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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1-07-02
  • 한국화학연구원, 스펀지로 열을 전기로 바꾸는 소재 개발
    [타임즈코리아] 구부러지고 늘어나고 압축이 돼, 열이 있는 곳 어디에든 붙여 열을 전기 에너지로 바꿔주는 열전소재가 개발됐다. 완전히 유연한 열전소재가 개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화학연구원 화학소재연구본부 조성윤 박사팀은 열원의 형태와 관계없이 어디든지 붙일 수 있는 ‘스펀지형 열전소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열을 전기로 바꿔주는 소재로 온도 차에 의해 전기가 발생한다. 일례로 발전소 굴뚝에 열전소재를 부착하면, 굴뚝 안쪽의 고온(150도)과 바깥 상온(30도)의 온도 차로 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구진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스펀지에 탄소나노튜브 용액을 코팅했다. 탄소나노튜브를 물리적으로 분산시킨 용매를 스펀지에 도포한 후, 용매를 빠르게 증발시킨 것이다.  제조방법이 간단해 대량생산에도 적합하다. 모양을 만들어주는 틀 없이 스펀지를 이용해 열전소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거푸집 없이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셈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열전소재는 무기 소재로 만들어진 탓에 유연하지 않았다. 사람의 몸이나 자동차 등 다양한 곡면의 열원에 붙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제조공정 자체도 까다롭고 복잡하다. 전 세계 연구진들은 유연한 열전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탄소나노튜브에 주목했다. 탄소나노튜브는 전기전도도가 높고 기계적 강도가 강하며, 지구상에 풍부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팀이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해 유연한 열전소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스펀지와 유사하면서도 높게 쌓을 수 있는 탄소나노튜브 폼(foam)을 만든 것이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압축 안정성 실험 결과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는 “지금까지 개발된 유연한 소재는 지지체나 전극의 유연성을 이용한 것”이었다면서 “소재 자체가 유연한 건 이번 스펀지형 열전소재가 처음이고 제조방법도 간단해 대량생산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개발된 스펀지형 열전소재는 열전소재의 전기적 특성과 스펀지 고유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10,000번 반복해도 형태는 물론이고 전기적 특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압축 전과 압축 후의 저항값이 각각 1.0Ω(옴), 0.3Ω으로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이는 스펀지에 기공이 무수히 많아 변형에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펀지의 탄성을 이용한 응용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경우, 압력이 커질수록 발전량도 덩달아 높아졌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했을 때 최대 2㎼(마이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하여, 압축 전과 비교해 발전량이 10배 정도 증가했다. 이에 대해 연구논문 1 저자인 김정원 박사는 “스펀지의 압축되고 복원되는 탄성을 활용해 몸에 부착하는 웨어러블 기기에 적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수한 기계적 성질이 요구되는 자동차 등에도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정원 박사는 “열전소재 분야 전망도 밝다. 현재 자동차에서 사용하고 난 후의 열이나 온천수를 이용한 열전발전 시작품의 실증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관련 기술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성과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에너지 소재 분야 권위지인 『나노 에너지(Nano Energy), IF:16.602』8월호에 게재됐으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창의형 융합연구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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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
    2020-09-22
  • 종속될 것인가, 회복할 것인가
      [타임즈코리아]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느린 사람은 어찌 살라는 건지, 넋이 나갈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많은 것들이 바뀌곤 한다. 이런 현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변화는 순리이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논리가 더 우세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약육강식이 진리이어야 한다. 여기에 동의할 사람들은 모두 강자라야 가능하다. 적어도 변화가 자연에 의한 것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이 자초한 변화에 순응하라는 것은 무조건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이 그만큼 편리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만큼의 행복을 확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비대 면화되어 가고 있다. 