계승하는 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자산이며 선물이다. 부모가 전해 준 언어를 통해 부모와 자식 간의 끈끈한 유대를 유지할 수 있고, 문화의 자산인 언어를 후세대에게도 계속 전달할 수 있다.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야. 나는 생각했어. 여기 아무 것도 있네.”“조금 전에 먹은 떡볶이 매워서 혼났네.”“엄마, 누구한테 혼났어?” 내 말에 이렇게 우스꽝스럽고 엉터리 같은 대답을 해 주는 아이는 7살을 두 달 앞둔 나의 아들이다. 내 아이는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부모를 둔 탓에 가정에서 한국어와 불어를, 학교에서는 불어,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나의 아들은 하루에 세 언어의 세상을 넘나들며 사는 것이다. 남들은 말한다. 언어교육을 위한 사교육비는 안 드니 얼마나 좋겠냐고. 하지만 내 아이의 다중언어 습득 과정은 험난하고 먼 여정과도 같다.  다문화가정의 모든 부모들이 그러하듯 다언어 사용 환경을 아이에게 제공하는 것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큰 선물임과 동시에 큰 혼란과 두려움이기도 하다. 내 머릿속엔 세 언어를 모두 유창하게 하는 아이의 모습도 있고, 반대로 어떤 언어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불행해 하는 아이의 모습도 있다. 이 아이는 본인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왜 세 언어를 해야 하는 부담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기나 할까. 언어교육을 전공하는 나에게 아들의 다중언어 습득은 늘 주된 관심 대상이다. 아이는 태아 때부터 아빠의 불어와 나의 한국어에 노출돼 있었다. 우리는 절대 두 언어를 섞어서 아이에게 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이를 갖기로 계획함과 동시에 우리가 정한 가정의 언어정책이기도 했다. 이런 언어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는 이런 상황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내가 장난삼아 어쩌다 불어나 영어로 말을 걸어도 아이는 언제나 한국어로 대답을 해 주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몇 달 전부터 아이의 한국어에 하나 둘 불어나 영어 단어가 섞이기 시작했다. 난 그럴 때마다 한국어로 다시 말해 보라고 하거나, 그것도 어려워하면 내가 만든 한국어 문장을 따라 하게 한다. 어쩌면 난 나의 모국어인 한국어가 아니면 모자 관계의 끈을 영영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에게 아이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엄마는 아빠하고 불어로만 말하잖아. 불어 할 줄 알면서 왜 나한테는 한국말로 하라고 해?” 순간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아이의 수준에 맞게 서둘러 둘러 댄 나의 변명 아닌 설명은 “너는 한국인이니까 한국말을 할 줄 알아야지”였다. 사실 한국어가 여전히 능숙하지 못한 아이의 아빠와 나의 대화에는 한국어보다 불어가 훨씬 더 자주 개입된다. 아이 앞에서는 되도록 한국어를 사용하려 하지만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는 한국말을 사용했다가도 대화가 종종 단절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어로 바꿔 버리게 된다. 아이는 이런 상황을 이미 눈치 채버렸다. 불어를 말할 줄 아는 엄마의 모습이 자신의 눈에 들어왔고, 불어가 서서히 자신의 제 1언어로 자리를 잡아가는 자신에게도 불어 사용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아이가 한국어를 잊어버리지 않고 유지할 수 있을까 늘 고심한다. 한국어로 맺어진 아이와 나의 유대감이 한국어로 인해 잃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모자의 유대감에 위기감을 안겨 준 상황을 실제 짧게나마 경험하기도 했었다. 작년 여름 방학 때, 아이는 아빠와 같이 시댁이 있는 프랑스에 두 달간 머물렀었다. 일 때문에 한국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나는 화상전화를 통해 아이의 안부를 묻고 건강한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국어가 없는 불어의 세상에서 두 달을 살다 온 아이는 공항에서 오랜만에 만난 나에게 쉬운 한국말조차도 말하지 못했다. 그 후 아이가 다시 한국어 사용을 회복하는 데 꼬박 두 주 반이 걸렸다. 이 짧고도 긴 시간동안 나는 복합적인 감정으로 매우 힘들었었다. 오랜만에 가슴에 품은 아이는 모자 관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 동안 한국어 유지를 위해 들였던 나의 공도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것 같아 공허하고, 서글펐다. 난 가끔 나의 모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의 언어로 아이와 대화를 하는 나를 상상해 본다. 아이에게 외국어로 사랑의 감정을 전하고, 훈육을 하며 위급 상황을 전해야 하는 나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낯설고, 불편하다. 