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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1-07-02
  • 한국화학연구원, 스펀지로 열을 전기로 바꾸는 소재 개발
    [타임즈코리아] 구부러지고 늘어나고 압축이 돼, 열이 있는 곳 어디에든 붙여 열을 전기 에너지로 바꿔주는 열전소재가 개발됐다. 완전히 유연한 열전소재가 개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화학연구원 화학소재연구본부 조성윤 박사팀은 열원의 형태와 관계없이 어디든지 붙일 수 있는 ‘스펀지형 열전소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열을 전기로 바꿔주는 소재로 온도 차에 의해 전기가 발생한다. 일례로 발전소 굴뚝에 열전소재를 부착하면, 굴뚝 안쪽의 고온(150도)과 바깥 상온(30도)의 온도 차로 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구진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스펀지에 탄소나노튜브 용액을 코팅했다. 탄소나노튜브를 물리적으로 분산시킨 용매를 스펀지에 도포한 후, 용매를 빠르게 증발시킨 것이다.  제조방법이 간단해 대량생산에도 적합하다. 모양을 만들어주는 틀 없이 스펀지를 이용해 열전소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거푸집 없이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셈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열전소재는 무기 소재로 만들어진 탓에 유연하지 않았다. 사람의 몸이나 자동차 등 다양한 곡면의 열원에 붙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제조공정 자체도 까다롭고 복잡하다. 전 세계 연구진들은 유연한 열전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탄소나노튜브에 주목했다. 탄소나노튜브는 전기전도도가 높고 기계적 강도가 강하며, 지구상에 풍부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팀이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해 유연한 열전소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스펀지와 유사하면서도 높게 쌓을 수 있는 탄소나노튜브 폼(foam)을 만든 것이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압축 안정성 실험 결과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는 “지금까지 개발된 유연한 소재는 지지체나 전극의 유연성을 이용한 것”이었다면서 “소재 자체가 유연한 건 이번 스펀지형 열전소재가 처음이고 제조방법도 간단해 대량생산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개발된 스펀지형 열전소재는 열전소재의 전기적 특성과 스펀지 고유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10,000번 반복해도 형태는 물론이고 전기적 특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압축 전과 압축 후의 저항값이 각각 1.0Ω(옴), 0.3Ω으로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이는 스펀지에 기공이 무수히 많아 변형에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펀지의 탄성을 이용한 응용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경우, 압력이 커질수록 발전량도 덩달아 높아졌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했을 때 최대 2㎼(마이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하여, 압축 전과 비교해 발전량이 10배 정도 증가했다. 이에 대해 연구논문 1 저자인 김정원 박사는 “스펀지의 압축되고 복원되는 탄성을 활용해 몸에 부착하는 웨어러블 기기에 적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수한 기계적 성질이 요구되는 자동차 등에도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정원 박사는 “열전소재 분야 전망도 밝다. 현재 자동차에서 사용하고 난 후의 열이나 온천수를 이용한 열전발전 시작품의 실증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관련 기술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성과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에너지 소재 분야 권위지인 『나노 에너지(Nano Energy), IF:16.602』8월호에 게재됐으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창의형 융합연구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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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
    2020-09-22
  • 종속될 것인가, 회복할 것인가
      [타임즈코리아]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느린 사람은 어찌 살라는 건지, 넋이 나갈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많은 것들이 바뀌곤 한다. 이런 현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변화는 순리이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논리가 더 우세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약육강식이 진리이어야 한다. 여기에 동의할 사람들은 모두 강자라야 가능하다. 적어도 변화가 자연에 의한 것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이 자초한 변화에 순응하라는 것은 무조건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이 그만큼 편리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만큼의 행복을 확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비대 면화되어 가고 있다. 이것을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변화라고 동의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코로나19에 따른 불가피한 강요인 셈이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에 따른 변화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만남에서 누리고 싶은 행복은 사람의 DNA 속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다. 현장 공연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감흥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런 노력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 개인의 욕심이 아니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예술을 가상의 세계에 가두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 만약 가상의 세계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우리가 굳이 직접 여행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영상이나, 증강현실 그리고 가상현실 시스템만으로도 더 자세하게 보며 실감 나는 장면 속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온라인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계기로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콘텐츠를 구별하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가 파산했다는 기사가 유난히 아프게 느껴진다. 과학과 기술이 육체적 요소라면 문화와 예술은 정신적 요소이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난국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문화와 예술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예술의 존엄과 가치는 예술가들이 지켜 내야 하는 것이다. 대중화, 실용화 이런 측면들은 굳이 지키려 하지 않아도 어느 시대에나 자생해 왔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변하지 않게 하는 일,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려는 힘은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자극하여 거대한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예술의 힘이고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망가트려놓은 만남과 관계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 속에 내어주고 거기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만남과 관계를 열망하는 DNA와 인간의 지혜가 코로나19보다 더 강함을 증명하며 예전과 같은 역동성을 회복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왔듯이 이 또한 극복해 낼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코로나19를 이겨낼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이전과 같은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예술가들이여, 우리는 과학자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감동을 선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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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6
  • 인문학은 이론이 아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본질을 찾아 나선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사변적으로 흘러가면 이념이나 현상적인 집착으로 이탈하게 된다.   이런 행태는 수많은 증오와 폭력을 낳으며 씻지 못 할 마음의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남길 뿐이다.   인문학적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삶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타자와 참된 관계를 형성하는 정신을 의미한다.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사람은 ‘너’와 더불어 ‘나’라는 관계를 통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조화로움의 아름다움을 통해 공감함으로써 상대방을 이웃으로써 인식하고 수용하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문학, 역사, 철학, 종교 등의 이론을 습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그들의 아픔과 울분, 사랑과 기쁨을 공유하는 공감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인문학은 ‘너’와 더불어 존재하는 ‘관계’로서의 ‘나’를 인식하고 사랑(자비, 나눔, 배려, 공감)으로 소통하는 지혜를 깨우치고 표현하게 하는 모든 문화, 사상, 지식 등을 말한다.   인문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진리를 찾고 따른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온전히 깨닫고 그 사랑을 최선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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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정보
    2016-03-18