이것을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변화라고 동의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코로나19에 따른 불가피한 강요인 셈이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에 따른 변화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만남에서 누리고 싶은 행복은 사람의 DNA 속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다. 현장 공연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감흥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런 노력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 개인의 욕심이 아니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예술을 가상의 세계에 가두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 만약 가상의 세계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우리가 굳이 직접 여행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영상이나, 증강현실 그리고 가상현실 시스템만으로도 더 자세하게 보며 실감 나는 장면 속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온라인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계기로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콘텐츠를 구별하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가 파산했다는 기사가 유난히 아프게 느껴진다. 과학과 기술이 육체적 요소라면 문화와 예술은 정신적 요소이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난국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문화와 예술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예술의 존엄과 가치는 예술가들이 지켜 내야 하는 것이다. 대중화, 실용화 이런 측면들은 굳이 지키려 하지 않아도 어느 시대에나 자생해 왔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변하지 않게 하는 일,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려는 힘은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자극하여 거대한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예술의 힘이고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망가트려놓은 만남과 관계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 속에 내어주고 거기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만남과 관계를 열망하는 DNA와 인간의 지혜가 코로나19보다 더 강함을 증명하며 예전과 같은 역동성을 회복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왔듯이 이 또한 극복해 낼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코로나19를 이겨낼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이전과 같은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예술가들이여, 우리는 과학자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감동을 선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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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합정보
    2020-07-06
  • 인문학은 이론이 아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본질을 찾아 나선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사변적으로 흘러가면 이념이나 현상적인 집착으로 이탈하게 된다.   이런 행태는 수많은 증오와 폭력을 낳으며 씻지 못 할 마음의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남길 뿐이다.   인문학적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삶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타자와 참된 관계를 형성하는 정신을 의미한다.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사람은 ‘너’와 더불어 ‘나’라는 관계를 통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조화로움의 아름다움을 통해 공감함으로써 상대방을 이웃으로써 인식하고 수용하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문학, 역사, 철학, 종교 등의 이론을 습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그들의 아픔과 울분, 사랑과 기쁨을 공유하는 공감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인문학은 ‘너’와 더불어 존재하는 ‘관계’로서의 ‘나’를 인식하고 사랑(자비, 나눔, 배려, 공감)으로 소통하는 지혜를 깨우치고 표현하게 하는 모든 문화, 사상, 지식 등을 말한다.   인문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진리를 찾고 따른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온전히 깨닫고 그 사랑을 최선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6-03-18