외국어로 전달되는 나의 감정과 생각은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 나만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난 오늘도 아이 앞에서 명료한 발음과 아이의 수준에 맞춰 적절한 단어를 골라 한국어로 수다를 떤다. 누군가는 말한다. 아이가 세계인으로 성장하는데, 그까짓 한국말 하나쯤 못하면 어떠냐고 말이다. 세계적 위상이 높은 영어와 불어를 할 줄 알면, 어느 나라에 가서도 밥벌이 걱정은 없을 거라고 한다. 이 폭력적 위로는 다문화 가정 자녀들을 양육하는 부모들에게는 매우 큰 상처가 되고 만다. 실제 동남아 출신 여성과 한국인 남성이 이룬 다문화 가정에서 엄마들의 모국어는 그들의 가정에서조차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엄마의 어설픈 한국어에 노출된 아이들은 결국 엄마의 말도, 아빠의 한국어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성장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공식 교육 기관에서도 버젓이 발생하는데 다문화 가정 자녀가 처음 학교에 들어가서 학교의 교육 언어에 익숙하지 않으면 교사는 학부모에게 아이의 모국어대신 학교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집에서도 사용하라고 충고한다. 결국 세계적 위상이 높은 언어는 배우고 사용할 가치가 있는 것이고, 비교적 위상이 낮다고 판단되는 소수 언어는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것일까. 부모의 모국어를 자녀들에게 계승하는 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자산이며 선물이다. 부모가 전해 준 언어를 통해 부모와 자식 간의 끈끈한 유대를 유지할 수 있고, 문화의 자산인 언어를 후세대에게도 계속 전달할 수 있다. 언어는 ‘내가 누구인가’를 말해 주는 정체성의 표지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어떤 언어도 우세하거나 열등하지 않다. 모든 부모들은 그들의 모국어를 자녀들에게 계승할 권리가 있다. 경제적인 가치만이 부각되는 가정과 학교 내의 언어 교육은 하나의 개인을 주체가 아닌 물질로 환원시킬 뿐이다. 모든 유기체가 공존할 때 건강한 생태계가 유지되는 것처럼 다양한 언어의 공존은 건강한 언어 생태계를 유지시킬 것이다. 언어는 단지 밥벌이를 위한 수단만이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소속한 공동체 내에서의 유대감을 확인시켜 주는 문화적 자본이며, 삶의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고 사고하는 데에 있어서 자신의 실존처럼이나 중요한 것이다. 박성원 삼성인력개발원과 국, 내외 대학의 한국어 교육기관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해 왔다. 유럽인과 결혼해 다문화 가정에서 다문화, 다언어를 실제 공간에서 체험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다문화-다중언어를 위한 언어문화운동을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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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정보
    2013-05-15
  • 대학에서 방황하는 외국인 유학생들
    이제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평화로운 공생을 위한 다문화 사회, 모두가 복된 지구촌 시대, 더불어 잘하는 인류사회의 건설과 같은 요란한 구호가 진실도 사랑도 없이 시끄럽게 울리는 꽹과리 소리는 아닌지 철저한 반성이 필요하다 ▲ 새로운 지식과 문화를 선도하는 대학에서의 모습이 이래서는 안 된다. 다인종, 다언어, 다문화에 대한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인식과 태도가 성찰 없이 지속된다면, 성숙한 다문화 사회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요즘 국내 대학에서 다인종, 다국적의 학생들이 캠퍼스를 활보하는 것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우리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아시아 학생, 특히 중국인 학생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  나는 오랫동안 한국어 교사로 이러한 외국학생들이 국내 대학에 입학하도록 돕는 일을 해 왔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한국어 능력 중급 이상을 자격 요건으로 내세우는 대학의 요구에 맞춰 국내 대학의 입학 허가를 받는다. 가끔은 한국 신입생들도 받기 어려운 높은 비율의 장학금을 받으면서 말이다. 내가 가졌던 한국어 교사라는 직업의식 때문인지, 난 대학 내에서도 그들의 생활이나 교실 참여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그들의 대학생활은 그리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그들 중 열에 아홉은 대개 한국인이 아닌 자국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다니고, 강의 시간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리지도 않는다. 외국에서 짧은 교환학생 생활을 해 본 나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2언어로서의 한국어 학습자를 넘어 학문 공동체 내에서 한국 학생들과 생활을 하면서 학문에 정진해야 하는 학생들이기에 이런 상황은 안타깝고 애처롭다. 