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5(월)

한국교육
Home >  한국교육  >  학술정보

실시간뉴스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1-07-02
  • 한국화학연구원, 스펀지로 열을 전기로 바꾸는 소재 개발
    [타임즈코리아] 구부러지고 늘어나고 압축이 돼, 열이 있는 곳 어디에든 붙여 열을 전기 에너지로 바꿔주는 열전소재가 개발됐다. 완전히 유연한 열전소재가 개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화학연구원 화학소재연구본부 조성윤 박사팀은 열원의 형태와 관계없이 어디든지 붙일 수 있는 ‘스펀지형 열전소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열을 전기로 바꿔주는 소재로 온도 차에 의해 전기가 발생한다. 일례로 발전소 굴뚝에 열전소재를 부착하면, 굴뚝 안쪽의 고온(150도)과 바깥 상온(30도)의 온도 차로 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구진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스펀지에 탄소나노튜브 용액을 코팅했다. 탄소나노튜브를 물리적으로 분산시킨 용매를 스펀지에 도포한 후, 용매를 빠르게 증발시킨 것이다.  제조방법이 간단해 대량생산에도 적합하다. 모양을 만들어주는 틀 없이 스펀지를 이용해 열전소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거푸집 없이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셈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열전소재는 무기 소재로 만들어진 탓에 유연하지 않았다. 사람의 몸이나 자동차 등 다양한 곡면의 열원에 붙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제조공정 자체도 까다롭고 복잡하다. 전 세계 연구진들은 유연한 열전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탄소나노튜브에 주목했다. 탄소나노튜브는 전기전도도가 높고 기계적 강도가 강하며, 지구상에 풍부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팀이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해 유연한 열전소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스펀지와 유사하면서도 높게 쌓을 수 있는 탄소나노튜브 폼(foam)을 만든 것이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압축 안정성 실험 결과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는 “지금까지 개발된 유연한 소재는 지지체나 전극의 유연성을 이용한 것”이었다면서 “소재 자체가 유연한 건 이번 스펀지형 열전소재가 처음이고 제조방법도 간단해 대량생산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개발된 스펀지형 열전소재는 열전소재의 전기적 특성과 스펀지 고유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10,000번 반복해도 형태는 물론이고 전기적 특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압축 전과 압축 후의 저항값이 각각 1.0Ω(옴), 0.3Ω으로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이는 스펀지에 기공이 무수히 많아 변형에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펀지의 탄성을 이용한 응용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경우, 압력이 커질수록 발전량도 덩달아 높아졌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했을 때 최대 2㎼(마이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하여, 압축 전과 비교해 발전량이 10배 정도 증가했다. 이에 대해 연구논문 1 저자인 김정원 박사는 “스펀지의 압축되고 복원되는 탄성을 활용해 몸에 부착하는 웨어러블 기기에 적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수한 기계적 성질이 요구되는 자동차 등에도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정원 박사는 “열전소재 분야 전망도 밝다. 현재 자동차에서 사용하고 난 후의 열이나 온천수를 이용한 열전발전 시작품의 실증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관련 기술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성과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에너지 소재 분야 권위지인 『나노 에너지(Nano Energy), IF:16.602』8월호에 게재됐으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창의형 융합연구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 한국뉴스
    • 과학
    2020-09-22
  • 종속될 것인가, 회복할 것인가
      [타임즈코리아]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느린 사람은 어찌 살라는 건지, 넋이 나갈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많은 것들이 바뀌곤 한다. 이런 현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변화는 순리이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논리가 더 우세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약육강식이 진리이어야 한다. 여기에 동의할 사람들은 모두 강자라야 가능하다. 적어도 변화가 자연에 의한 것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이 자초한 변화에 순응하라는 것은 무조건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이 그만큼 편리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만큼의 행복을 확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비대 면화되어 가고 있다. 이것을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변화라고 동의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코로나19에 따른 불가피한 강요인 셈이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에 따른 변화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만남에서 누리고 싶은 행복은 사람의 DNA 속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다. 현장 공연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감흥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런 노력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 개인의 욕심이 아니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예술을 가상의 세계에 가두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 만약 가상의 세계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우리가 굳이 직접 여행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영상이나, 증강현실 그리고 가상현실 시스템만으로도 더 자세하게 보며 실감 나는 장면 속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온라인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계기로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콘텐츠를 구별하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가 파산했다는 기사가 유난히 아프게 느껴진다. 과학과 기술이 육체적 요소라면 문화와 예술은 정신적 요소이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난국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문화와 예술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예술의 존엄과 가치는 예술가들이 지켜 내야 하는 것이다. 대중화, 실용화 이런 측면들은 굳이 지키려 하지 않아도 어느 시대에나 자생해 왔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변하지 않게 하는 일,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려는 힘은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자극하여 거대한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예술의 힘이고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망가트려놓은 만남과 관계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 속에 내어주고 거기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만남과 관계를 열망하는 DNA와 인간의 지혜가 코로나19보다 더 강함을 증명하며 예전과 같은 역동성을 회복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왔듯이 이 또한 극복해 낼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코로나19를 이겨낼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이전과 같은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예술가들이여, 우리는 과학자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감동을 선사합시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0-07-06