  • 현대인 허균이 살았던 과거의 삶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동부승지, 삼척 부사,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허엽(許曄)은 30년간이나 관직에 머물렀는데도 생활이 검소했고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한 인물이다.   허엽의 호는 초당(草堂)이다. 오늘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초당 순두부의 본고장이 바로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이다.         이곳에서 허엽의 아들 허균(許筠, 1569~1618)이 태어났다. 교산(蛟山) 허균은 명문가의 자제로 천재적인 두각을 나타내 모든 것이 보장된 인물이었지만, 불우한 계층을 대변하는 삶을 선택했다.   이런 까닭으로 허균은 조선시대 반역의 상징 같은 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평등사상에 눈을 뜬 허균의 급진적인 개혁 사상은 오늘날에 와서는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단과 반역을 도모하는 사회전복세력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쓴 《홍길동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허균이라는 인물을 볼 때, “역사는 현대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항상 새롭게 해석되고 평가될 수 있기에 역사를 보는 모든 이들의 시각은 상대적이다”고 말한 영국의 정치학자이며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 1892년~1982년)의 견해가 더욱더 공감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6-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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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보다 사랑이다
    돈의 역설 '고통의 초월이 아닌 광적 중독'정직한 마음과 아름다운 생각으로 돈을 다스려야 ▲ 돈으로 인해서 인간은 이 현실 세계의 고통을 초월하려고 하지만, 정작 돈 때문에 이 세계에 ‘빠져있음’이라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빠져있음’으로 해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빠져있음’으로 해서 그곳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광적으로 중독되어 있다. 인간에게 돈이란 무엇일까? 돈에 대한 경제학적인 정의는 차치하고, 돈의 본질을 차근히 물어보자. 우선 돈은 유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동전과 지폐라는 독특한 물질로 구성된 것으로서 우리의 감각과 욕망을 자극한다. 또 다른 한편 돈은 무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돈의 가치는 약속일 뿐, 그 수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수학적 계산과 산정 방식은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것 같지만, 우리를 속이는 가상이다. 나아가 돈 자체는 또한 광기를 갖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광기를 전염시킨다. 소유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낳은 광기, 소유를 하고 싶지만 소유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광기는 사람들을 전염시킨다. 그렇게 전염된 사람은 절망과 불안을 경험한다.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절망하고, 소유했기 때문에 상실될 것에 대한 불안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돈은 절망이자 불안이다. 돈 자체를 소유하고 있다고는 하나 소유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나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만큼 쉽게 가시적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이다. 또한 돈을 소유하고 있다고는 하나 일순간에 나의 곁을 떠나버리고 말 수도 있는 물질이고 계량화된 개념이다. 그래서 돈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사회는 그러한 인간의 절망과 불안의 묘한 심리를 악용하고 있다. 그리고 광기를 전염시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체제는 사실 모두가 이 세계를 초월하고 싶은 황홀경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돈은 사람으로 하여금 세계를 초월하도록 만든다. 또 다른 세계를 꿈꾸면서 개인의 이상적 사회를 만들어 나간다. 그것은 공동의 이상사회가 아니라, 개인의 이상사회에 그리며 ‘빠져있음’이라는 기이한 현상으로 치닫게 된다. 돈으로 인해서 인간은 이 현실 세계의 고통을 초월하려고 하지만, 정작 돈 때문에 이 세계에 ‘빠져있음’이라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빠져있음’으로 해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빠져있음’으로 해서 그곳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광적으로 중독되어 있다. 이렇게 돈은 광기를 동반한다. 즉 신비스러움, 성스러운 모습으로 가장하고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돈은 두렵다. 돈은 공포가 된다. 멀리 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가까이 하기에도 쉽지 않은 문제들이 많다. 물질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위험을 감수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 물질은 인간에게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 매력은 마력이다. 돈의 매력은 치명적인 마력을 가지고 있다. 동그란 동전, 길쭉하면서 촉감이 묘한 지폐의 마력은 한마디로 추종이다. 그것을 추종하는 자는 모두가 똑같은 길을 따라가려고 할 것이고,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돈은 고행이다. 고행을 해야 얻을 수 있는 물질이다. 고행을 하면서 얻으려 하는 돈은 자기 증식을 한다. 돈은 자기를 늘이고 한없이 뻗쳐 나가려고 한다. 고행을 하는 사람은 바로 절벽 아래로 한없이 뻗쳐 나간 그 위험천만한 줄기와 뿌리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광기를 알아차리지 못하면서도 손을 뻗고 마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부실 저축은행을 정리하겠다고 발표를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뱅크런(bank run․예금 대량 인출 사태) 조짐이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제 매스컴은 그 이후의 사태가 어떻게 되었는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돈의 마력에 ‘빠져있음’의 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의 밑바닥에 얼마나 날카로운 죽음의 그늘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돈은 돌고 도는 동전이나 순환을 하는 물질만이 아니다. 