특히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잔재하는 이중적 외국인 수용 잣대가 적용되는 것을 보면 이런 상황은 더욱더 안타깝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학과에서 유독 한 명의 중국 유학생이 눈엣가시처럼 한국학생들에게서 소외되고 있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이런 그 친구의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시간을 내 그의 어려움을 들어보았다. 예상대로 그의 유학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 고통은 계속 진행 중이다.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저에게 수업을 알아듣지 못할 거면 당장 어학당으로 가서 한국말을 더 공부하고 오라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입학 면접시험에서 일등을 했고, 대학에서도 어학당 수업을 더 이상 들을 필요 없이 학부 입학이 가능하다고 했어요. 어느 날 교수님은 전체 학생들 앞에서 중국 학생들이 집안은 좋은 데, 머리가 나빠서 한국에 온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나중에 대학원 입학 지원에 대한 추천서가 필요할 때, 중국인 학생들에게는 절대 써 주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저는 매우 큰 상처를 받았어요. 그런데 다른 과 교수님들도 중국인들에 대한 편견이 많아요.” 나는 이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리가 멍해짐을 느꼈다. 한국인으로서 이 상황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리며 이해를 시켜야 할지도 매우 난감했고, 이 학생의 쓰라린 심정이 사뭇 이해가 되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것이 비록 소수 교수자들의 오만한 우월의식과 편견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미성숙하고 폭력적인 교육자의 발언이 한국학생들의 의식에도 통째로 뿌리를 내리게 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 중국인 학생은 한국학생들 또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제가 길을 지나가면 중국인은 더럽다고 제가 들을 수 있게 욕을 했어요. 이 상황은 제가 졸업을 할 때까지 2년 동안 계속 됐어요. 한국어가 아닌 영어 수업에서도 무시를 당했는데 영어 발음이 좋은 편인 저를 기분 나쁜 표정으로 쳐다봤어요.” 이 학생은 한국어를 못해도, 영어를 잘해도 학문 공동체 내에서 가차 없이 무시와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이 학생이 중국이 아닌 서양에서 온 백인 영어 원어민 유학생이었어도 똑같은 대접을 받았을까. 나는 이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문화 사회를 위한 우리의 시민의식 수준에 대해 강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 인류의 평화로운 공생과 이득을 지향하며 끊임없이 학문에 정진해야 하는 학문 공동체인 대학에서 이런 상황이 연출된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인종 차별주의적인 교육자의 발언과 태도, 이런 위험천만한 교육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학생들에게 답습되는 국내 대학에서 외국인 유학생들, 특히 아시아 출신 유학생들은 방황하고 고립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중국인 학생의 한국어가 향상된 것은 자기 말을 관심 있게 들어 주었던 또 다른 한국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매우 다양한 손님들을 만났다고 한다. 거기에서는 어떤 누구도 자신의 불완전한 한국어를 비난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그 사람들과 나눴던 이야기가 지금 자신의 한국어를 향상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이 학생은 정작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고 싶었던 대학에서는 무시를 당했다. 그러나 대학 밖의 실생활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대학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한국어 실력을 향상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학생은 한국어와 학문적 동기가 없거나 열정이 부족한 소극적인 학습자가 아니었다. 한국인들의 냉정한 반응과 차별적 태도는 한국어와 한국문화, 나아가 학문에 대한 동기와 열정마저도 식게 할 수 있다. 대학에서 요구하는 한국어 능력 시험을 통과해 입학을 했으나 대학 내에서 합법적인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당혹스럽다. 부당한 이유로 소외되고 방황해야 하는 이런 유학생들의 시련은 어쩌면 준비되지 않은 우리의 다문화 사회의 일면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유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유치하기 위해서만 애쓰는 대학은 이들을 위해 과연 어떤 관심을 갖고, 지원해주고 있는가. 