  • 현대인 허균이 살았던 과거의 삶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동부승지, 삼척 부사,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허엽(許曄)은 30년간이나 관직에 머물렀는데도 생활이 검소했고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한 인물이다.   허엽의 호는 초당(草堂)이다. 오늘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초당 순두부의 본고장이 바로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이다.         이곳에서 허엽의 아들 허균(許筠, 1569~1618)이 태어났다. 교산(蛟山) 허균은 명문가의 자제로 천재적인 두각을 나타내 모든 것이 보장된 인물이었지만, 불우한 계층을 대변하는 삶을 선택했다.   이런 까닭으로 허균은 조선시대 반역의 상징 같은 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평등사상에 눈을 뜬 허균의 급진적인 개혁 사상은 오늘날에 와서는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단과 반역을 도모하는 사회전복세력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쓴 《홍길동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허균이라는 인물을 볼 때, “역사는 현대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항상 새롭게 해석되고 평가될 수 있기에 역사를 보는 모든 이들의 시각은 상대적이다”고 말한 영국의 정치학자이며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 1892년~1982년)의 견해가 더욱더 공감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6-03-15

실시간 학술정보 기사

  • 세계에 저항하는 정신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간 정신의 온전성, 삶의 숭고함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세계의 관념을 상대화시키고, 세계의 악과 타협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세상을 비워내고 부정하면 무엇이 남을까요? 무(Nichts, 無), 실재의 허무뿐일까요? 세상을 거부하고 그것의 객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존재론적 위상의 문제와 세계의 거부는 세계 그 자체의 퇴폐에 있습니다. 따라서 존재 망각, 존재의 퇴락이 세계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세계에 대한 저항은 필연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세계가 무사유로 일관하는 욕망의 동체라면 주체의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을 위해서라도, 정신의 히스테리 가능성을 떠나야 합니다. 함석헌이 “세상을 버리면 정신값이 돌아오고 정신적 보화가 돌아온다.”고 했는데, 세계의 구성은 정신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만큼, 세계가 정신적 수치(羞恥)를 안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 순간 정신이 갖고 있는 가치, 정신은 수치감을 견딜 수 없습니다. 타락하고 병들어버린 세계는 정신이 대면할 수 없기에 정신값의 고양을 위해서라도 세계는 버려져야 하고, 정신에 의해서 비워져서 삶을 곧추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정신이 세계를 버린다고 해서 분열증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체의 존재론적 위상이 달라지고 삶은 더욱 세련될 것입니다. 더욱이 세계를 버린다고 해서 정신과 이분화되어 세계를 타자화시키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세계는 세계로서 존재할 뿐이지만, 더 이상 정신적 삶과는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기에 세계를 무화시키는 것뿐입니다.   ▲ 세상을 버리면 정신값이 돌아오고 정신적 보화가 돌아온다.     그렇게 될 때 함석헌이 말한 ‘영생, 즉 세계와는 동뜬 살림’의 삶이 도래할 것입니다. 퇴락한 세계, 정신과 균형, 그리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충동적인 세계를 무화시키는 순간, 새로운 삶의 세계가 열립니다.   영 딴판의 세계, 정신의 무력함을 극복하고 펼쳐지는 삶이 생겨날 것입니다. 영생은 지금의 세계와는 다른 모습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영생은 의미가 없습니다. 영생은 사물성(thingness)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그리워하는 유희적 삶을 대망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다만 정신의 수치, 정신의 결여, 정신의 외설이 승화되어 더 이상의 의심과 의문이 남지 않는 순수한 정신의 세계, 정신적 삶의 지극함일 것입니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인간이 바라고 꿈꾸는 궁극의 삶은 바로 이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종교인은 ‘따라나서야’합니다.   종교적 창시자의 삶을 부끄러워하거나(선망) 욕망의 화신인 것처럼 생각하여 추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인에게 있어서 창시자의 추종은 ‘질문’입니다. 나없는 초월자, 그리고 앞선 창시자의 삶과 정신세계에 대한 질문을 통한 해답 찾기가 되어야 합니다. 질문은 나를 바로 세우고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종교적 태도이지만, 그것이 가지는 목표는 결국 나를 없애기 위한 자기 심층의 노출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창시자의 본의와 부합하여 따라나서기가 됩니다.   따르면서 자신이 서 있는 근본적 자리가 독단이나 권력의 자리가 아닌지를 묻고 선 주체의 위상을 올바로 정립해야 합니다. 그래서 따라나설 때는 내 것이 있다는 소유 관념, 내가 있다는 존재 관념도 버려야 합니다.   소유는 주이상스(Jouissance)입니다. 가짐을 통해서 마음과 몸의 향락을 즐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이상스는 인간 정신의 공백과 결여와 다르지 않습니다. 주이상스는 나의 정신적 결핍의 감정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이상스는 정신적 죄의식의 아프리오리(a priori)한 결과입니다. 인간의 무의식은 이 주이상스를 갈구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결핍으로 남아 있는 잔여물과도 같습니다.   “욕망은 항상 욕망의 욕망”일 뿐입니다. 지젝은 말합니다.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속성들을 지니고 있으며 일련의 효과들을 산출할 수 있는, 그러한 역설적인 기괴한 실체로서 실재를 규정한다면 탁월한 실재는 향락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   향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수많은 외상적인 효과들을 양산한다.” 향락은 비어 있음이자 실체가 없습니다. 따라서 소유 관념, 존재의 관념을 무로 돌려야 진정한 삶, 참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도약이고, 초약(超躍)입니다. 초월하면서 도약한다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나 철학이 “넘어 뜀” 혹은 넘어-뜀이 없이는 그 궁극의 자리에 다다를 수가 없습니다. 절대 생명, 곧 영생을 얻으려면 상대적 세계를 넘어서 절대적 세계로 뛰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세계와 정신의 양립불가능성, 불일치에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정신과 세계가 분열되고 세계 때문에 정신이 사라지고, 정신으로 인해서 세계 변혁이 불가능해지는 상호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신은 타협이 없습니다. 세계가 상실되고 장벽이 된다고 하더라도, 세계가 정신을 뒤틀리게 만든다면 단순히 정신을 개량하거나 세계를 개량하는 수준에서만 그칠 수는 없습니다.   온전하고 완전한 탈바꿈,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만드는 세계에 대한 부정의 부정성만이 세계를 살리고 정신도 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세계와 정신이 유기적인 통일체로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부 아니면 전무일 뿐입니다. 부분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더더욱 정신의 방해가 되는 세계라면 세계 그 자체를 비움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인식에서나, 존재에서 비워있는 대상으로 놓아야 대립이 해소되면서 오히려 정신의 자유로움이 진리 그 자체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정신이 지향하는 것이 진리의 발현이고, 그것을 통해서 삶의 세계가 숭고해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 정신을 선택해야 합니다. 세계를 선택하면서 끊임없는 정신의 죄책감과 수치감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계는 정신에 의해서 해명되어야 하고 선함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지, 정신을 축조하는, 정신을 조작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신의 자발성과 정신의 자유, 정신의 의지를 성숙한 삶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워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본원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따라서 정신의 세계가 굴복하거나 세계의 힘에 의해서 정신이 배반하는 인간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과 영혼이 온전해야 합니다. 온전해야 한다는 것은 필연성입니다. 초월자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지켜야 하고 구현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정신 혹은 영혼이 세계와 평형상태로만 유지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정신과 의식이 항상 세계에 앞서 있어야 세계 이전의 세계, 삶 이전의 삶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간 정신의 온전성, 삶의 숭고함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세계의 관념을 상대화시키고, 세계의 악과 타협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세계로부터 이미 주어졌다고 하는 선험적 사실, 사건, 대상에 대해서도 정신은 의심의 시선을 견지해야 하며, 더불어 삶과 정신을 항상 변혁하는 해석학적 이해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신과 영혼, 그리고 의식의 온전함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 과정적, 중단 없는 과제입니다. 그것이 나의 실재, 나의 현실이 될 때까지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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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19
  • 부활, 생의 의미의 영속적 발생
      예수의 부활사건을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사건을 부정(否定)하고 무화(無化)시켜야만 개별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건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시간 속에서 하나의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어남(ereignis)이 있어야 합니다. 사건의 독특한 시간의식, 즉 역사성을 가지려면 계기적 순간(moment)으로서 현존해야 합니다. 특수한 일어남이 단순히 연속적인 현상이라면 그것을 사건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어남 혹은 사건의 발생은 눈으로(Auge) 바라봄, 눈으로 확인되는 시점(Augenblick), 눈앞에 현존함이라는 감각적·감성적 인식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의 사건을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독특하고 특별한 사건으로 바라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의 사건은 목격(目擊, Augenschein)이라는 확증과 기억이라는 실제적·역사적(Geschichte)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단지 감성적 인식이 아닌 어떤 내적인 연관성과 개념, 그리고 관념을 통한 이성적 인식과 확신으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부활사건을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그 사건은 한낱 기억이 아니라 목격이라는 체험적 확신을 가진,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분명한 사실로 믿고 있습니다. 