  • 인문학은 이론이 아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본질을 찾아 나선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사변적으로 흘러가면 이념이나 현상적인 집착으로 이탈하게 된다.   이런 행태는 수많은 증오와 폭력을 낳으며 씻지 못 할 마음의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남길 뿐이다.   인문학적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삶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타자와 참된 관계를 형성하는 정신을 의미한다.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사람은 ‘너’와 더불어 ‘나’라는 관계를 통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조화로움의 아름다움을 통해 공감함으로써 상대방을 이웃으로써 인식하고 수용하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문학, 역사, 철학, 종교 등의 이론을 습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그들의 아픔과 울분, 사랑과 기쁨을 공유하는 공감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인문학은 ‘너’와 더불어 존재하는 ‘관계’로서의 ‘나’를 인식하고 사랑(자비, 나눔, 배려, 공감)으로 소통하는 지혜를 깨우치고 표현하게 하는 모든 문화, 사상, 지식 등을 말한다.   인문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진리를 찾고 따른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온전히 깨닫고 그 사랑을 최선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6-03-18
  • 현대인 허균이 살았던 과거의 삶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동부승지, 삼척 부사,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허엽(許曄)은 30년간이나 관직에 머물렀는데도 생활이 검소했고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한 인물이다.   허엽의 호는 초당(草堂)이다. 오늘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초당 순두부의 본고장이 바로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이다.         이곳에서 허엽의 아들 허균(許筠, 1569~1618)이 태어났다. 교산(蛟山) 허균은 명문가의 자제로 천재적인 두각을 나타내 모든 것이 보장된 인물이었지만, 불우한 계층을 대변하는 삶을 선택했다.   이런 까닭으로 허균은 조선시대 반역의 상징 같은 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평등사상에 눈을 뜬 허균의 급진적인 개혁 사상은 오늘날에 와서는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단과 반역을 도모하는 사회전복세력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쓴 《홍길동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허균이라는 인물을 볼 때, “역사는 현대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항상 새롭게 해석되고 평가될 수 있기에 역사를 보는 모든 이들의 시각은 상대적이다”고 말한 영국의 정치학자이며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 1892년~1982년)의 견해가 더욱더 공감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6-03-15

실시간 학술정보 기사

  • 영어습득의 새로운 안목
    필요에 따른 의사소통적 바람에 부응하는 편안함에서, 만나고 부딪히면서 점차 확대해 나가는 학습적 방법이 필요하다 ▲ 우리는 현 시점에서 영어권 원어민들의 모국어인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아니면 세계화 시대 흐름에 맞춰 전 세계인과 교류하기 위한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한번쯤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연예인들이 가끔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발음이 지나치게 한국적이라든가 문법과 어휘가 조금만 표준에서 어긋나기라도 하면 즉시 주변 사람들을 박장대소하게 하는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정작 그 외국인은 내용을 다 이해했는데도 말이다. 한국에서 한국식 영어인 콩글리쉬를 하면 영어에 대한 언어 지식이 매우 부족한 언어학습자로 낙인 찍혀 세계 시민이 되기에 부족한 조건을 갖춘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럼, 우리의 영어 학습의 목적은 단지 영어 원어민과 의사소통하기 위한 것인가. 그래서 매우 표준화된 미국, 영국식 영어를 학습하고 사용해야만 하는가. 이 규범에서 벗어난 영어는 국제사회에서 자격이 없는 것인가. 누군가의 콩글리쉬를 들으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영어로 말할 때, 위축이 되는가.  남편의 일 때문에 홍콩에 거주했을 때가 있었다. 난 내심 아이의 영어교육 문제 해결과 나의 영어 실력 향상에 유익을 얻게 될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었다. 영국 학교가 제법 많은 홍콩이라면, 영국 원어민이 직접 가르치는 우수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을 것이며, 아이와 나도 제대로 된 영국 영어를 배울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야 하는 시기가 됐을 때, 대부분의 영어 유치원 교사들이 아시아 출신인 것을 알고 적잖이 실망했었다. ‘유치원 학비가 얼마인데 어떻게 인도, 홍콩, 필리핀 교사한테 내 아이의 영어 교육을 맡겨.’ 난 솔직히 내 아이가 미국이나 영국 백인 원어민 교사가 아닌 아시아 교사한테서 영어로 교육을 받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제대로 된 외국어 학습이라면, 그 나라의 원어민에게서 배워야 가장 효과적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2년 반 동안 아시아 교사 밑에서 교육을 받은 아이의 영어실력은 예상보다 빠르게 향상되었고, 이 경험을 통해 나의 고정관념은 어느 정도 누그러질 수 있었다.   내가 홍콩에서 살았던 곳은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홍콩 사람들보다는 외국인들이 더 많이 거주했던 작은 ‘지구촌’이었다. 상권이 조성된 장소 주변의 큰 광장에는 주말이면 다양한 인종과 언어가 서로 만나 교류하는 장이 열리곤 했다. 여기에서도 세계 공용어인 영어는 세계인의 관계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모인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리 식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표준화된 영어를 사용했다고 말할 수 없다. 홍콩, 인도, 필리핀, 일본, 말레이시아, 브라질,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매우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그들은 각기 그들의 방식으로 영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표준화된 영어 원어민의 발음, 문법, 수준 높은 어휘 사용은 기대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들은 모국어인지, 영어인지 모를 그들 방식의 영어를 사용하여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며 친목을 도모하였다. 그 동안 미국 영어에만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처음에는 이런 상황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었다. 그들의 영어를 이해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차차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핀 사람과는 그들 방식대로 장문보다는 단문을 주로 사용해 대화를 했다. 홍콩 로컬시장이나 식당에서는 완성된 문장보다는 주요 단어 중심으로 말해야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음을 터득했다. 나는 홍콩에 거주하면서 기대했던 영국식 영어는 배워 오지 못했지만, 여러 각국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그들의 영어 스타일에 맞춰 말할 수 있는 전략을 자동적으로 익히게 되었다. 나의 이런 경험은 ‘표준화된 영어’와 ‘영어 원어민처럼 말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 주었다. 우리가 영어를 학습하는 목적이 단지 영어권 원어민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세계적 교류가 활발한 요즘, 우리는 비원어민 영어화자들과 사업을 진행하고, 사랑을 속삭이며 사교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도 영어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현 시점에서 영어권 원어민들의 모국어인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아니면 세계화 시대 흐름에 맞춰 전 세계인과 교류하기 위한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한번쯤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영어교사의 자질에 관계없이 백인 영어 원어민 교사가 선호되고, 콩글리쉬를 하면 가차 없이 표준화된 미국영어의 잣대로 우리의 영어 능력이 판단되는 지금의 풍토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제는 영어 지식을 학습해 좋은 시험 점수를 받기 위한 목적으로 영어를 공부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영어적 해득과 작문, 외교나 학술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와 걸맞은 학습을 하고 필요한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실생활에서의 다양한 국적의 언어 화자와의 의사소통을 꿈꾸며 영어를 학습한다면, 기존의 경직된 학습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이 세상에 완벽한 구사능력이 선행되는 언어적 습득방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필요에 따른 의사소통적 바람에 부응하는 편안함에서, 만나고 부딪히면서 점차 확대해 나가는 학습적 방법이 필요하다. 이렇게 된다면, 좀 더 덜 위축되고, 더 여유 있는 마음에서 언어를 습득해나가는 행복한 영어 학습자가 되지 않을까.박성원 박성원은 삼성인력개발원과 국, 내외 대학의 한국어 교육기관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해 왔다. 유럽인과 결혼해 다문화 가정에서 다문화, 다언어를 실제 공간에서 체험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다문화-다중언어를 위한 언어문화운동을 기획하고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3-04-28