외형적인 지원 정책보다, 그들이 실제 대학에서 어떤 생활을 하며 어떤 고충을 겪고 있는지 그들의 목소리에 한번쯤 귀 기울여 본 적이 있는지 반성해 볼 때이다. 새로운 지식과 문화를 선도하는 대학에서의 모습이 이래서는 안 된다. 다인종, 다언어, 다문화에 대한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인식과 태도가 성찰 없이 지속된다면, 성숙한 다문화 사회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불 보듯 뻔하다. 그들의 불완전한 한국어가 그들의 지적 능력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충분한 잠재능력을 가진 유학생으로 인정해야 한다. 이들에 대한 어떤 차별적 요소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우리와 공통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존중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도 학문 공동체뿐만 아니라, 인류사회를 더 풍요롭게 할 자질과 가능성이 누구 못지않음을 인식해야 한다.요즘 일본 우익세력의 무모한 행태를 보면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다. 상식과 진리는 어느 나라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평화로운 공생을 위한 다문화 사회, 모두가 복된 지구촌 시대, 더불어 잘하는 인류사회의 건설과 같은 요란한 구호가 진실도 사랑도 없이 시끄럽게 울리는 꽹과리 소리는 아닌지 철저한 반성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구호만이 아니라, 진실이라면 가뜩이나 유학생활로 힘들고 외로운 그들을 포근하게 감싸고 배려해야 한다.  박성원 삼성인력개발원과 국, 내외 대학의 한국어 교육기관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해 왔다. 유럽인과 결혼해 다문화 가정에서 다문화, 다언어를 실제 공간에서 체험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다문화-다중언어를 위한 언어문화운동을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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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정보
    2013-05-08
  • 의식의 사물화와 참을 수 없는 삶의 가벼움
    의식 바깥의 대상에 대한 배려가 없이는 온전한 인간 존재, 이성적 존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타자의 인정 없이 어찌 어떻게 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타자에 대한 인정과 배려가 없는 인간은 의식이 결여된 존재로 봐야 한다 ▲ 의식이 사물화 되어 버린 인간은 사유를 통해 의식 안에 들어 온 세계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할 수 없다. 사물의 본성을 띤 의식은 타자의 언어와 정보에 의해 지배당한다. 사물은 지배할 수 없고 지배당하고, 지배자의 처분에 맡겨지듯이 자신을 자신인 채로 소유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스스로, 자처해서 의식을 사물화하고 있다. 의식을 사물화 한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무엇일까? 의식은 사물과는 별개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지각한다. 사물은 인간에게 있어서 도구적이고 물질적이다. 사물의 사물성을 논한다 하더라도 사물 안에 의식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생각․판단․지각하는 주체적인 이성의 기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식 바깥에 있는 사물은 분명히 의식과의 연관성에서 전혀 주체적이라 말할 수 없는 의식과 떨어져-있음이라는 존재론적 지평에만 속해 있다.그렇다면 ‘의식의 사물화’는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의식이 더 이상 사유하는 역할을 포기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의식은 이제 물건이나 도구에 지나지 않는 임의적, 수동적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나아가 의식은 정지된 채 있음을 의미한다. 사유하지 않는 1차원적 인간, 그러면서 동일하게 사물 속에 매몰되어 버리는 인간은 의식의 작용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다. 여기서 자기는 의식이 깨어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식이 사물화 되어 버린 인간은 사유를 통해 의식 안에 들어 온 세계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할 수 없다. 사물의 본성을 띤 의식은 타자의 언어와 정보에 의해 지배당한다. 사물은 지배할 수 없고 지배당하고, 지배자의 처분에 맡겨지듯이 자신을 자신인 채로 소유할 수 없다. 자신의 비존재적 실존의 상태에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은 타자를 자신으로서 확인하지만 엄밀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 연유로 의식이 사물화 되어 버린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사물이 된 것도 모르면서 잡담(한담/객설)을 하며 살아간다.