부활 전례 혹은 부활 의례는 매번 반복됨으로써 과거의 사건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늘 현재화(presencing)하는 사건으로 고백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 사건의 발생은 눈으로(Auge) 바라봄, 눈으로 확인되는 시점(Augenblick), 눈앞에 현존함이라는 감각적·감성적 인식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부활은 나날이 죽지 않으면 발생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면 부활은 보냄(schicken)이라는 선물을 받습니다(Michael Roth, The Politics of Resistance: Heidegger’s Line,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6, 37). 죽음의 사건이 없이 부활은 보냄이 될 수 없습니다. 죽음-받음은 곧 부활-보냄이라는 형식을 띱니다. 이는 함석헌이 말하고 있듯이, 감추어진 지금에서 한 발짝 내디딤이라는 의미의 발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한 뱃길 19, 1985, 386쪽).   죽음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은 어쩌면 무(無)의 불안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죽은 이후의 실존의 모습은 예수 사건의 독특한 경험적 기록과 증언에 토대를 둔 확신이지만, 개인에게는 그 확신이, 죽음에 의한 무의 불안 속에 넣지 않는 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한걸음은 ‘의미’의 발걸음입니다. 부활사건은 발생 혹은 일어남의 현존(presencing)이라고 말했듯이, 지금 감추어진 자리를 박차고 무를 향해 내디뎌야 매순간 의미가 발생합니다. 그것이 곧 부활사건의 의미입니다. 단지 육체적 죽음과 소멸 이후에 새로운 육체를 입게 되는 신비적 사건으로만 인식한다면, 부활은 영원한 생명을 향유하려는 욕망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육체의 한계라는 생물학적 구성물을 염두에 두더라도, 육체로만 한정짓기에는 좌절이 됩니다.   부활은 의미의 사건입니다. 지속적이고 연속적인 의미의 발생이 부활입니다. 내 인생을 한 발짝씩 옮겨가도록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geschehen)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역사(Geschichte)입니다. 그것이 역사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것, 본래의 것, 특수한 것, 자신의 소유(eigen; eigentum)가 된다는 말입니다. 나아가 그것이 역사가 된다는 것은 타당한 것으로 획득되고(eignen) 입증된다(ereigen)는 뜻입니다(Michael Roth, 앞의 책, 38). 부활은 역사로써 자신에게 발생하는 실제요,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건입니다. 오직 자신의 삶을 통해서만 입증되고 확증되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개인의 역사적 사건으로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시대적·역사적 발걸음의 의미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함석헌, 앞의 책, 384쪽) 보편사적 사건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삶의 의미가 달라지고, 역사적 행위를 통해서 보냄(schicken)을 받은 자로서 의미 사건을 발생시킨다면 부활은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부활사건은 지금 숨겨져 있는 죽음을 부정(否定)하고 생의 의미를 끊임없이 밝히려는 곳에서 발생합니다. 생의 의미의 사건, 죽지 않고 일어나는 순간(Augenblick), 의미는 또 다시 우리에게 살도록 합니다. 의미의 발생, 생의 의미의 발생이 살도록 추동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부활은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성이 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능성의 차원이 아니라 현실성의 차원을 믿는 것이 곧 부활을 가져오는 법입니다. 차원을 달리하는 것, 더 높은 차원으로 생을 고양시키는 것이 부활이라고 함석헌은 말합니다. 육체적 부활의 욕망보다 우선시해야 할 것은 생의 의미의 차원을 높이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64-365쪽).   예수 사건의 독특성, 예수 부활의 독특성은 보통 사람들은 다 죽어도 예수는 결코 안 죽고 부활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생의 의미를 반복적으로 차원을 달리 하며 발생시켰고, 개인의 죽음뿐만 아니라 사회적 죽음, 국가적 죽음, 세계의 죽음을 계속 부정-부인(否認)이 아니라-하면서 삶의 긍정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건의 발생한 이야기(Geschichete)가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죽음의 부정에서 비롯됩니다. 현재(presence)는 나타나도록 내버려두는 선물(present) 안에 있습니다. 현재는 선물로써 존재합니다. 현재는 현재하도록 내버려두어야 존재합니다. 부활은 산 자에게는 여전히 현재가 현재가 되도록 하는 힘이며, 죽은 자에게 현재하도록, 존재하도록 열려진 사건입니다(Michael Roth, 앞의 책, 38). 그런 의미에서 부활사건은 미래의 사건이라기보다 현재의 사건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에게 현재가 되기 때문에, 공속성(Zusammengehörigkeit)의 시공간과 의식의 차원에서 모두 있음으로 존재합니다. 항상 있음으로 존재하는 이들에게는 믿음의 차원은 초월의 차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초월의 차원은 죽음 후의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이라기보다 새로운 의미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합니다.   죽음은 소멸과 사라짐이라는 상실입니다. 산 자는 그 상실감이 평생 트라우마가 됩니다. 그러나 죽음을 통한 죽음의 부정이 없다면 부활이라는 생의 의미 차원의 고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죽음이 예수 부재의 사건인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 부재의 사건인 듯한 그 절망의 발생을 뒤로 하고 의미의 현재를 현재화할 때 부활의 사건이 도래합니다. 죽음의 사건 속에 꿈틀대는 부활의 사건, 죽음의 사건 속에 은폐되어 있는 부활사건은 의미의 반복을 통해 탈은폐되어집니다(unconcealment).   따라서 부활사건은 생의 의미의 운동입니다. 무한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부활사건이듯이, 부활사건은 무의 심연으로 떨어지지 않고, 되레 끝없는 의미의 무한함을 통해서 무로서의 죽음을 극복하면서 살아서 일어납니다(Auferstanden). 무(無)를 이기고 무 위에서 다시 생의 의미를 세우고, 내리 무가 생의 의미를 부정하는 순간, 또 다시 그 위에 생의 의미를 세움으로써(stasis) 무는 영원히 극복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죽음으로서의 무(無)와 생의 의미로서의 유(有)의 긴장과 투쟁은 이 세계가 사라지는 순간까지 지속될지 모르나 결국 의미의 사건, 즉 생의 의미의 차원과 무에 따른 생의 의미의 변화는 예수 존재성 안에[에 의해서] 영원히 열려 있음이 된다는 말입니다. “주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나셨다”(Herr ist wahrhaftig auferstanden; 24,34). ‘믿음의 차원’에서 보면 예수의 부활은 여전히 참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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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16
  •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현실과 관념의 공속성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가 공속적 존재이듯이, 산 자와 죽은 자는 기도로 함께-있음의 존재, 함께-속해 있음의 존재가 됩니다.   예수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획기적인 의식 변화의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은 함석헌이 말하고 있듯이, 우주적인 새로운 사건이자 새로운 질서의 도래입니다. 예수 사건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분명히 존재 변화의 경험을 가지고 옵니다. 예수 사건은 존재 사건, 즉 있음의 사건이요 의미의 사건이지만 역사 속을 꿰뚫고 들어오는 예수는 인류에게 낯선 타자요 동시에 타자가 아닙니다.   그는 역사-내-존재와 만나는 순간 타자가 아닙니다. 모든 존재와 더불어 있는 공속성(Zusammengehörigkeit, 共屬性) 혹은 공속관계의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공속성은 동일자(the same, to auto) 혹은 동일성(sameness)을 전제로 합니다. 이 타자인 동일자는 존재 그 자체로서 사유되는 즉시, 시간 안에서 발생하는 즉시, 이해의 차원, 가변의 차원으로 인식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일자가 사물성(Dinghaftigkeit)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존재는 동일성 안에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존재 그 자체로서의 자기-동일성의 존재는 모든 존재자와 사유보다 앞섭니다. 타자의 목소리는 들을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없는 혹은 잘못 들을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함께 속해 있을 수도 있고, 함께 속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차이(다름)가 없지만 차이(다름)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면에서 자기-동일성은 타자이면서 타자가 아닙니다(Michael Roth, The Politics of Resistance: Heidegger’s Line,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6, 19-23).   함석헌은 ‘예수 출현에 의해서 우주에 새로운 질서가 생겨났다’고 보고 그 질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한 화해의 질서, 화해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한 뱃길 19, 한길사, 1985, 279-280쪽).   한마디로 예수 사건의 핵심은 화해라는 말입니다. 화해는 인간이 결코 홀로 있지 않음, 내던져져 있지 않음이요, 관심과 사랑의 존재임을 확증하는 예수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죽음과도 연결 지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산 자와 죽은 자가 대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예수 사건으로 인한 공속성은 궁극적인 인격체 전체의 부활의 희망을 연결시켜주는 끈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예수 사건으로서 공속성의 존재로 있음입니다. 금세기 탁월한 성서신학자요, 성공회 주교였던 톰 라이트(Tom Wright)는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잠듦’(1고린 7,39; 11,30; 15,6.8.20.51; 1테살 4,13-15)”(Tom Wright, 박규태 옮김, 톰 라이트 죽음 이후를 말하다, IVP, 2013, 47쪽)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잠듦이란 그리스도인이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리스도와 함께[그리스도에] 속해 있음(belonging together)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그가 죄인인 인간을 자신의 생명적 존재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화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화해사건이 유한한 인간이 그리스도와 공속적 존재로 있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은 예수 사건을 새 목적의 계시, 즉 세계와 인간의 진화, 질적 변화의 진보를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함석헌, 앞의 책, 281쪽). 공속성은 질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인에게 새 생활의 원리인 회개와 신앙생활을 들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함석헌, 앞의 책, 281-282쪽). 회개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름다운 쉼터에 ‘오늘’ 머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계시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사건은 이 세계와 인간을 위한 한없는 사랑의 징표입니다.