  • 대립과 모순의 시대를 바라보며
    누구나 분명 내면의 대립과 사회적 갈등을 만나게 될 터인데, 그땐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낼까   ▲ 그들은 분명 내면의 대립과 사회적 갈등을 만나게 될 터인데, 그땐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낼까? 우리는 자꾸 아프다. 자신을 가감 없이 표현해낼 언어를 배우지 못해서 더 많이 아프다. 작년에 싸이(PSY)가 ‘강남 스타일’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시기에 친형처럼 따르던 가수 김장훈과 사이가 나빠졌다는 기사가 등장했다. 사건의 진위 여부를 두고 양측 간의 공방이 계속될 때, 김장훈은 싸이의 공연장을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둘은 함께 소주잔을 들어 러브 샷을 했다. 둘이 서로 밉다고 으르렁댔던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어느 모습이 진심이냐고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보기엔 ‘밉다’ 혹은 ‘좋다’는 내면의 목소리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김장훈은 정말 멋진 야성의 삶을 살고 있다.사실 사랑과 미움은 대립한 감정이 아니다. 사랑한다고 마음먹음으로써 미움을 다 제거할 수 있을까? 아들이 문을 꽝 닫고 나가면 밉다. 그러나 사랑하니까 밉다. 미운 만큼 사랑도 깊어진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하는 감정이다. 철학자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건강은 질병과 대립한 것이 아니라, 질병과 더불어 ‘불편하지 않게’ 살아가는 상태라고 했다. 개인마다 편차가 있으나, 질병을 통해 건강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 다 알 수도 없는 질병을 제거하는 데에만 몰두하지 말고 보듬고 가는 것도 중요하다. 표준적인 측정치로는 문제가 없어도 내가 아프면 아픈 것이다. 겉으로는 아파도 내적으로는 평안을 지키며 살 수도 있다. 우리는 일관적이지 못한 내 안의 모순과 변화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그 차이의 틈새와 타협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극단의 대립과 표리부동(表裏不同)의 허식에서 벗어나 살 수 있다.지금도 인류는 여전히 불안과 위험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한국 사회에도 느림과 성장, 좌편과 우편의 담론이 늘 공존하고 있다. 이런 영향을 거부할 수 없는 자아가 복잡하고, 변화하는 것도 당연하다. 정신상태가 분열되지 않았다면, 그건 자신의 역량 덕분이 아니라, 그저 행운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솔직히 나와 이웃이 자존감을 지키지 못할 만큼 휘청거릴 때, 우린 각자 어떻게 반응했는가? 악착같이 돈을 더 벌거나 정보의 네트워크를 확장하기에 바쁘지 않았나? 술이나 마시고 편을 갈라서 쓸데없는 소문을 만들어내며 살지는 않았는가? 국내외 여러 지표를 보면 우린 분명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오히려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이런 현실을 바라보며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안을 생각함에 있어, 어문계열 교수인 나의 연구 영역적 한계를 전제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이나 말로 자신의 대립적이고 불안정한 정체성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이야기하고 싶다. 내러티브 언어로 자신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과 대립의 인생에 직면하게 된다. 찌르고 찔리는 고슴도치적 세상 담론에서도 벗어날 수 없게 된다.내가 속한 영어영문과 학생들을 보자. 영어를 모방하면서, 영어 원어민과 같은 유창성을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열등감을 갖는 학생들이 있다. 한국은 다문화 공동체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관용적으로 품어, 모국어와 자국 문화의 가치관을 잃지 않는 통문화적(通文化的) 복수언어 사용자의 정체성을 가질 법도 하다. 그러나 영어가 싫지만 억지로 공부하고, 잘한다고 칭찬받으면서도 부끄러워한다. 아니면 다 포기하고 영어에 관한 특정 문화에 대해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학생들도 있다. 물론 그들만 탓할 수는 없다. 맥도날드화된 교육과정 안에서 원어민-비원어민, 유창성-정확성, 교사-학생, 맞다-틀리다 등을 대립적으로 구분하며 살아왔으니, 갑자기 언어의 다양성과 문화적 차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공존하게 하는 것이 말처럼 쉽겠는가.평범한 한국인이야, 영어를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어를 전공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면, 자신만의 모순과 긴장을 무장해제시킬 여유를 갖는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언어를 배우는 곳에는 늘 목표, 진도, 시험 등으로 잘게 쪼개져 있다. 여분의 텍스트로 자신만의 유별함을 한가롭게 품을 수가 없다. 자로 재는 듯한 측정의 시대에는 생활과 통합의 언어는 성과와 분석의 대상일 뿐이다. 겨울이 지나고 시험의 계절이 한풀 꺾였다. 그러나 다시 찾아올 공무원시험, 수능시험 등을 준비하는 학생들로 학원은 여전히 북적인다. 편입 시험도 준비해야 하고 입사 전쟁도 시작된다. 그 모든 길목에서 언어의 능숙함에 대한 평가가 기다리고 있다. 수험자는 잘게 쪼개진 대화문이나 지문을 빠르게 이해하고 답을 찾아야한다. 공교육에서도 시험 준비를 하고, 다시 사교육으로 가서 문제 풀이를 한다. 과연 그곳에 자신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고, 못난 자아를 보듬어 주며 타인을 관용적으로 품을 수 있는 생명의 언어가 있는가? 그들은 너무나 위생화된 언어를 공부하느라, 읽고 싶은 책도 마음껏 읽지 못한다. 누군가와 한가롭게 고통과 희망의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한다. 러브레터를 마음 설레며 써보지도 못한다. 스펙이 완성되고, 결혼을 하고, 좋은 기업에 취업을 한 다음엔 과연 자신의 모순적인 삶을 내러티브로 풀어갈 수 있을까? 그들은 분명 내면의 대립과 사회적 갈등을 만나게 될 터인데, 그땐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낼까? 우리는 자꾸 아프다. 자신을 가감 없이 표현해낼 언어를 배우지 못해서 더 많이 아프다.신동일 박사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본지 편집자문위원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3-04-16
  • 혼내는 오디션, 눈물 쏙 빼는 몰카방송
    제발 너무 진지하지 말자자꾸 윽박지르지 말자언어의 진지함, 위계성, 전문가의 규범에 우린 지쳐가고 있지 않은가  ▲ SBS 일요일이 좋다 - K팝스타2  화면 캡처 악동뮤지션의 우승! 난 오디션 방송을 즐겨 본다. 그곳에 나온 참가자들이 노래도 참 잘하지만, 꼭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처럼 보이기도 해서 볼 때마다 언제나 유쾌하다. 그런데 방송이 후반부로 갈수록 우승, 경쟁, 탈락, 생존의 말이 넘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난 방송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 경연이 한 번 끝날 때마다, 심사위원 쪽에선 심각한 표정으로 엄숙하게 말을 전하고 참가자들은 그만큼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TV 화면을 가득 채운 심사자들이 어쩌다 웃을 때면, 시청자들도 함께 웃게 되고, 그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면 시청자들도 함께 심각해진다. 시선의 권력, 언어의 위계에 시청자도 참가자들과 동일한 수준으로 긴장, 피로, 압박감, 눈물을 공유하게 된다.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으면 서바이벌 게임의 오디션 방송 자체가 불편해질 때가 있다. 어느 방송이든 누군가를 매주 탈락시키고 보따리를 싸서 숙소를 나가게 한다. 그러나 경연이 끝날 때까지 함께 계속 생활하며 어울리게 한다면 어떨까. 이런 과정에서 서로 더 친해질 수도 있고, 붙든 떨어지든 서로에게 덜 미안하지 않을까. 다음 경연을 준비하는 동료를 도울 수도 있고, 공연의 조연으로 참여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해야 축제 같은 공연을 준비하고, 떨어져도 눈물이 덜 나는 오디션으로 기획되지 않을까. 결국, 누가 1등이 되던 생존하지 못했다고 한 명씩 쫓아내지만 않으면, 진심으로 서로 축하하고 축하받는 더 훈훈한 관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방어적이 될 수밖에 없는 서바이벌 게임의 방송문화가 참 안타깝다. 우린 올림픽 때도 국가 간 순위 경쟁에 너무 심각해져서, 타문화를 흥미롭게 바라볼 기회를 갖지 못한다. 우리 자식에만 너무 집착해 있으면, 다른 집 아이들과 유쾌하게 놀 시간과 공간을 놓치게 된다. 경쟁에 몰입하며 놀지 못하는 문화는 점점 우리의 일상이 되고 있다. 몰카(몰래카메라)방송도 불편하다. 특히 선배들이 작당해서 후배를 매몰차게 꾸짖고 어쩔 줄 모르는 후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장면은 보는 사람도 안타깝고 긴장된다. 결국 몰카라고 밝히면 후배는 긴장이 풀려 울먹거리는 경우가 태반이고, 주위에서는 웃고 달래게 된다. 방송이야 모두가 유쾌하게 웃으며 마무리하지만, 그럴 때마다 난 ‘혼내고 곤혹에 빠뜨리는’몰카 방송에 누가 즐거워할지 의아해진다. 