우리가 무심결에 바라보는 사물, 대상, 사건, 심지어 사람조차도 사물화 된 형태로서의 의식으로 바라본다. 정치, 경제, 사회, 환경, 교육 등은 우리 자신의 의식을 사물화 하도록 강제한다. 엉겁결에 담론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존재자가 시간의 무한한 퇴락으로 빠져 들어가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무심코’, 즉 자신 스스로가 의식의 사물화가 된 것을 모르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인식은 책임을 담보로 하지 않는다면 인식조차도 이성의 결여나 다름이 없다. 의식의 결여된 상태는 의식의 사물화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이렇듯 의식의 사물화와 의식의 결여는 밀접한 상관성을 갖는다. 그것은 타자를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의식은 항상 무엇을 향한 의식으로서 바깥 실재에 대한 배려와 관심 없이는 의식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이는 “내용 없는 사상들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들은 맹목적이다.”(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 KrV., B75)라는 칸트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당연한 귀결이다. 따라서 의식 바깥의 대상에 대한 배려가 없이는 온전한 인간 존재, 이성적 존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타자의 인정 없이 어찌 어떻게 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타자에 대한 인정과 배려가 없는 인간은 의식이 결여된 존재로 봐야 한다. 게다가 자신의 의식조차 대상화, 물질화시켜서 비생명적인 사물성으로 전락시키고 마는 것이다. 이 국가와 사회 곳곳에서 평균 인간, 평균 문화가 자리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의식이 사물화되고 심지어 의식이 결여됨으로써 인간 현존재는 하나의 사물처럼 규격화, 수량화, 수치화되고 만다. 현존재의 모든 사유와 행위는 모두 동일화되고 그에 따른 인간의 문화 또한 획일화된 채 또 하나의 계급 구조와 권력을 갖게 된다. 평균 인간, 즉 평균적인 현존재는 막연한 불안과 현대 기계 문명(현대 물질문명)에 대한 공포로 자신의 의식을 사물적인 것에 의존하고 거기에서 안정을 찾는다. 그 순간 현존재의 의식 작용은 주체적인 자의식의 활동과 판단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타율, 타자적 의식에 동조하고 그에 의해서 조작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재는 자신의 의식이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사물적인 것에 저항하기보다는 사물적인 것이 갖고 있는 사물성에 끌려가고 만다. 현존재의 의식과 의지, 삶의 주체성은 온데간데없이 오로지 한담(閑談)거리, 공담(空談, leeres Geschwätz)거리의 삶만을 끌어안고 무게가 있는 삶의 진지함과 진정성에는 눈을 가린다. 그러므로 이제는 사물적인 것과 사물성을 비판하기보다 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사물이 되어가고 있는 현존재의 의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있어야 한다. 더불어 그 의식을 사물화시키는 사물적인 것의 구조와 사물적인 것을 포함하는 세계 일반에 대한 엄밀한 반성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의식은 여전히 의식이 아니게 되며, 삶은 가벼운 일상의 차원으로 전추하여 거슬러-나아가지-못하는 의식-없음, 이성-없음이라는 현존재 그 자신의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앞에서 삶이 가벼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삶과 삶과 연관된 모든 사건과 현상에 대해서 한낱 빈-이야기[공담]로 일관하는 시원을 의식의 사물화라고 말했다. 의식은 침묵[말-없음, 말하지-않음]을 모르며 시끄러운 소음과 자질구레한 소리, 원치 않는 소리에 빼앗겨 순수한 의식과 순수한 생각이 떠오를 틈이 없다. 옛 말에 지과필개(知過必改, 허물을 알게 되면 그것을 반드시 고쳐야한다) 혹은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어떤 잘못이 있으면 그것을 고치려는 것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라 했다. 이런 시대일수록 무의미하게 떠드는 소리가 아닌 의식이 부르고, 의식이 생각하는 이성의 회복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때가 아닌가 싶다.김대식 박사 / 본지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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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5-08
  • 통역의 지혜와 묘미