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사랑과 정신의 각성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새로운 도덕을 깨닫고 삶으로 승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예수 사건이 인류가 살아가는 방식, 생각을 바꾸도록 한 것입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은, “신약성경의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늘 어떤 장소가 아니라, 어떤 사실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장소(하늘)가 아니라,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즉 ‘오는 시대’가 ‘현 시대’ 속을 뚫고 들어와, 저 멀리 형체도 없는 ‘하늘’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이 땅에서 새 세계를 열리라는 것”(Tom Wright, 앞의 책, 94-95쪽)이라는 점입니다.   새로운 세계의 열림을 가능하게 했던 예수 사건과 그의 행위는 역사를 뚫고 들어온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은 구원의 사건을 경험하고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는 행복을 얻습니다. 새로운 세계는 결국 이 시대가 ‘신앙의 시대’로 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함석헌, 앞의 책, 281쪽).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죽은 이들은 하나님이 그 생명을 유지시킨다.’(Tom Wright, 앞의 책, 115쪽)고 믿는 것입니다. 신앙의 시대는 모든 익명적인 존재들을 포함한 생명적인 것들의 생명의 시대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공통의 생명적 존재가 예수 사건과 공속적 존재임을 경험·인식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현대는 위기의 시대, 위험의 시대입니다. 표류하는 인류에게 좌표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함석헌은 말합니다. “현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요구한다.”(함석헌, 앞의 책, 283쪽)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독보적 존재, 독단, 독재성을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시대적 존재의 기반, 시대의 목표와 목적을 두는 잣대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로 수렴되는, 그리스도를 목표로 인식하는 차원을 말합니다. 모든 존재는 그에게로 환원됩니다. 모든 존재는 그에게로 향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타자가 됩니다. 우리와 같으면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타자에게 향하는 기도는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를 긍정할 뿐만 아니라 의식이 연결되는 힘이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사랑이 넘쳐흐르는 것이다. 만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을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그들을 품고 올려드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적절한 일이기 때문이요, 어떤 유익이든 우리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올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내가 믿기 때문이다.   사랑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그치지 않는다. 그친다면 그것은 심히 빈곤한 사랑일 뿐이다! 사실, 비통은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 사랑이 대개 취하는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빈 공간을 부둥켜안은 사랑이요, 희미한 공기에 입 맞추는 사랑이며, 부재가 주는 고통을 느끼는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이 기도로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 앞에 놓아두는 관행을 그만둘 이유가 없다.”(Tom Wright, 앞의 책, 116쪽)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가 공속적 존재이듯이, 산 자와 죽은 자는 기도로 함께-있음의 존재, 함께-속해 있음의 존재가 됩니다. 기도로 그들이 현재화되며, 기도로 그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 있으며, 기도로 그들은 우리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기도로 그들을 하나님 앞에 놓아두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와 공속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사건은 탈-물리적(meta-physics; 형이상학적) 사건입니다. 형이상(metaphysics), 곧 지금 처해 있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려는(meta; trans) 신앙적 몸부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신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월을 향한 몸짓, 초월을 지향하는 기도, 초월을 위한 예수살이는 물질적·물리적·가시적 한계를 신앙으로 넘어서려는 유한한 인간의 태도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와 예수,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의 공속적 관계를 좀 더 명확히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설령 현실 세계와 관념 세계(초월 세계)가 떨어져 있고, 산 자와 죽은 자가 대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예수 사건으로 인한 공속성은 궁극적인 인격체 전체의 부활의 희망을 연결시켜주는 끈이 될 것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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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02
  • 환상 너머 공백과 꽉 찬 무
      진리의 현전을 믿는 이들의 마음에 신앙을 던져 넣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닐까?   현상 너머에는 환영만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매우 캄캄한 공간에는 암울한 침묵만이 짙게 깔리고 고통스러운 마음의 심연은 바다의 수심만큼이나 깊었을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 공간과 시간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죽음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저 공백, 무, 허무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나약함, 안일함, 무관심, 방관 등은 충격적인 죽음(죽임)으로 몰고 갑니다. 가녀린 목숨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현실 앞에 선 우리는 슬픔과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서는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진리의 돌파구는 그 허구의 자리, 허무의 자리, 공백의 자리를 뚫고 들어갈 때 생기는 것입니다. 진리가 아니라고 할 때, 진리가 없다고 할 때, 오히려 진리는 효력을 발휘하는 법입니다. 종교적 환상이라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허무 너머, 공허 너머를 짚어 주고 그곳에 현전(現前, darstellung)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진리의 현전을 믿는 이들의 마음이 허무와 공포 너머에 신앙을 던져 넣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닐까 싶습니다.   ▲ “살아서 돌아와 다오!” 이것은 간절한 애원이 담긴 명령이요, 진리입니다. 허무를 뚫고 산 생명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살아서 돌아와 다오!” 이것은 간절한 애원이 담긴 명령이요, 진리입니다. 허무를 뚫고 산 생명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때 진리인 체 가장하지 말고 진리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무엇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종교는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수천 년 동안 상징적인 행위들을 이용해왔다. 이런 행위들은 강력한 심리적 도구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병사들에게 자신이 무적이라는 기분을 심어줄 수도 있고, 엄마에게 자신의 아이가 초자연적인 보호를 받고 있다는 기분을 심어줄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신이 그들의 질병을 치유해주었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도 있다.”(Darrel W. Ray)   함석헌의 견해로 논박을 해보면, “역사란 결국 자연이라는 무대 위에서 신이라는 감독자의 지도 밑에 배우인 인생이 연출하는 일장극이라 할 수 있다. 고로, 초인간적 신비력을 무시한 역사는 평면화한 기록에 불과하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277쪽)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는 연기나 공연을 하지 말고 현상 너머의 불길한 징조의 빈자리에 확신의 자리인 물 자체(Ding an sich)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실체가 공허하다고 인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괜한 희망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당분간일 수는 있지만, 그러나 실존의 상황은 급박하고 절대적입니다. 절대적 시간과 자리에서 종교가 강박증이 아니라 초감성적인 것의 현상을 숨기지 말고 내보이는 도래 사건을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무의 자리 뒤 베일에 숨겨져 있는 궁극적 존재는 이미 무와 공허의 자리에 함께 하고 있을 것입니다. 숭고 그 자체인 존재는 그들과, 그 대상과 본질적인 속성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환상이나 환영이 없습니다. 아니 공백이 없습니다. 무가 아닙니다. 남는 것은 완전한 무가 아니라 꽉 찬 무 자체, 초월적이면서 내재적 타자입니다. 그가 그들과 더불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물도, 객체도, 대상도 아닌 초월적 존재와 더불어 있는 생명적 주체들입니다(S. Zizek).   참 존재, 참 본질은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된 이미지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모든 사람들의 상처가 되어버렸지만, 극한의 고통과 스트레스, 그리고 공포와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무와 공백이라 여기는 그 자리를 메울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사라져간 이들의 지금과 살아있는 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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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4
  • 몸-나의 발화적 진정성