만약 그런 방송을 보는 것이 유쾌하다면, 그는 아마도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인 언어 질서 안에서 편리하게 살고 있는 사람일 게다. 몰카에서는 즐거운 일상이 드러날 수 없겠는가. 그렇게 온 국민 앞에서 혼을 내고 눈물을 쏙 빼야 할까. 언어를 인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곳, 언어를 통해 엄격한 위계와 규범성이 강조되는 곳, 아버지, 사장님, 선배님이 심드렁하게 앉아 있고, 그래서 무섭고 긴장되는 중에 눈물이 펑펑 나는 곳에선 늘 타인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법을 강조한다. ‘혼내기’ 몰카 방송은 시청자들에게 위계적이고 엄숙한 언어 공동체를 내면화시키고 있다. 제발 너무 진지하지 말자. 자꾸 윽박지르지 말자. 언어의 진지함, 위계성, 전문가의 규범에 사실 우린 지쳐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도 모르게 그와 같은 문화를 일상에서 흉내 내고 있지 않는가. 그러한 문화 권력이 우리의 삶을 압박하도록 계속해서 허용한다면, 개인의 실존은 더 엄격하게 측정되고 위계적으로 고정될 것이다. 놀겠다는 사람은 잘 놀게 자리를 마련해주자. 꾸짖을 거면 시간을 두고 구체적으로 뭘 좀 즐겁게 가르쳐보자. 유쾌하게 가르치며 배우고 사랑하는 모습을 시청자들이 더 볼 수 있다면 혼내는 분위기라고 해도 덜 민망할 것이다. 삶이 축제이고 선물이라면, 방송에서도 축제적인 경연, 일상 속에서의 축제를 보고 싶다. 가수 싸이(PSY)의 시청공연이 기획될 때, 내 건 첫 타이틀이 ‘글로벌 석권기념 서울시민과 하는 공연’이었다. 이 제목을 보면서 놀 생각이 드는가? ‘글로벌을 석권했다, 또는 계속 석권하겠다’는 자세라면, 이미 흥은 깨지는 것이고 싸이(PSY)도 더는 놀 곳이 없지 않겠는가? 그냥 놀자. 유쾌하게.신동일 박사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본지 편집자문위원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3-04-09
  • 함석헌의 진리 인식과 초월자에로의 기투(企投)
    성경은 변치 않는 영원 절대의 것이 변하는 일시적 상대인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 영원 절대인 것에 대하여는 들을 줄 알고 들어야 한다 ▲ 성경은 변치 않는 영원 절대의 것이 변하는 일시적 상대인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 영원 절대인 데 대하여는 들을 줄 알고 들어야 한다.  “진리란, 지축이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물결은 늘 뛰놀면서 바다는 언제나 평이한 것처럼,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도 쉬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을 수 있다”(함석헌, 『함석헌전집』19, 「영원의 뱃길」, 한길사, 1985, 8쪽).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 함석헌은 그것을 진리라고 역설한다. 상대적 세계에서는 변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변하지 않음을 끝까지 견지하고 있는 것이 진리다. 이는 만물은 생성변화 하지만 그 속에 영원불변의 로고스가 있다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BCE 535~475)나 진도약퇴(『도덕경』, 41장, “進道若退”)를 말한 노자(老子)와도 맥을 같이 한다. 사람들은 진리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진리의 외형만을 보고 진리의 퇴색을 외친다. 어쩌면 진리의 왜곡이란, 하늘과 맞닿은 세계를 열어주는 종교경전을 제대로 보지 않고 가벼이 말하는 것이리라. 진리는 초월의 세계, 삶의 초월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가상(Schein, 假象)의 진리가 아니라, 참의 진리, 빛의 진리를 보게 될 것이다. 진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변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변화를 주도하는 진리가 변화 속에 있으니까,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지 불변의 씨앗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게 급선무다. 볼 수 없거나 보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는 이상 변화, 퇴보, 퇴색만 보이니, 진리 그 자체가 원본적으로 다가올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본시 “성경은 인간의 모든 마음을 불살라 열과 빛을 내잔 하늘 닿는 굴뚝이다. 올라갈수록 그 흔들리는 도는 놀랍게 늘어간다”(함석헌, 『함석헌전집』19, 「영원의 뱃길」, 한길사, 1985, 8쪽). 그래야만 진리의 상승 기류를 만나 하늘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성서는 단지 문자가 아니라 올라-감이다. 오르고 올라서 도(道)에 다가가도록 만들어 주는 진리다. 노자가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 말했듯이, 도를 향해 올라가면 결국 저절로-그러함의-존재와 만나게 된다. 신 혹은 초월적 존재는 스스로-있음, 저절로-있음, 저절로-그러함이다. 이제 성서의 문자를 떠나서, 문자를 넘어선 저절로-있음 그 자체로의 비약이 필요하다. 성서가 문자가 아니라 비약하는 정신이 되려면 씨알이 되어 자라고 또, 자라야 한다. 문자가 죽고 문자의 의미가 싹틔운 뜻만이 살아서 사람을 자라게 해야 한다. 그래서 함석헌은 “성경은 양식이라기보다 산 씨이다. 씨이기 때문에 그 첨 형상이 없어지도록 키어내야 한다.”(함석헌, 『함석헌전집』19, 「영원의 뱃길」, 한길사, 1985, 9쪽)고 말한다. 의미가 꿈틀거리는 씨, 삶이 서부렁섭적 피어나는 씨, 사랑이 모락거리는 씨로 살아야 성서적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성서의 의미 덩어리들이 모여 움트려는 진리 가능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나아가 발언되고 살게 되면 단순한 말 덩어리들 혹은 말 조각들은 진리가 된다.  “성경은 변치 않는 영원 절대의 것이 변하는 일시적 상대인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 영원 절대인 데 대하여는 들을 줄 알고 들어야 한다. 글은 굳어졌는데 뜻은 자랐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에 끊임없는 새 해석, 고쳐 씹음이 필요한 까닭이다. 덮어놓고 믿는 믿음에 이르기 위하여 덮어놓고 읽기만 하지 않는 읽음이 필요하다. 세상 모든 것을 덮어놓고 믿는 믿음은, 열어젖힌 마음의 칼로 성경을 사정없이 두려움 없이 쪼개고 열어젖혀서만 얻을 수 있다. 성경은 덮어놓고 읽을 글이 아니요 열어놓고 읽어야 할 글이다... 덮어 둘 것, 은밀하게 둘 것, 신비대로 둘 것은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 그 밖의 것은 다 열어젖혀야 한다. 성경은 연구해야 하는 책이다. 연구하지 않고 믿으면 미신이다. 하나님은 연구의 대상은 될 수 없고, 그 밖의 것은 다 연구해서 밝혀야 할 것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19, 「영원의 뱃길」, 한길사, 1985, 8쪽)아무리 성서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라 해도 문자로 되어 있는 한 읽혀야 한다. 열어 젖혀서 밝혀야 한다. 글자를 읽어야 들을 수 있다. 글자가 살아나려면 읽어야 하고 읽게 되면 의미가 새겨져 뜻이 올라와 초월자의 말씀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의 어원이 되기도 하는 relegere는 legere(읽는다)에 re(다시)가 붙지 않으면 종교의 생명력을 잃게 된다. 종교가 살아 있는 실체로서 존재하려면 종교 경전이 화석화되지 않도록 다시 읽고, 고쳐 읽어야 한다. 문와 문자, 글자와 글자, 문장과 문장이 풀어 밝혀져 ‘그때 거기’의 의미가 ‘지금 여기’의 의미로 열려서 나타나야 한다[開顯]. 문자가 읽힘으로써 밝혀내는 것 사이로 나타나는 것은 의미 그 자체, 즉 초월자(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굳어진 채 글자로 남아 있는 것 틈새로 나타나는 것은 초월자 그 자체이다. 초월자는 들이 파서 길어 올려야 하는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파고 열어서 문자의 뜻을 밝히지 않으면 초월자를 인식하는 것은 어렵다. 초월자는 문자를 통해서, 문자의 열려짐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것이 읽히고 발언되는 순간 초월자의 목소리가 된다. 오늘날 종교(religion)가 종교 노릇을 잘못하는 이유는 문자에 얽매어 초월자의 목소리를 열어 밝히지 못하거나, 문자의 뜻을 길어 올리는, 문자의 의미를 들이 파는 힘이 모라자서 뜻 없는 인간의 소리만이 들리기 때문이다. 정작 놔둬야 하는 초월자를 들먹이며 공허한 낱말과 개념만을 나열하는 종교의 목소리는 장단 없는 꽹과리요, 힘없이 불어 대는 퉁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곳저곳에서 난무하는 종교의 목소리는 애꿎은 씨들을 엉뚱한 길로 들어서게 하고 신비(myein, 눈을 감는다)를 다 알아버린 듯 그 가상(假象)을 입에 달고 다닌다. 물론 초월자는 문자를 통하여 이미 와 있다. 현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현재화하고 도래하게 하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온전히 열어 밝히는 수고가 필요하다. 그것을 살아내겠다는 의지에 앞서 요구되는 것은 문자를 시간성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텍스트의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 있는 뜻을 드러내는 초월자의 현재와 도래에 사심 없는 기투(企投, Entwurf; Projection)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초월자의 존재 가능화는 문자의 시간화와 무지(無知)로부터의 개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의 역할이기도 하지만, 은총의 빛(Thomas Aquinas, 1225?-1274)으로 인한 인식의 확장, 그리고 신의 망각(Vergessenheit)으로부터 새롭게 회상(Erinnerung)하는 것이며, 인간의 탈자적(脫自的, 자기 자신을 벗어남) 피투성(被投性, 자의와는 무관하게 세상-존재와 시간에 내던져 있음, Geworfenheit)을 통하여 초월자에 대한 헌신으로 이어진다. 인간 자신(의 유한성)은 절대적 존재에게 내던져짐으로써 완전한 위험에 처해지지만, 그것이 인간의 종교적 실존의 본래적 모습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문자적 유한성과 무지를 극복하게 된다면, 생성 변화하는 상대적 세계에서 갑작스런 하늘 세계, 탈은폐적(aletheia) 세계를 만나게 될 것이다. *기투(企投)  현재를 넘어 미래를 향해 스스로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실존적 존재 방식을 일컫는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3-04-09