    중립적인 자세로 양쪽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서로의 입장을 감안하여 말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격한 감정적 대립을 완화시키게 된다 ▲ 중립적인 자세로 양쪽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서로의 입장을 감안하여 말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격한 감정적 대립을 완화시키게 된다. 오늘은 다양한 언어의 다양한 의사전달 기능을 골고루 맛본 날이다. 세 언어(한국어, 불어, 영어)가 한 데 뒤섞여 불평하고, 비난하고, 설득하고, 호소하고, 협박하고, 용서를 구하고, 합의해야 했던 날이다. 이 언어들 사이에서 가능한 한 평정을 유지하려 애를 쓰면서 말이다. 남편의 손가락 골절 수술 결과가 좋지 못해 한번쯤은 병원에 가서 환자의 권리에 대한 의견을 전달하려고 벼르고 있긴 했었다. 남편이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영어가 미숙한 한국인 의사에게 자신의 불만을 전달하며 환자의 권리를 찾는 것은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진료실에서 의사와 환자인 남편과 보호자인 나는 영어, 불어, 한국어를 삼각 구도로 섞어가며 서로의 의견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전달에 애썼다. 불어 악센트와 고조된 감정이 뒤섞인 남편의 영어를 한국인 의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젊은 한국인 의사는 매우 난처한 이 상황에서 남편을 보며 영어로 설명하며, 설득을 시도하다가 중간에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은 다시 나에게 한국말로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럼, 나는 다시 이 상황을 불어로 남편에게 전하고, 남편은 다시 흥분된 감정을 나에게는 불어로, 의사에게는 큰 몸짓을 섞어 영어로 표현했다. 세 사람 사이에는 이미 팽팽한 긴장감과 안타까움이 감돌았고, 세 언어 또한 고조된 감정의 날개를 달고 작은 진료실 안을 종횡무진 했다. 한 사람의 말이 뱉어지자마자 나와야 할 상대방의 반응은 이 상황에서는 5초 정도씩 뒤로 후퇴되어 있었다.  나는 한국어가 능통하지 못한 외국인 남편과 사는 탓에 이러한 상황에 종종 부딪칠 때가 있다. 보통 내가 나서서 개입을 해야 하는 상황은 으레 유쾌하지 않은 일일 때가 많은데 바로 오늘 같은 날이 그렇다. 오늘도 사건 이후에 몰려오는 육체적, 신체적 피로감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늘 그렇듯이 두 개(한국어, 불어) 또는 세 개의 언어(한국어, 불어, 영어)가 등장을 하고, 나는 여러 언어나 두 진영의 중간에서 긴장감을 잃지 않으며 의미와 감정까지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남편의 입장을 옹호해야 할 때가 많지만, 가끔은 중간자적인 입장에 서 생각하게 될 때도 있다. 이렇게 중립적인 자세로 양쪽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서로의 입장을 감안하여 말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격한 감정적 대립을 완화시키게 된다. 사실 남편의 불만 섞인 비난을 다 들어야 했던 그 젊은 의사는 남편의 수술 집도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의사에게 비난을 쏟아 부어야 하는 상황이 사실 나에게는 매우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감당해야 하는 의사가 자신의 직업에 대해 순간적으로 뼈저린 회의를 할 것 같은 염려도 되었다.   나의 중립적 통역관 역할은 가끔 빛을 발휘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이다. 남편의 격한 감정 표현이 나를 한번 거치게 되면 좀 더 완화된 한국어로 의사에게 전달이 된다. 의사가 한국어로 하는 황당무계한 변명도 나의 귀와 머리를 통해 좀 더 설명적인 불어로 뒤바뀌어 남편에게 전달된다. 이렇게 되면 양쪽 진영의 격한 감정과 긴장은 훨씬 누그러지며 좀 더 느슨한 분위기가 된다. 이런 나의 중립적 역할을 두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완결시키면 다행이지만, 가끔 한국말을 이해하기도 하는 남편은 자신의 편이 되지 않는다며 비교적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는 나를 나무라기도 한다. 오늘 사건은 세 사람 모두를 충분히 지치게 하는 힘든 일이 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 언어의 공존 덕택으로 이 긴장되고 격한 상황은 좀 더 느슨하게 흘러갈 수 있었다. 이런 다행스러운 결과의 도출에는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했던 나의 통역관 역할도 한 몫 했다고 자부한다. 요즘 내 아들도 수영장과 태권도장에서 프랑스 친구들과 한국인 강사 사이에서 통역관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내 아들에게도 이런 상황이 닥치면 슬기롭게 잘 대처해 원만한 길을 잘 제시해 낼 수 있기를 바란다.   박성원 박성원은 삼성인력개발원과 국, 내외 대학의 한국어 교육기관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해 왔다. 유럽인과 결혼해 다문화 가정에서 다문화, 다언어를 실제 공간에서 체험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다문화-다중언어를 위한 언어문화운동을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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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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