돈은 날카로움이다. 돈은 우리의 정신을 날카로운 곳을 향해 가게 만든다. 은행은 그것을 감추고 안정적이고 안전한 유토피아만 말해준다. 이에 편승하여 국민들이 돈의 숭배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뼈아픈 고행을 하면서, 또 다른 어떤 사람은 그 같은 고행의 덕 보거나 악용해 물질을 일순간에 손에 넣기도 한다. 그래서 돈은 정직하지 못한 속임수가 너무나 많다. 그래도 사람들은 오늘도 고행을 마다하지 않고 거룩한 모양으로 유혹하는 물질을 소유하기 위해서 모진 애를 쓴다. 돈의 유혹에서 빠져 나와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정직한 마음과 아름다운 생각으로 돈을 다스려야 한다. 20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방글라데시의 경제학자이자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의 정신을 보자. 빈민들을 가난의 굴레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무담보 소액대출 운동을 전개하며 마이크로 크레디트(micro credit)를 창안하고 그라민 뱅크(Grameen Bank)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저축은행사태를 지켜보며, 돈보다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에 따른 실천을 주저하지 않은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의 인간 사랑의 아름다운 마음을 생각하기 바란다.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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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25
  • 주의(ism)가 아니라 사랑이다
    절대성으로 힘을 부여받은 주의(ism)는 위험을 초래해답은 주의(ism)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보여주신 사랑 ▲ 이제 이 지구촌 공동체는 모두 일어나 사랑을 노래해야 한다. 이 사랑의 노래가 주의, 이념, 이론, 학설, 교리도 사랑을 위한 리듬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는 많은 사상이 등장하고, 사라지면서 나름대로의 유익과 폐해를 남겼다. 하지만 인간의 인간됨에 회의가 들 정도의 참혹한 사건들의 이면에는 주의(ism)라는 이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주의, 이념, 이론, 학설, 교리들이 자신들의 굴레 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드려서는 종속시켜버린다. 여기에 종속 되면 누구나 자기가 소유하게 된 이념이 다른 어떤 것 보다 이상적이며 최고의 가치관이라고 생각하게 된다.이것이 바로 갈등의 씨앗이 되고 전쟁의 불씨가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지성의 숲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온갖 이즘(ism)과 올로지(ology)의 넝쿨들로 인해 길을 잃고 헤매는 처지가 된 셈이다. 기독교 안에도 엄청난 교파들로 인한 교리가 난무하고 있다. 보편적으로 종교는 평화를 추구한다. 그런데 이념이 앞서게 되면 타종교에 대한 타파를 위해 폭력과 살상이라는 수단도 정당화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 되신 하나님을 왜곡된 시야로 해석한 편협한 자기중심적 도그마(dogma)에 갇힌 근본주의적 태도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최고의 신앙인인양 굉장한 착각만큼이나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또 다시 못 박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가르침은 사랑이요, 희생이다. 우월적 신념으로 물든 교조주의(dogmatism, 敎條主義)가 아니다. 잘못된 신념과 그에 대한 신봉을 좋은 믿음과 신앙으로 착각하는 오류만큼 우상에 물들어있음을 자각해야 한다.신념에 빠진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마치 굶주린 맹수가 먹잇감을 물어뜯는 것처럼 이성을 잃어버리고 행동한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나 ‘남경대학살’과 같은 2차세계대전의 나치즘과 군국주의의 망령을 보라. 이들에게는 오직 하나만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모든 것이 존재적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이런 전체주의(全體主義, totalitarianism)적 발상은 오늘 날에도 없어진 줄 알고 방심하는 사이에 발생하는 폐결핵처럼 틈탈 곳을 찾고 있는 듯하다. 진보냐, 보수냐, 여(與)냐, 야(野)냐의 문제가 아니다. 사제 간에도, 대립이 교육을 무너뜨리고 있다. ‘학생인권’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교권’에 대한 대립은 아니다. 매사에 이분법적 구도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문제다.이념이 무서운 것은 왜곡과 파괴적인 진행 속도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암이 무서운 것은 생명의 위협이 될 때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과 그 전이 속도가 폭발적이라는 것이다. 이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정상 세포 속에서 평화와 공존의 얼굴을 하고 화합을 이야기한다. 이런 과정에서 진정한 평화와 공존의 생명을 위협하기 위해 서서히 침투한다는 것이다.권력 추구자들은 이런 속성을 절묘하게 이용할 줄 안다. 권력 추구자들의 개인적 욕망의 달성을 위해 평범한 사람들이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런 암적 요소를 막아내려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성육신은 세상적 논리나 이념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사랑이요, 희생이다. 