  • 삼월의 민족정신, 삼일정신
    삼일정신은 단지 정치․경제․문화․언어․사상 등을 잠식한 사건에 대한저항일 뿐만 아니라 의식의 저항, 마음의 저항이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 오늘날 삼일정신을 현실을 변혁, 혁명하라는 세계사적 의미 혹은 계몽적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그런 의미에서 삼일정신은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인 삶, 스스로 타협하려는 의지, 이기주의와 무감각, 몰이성과 비도덕에 대한 저항으로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몸과 정신을 억압하는 모든 형태의 수단과 세력은 자유를 향한(위한) 어떤 지속적인 몸부림을 발생시킨다.자유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상태, 그것은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래적인 특성이다. 그 본래적인 존재성을 누르게 될 때 인간은 저항하려고 한다. 다시 그 자리도 돌아감, 다시 그 자리에 서 있기를 원하는 힘이 놀랍도록 분출하는 것이다. 저항은 자유스럽지 않은 자리에서 자유스러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감이다. 삼일만세운동정신이야 말로 바로 역사의 저항 정신이 드러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일본이라는 외세로부터 이탈하고 폭압으로부터 분연히 일어나려는 우리 민족의 단결된 힘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는 데에만 역사적 의의를 두어서는 안 된다. 그 역사적 사건, 삼일정신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져 우리에게 실존적으로 요청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왜 인간은 가시적으로 보이는 현상에 대해서 혹은 자신의 이익이 눈앞에 있을 때에는 저항(반항)을 불사하면서 무지불식간에 정신과 육체를 통어하는 것(구조, 체제, 언어, 이미지 등)에는 저항하지 못하는가? 삼일정신은 단지 정치․경제․문화․언어․사상 등을 잠식한 사건에 대한 저항일 뿐만 아니라 의식의 저항, 마음의 저항이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함석헌이 “산 생명의 그 줄 잡아/ 날로날로 닦아내면/ 굽이치는 큰 물결이/ 온 누리에 넘치리라.”(함석헌전집 6, 「살림살이」, 『시집/수평선 너머』, 한길사, 1983, 45쪽)고 읊었던 것처럼 죽을 생명, 죽은 정신을 산 생명으로 일으키는 역사의식이 필요하다. 온갖 체제와 권력으로 인한 과잉과 결핍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시대에 인간 존재 자체의 억압과 죽음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강제, 강압, 부조리, 부자유 속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의 자기 각성과 자기 저항밖에는 없다. 구조의 속박, 자본의 전염은 인간을 병들게 하고 인간 존재의 고유 영역이 침탈당한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존재적 삶의 시공간이 조작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존재 본래의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본래적 영역, 본래적 자리, 본래적 자기 자신은 자유이다. 저항 정신을 품고 있는 자유, 즉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서 모든 근원과 정신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삼일정신은 인위(人爲)에 대한 무위(無爲)의 발로이다. 강제로 끄는 힘의 인위성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자연스럽지 못하다. 스스로(에게서) 그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삼일정신을 논하는 것은 기념이나 기억의 차원이 아니다. 자신의 삶이 무위에서 연원하기를 바라는 각자의 고유한 자신에게서 비롯되기를 바라는 실존적 인식 때문이다. 삶은 풍요로워졌으나 자신의 고유하고 본래적인 인식과 행위는 날로 퇴락하고 무뎌지는 것은 내부의 존재의 목소리보다 소음과도 같은 외부의 목소리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거다. 따라서 굽이치는 삶의 거대한 물결이 우리 자신을 휘감고 있을 때조차도 그 목소리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거칠고 험한 힘(세력)과 맞설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때’ 그 소리, 그 힘과 그 뜻을 되새길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때’ 거기가 없었더라면 지금 여기가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현존재는 지금으로서만 존재하기에 그때 거기를 망각하면서 자기의 본래성, 인간의 참 자리를 항상 벗어나고 만다.문득 멈춰 서서 자신의 존재 자리를 바라보는 것은 그때 거기의 목소리이다. 그때 거기의 목소리가 자신에게 동시에 온 누리(세계)에 울려 퍼지지 않으면 세계는 변혁되지 않는다. 세계의 진보는 지금 여기의 목소리를 그때 거기의 목소리로 보채고 재촉하면서 닦달하는 닦음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때 그 목소리는 현존재를 침묵 속으로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상황 안에서 깨어나 자신과 세계를 닦음이라는 구체적 삶으로 나타나게 한다. 닦음은 닦아-내는-존재의 행위로서 자신과 세계를 정화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의 의식을 퇴락의 집적층을 만들어내는 인식과 실천의 망각으로 빠져들게 함으로써 그것을 걷어내는 닦음은 수없이 반복되는 의식의 닦음과 그때 그 목소리를 삶의 실존적 생명으로 잡고서 일어나야 한다. 지금 우리는 그러한 닦아-세움이 필요하다. 마음-닦음, 정신-닦음, 생명-닦음으로 온 세상이 두루두루 닦아-세워져 외부에서 오는 온갖 힘으로부터 자유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삼일정신은 과거의 시간적 사건을 되새기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쇠락해져 가는 인간의 이성과 세계 혹은 삶에 대한 풀어진 긴장감을 끊임없는 의식의 닦아-세움으로 밝혀야 한다. 오늘날 삼일정신을 현실을 변혁, 혁명하라는 세계사적 의미 혹은 계몽적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그런 의미에서 삼일정신은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인 삶, 스스로 타협하려는 의지, 이기주의와 무감각, 몰이성과 비도덕에 대한 저항으로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13-03-22
  • 님비(NIMBY)에서 핌피(PIMFY)로 공생공영의 길 모색
    상생의 번영, 지속가능한 발전이 되도록 만들어 나가는 것이 정치가 나가야 할 방향이 아닌가 ▲ 박돈규 의원(대구광역시의회) 사람이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까?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서 필요한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사회성이 중요하다. 이는 조화와 공생공영을 함의하는 것이다. 나만이 좋아야하겠다면, 불편하고 나쁜 것은 누구의 몫이 되어야 하는가. 이런 불합리한 주장에 대해 모순이라고 하는 것이다.  교도소나 취수원, 쓰레기매립장이나 화장장과 같은 공공시설의 설치에 대해 그 필요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환경오염이나 부동산가격 하락 등의 이유로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소위 님비(NIMBY, Not In My Backyard) 현상으로 전국이 몸살을 앓고 있다.경기도는 주민기피시설 설치로 인한 지방자치단체 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주민 지원과 피해 보상을 명문화하는 내용을 담은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서울시가 경기도 내에 설치·운영 중인 폐기물처리시설, 납골당, 화력발전소 같은 주민기피시설로 피해를 보고 있는 경기도 지역 주민들의 피해를 보상하고, 님비현상으로 진전이 없는 신규 기피시설이 원활하게 건설된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이다.대구에서도 님비현상으로 갈등을 빚었다. 지난해 대구기상대의 두류정수장 이전계획이 고도제한 문제를 들고 나온 달서구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대구시의 사업추진이 잠정 중단됐다. 또한 대구교도소 이전에 따른 입지선정의 문제나 취수원 문제로 중앙정부, 경상북도, 구미시 간에 갈등을 빚고 있다.님비현상은 쓰레기매립장, 소각장, 화장장, 교도소, 하·폐수처리장 등 전통적인 기피시설을 넘어서고 있다. 최근에는 취수원, 노인요양시설, 장애아동학교와 같은 사회복지시설까지 대상이 확산되는 현상으로 심각성이 커지고 있다. 좋은 것을 가까이하고 혐오스러운 것을 멀리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기에 일방적으로 님비현상을 매도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피해 당사자가 되면 비슷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물론 공공성을 저버린 극단적 지역이기주의는 배척되어야 한다. 그러나 적정한 보상 없이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하면서 기피시설이 자기 지역에 있는 것을 좋아할 주민은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수반되는 물적·심적 피해에 대해선 합당한 보상과 반대급부가 있어야 한다. ▲ 대구텍 증설투자와 MOU체결 님비현상으로 인한 갈등의 주요 원인을 살펴보자면, 먼저는 기피시설의 설치나 이전의 필요성에 대한 홍보 부족의 문제가 있다. 