      몸-나는 서로 열려 있고 서로 만나고 전체로서의 몸-나입니다.   발화(發話)는 몸-나(corpus ego)의 그때-거기와 지금-여기를 떠나서는 발생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발화는 자리, 즉 발생 자리와 상관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발화는 말을 밀어내기 때문에 공간성을, 나(자기)를 열어 밝히기 때문에 시간성과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지도자의 정치적 발언이든, 개별적 존재의 일상적 말이든, 동물의 소리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발화를 단순히 말을 열거나 몸-나의 그때-거기와 지금-여기를 고려하는 맥락적 발언으로 보기보다 종교적 명법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종교적 명법은 항상 명령(imperative)을 합니다. 경전을 빗대어 말하는 화자의 말은 도덕적 정결주의와도 같아서 청자는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엄숙한 선의 실천으로 가져야와 한다는 강박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발화하는 몸-나의 시공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더불어 듣고 있는 몸-나의 시공간도 동일한 맥락에 존재하고 있어야 합니다.   정치적 발언의 그때-거기와 지금-여기는 듣는 이로 하여금 맥락적으로 설득되지 않는다면, 발화 주체의 몸-나의 우월성과 일방적 커뮤니케이션, 심지어 폭력성으로 비추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발화 주체가 가장하고 있는 도덕적 정결주의와 엄숙주의는 악이 됨으로써 청자에게는 수용 불가능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221쪽).   ▲ 종교적 발화 주체이든, 정치적 발화 주체이든 그 발화는 이성의 자기 발화이어야 하고 내면적 자기 영혼과의 일치를 이룬 그때그때의 순수한 긴장이어야 합니다.     정치적 발화가 종교적 명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선이란 것도 자기 보기에 선인 것 뿐”(함석헌, 위의 책, 248쪽), 그때-거기와 지금-여기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몸-나의 맥락적 발화이기 때문입니다.   발화가 되는 순간, 몸-나와 목소리, 몸-나와 말은 분리(depart)가 됩니다(Jean-Luc Nancy, 김예령 옮김, 코르푸스-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문학과지성사, 2012, 29-31쪽). 타자에게 제안하는 말조차도 몸-나와 떨어진 말을 듣는 몸-나를 가진 타자 역시 그 제안을 분리가 아닌 인격적 통합성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면 몸-나의 의식과 정치적 도덕성의 자기 증식이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종교적 발화 주체이든, 정치적 발화 주체이든 그 발화는 이성의 자기 발화이어야 하고 내면적 자기 영혼과의 일치를 이룬 그때그때의 순수한 긴장이어야 합니다. 몸-나의 자기 인식의 유한성을 인식하지 않고 사태를 몸-내 쪽으로 끄잡아 당기면서 타자의 몸-나를 배려하지 않는 강제와 강요, 강압적 발화로 일관한다면 그것은 타자의 몸-나를 나의 몸-나로 일방적으로 구성하겠다는 발상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야말로 몸-나의 지성과 영성의 조화를 이룬 발화이어야만 비로소 나의 몸-나와 타자의 몸-나가 교류, 교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함석헌, 앞의 책, 215, 220쪽).   몸-나의 발화가 진정성이 있으려면 속눈이 밝아져야 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210쪽). 속눈은 나의 몸-나와 타자의 몸-나가 침투 불가능할 것 같은 공간과 시간까지도 꿰뚫을 수 있는 실존의 고유성이자 순수성입니다.   이러한 상호주관적 실존의 순수의식의 연관성만이 공통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상호주관적 실존의 울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눈은 몸-나의 더 깊은 몸-나 속에 있는 정신입니다.   바깥으로(extra) 나 있는 정신은 감동과 설득을 불러일으킬 수 없습니다. 오직 몸-나 속의 정신으로만 타자의 몸-나 속의 정신을 열 수가 있습니다. 바깥은 여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깥은 결국 바깥 껍데기만을 접촉할 뿐입니다.   마치 함석헌이 말하는 것처럼, ‘성경, 정신이 사는 생명의 양식이다.’(함석헌, 위의 책, 113쪽)라는 발화를 몸-나의 주체적 발화로 삼고자 한다면, 혹은 자신의 몸-나 발화가 종교적 명법과도 같은 효과를 낳고 싶다면, 정치적 발화는 몸-나의 상호주관적 정신이 사는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단지 자신의 몸-나 발화 하나만으로 ‘혼합’ 혹은 ‘통일’, ‘일치’를 가져올 수 있다는 오만은 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몸-나 발화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때-거기와 지금-여기의 유한한 맥락적 목소리(vox)이기 때문에, 그것이 뜻이 있는 목소리 혹은 뜻을 만들어 내는 목소리(vox significativa)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전체의 몸-나의 목소리로 확장하고 관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몸-나 주체적 발화를 듣지 않는다고 분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종교적 명법에서도, 종교의 본질은 도덕이지만, 그것[好惡]을 넘어서야 하는 것처럼(그것 또한 상대적이기 때문에, 함석헌, 위의 책, 212쪽), 정치적 발화 행위조차도 하나의 명법이 되고자 한다면, 양극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매체를 통한 극단적 발화 행위(스크린을 통해 비춰지는 한쪽의 부정적 모습들, 마치 발화에 반하는 적대 행위만 하고 적대 감정만을 토로하는 것으로 매도하는 조작적·조정적 발화)가 “사라(消)지는 것이 살아(生)지는 것”(함석헌, 위의 책, 252쪽)입니다.   몸-나가 발화를 통해서 말을 밀어내는 순간 몸-나가 사라지고, 발화가 살게(生)될 때 상호주관적 몸-나가 사라져서(消) 전체 몸-나가 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의 몸-나가 죽음으로써 온 우주의 몸-나가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몸-나는 우주의 몸-나와 왕래합니다.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상호주관적 몸-나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니 애초에 몸-나는 끈끈하게 이어져-있음으로 존재했습니다. 몸-나의 발화는 그것을 끊임없이 확인을 하고 의미를 만들어 가면 됩니다. 그것이 몸-나가 바라는 일입니다.   함석헌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안 하는 것이 궂은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212쪽). 몸-나의 속에 있는 진정한 자기는 날마다 소리를 냅니다. 그런데 몸-나는 그것을 듣지 않고 자기 겉의 몸-나의 발화만 하려고 합니다. 자기 몸-나의 뜻대로만 행위를 하려고 합니다.   정치적 발화가 무분별하고 무책임하여 닫히고 폐쇄적으로 변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몸-나 속의 자기(Self) 발화의 뜻보다 몸-나 겉소리/발화가 고유한 자기성을 갖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발화가 전달이 안 되고 침투가 안 되는 것입니다. “몸-나, 코르푸스 에고에는 고유성이 없습니다. 이른바 ‘자기성’(egoite)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Jean-Luc Nancy, 앞의 책, 30쪽).   몸-나는 서로 열려 있고 서로 만나고 전체로서의 몸-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몸-나는 고유성, 자기성이 아닌 공통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몸-나는 공통적인 몸-나, 전체의 몸-나 속의 진정한 자기의 목소리의 뜻대로 살아야 하고 행위를 해야 합니다.   종교적 명법에 따라 사는 종교인이든, 그것을 발화하는 몸-나 주체이든, 또 그것을 모방하는 정치적 발화 주체의 몸-나로서 정치적 명법을 말하는 존재이든, 그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발화 혹은 발화의 톤(ton)은 상호 공포, 상호 두려움, 상호 죄의식, 상호 죽음을 조장할 뿐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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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18
  • 건강한 종교적 자아론
      종교적 자아는 초월자 혹은 종교의 근본 진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종교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진술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객관적 혹은 객관주의라 함은, 철학적으로 말하면, 많은 것이 상대적으로 보이더라도 절대적인 것, 그래서 입장이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최소한 하나는 있다는 입장입니다. 모든 것이 입장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한 시각에서 “그리스도교는 코이노니아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함석헌이 “기독신앙의 목적은 사귐에 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100쪽)라는 말을 반복 정리한 것입니다.   좀 더 심층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무의식과도 같은 신앙의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신분석은 의식의 표층보다 무의식이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봅니다. 무의식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할 때는 정신병리적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종교의 심층을 잘 모르게 될 경우에는, 그것의 작용하는 힘, 본질적인 행위의 에너지가 억압되어 삶의 부조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종교의 집단무의식 혹은 개인의 무의식에는 사귐, 즉 코이노니아가 전제되어 있는데, 그것이 건강하고 건전하게 발현될 때에는 인간의 종교적 삶과 정신 또한 건강해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 본연의 심층을 망각하고 국가 이데올로기에 편승을 한다거나 사회사상 혹은 자기 계발과 같은 에너지로 전락할 경우에는 그야말로 병리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종교가 그러한 병리를 병리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함석헌이 말하는 종교 무의식의 병리가 그것입니다.   “군자지교담여수(君子之交淡如水)라 한다. 기독교는 담담하기가 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유행하는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기독교를 될수록 달고 진한 것으로 선전하려 애쓴다. 농촌진흥, 사회계량, 국가융흥, 문명진보, 인격수양, 실로 산함신감(酸醎辛甘)의 각종 맛을 탄 기독교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100쪽)   함석헌은 종교의 표층으로 나타난 무의식의 병리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그 휘두르는 기치가 찬란한 때에 있는 것이 아니요, 도리어 아무것도 보잘것없는 때에 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100쪽)   ‘보잘것없다’는 말이 종교의 실패나 종교적 심층의 억압 혹은 퇴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 본래의 심층과의 화해를 말합니다. 어쩌면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승화(sublimation)가 맞을 것입니다. 종교가 ‘아무것도 보잘것없다’는 자기 겸허적 발언은, 종교 무의식을 건강하게 내보이면서 종교 자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확인하는 자기 존재의 표현이자 종교적 자아의 인정과 수용일 것입니다.    ▲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종교적 자아는, ‘평화’, ‘동무’라는 인식입니다. 종교적 자아의 실현은 타자와 평화의 악수를 나누는 벗이 되는 일입니다.      종교가 낮아지고 비천한 데 처하려는 초자아적 행동은 종교가 고급화, 계급화, 권력화, 부자화(富者化)되려는 리비도를 잘 통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자아나 리비도적 본능도 지나치면 오히려 병리가 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종교적 자아가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가부장적 아버지의 도덕적 감성을 내면화하여 자신의 무의식을 억압하면서 과도한 도덕 결벽증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칫 종교인 자신을 죄인으로, 죄인 공동체로 규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석헌에게 있어 건전한 종교적 자아는 자신을 ‘벗’(友)으로 고백하고 발언하는 것입니다. 또한 타자를 벗으로 받아들이고 벗과 벗으로 만나 사귐이라는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벗이란 우(友)자는 본래 손 둘을 그린 것이다. 