물론 주의, 이념, 이론, 학설, 교리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 필요의 정당성이 주의(ism)를 위한 동원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지도자의 권위, 아버지의 권위, 선생님의 권위는 창조섭리의 질서다. 그러나 권위의 남용으로 인한 권위주의는 암적 요소로 공동체의 생명을 파괴하게 된다. 약자들은 어딘가에 열광함으로써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싶어 한다. 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격려함으로써 그 정체성을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그래야 창조섭리의 다양함이 아름답게 꽃피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생명력도,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도 볼 수 없는 삭막한 어둠이 몰려오게 된다.절대성으로 그 힘을 부여받게 되는 주의(ism)의 힘은 그 만큼의 위험을 초래할 뿐이다. 해답은 주의(ism)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보여주신 사랑이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사람은 사랑 없이는 강해질 수 없다. 사랑은 부적절한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생의 피며, 분리된 것을 재결합시키는 힘이다.(One cannot be strong without love. For love is not an irrelevant emotion; it is the blood of life, the power of reunion of the separated.)‘라는 말을 했다. 이제 이 지구촌 공동체는 모두 일어나 사랑을 노래해야 한다. 이 사랑의 노래가 주의, 이념, 이론, 학설, 교리도 사랑을 위한 리듬이 되게 하는 것이다. 최대식 타임즈코리아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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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18
  • 사물과 거리 두는 삶
    사물성에 빠져-있음은 사물에 기대는 것이고 달라붙어 있는 것사물성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비해야 함 ▲ 사물들은 우리와 공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로서 우리의 손앞에 있을 뿐이다. 사물은 우리의 처분에 따라서 생명력을 갖게 된다. 사물이 인간과 마주 보고 있는 존재가 되려면 사물이 갖고 있는 그 본래의 생명력을 상실하면 안 된다. 사물의 사물성은 인간이 부여한 생명력에 있다. 우리는 사물-앞에-있음이다. 세계 내의 수많은 사물들로 둘러 싸여 있고 그것들과 관계를 맺고 산다. 사물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다만 사물이 갖고 있는 성격에 따라서 사용될 가능성으로 놓여 있다는 말이다. 사물은 인간과 같은 인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물의 사물성으로만 가치가 있다. 만일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사물성에 의한 사용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사물은 인간의 필요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여러 사물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지만 다 사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사물성으로 인식되고 사용되어질 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은 인간의 사유에 의해서 사물성으로 다가올 수 있다. 사물을 사용하기 위해서 인간은 사유를 하게 되는데, 만일 사물을 손에 잡기 위해서 의식하고 몸을 움직이는 행위가 없다면 사물은 우리-앞에-있음이 아니다. 이는 사유되지 않은 사물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없고, 인간이 능동적 행위를 통해서 사물과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이며, 동시에 사물의 사물성은 인간이 사물을 향해 의식하고 몸을 움직일 때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이다.사물이 적어도 우리 앞에 있음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그 사물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사물들은 우리와 공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로서 우리의 손앞에 있을 뿐이다. 사물은 우리의 처분에 따라서 생명력을 갖게 된다. 사물이 인간과 마주 보고 있는 존재가 되려면 사물이 갖고 있는 그 본래의 생명력을 상실하면 안 된다. 사물의 사물성은 인간이 부여한 생명력에 있다. 그런데 오히려 인간이 사물의 사물성에 빠져-있음의 상태로 살아간다면 이것은 불행이다. 사물성에 빠져-있음은 사물에 생명력을 부여하면서 사용하고자 하는 것과는 반대로 사물에 기대는 것이고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빠져-있음과 달라붙어-있음은 다시 사물을-따름이라는 주객이 전도된 현상을 가져온다. 사물-앞에-있음은 인간이 사물의 사물성을 주체적으로 부여하여 자신의 의도된 방향으로 사용하는 주도적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역으로 사물을-따름은 사물에 달라붙어서 떨어지면 안 되는 위기의 상태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의 자기로 말미암지 않은 수동적이고 몰주체적인 상황을 깨닫게 된다. 사물에 달라붙어-있음은 사물에게 자신의 의지를 맡기고 그 사물성에 이끌려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라붙어-있음은 곧 끌려-감이다. 사물의 입장에서 보면 잡아-끔이다. 사물은 인간을 자신의 자리로 잡아-끈다. 사물은 인간을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잡고 있다. 그러면서 사물은 인간을 자신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자기가 있는 자리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인간이 사물로 인해서 사물화되는 것이다. 