또한, 지역민의 의견수렴과 계획수립 과정에서의 주민참여가 미흡하다는 점이다. 아울러 잠재적 위해시설에 대한 환경피해 우려, 경제적 손실에 대한 피해의식, 부적절한 입지선정 등도 원인으로 분석된다. 갈등주체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자치단체 사이, 자치단체와 지역주민, 민간개발주체와 지역주민 등으로 다양하다. 이제 주민기피시설을 님비에서 핌피(PIMFY : Please In My Frontyard)로 해결하는 일은 행정의 당면과제가 됐다. 핌피는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수용 또는 유치에 나서는 현상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민주성과 능률성을 확보해야 하며, 다음 몇 가지 사항을 고려해 볼 수 있다.첫째, 수익자부담 원칙에 근거하여 사회적 공동부담의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 이는 기피시설을 신설·확장·축소 또는 폐쇄하고자 할 때, 도시 전체 차원에서 부담과 이익이 공평하게 분담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기피시설의 설치로 인해 피해가 불가피한 입지 지역민을 배려해야 함은 당연한 전제가 되어야 한다. 이런 시설로 인한 피해와 수혜가 분명하기에 그에 따른 공평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따라서 수익자 부담-피해자 수혜 원칙이 철저히 확립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최근 선진국에서는 기피시설이 들어서는 지역의 주민에게는 직접 금전적 보상을 해주거나, 지역 우선 개발, 세금 감면, 일자리 제공 등의 간접보상을 해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피시설 입지에 따른 손실을 보험으로 보상해 주는 경우도 있다. 국내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의 경우, 전북 무안군은 유치를 결사반대하였으나 경북 경주시는 양성자가속기 배후단지조성, 공공의료기관 확충, 한우브랜드 육성사업, 축구공원 조성, 전기요금 및 TV수신료 지원 등 사회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인센티브 제공을 조건으로 주민 대부분이 유치에 찬성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매니페스토 약속대상을 수상받는 박돈규 의원 둘째, 계획과정에서부터 주민참여와 행정정보 공개의 내실화가 필요하다. 기피시설 사업에 따른 갈등요인 중의 하나가 지역주민들에게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고 단기간에 일방적으로 사업계획을 결정하고 추진하는데 기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공익과 사익이 최대한 충족될 수 있는 타협의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주민과 같이 호흡하는 투명하고 합리적인 신뢰행정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지역주민, 관련 전문가, 정책입안자 등이 함께 지역 전체의 이익과 지역주민의 이익을 적절히 조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 도출되어야 한다. 지역주민의 이해와 관련자의 협조 없이는 이제 어떠한 정책사업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신규 님비유치사업으로 인하여 선투자사업(관광, 경제 등)에 영향을 주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셋째, 공익을 위해 사익의 양보가 불가피하다면, 직·간접 보상을 통해 기피시설 입지에 따른 실질적인 보상체계의 수립이 필요하다. 앞에서 언급한 수익자부담 원칙의 측면에서 볼 때, 기피시설 설치에 대한 미래의 재원확보를 위해 특별기금 조성에 긍정적인 검토가 있어야 하겠다. 특별기금은 장기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피해발생에 대비할 수 있고, 개발이익의 환수를 통해 피해지역과 인근 주민에게 보다 많은 혜택을 줄 수 있다.정리해보자면 지자체가 종합적인 차원에서 정책을 수립하고, 시민에게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충분한 인센티브까지 제공한다면, 주민기피시설 설치와 관리는 보다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박돈규(朴敦圭)현재 대구광역시 달서구 제1선거구 새누리당 소속 제6대 대구광역시의회 의원으로 경제교통위원이다. 경북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행정학 석사)하였으며, 효성그룹 기획, 관리, 판매부 부장(20년), 제16, 17대 국회의원 보좌관, 달서구의회 운영․사회도시위원, 복지환경위원장, 제5대 대구광역시의회 교육사회․운영․경제교통위원, 제6대 대구광역시의회 전반기 경제교통위원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영진전문대학의 겸임교수이기도 하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3-03-06
  • 근사(近似)적 진리로는 행복이 있을 수 없다
    종교를 갖고 신을 믿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종교를 갖고 신을 믿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행복은 종교의 행복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적 종교에서 하느님은 언어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은 언어의 힘(force), 빛(light), 능력(power)으로 보기도 합니다. 때로는 좀 범신론적으로 하느님을 의미 자체로, 언어의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인간 삶의 예지성(intelligibility)으로 보기도 합니다.”_돈 큐피트(Don Cupitt)“종교 신자가 자기네 믿는 종교의 글월을 열심히 믿고 존경하면서도 아무 큰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 가장 큰 까닭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높이는 나머지, 사람의 참된 힘씀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는 데 있다. 하나님 말씀이야 물론 하나님이기 때문에 역사를 꿰뚫고 서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오려면 반드시, 예외는 하나도 없이, 꼭 참된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만 온다. 통한다는 것은 거친단 말, 꿰뚫는단 말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람의 마음을 뚫고 거쳐 나와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그럼 그것을 뚫고 거쳐 나오는데 그 빛깔이나 울림이 거기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악기 따라 다른데 음악의 맛이 있듯이... 그 사람스러운 점을 빼면 종교 경전은 집 없는 울타리, 곡조 없는 소리 같이 크기만 무섭게 크지 속은 아무것도 없는 싱거운 것이다.참된 사람이 되자는 정성 없이 굉장한 능력, 놀라운 신비만 바라는 종교가, 마음의 정도가 낮은 사람들에게만 있고, 그리고 그 종교가 어떤 것임을 오늘도 잘 볼 수 있지 않은가? 사람이 참 사람이 되려 힘쓰고 애쓰면 하나님에게 가 닿을 수 있어도, 사람 되잔 생각하기 전 하나님부터 되려면 짐승 중에도 가장 더럽고, 독하고, 간교한 뱀같이 되어 버린다. 그것이 잘못된 종교의 그림이다. 문제는 그저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어떻게 뚫었나,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한테 뚫리었나 하는 데 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19, 한길사, 1985, 20-21쪽)종교 경전이 초월자의 궁극적인 뜻이 활자화되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정작 그 활자가 초월자의 것이었음을 애초에 증명해내는 몫은 유한한 인간에게 달려 있다. 다시 말하면 말해진 말(입-말)과 씌어진 말(글-말)의 진정성은 그것을 읽고 받아들인 인간의 몸 말(몸짓poiesis/몸행위)에 의해 밝혀진다는 의미다. 입-말과 글-말이 종교인의 마음을 꿰뚫어 전달되어진 언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초월자의 마음이다. 따라서 초월자의 마음은 종교인의 몸짓/몸행위에서 거룩한 “빛깔과 울림”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 경전의 활자는 사어(死語)나 다름이 없다. 함석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 빛깔과 울림”이란 참된 사람이 되는 것, 참을 진리의 구현으로 보고 참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삶의 자세를 말한다. 초월자의 마음에 의해 입혀진 삶의 빛깔, 그리고 말에 의해 일어난 삶의 파장은 종교인으로 하여금 ‘다름’을 보이게 만드는 중요한 몸 말/몸짓/몸 행위이다. 따라서 종교의 능력은 기적이나 신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참-사람-됨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빛깔과 울림은 “종교의 그림”이다. 그림은 초월자에 대한 거룩한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진 놀이다. 그런데 그 놀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초월자의 마음이 인간을 꿰뚫어 마음에서 일어난 빛으로 살아가는 생명의 놀이다. 그 놀이를 잘 할 수 있어야 참 사람이 된다. 종교가 1차적으로는 초월자에 대한 인식과 규범, 그리고 진술에 목적을 둔다 하더라도, 그것은 곧 불트만(R. Bultmann)의 주장처럼 인간에 대한 이해와 진술(이야기)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참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한 인간학, 즉 신과 같이 되자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기 위한 방편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이 되자는 본질이 되어야 한다. 