즉 손과 손을 마주 잡은 것이 사귐이다. 즉 악수다. 화해다. 사귐이란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의가 없어지고 호의가 성립되는 일이다. 벗이란 호의를 가지고 서로 대하는 사람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100-101쪽)   성숙한 종교적 자아는 타자를 경계하거나 적으로 여겨 불화를 조장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종교적 자아는 수용과 포용, 그리고 긍정이 있습니다. 완고한 항문성애적 성격으로 타자와 물질을 소유하려 한다거나 지나치게 자기 고집으로 인색한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결국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종교적 자아는, ‘평화’, ‘동무’라는 인식입니다. 종교적 자아의 실현은 타자와 평화의 악수를 나누는 벗이 되는 일입니다. 이제 종교적 자아는 자신의 무의식의 소리를 잘 경청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타자의 무의식까지도 경청, 환대해 주어야 합니다.   종교적 자아가 편협할수록 자신의 무의식과의 화해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화해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의식, 곧 종교적 의식(religious consciousness)은 시대의 의식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사귐이란 청천백일하에 평화의 대지 위에 서서 하는 악수다. 인격이 동일한 평면 위에 서는 일이다. 동무가 되는 일이다... 사귐이라는 코이노니아(koinonia)라는 말은 본래는 공유라 동참이라 제휴라 번역할 만한 말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101쪽)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교적 자아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타자의 무의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타자에게 언제나 열려 있는 개방적 인격을 함양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아는 상호인격적인 것으로서 서로 발언하고 참여하면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에서 성숙도의 지표를 읽을 수 있습니다(J. Habermas, 이진우 옮김,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문예출판사, 1994, 349쪽).   달리 말하면 종교적 자아는 인격성숙을 통해서 타자 그리고 사회와 통합을 가져올 수 있어야 합니다. 분열된 자아나 분열된 인격은 언젠가는 자기뿐만 아니라 사회에 병리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일치뿐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무의식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포장된 방어기제로는 타자와 사귐이 있을 수 없고, 초월자와의 사귐도 불가능합니다. 오로지 종교적 자아가 가진 무의식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그 절대정신과 화해하여 올바른 자기인식을 갖는 게 급선무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104쪽).   억압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의 뜻과 자기의 욕망을 분별하지 못하면서 자기의 욕망을 그리스도에게 투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자기화, 자기 내면화시킬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욕망의 근거로 삼고 그리스도마저도 소유하려고 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습니다.   종교적 자아는 초월적 자아 혹은 내면의 진정한 자기(Self)를 만나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종교적 자아이든 보편적 인간의 자아이든 자아는 진정한 자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분열된 자아와 상실된 자아, 불완전한 자아는 진정한 자기를 발견함으로써 완전한 자아가 되고 진정한 종교, 성숙한 종교를 꿈꿀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의 자아, 종교적 자아가 욕망의 덩어리(私我)로 뭉쳐 있음을 간파하는 데서 시작될 것입니다. 종교적 자아는 그것(es, 私我)을 넘어서 초월자와 만남으로써 온전한 인격의 통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내면의 결핍을 극복하고 타자와의 온전한 사귐, 자아의 실현과 완성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105쪽).   함석헌은 사귐의 필연성을 역설합니다.   “세계에 다른 데는 몰라도 적어도 조선에 필요한 종교는 코이노니아의 종교다... 종교는 모방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를 살리는 우리 신앙이 있어야 할 것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106-107쪽)   종교적 자아는 단순히 국가나 사회 혹은 타자의 종교, 더 나아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의미와 실체를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종교적 자아를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적 자아는 초월자 혹은 종교의 근본 진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종교적 자아의 에너지, 종교적 자아의 리비도는 진리를 향해서 승화될 수 있고, 진리의 명법을 근본으로 삼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의 명법이 말하는 것은, 종교적 자아는 반드시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 ‘사귐’을 통해서 종교와 종교, 자아와 타자와의 인격적 통합성을 증언하고 고백하는 순수성을 견지하라는 것입니다.   종교적 자아와 대면하는 장 안에서 현재의 종교의 고통,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감소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아마도 순수하고 건강한 종교적 자아를 통해서 사귐이 이루어질 때 가능할 것이라 봅니다. 사귐(koinonia)은 곧 사적(私的)인 것이 아니라 공동(koinos)의 것, 공통적인 것, 공유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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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8
  • 그리스도인, 제3의 인종(trion genos)
      초월자의 능력, 곧 성령을 입지 않으면 삶의 문법은 바뀌기가 어렵다.    “당시 그리스의 분류 용어를 사용하여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제3의 인종’(trion genos)인 셈이다. 이 용어는 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도 아님을 뜻하는 것이다. 왕과 현인의 독특한 위상을 서술하기 위해 피타고라스학파가 만든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성격을 그리스적이지도 않고 동시에 유대적이지도 않다고 가장 분명하고 잘 서술해 놓은 문헌이 바로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서간(Epistle to Diognetus)>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인종’이며,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새로운 인간’이 되어야 하고, ‘새로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Jonathan Z. Smith, 장석만 옮김, 종교상상하기, 청년사, 2013, 51-52쪽)     ▲ 그리스도인, 제3의 인종   종교인은 편집증이 있는 것처럼 진리 혹은 진리의 원천에 대해서 입에 달고 삽니다. 마치 그 말을 고백하지 않으면 삶의 서술이나 종교 담론이 어려운 듯이 강박증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진리서술이 강한 만큼 몸으로 살아내는 몸의 서술(진술) 또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지, 거기에 부합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함석헌은 말합니다. “진리는 모든 것이 의존의생(依存依生)하는 원동력, 원리, 원천이기 때문에 그것을 증거하는 자, 즉 몸으로써 그것을 증험하는 자는 위대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95쪽)   종교인이 “위대한 결과”를 낳는 것은 자신의 진리 서술을 몸으로 증명해냈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나타내지 않는다면 아르케(arche, 원리, 원천)는 설득력을 상실합니다. 자신의 삶의 법칙으로서의 아르케는 모든 생명과 모든 삶의 법들이 흘러나오는 것인데, 그것은 삶과 종교를 지탱하는 초월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함석헌은 “예수가 도 자체, 진리 그 자체, 생명 그 자체, 산 완전자”(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95쪽)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를 망각하지 않고 붙잡는 자야말로 영성적 퇴행을 범하지 않고, 유아적 신앙 퇴행을 범하지 않는 삶의 진보와 성숙, 그리고 성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함석헌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예수의 증인이 됨은 예수의 종이 됨이라.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를 위해 삶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96쪽)   증인이 된다함은 말로써 자신의 신념과 경험, 그리고 확신을 증명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증인은 거울 속에 반영되어 있는 형상을 오롯이 그려낼 수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마치 대상을 사진이나 그림으로 구현해내듯이, 있는 그대로를 자신의 몸-짓으로 흔적을 드러내야 합니다.   종은 주인의 지시와 명령, 그리고 삶과 한시라도 떨어질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주인의 삶이 곧 종의 삶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인과 종이 동급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의 의지와 생각, 그리고 행위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주인의 운명과 존재가 곧 종의 운명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종은 주인을 위해서 삽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주인인 예수를 위해서 사는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떠나서는 의미가 없는 존재입니다. 모든 삶의 의미와 이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오고 그리스도만이 삶의 장소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위해 산다는 것은 결국 그의 언어와 행위를 (재)실행하고 자신의 의식이 그의 의식으로 일체회하여 그것을 인격의 토대로 삼아서 산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저절로 되지는 않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 예수를 증거할 수 없기 때문”(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96쪽)입니다. 나의 인격을 그의 인격과 동일시하면서, 그의 인격과 그의 관점을 세계 속에서 절대화하려면 자신의 능력이나 억지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초월자의 능력, 곧 성령을 입지 않으면 삶의 문법이 바뀌기가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하고 예수를 즐거워해야 하고 생명에 불타는 사람”(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97쪽)이 되어야 하는데, 그와 같은 변화는 성령에 의해서 가능한 일입니다.   달리 말해 새로운 존재로 위치 이동을 하고 예수를 즐거움의 원천으로 삼으며, 죽음과 폭력에 저항하는 마음은 초월적 주체의 내적 점유와 압도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의 사람됨은 예수로 인해서, 나의 즐거움은 예수로 인해서, 나의 생명은 예수로 인해서라는 고백은 성령의 주도적인 힘에 의해서 행위 서술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성령은 새롭게 하는 영이다. 