얼마 전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한 ‘2012 한국인의 종교 생활과 의식조사 결과’를 보면 비종교인의 90%가 종교를 가질 의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신을 믿는다는 비율은 38.5%, 영혼을 믿는다는 비율은 36.5%로 미미하다. 이러한 결과로 보자면 일반 대중들의 종교에 대한 선호도가 자꾸 낮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진단을 내려 볼 수 있겠지만, 우선은 종교와 종교인 자체가 참 인간으로서의 표지를 보여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종교의 밑그림을 잘 드러내 주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B. Russell)이 혹독하게 비판하듯이, 어쩌면 뭇 사람들에게 “인류는 이제 황금시대의 문턱에 서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첫째 이 문을 막고 있는 괴물을 무찌를 필요가 있는데, 그 괴물이 바로 종교”라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신이 되려고 애를 쓰기보다 참 인간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종교의 지향성, 즉 신과 같이 되기 위해서는 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다 보면 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를 갖고 신을 믿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행복은 종교의 행복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종교의 행복은 신자를 많이 확보하고 성장한다고 해서 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믿는 인간이 신에 의해서 그려지는 깨달음, 즉 신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는 사람, 참 인간의 바탕을 보는 사람이 많아지면 된다. 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믿는 가시적 복보다 더 무게를 두어야 할 것은 신이 내 안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내 안을 비추고 있는가, 경전의 빛이 어떻게 나를 조명하는가, 내가 믿는 신만으로 즐거워할 줄 아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신을 믿는 사람의 글속(건전한 종교인식능력, 종교적 자율성, 종교 행복의 이해) 수준이 아닐까?“오늘날에는 인류가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위험한 맹수는 인간이다” -버트런드 러셀김대식_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3-02-20
  • 자연은 인간의 미래다
    인간과 자연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지금 같은 인류의 위기를 초래지도자는 사람과 자연에 대해서 똑같이 공감의 정치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민주주의, 이는 사람들입니다. 특권층이 아닌 보통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가 도처에서 최상층 부자들과 극빈자들의 기막힌 격차를 목도한다면, 민주주의는 뭔가 행동하고 또 해야 하며, 극빈층이 그들의 권리와 자유를 누리고 살 수 있게 도와야 합니다. 정치는 이런 것을 위해 하는 것이며, 우리는 여기서 정신적 영역을 회복합니다.”(달라이 라마, 스테판 에셀, 임희근 옮김, 정신의 진보를 위하여, 돌베개, 2012) ▲ 서구적 사고를 가로지르는 ‘나’와 ‘나 아닌 것’, 인간과 자연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지금 같은 인류의 위기를 초래했다. 사르트르(J. P. Sartre)는 “인간은 인간의 미래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실존적 의식과 행위들에 따라서 인간 삶의 존재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필자는 이 말을 바꿔서 “자연은 인간의 미래다”라고 말하고 싶다. 먼 안목이 아닌 가까운 안목을 가지고 경제학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경제의 토대는 자연이다. 자연을 통해서 노동이나 재화가 발생한다. 진공 상태에서 정치경제 시스템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생태학(ecology)과 경제학(economics)의 어원인 ‘오이코스’(oikos)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스테판 에셀(S. Hessel)이 적시하듯이, 함께 유기적 생명체인 자연을 정치적 대화 영역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구적 사고를 가로지르는 ‘나’와 ‘나 아닌 것’, 인간과 자연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지금 같은 인류의 위기를 초래했어요. 모든 것이 대화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환경’(Umwelt)이라는 단어가 이미 대화를 암시해 주고 있는데도 말이죠. 게다가 우리 서구는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교는 인간에게 지구를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하고 있어요. 이런 식의 사고를 벗어나야 합니다. 이런 사고는 파괴와 착취로 직결되기 때문이지요.”그러므로 인간의 복지와 경제발전, 정치 쇄신에 밀려 자연이 정치 무대의 뒷방으로 밀려나서는 안 될 것이다. 정치 지도자는 자연환경 보전도 복지와 행복의 본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도자는 자연이야말로 오히려 정치경제의 무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생명적인 것뿐만 아니라 비생명적인 것조차도 한 나라의 백성들과 함께 모두 무대 위에 있는 주연들이다. 그런데 그런 공통적인 무대가 인간의 자의적인 해석과 이념으로 파괴가 된다는 것은 우주 공동체적 토대가 사라질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의 장도 더불어 상실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스테판 에셀이 말한 ‘공감’의 환경정치적 사유가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공감(Mitgefuehl)의 ‘mit’는 우리가 뭔가를 직접적으로 대하기 전에도 이미 모든 것들과 관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나는 공감을 새로운 공생 정치의 토대로 여기고 있습니다. 공감은 글로벌 사회를 수립하는 데 필요한 연대적인 관계를 만들어 주지요.”공감은 연대적 사유와 실천을 가능하게 해주는 관계적 태도이다. 공감이 현실 정치적인 측면에서 타자에 대한 존엄성을 기반으로 하겠다는 의지와 정서의 표현이라면, 지도자는 사람과 자연에 대해서 똑같이 공감의 정치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정치와 자연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 달라이 라마(Dalai-Lama)가 말했다시피, 지도자는 우리 모두가 ‘큰 우리’ 속에 살고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계속해서 스테판 에셀의 말을 인용해보자. “자연과 더불어 스스로를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희망이요, 폐쇄적인 태도로 스스로를 자연과 단절시키며 자연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 위험이 된다.” ▲ 지도자가 백성을 생각하는 만큼 자연에 대해서도 생각한다면, 그 연민의 정치가 궁극적으로는 나라를 더욱 풍요롭고 살만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지도자는 환경파괴가 인간을 파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를 위기에 처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친환경적 사회, 친환경적 국가를 건설하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백성과의 교감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교감이다. 또한 백성에 대한 연민과 자연에 대한 연민은 이어져 있다. 그러므로 백성을 생각하는 만큼 자연에 대해서도 생각한다면, 그 연민의 정치가 궁극적으로는 나라를 더욱 풍요롭고 살만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장차 지도자가 될 사람은 ‘백성의 정치적 욕망은 자연에서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치 지도자는 식량 전쟁, 물 전쟁, 석유 전쟁 등 매우 중대한 정치적 사안들을 잘 극복하고 대처해 나가는 능력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더더욱 백성의 자연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지도자가 요구되는 것이며, 그 지도자는 백성의 자연을 위한 정신적 전투를 치를 수 있는 환경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은 “사람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면 사람은 귀하고 사물은 천하며, 사물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면 사물은 귀하고 사람은 천하다. 하지만 하늘로부터 보면 사람과 사물은 균등하다”라고 일갈했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쇄신, 경제발전, 복지를 운운하지만 정작 자연의 목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지도자가 아니라 백성을 하늘로 여기듯, 그 하늘의 마음 또한 잘 읽을 줄 아는 현군(賢君)이 지도자가 되어야한다. 스테판 에셀은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여, 공감, 감정이입, 이해심-한마디로 인류의 단합-입니다.” 이것은 이제와 향후의 모든 지도자와 정부에게 필요한 메시지가 아닐까.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2-12-17
  • 생각에 대한 ‘생각’을 근원적으로 묻다