사람을 변질시키는 영이다. 성령을 받는다 함은 진리 정복을 당하는 일이다. 옛 내가 전혀 무력해지는 일이다. 죽는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 성령의 사람은 아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97쪽)   성령은 나를 재구성하고 재조합합니다. 나의 의식을 완전히 탈바꿈시킵니다. 그래서 나의 의식 혹은 나라는 존재는 무력화되어 나의 행위 원천을 예수 혹은 성령에다 두게 됩니다. 나의 정신과 이성은 그에 의해서 점령당함으로써 초월자의 의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함석헌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죽음’, ‘종교인의 죽음’입니다.   오늘날 종교가 지탄의 대상이 되는 이유, 그리고 종교로서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는 종교인의 진정한 죽음이 없어서입니다. 진리 운운하면서 진리 서술과 몸-짓 서술행위가 일치하지 않아 종교 본래의 그 원천과 원리가 드러나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무의식은 고사하고 초월자의 의식을 자신의 의식으로 삼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조차도 초월자의 흔적을 찾지 못할 정도로 종교인 자신의 욕망적 자아가 살아 있다는 것은 신의 존재를 부재로 바꿔놓습니다. 그것을 두고 함석헌은 “성령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무한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설령 무한이 어두움이라 할지라도 무한의 어두움 속에서 빛이 스며들어 올 수 있도록 자신의 이기적 본성과 악한 마음을 극복하고 초월자의 정신을 자기 의식화하여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자아가 사라지고 초월자의 정신과 초월이성(선험이성)에다 자신을 내던진다는 것은 무한한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욕망적 자아의 표면으로 올라와 악의 구렁텅이로 복귀/회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신과 타협하지 않고 초월자의 정신 혹은 초월이성과 벗해야만 합니다. 오만한 자기식대로의 삶의 주체성과 초월 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신뢰-건강하고 건전한 이성적 신뢰가 아닌-는 한낱 초월자의 신뢰와 반하는 것이며, 초월자와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기, 욕망적 자기의 죽음을 끊임없이 연습하십시오. 그리하여 초월자의 정신, 초월이성이 자기 것(화), 자기 원천이 될 때까지 말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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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1
  • 장소의 비신화화
      회귀의 자리는 멀리 있는 장소, 공간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의 자리입니다.    종교는 의례적으로 장소의 신비성, 장소의 특수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합니다. 특정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이미 의미 부여된 장소를 신성시하는 태도는 장소, 혹은 공간의 태곳적 자궁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자궁으로의 회귀를 통해 자기 기원을 끊임없이 확인하려고 하는 욕망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어떤 종교의 태동지를 순례하고 탐방한다는 것도 역시 종교 기원의 자궁을 확인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물론 그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신성하게 여기는 곳을 접함으로써 신령한 기운을 얻으려는 의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영험하다고 하는 곳은 다른 장소나 공간보다는 뭐가 달라도 다른 영기(靈氣)가 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종교는 특별한 토포스(topos, 땅 또는 영역)에 대한 열망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성전(temple), 제대, 성지, 창시자의 탄생지, 성인의 순교지니 하는 모든 곳에는 장소와 공간을 통한 반복적 자기 재생, 자기의식의 탄생, 자기 정신의 갱신, 원초적이고 원본적인 것과의 일치를 갈망하는 강렬한 모습들입니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그러한 장소나 공간에 대한 타부를 깨고 생명을 내놓고도 토포스의 체험을 강화하려고 합니다. 평생에 걸쳐 그 토포스를 연구하거나 찾으러 다니다 생을 마감하는 것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신비함과 거룩함이라는 어떤 종교성이 있어서이기 때문입니다.   ▲ 이곳 내가 있는 곳에서 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한 장소나 공간을 체험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종교성입니다. 굳이 애초부터 종교적 장소로 규정되어 있는 곳이 아니더라도 위대한 인물, 카리스마적 인물의 역사적 경험의 발생 장소는 신성시됩니다. 성역화 된다고 할까요? 사람들은 그런 곳을 찾고 또 보면서 기억을 재생하고 각오를 다지고 의식을 고취시키면서 자신을 종교적 성의 체험 속으로 내던집니다.   그러나 문제는 장소의 문제 혹은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스럽다고 여기는 장소를 순례하거나 그곳에 가보았다고 함으로써 그 장소를 심적으로 차지했다거나(사물적인 것의 신비화) 가졌다고[所有]하는 생각이 문제입니다.   장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어떤 거룩한 이미타치오(imitatio, 본받음)나 미메시스(mimesis, 모방)가 형성되었다고 착각을 하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장소는 공적 세계이기 때문에 소유할 수 없는 관념 세계이지 특정한 인물에 대한 미메시스가 바라는 장소 소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소 애착과 장소 신비화, 공간에 대한 독특한 종교적 사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 자신을 통한 초월적 존재의 나타남입니다. 공간이 신비하다고 해서 신의 현존화가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의 소비 공간이 되어버린 공간은 세속적 장소와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간을 신비화하게 되면 그 공간의 집착으로 인한 점유 욕망이 생기게 마련이고, 신의 발현과는 상관없는 독점과 소유 논쟁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장소는 바로 그곳 혹은 저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 내가 있는 곳에서 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말과 행위가 신의 얼굴을 보여주는 성(聖)의 자리가 되지 않으면 태곳적의 신성한 공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현의 탄생 자리, 기적의 자리, 계시의 자리, 죽음의 자리 등 그곳으로의 회귀와 상상력, 그리고 기억의 재생이 영향을 미치는 자리는 결국 인간 실존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있는 처소 혹은 장소성의 성스러운 가치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신이 유한적 실존인 인간의 마음에 와야 합니다. 초월적 존재가 인간의 모습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여준다고 하는 것과 그 초월적 존재가 인간의 마음에 온다는 것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에 와 있다면 내재한 초월자는 자신의 얼굴을 유한자에게서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시적 공간, 구체적 공간에서 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하는 욕망보다 나라는 존재,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서 신의-있음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개별적 인간의 자리가 단지 사적 공간이라고 치부할 일이 아닙니다. 신의 자리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모든 것 속에서 모든 것이 존재하는 자리로서 존재한다. 아니 차라리 모든 개체의 규정과 “장소”(topia)로서 존재한다.” 조르조 아감벤(G. Agamben)의 말입니다. 그러니 특정한 공간과 자리의 맹신은 금물입니다.   함석헌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시하는 자는 그 순간에 영혼 안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특정한 공간의 신비 속에 무엇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신의 영광은 봉인된 세계 속에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신의 영광은 마음에서 보게 됩니다. 마음에서 일어나고 마음에서 보게 되고 마음이 변화되는 그곳, 그 자리가 변혁의 장소가 됩니다.   장소 맹신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서 변화와 개혁, 혁명의 자리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는 장소의 종교가 아니라 마음의 종교입니다. 그러려면 절대정신은 일정한 장소에 국한시켜서 제약하고 가두려고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자유로운 정신으로 살아있게 해야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장소 이동, 장소 확인, 장소 신비화, 장소 기념화가 아니라 “길을 닦고 예비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길을 닦고 마음의 길을 내어서 초월자가 머무를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일입니다. 내 마음의 자리를 확인하고 점검하고 반성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내 마음이 곧 신이 머물만한 자리인지, 내 마음이 욕망의 덩어리로 가득하지 않는지, 내 마음이 본능으로 채워져 있지 않은지 늘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마음이 성스러운 자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성스러운 존재에 대한 지속적 의식, 주관적 정신의 깨어 있음에서 비롯됩니다. 아무리 공간을 거룩하고 특별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주관적 이성과 종교적 감정을 의식하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몸과 마음으로 신의 존재를 감지하기 위해서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의 욕망과 초월이 화해를 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장소의 선구조화는 “하늘과 땅을 직선으로 연락하는 것, 이것이 예수다”라는 말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사물화된 장소에 가지 마십시오. 마음으로 가십시오. 마음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벗은 몸으로 신 앞에 서 있으라고 하는 것이 그 말 아니겠습니까? 가식적이고 포장된 몸, 사적 이익, 관심,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다 내려놓고 자기의 순수한 마음 밭을 향해서 서 있는 자, 그 마음 밭으로 들어가려는 자가 진정으로 성스러운 공간, 성스러운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장소는 환상일 수 있습니다. 사실의 역사와 시간은 태곳적의 공간을 희미하게 기억하기 때문에 남은 것은 환상과 상상력, 그리고 형식과 덧붙여진 이야기의 허구뿐입니다. 그것에 매여 도리어 진정으로 초월적 존재와 만나게 하는 마음의 자리를 잊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장소가 마음의 고향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당분간입니다. 다만 세계가 주는 위안일 뿐입니다. 고향의 시원은 늘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회귀의 자리는 멀리 있는 장소, 공간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의 자리입니다. 종교인은 항상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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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11
  • 우리는 숫자가 아니다
       숫자는 실제가 아니라 환상이고 허구이다.   ▲ 숫자는 실제가 아니라 환상이고 허구이다.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수(number)는 만물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그처럼 원초적 무의식의 숫자 혹은 수는 인간 문명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발견이었다. 기원전 3천 년경부터 이집트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문명사회의 척도인 수는 인간 상상력의 극치였다. 그 상상력은 인류의 역사에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0’이라는 숫자는 기원전 3백 년경에 바빌로니아에서 어떤 자릿값의 빈자리를 표시하기 위한 기호로 쓰였던 것이, 서기 628년에 인도에서 현대적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지금 우리가 활용하는 수는 인도 사람들이 발명했지만, 그 당시 무역을 활발하게 하던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서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아라비아 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수는 셈이나 산법에서 출발을 했으나, 인간의 논리이자 이성의 발로이기도 했다. 이성(reason)이라는 말은 수, 즉 계산을 의미하는 라틴어 ratio에서 나왔다. 이것이 헤아리고 생각하는 이치·이법의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차 수는 인간의 욕구를 넘어 욕망을 분출시키는 개념이 되어버렸다. 편리성·기계성·표준성·효율성·획일성·과학성 등을 통하여 도구적·파괴적 힘을 드러냈다.   20세기 초에 벌어진 양차세계대전의 아비규환은 숫자의 분열이자 수의 불안과 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게르만(아리안)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과의 구분과 배제는 표준이라는 잣대와 우월의 신화 혹은 열망의 화신으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통계학적으로 전혀 쓸모없을 정도의 소수(小數)의 집단으로 분류된 사람들마저 굴뚝의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양상은 달라졌으나 오늘날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ID)을 나타내는 특별한 기호들을 숫자로 식별하는 체계 속에 살고 있다. 주민등록번호, 학번, 입양번호, 죄수번호, 카드식별번호, 은행대기번호, 군번, 선거후보번호 등, 숫자는 분류와 계급서열이라는 도구이며, 차별과 분절을 가져오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엄연히 이름이 있고 얼굴이 있는 인격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숫자라는 편리성 때문에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숫자와 일치시켜버린다. 설령 그것이 임시방편이라고는 하나 기분이 썩 좋을 수는 없다. 효율성 때문에 숫자로 정체성을 바꾸고 호명하도록 한다면 정작 ‘나’라는 존재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타자는 우리에게 간혹 물어온다. “주민등록번호가 어떻게 되세요?”, “학번이 어떻게 되세요?”, “몇 번 손님?” 등. 여기에해서도 우리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정당하게 자신의 이름이나 인격적으로 호명되는 인간의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숫자도 하나의 소통의 매체이다. 그러니 수를 잘못 이해하면 수치(shame)가 된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 아니던가. 망상의 숫자를 걸머쥐기 위해서 죽음의 경쟁을 마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적하고 결투하며 심지어 살인을 한다. 도대체 숫자가 무엇이기에 그러는 것일까. 숫자는 스스로 고백하지 않는다. 하지만 숫자를 다루는 인간에 의해서 그것은 의미와 질량과 부피와 크기와 길이 등으로 나타나 인간의 상상력을 메운다. 그 상상력이 지나치면 망상이 되어 버린다.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아니 손에 잡히지 않는 그저 욕망이 되어버린다.   이런 현상이 지배하는 세상이다가 보니, 이 세상은 그저 속고 속이는 또 ‘하나’(1)의 세계라는 숫자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숫자,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Non manifeste sed in occulto)”. 과연 앞으로 그럴 수 있을까? 숫자, 기껏해야 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것이 너무 많은 언어와 함의를 남발하게 하고 있다.   숫자는 아슬아슬하게 영혼을 팔아먹고 본능마저도 조각을 내는 특성이 있다. 숫자 뒤에 감추어진 익명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영혼을 팔아넘기는 것이다. 숫자는 그저 우연이다. 나에게 부연된 숫자는 우연한 만남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필연으로 여기고 격상·평가하는 것도 찬탄을 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평상시 너무 숫자에 대한 맹신에 젖어 있었던 탓은 아니었을까. 은행에서 자신의 정보가 유출되었다고 해서 다시 숫자만 달리해 플라스틱을 바꾼다고 영원히 비밀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의 도덕적 해이, 숫자가 곧 돈이다, 숫자로 정보화된 인격체마저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는 잘못된 관념을 바꾸어야 한다. 공동체-국가공동체이든, 사회공동체이든, 경제공동체이든-는 최소한의 상도(商道)는 지켜주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숫자면 모든 것이 된다는 인식을 멈추고 인간 의식과 존재의 전격적인 탈바꿈을 감행해야 한다.   개인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공동체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는 법이다. 개인이 그저 숫자로만 인식되기 때문에 개인의 인격과 사적인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려고 든다. 이런 생각이 공동체를 불신과 위험에 빠뜨리게 되는 것이다.   숫자는 실제가 아니라 환상이고 허구이다. 그것을 실제라고 믿는 순간 숫자와 그것이 가리키는 지시체를 동일시하면서 오류를 범하고 착각에 빠진다. 돈이라는 숫자가 가진 신화나 주민등록번호가 갖고 있는 환상, 그리고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수많은 숫자 시스템은 실제가 아니라 허구이다.   실제와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세계, 환상을 실제로 인식하는 인간은 병리적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세계 속의 숫자는 돈으로 대표된다. 오늘날 정치는 머릿수이고, 경제는 수치이고, 권력은 돈이 되어버렸다.   인간과 세계는 결국 숫자뿐인 것인가? 오늘도 스마트폰 매장에서, 메일계정에서, 우체국에서, 은행에서, 서점에서 번호가 나를 부른다. 그 번호가 곧 나인 것이다. 잠시뿐이라고는 하지만 왠지 씁쓸하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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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07
  • 진정한 정의는 사랑에서 나온다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다.   ▲ 꼭 필요한 것은 진심으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칼 폴 라인홀드 니부어(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1971)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1932)’라는 저서로도 유명하다. 니부어는 도덕적 개인이 집단을 이루면 왜 비도덕적이 되는지에 관한 연구와 질문을 던졌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오는 6월 4일이면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지게 된다. 흔히들 정치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진흙탕 속으로 들어간다는 비유를 한다. 왜 일까? 개인적일 때와 집단에 속해 있을 때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니부어의 주장을 살펴보자. “집단에 속하면 개인의 이타적인 애국심도 이기심으로 전환시켜 버린다. 집단이나 진영의 논리에 빠져 버리면 조직의 이익에 따라 개인의 양심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사회나 국가도 다르지 않다. 전쟁도 국가권력이 순수한 애국심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것에 불과하다. 특히 특권층이 훨씬 더 위선적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특권이 보편적 이익을 위하여 봉사하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하다며 교묘하게 포장한다. 이것이야말로 평등과 정의라고 강조한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들여다보아도 탐관오리들의 명분은 늘 우국충정이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운 침략의 명분 또한 어처구니없다. 문명의 개화와 발전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어떤가. 지금 북한을 보면 특권 지배층을 위해 백성은 수단과 도구에 지나지 않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니부어는 이런 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을 강조했다. 마땅히 그런 대비와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류에게 법과 제도가 없어서 갈등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가.   춘향전을 보면 변 사또라는 악랄한 탐관오리에 대해 꾸짖는 이몽룡의 시가 나온다. 金樽美酒 千人血(금준미주 천인혈) 금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 사람의 피로 만든 것이다. 玉盤佳肴 萬姓膏(옥반가효 만성고) 옥으로 만든 소반에 담긴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으로 만든 것이다. 燭淚落時 民淚落(촉루락시 민루락) 초에서 흐르는 촛농은 백성들의 눈물이다. 歌聲高處 怨聲高(가성고처 원성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백성들의 원망소리 또한 높도다.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만 가는데, 지도자가 하는 짓거리가 이러면서도 입만 열면 애국이요, 충성이다. 그러나 이몽룡의 이 시 가운데에는 애국이며 충성을 강조하는 말은 없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구구절절 녹아 있을 뿐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근본적인 동기도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정의는 법과 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돈이 있으면 있던 죄도 없어지고, 돈이 없으면 잘못이 없어도 죄가 된다’는 것이 옳지 않음은 초등학교 4학년만 되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문제이다. 법치주의의 원칙은 법 앞에서의 평등이다. 그런데 왜, 아직도 ‘유전무죄무전유죄(有錢無罪無錢有罪, 돈이 있으면 죄가 없어지고, 돈이 없으면 죄가 됨)’라는 말이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이제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세상을 물려주어야 한다. 정의와 공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법과 제도를 완비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꼭 필요한 것은 진심으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성경은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로마서 13:10)이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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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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