    자기 주체로서의 생각의 정립이 없이는그 어떤 것에 대한 현재도 미래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 대학 강의실 모습 "‘생각’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기 정립이자 자기 객관화이다." 요즈음 서점가에는 대선을 앞두고 각 대권 후보자들의 생각을 알고 싶어 하는 국민들의 욕구에 부응하여 이른바 정치가의 ‘생각’을 풀어 놓은 책들이 인기다. 후보로 나온 것도 주목을 받는 터이지만, 그들의 정치관을 활자로 인쇄한 책들이 특수를 누리고 있으니,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만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대중들이 책의 표제어가 드러내주는 정치인들의 생각과 인간됨을 읽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표심을 품고 있는 대중들 자신의 “생각”이다. 대선 후보자들의 생각이 자리 잡은 터를 간파하고, 유권자 자신의 생각을 올바르게 세우려면 주체적이고 사려 깊은 생각이 우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생각이란 스멀스멀 피어나는 깨달음, 혹은 깨우침이다. 그런 생각은 단시간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생각 가운데로 나를 앞세우고, 생각 안에 놓여 있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생각한다’고 해서 ‘생각하는 것[行爲]’이 아니라 ‘생각해야’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사유행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몸으로 부딪히는 모든 문제를 확연히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생각을 향해 마음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마음을 열어 놓는다는 것은 무방비 상태로 무작정 세계에 방치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 하나의 사물, 하나의 현상에 머물거나 매몰되지 않고 빠져 나옴과 동시에 자신을 그 상태에 끼워 넣어 항상 깨어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기 보존의 본능과 자기 욕구 충족으로 인해 매우 이기적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경우 다만 생각이지 ‘생각함’이 아니다. 생각은 일순간의 욕구와 욕망으로 세계에 시선을 두었다가 거두어들이는 단순한 스침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표피적이다. 여기서 더 들어가야만 ‘생각함’이라는 실제적인 사유 방식이라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주체적인 ‘생각함’이 없이 타자의 생각만을 읽어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주체적 ‘생각함’이 선행되고 난 후에 타자의 생각 읽기와 타자와의 ‘생각 나눔’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생각인지 타자의 생각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단지 자신의 욕구와 욕망으로 인해 그것이 자신의 생각이라 단정 짓고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자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난 바가 없다. 오리무중이다. 그런데 대중들이 그 생각을 알아보겠다고 이미 활자화되어 있는 고정된 문자를 읽는다면 행간을 잘못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의 생각을 먼저 묻고 ‘생각함’이나 깊은 ‘사유행위’를 통해 사태를 판단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생각은 대상으로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생각으로 존재하게 하여 생각 자체의 본질을 바라보는 데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의 생각 소비 행위는 인간의 생각을 대상화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생각의 생각다움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과 끊임없는 투쟁(Streit)이 있어야 하고, 타자와의 생각 다툼과 균형 속에서 탈은폐적인 사유의 밝힘이 있어야 한다.생각은 길어 올려 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생각은 숨어 있지 않음이다. 그러나 생각은 밝음 가운데 드러나기 위해 숨어 있어야 한다. 밝힘과 숨김의 모순된 역설이 생각을 어렵게 한다. 하지만 이것이 생각이 처한 운명이다. 생각은 그러한 운명 속에서 발버둥 치면서 결국 밝음으로 나와 새로운 역사를 전개해야만 한다. 생각의 수립은 실존의 과제이다. 생각의 일어남(Geschehen)과 되어감(Werden)은 인간의 원천을 새롭게 하는 가능성이다. 따라서 ‘생각’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기 정립이자 자기 객관화이다. 그것이 없이 타자와의 관계적 진리 발현과 새로운 역사 개현 혹은 도약은 불가능하다. 자기 생각에 대한 생각의 대상성에 따른 주체적 정립이 없이, 타자의 세계로 뛰어듦은 자칫 근원(Ursprung)으로서의 생각의 터를 망각하게 될 수도 있다. 생각은 언어이고 행위이며, 체험이고 역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의 근원, 그것의 시작은 자기 생각의 정립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생각은 감사다.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해본 적이 있는가? 생각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감사요, 자기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 곧 증여이다. 이 생각을 지금 포기하고자 하는가. 만일 그렇게 된다면, 생각 곧 자기 주체로서의 생각의 정립이 없는 곳에서는 그 어떤 것에 대한 현재도 미래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2-10-12
  • 함석헌의 종교문화비판과 종교평화(2)
    생각은 소통하는 데 있습니다. 내 생각만 고집을 해서는 발달이 없습니다. ▲ ‘더불어’가 된다는 것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고, 사랑하게 될 때 ‘더불어’가 될 수 있다. 모든 종교는 자신들이 신앙하는 신의 실재 안에서 하나로 통(通)한다. 이는 본줄기로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며 사랑의 관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는 유전자처럼 마치 하나인 듯이 살 수 있고, 하나인 것처럼 공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실상은 모두가 개별자이지만, 그 개별자를 하나로 이을 수 있는 것은 신의 존재 안에서 그 신이 추구하는 사랑으로 물들어 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 가능의 조건이다. 여기에서의 존재자의 가능 조건은 최소한 ‘윤리적 종교’에 부합하는 ‘사랑-안에-있음’이다. 윤리적 종교는 신과 인간의 관계적 행위, 인간과 인간의 관계적 태도나 습관(mores)으로 일관하는 통일성을 부여한다. 이것이 없다면 종교의 생명력은 자신의 존립 기반 자체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나아가 평화와 통일은 관계의 문제인데, 이것은 사랑의 현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가 되자, 즉 사회적 평화, 정치적 평화, 종교적 평화, 국제적 평화, 이념적 평화, 남북한의 평화를 이룩하자는 것은 결국 ‘사랑 안에서, 사랑을 통하여’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사랑은 서로 다른 존재를 존중하고 포용할 줄 안다. 그러기 위한 실제적인 행동은 생각을 나누는 소통이 요구된다. “생각은 소통하는 데 있습니다. 내 생각만 고집을 해서는 발달이 없습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368-369쪽) 사랑은 자기가 아니라 타자를 더 생각하고 배려하기 때문에, 그 사랑의 힘을 통하여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고 이해하고자 한다면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막히지 않은 속트임[소통]이 일어난다. 그런데 여기에도 막힘[불통]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내 생각만을 고집하는 것인데, 그 경우에 하나로 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막힘은 분열의 원인이 된다. 나아가 불통은 너와 나로 갈라서게 한다. 상호간의 막힘은 신을 욕되게 한다. 신을 욕보이는 종교는 이미 신과의 막힘뿐만 아니라 서로의 막힘으로 인해 불통의 극단적 현상을 초래한다. 바로 종단, 교파는 그러한 초월자와의 불통, 상호주관적 불통을 해소하지 못하고 하나가 여럿으로 된 것에 대한 결과이다. 불통은 갈등이 증폭되어 불화하게 되고 반목을 가져온다. 그 모든 원인은 신 안에서의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윤리적 종교가 되지 못해서이다.너와 나의 차이를 모두 없애고 같은 계통, 같은 무리가 되어 같은 철학․신앙․사유․행위 등으로 전체주의화하자는 말이 아니다. “모든 종교에서 윤리와 사랑만큼은 기저에 살아있어야 그 정당성을 부여받게 된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더불어’가 된다는 것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고, 사랑하게 될 때 ‘더불어’가 될 수 있다.생각의 넓이나 깊이, ‘생각-함’의 사유 방식과 행위는 서로 다를지라도 사랑 안에 녹아들면 그 지평을 공유할 있게 된다. 생각은 자신의 삶의 지평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지만 사랑은 어떠한 지평이라도 넘어서서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다른 생각, 입장, 주의, 주장을 넉넉하게 품을 수 있다. 따라서 종교는 사랑 안에서 윤리적 이성을 가지고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2-09-2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