일전에 화물을 실어 나르는 사용가치를 지닌 사물에 의해서 아까운 운동선수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물성의 과신이 빚은 결과이다(유치원 통학버스로 말미암아 어린이들이 죽은 사례 또한 같은 사태이다). 화물차라는 사물, 그리고 화물차가 가진 사물성에 의해서 죽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화물차라는 인간의 교통수단에 불과한 공간 안에 운전을 하는 인간 인격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또 하나의 사물로 인해서 큰 사고가 벌어졌던 것이다. 운전하는 인간은 화물차는 사물을 잘 다루어야 하는 책임성이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화물차라는 사물성이 지닌 특성에 따라서 제대로 조작을 했었어야 올바른 것이다. 그런데 그 사물성을 넘어서 동시에 다른 사물성(DMB)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의식과 감각을 일정한 사물에 빠뜨리게 하고, 그 사물의 사물성에 질질 끌려서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 사물-앞에-있음에서 사물에-빠져-있음의 실존적 상황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사물에-빠져-있음은 잠깐의 쾌락으로 이끈다. 그 쾌락을 벗어날 수 없을 때 사물에 달라붙어-있음, 사물에-끌려-감이라는 실존적인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현대인들은 지금 그러한 질병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그 질병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 질병이 우리를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찌해야 할까? 사물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사물의 사물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본질이 가져다 줄 가능성에 대비할 때만 질병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사물로부터 멀어질수록 자신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기로부터 말미암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더 나아가 사물을 자유롭게 해야 인간이 자유로워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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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17
  • 창의성은 경쟁력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다
    진정한 창의성은 자신만을 욕심이 아니라 어울림과 상생을 위한 힘 ▲ 진정한 창의성은 자신만의 욕심과 유익을 채우는 수단을 말하는 경쟁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어울림과 상생을 위해 남들보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힘을 보태는 것이다. 그래서 창의성은 경쟁력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의 창의성이라면 대 환영이다. 한국인은 좋은 특성을 많이 가진 민족이다. 이 말은 국수주의(國粹主義, ultranationalism)나 우월의식에 치우친 민족주의적인 발상을 말하려함이 아니다. ‘다름’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우리민족의 장점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우월주의의 폐해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우월주의는 교만이며 불평등과 폭력의 토대가 되어왔다. 유대인들의 우월주의는 자신들이 그토록 신앙하던 하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잘못을 자행하였다.  게르만 민족의 우월주의는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게 하였고 일본의 우월주의는 남경대학살을 비롯한 수많은 폭거를 인류의 가슴에 상처로 남겼다.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런 민족주의적 행태를 보면 무시무시하게 포악할 것 같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평범한 아저씨요, 아줌마요, 다정한 이웃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극악무도한 포악을 자행하였을까?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의 함정이다. 개인 대 개인으로서는 이성이 작동하는 평범한 관계가 되다가도, 집단 간의 구도가 될 때에는 몰개성적으로 집단적 이슈에 함몰되고 만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에 수백만 유태인을 학살한 혐의를 받은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이라는 독일의 나치 친위대 중령은 자신은 명령에만 충실했을 뿐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 재판을 보게 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아이히만의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에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개인의 사유(思惟)와 양심을 포기하고 집단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행동한다는 것, 소위 ‘맹목적인 충성’ 또는 ‘이념에 대한 충실한 수행’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런 현상을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고 명명하였다.지구촌이라는 말은 더 이상 생소한 말이 아니다. 지구촌이라는 하나의 공동체 가운데 세계 곳곳에서는 각양 다름이라는 다양성이 아름답게 만발하여 조화롭게 물들어야 한다. 그야말로 글로컬(Glocal; Global Local)의 세상으로 상생하며 공생공영의 세상을 꽃피워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각자 자신만의 창조 본래적 목적에 기인한 창의성이 필요하다. 이것이 유기적으로 연합될 때, 이 나라 이 민족은 풍요를 누리게 된다. 이것을 나누면 지구촌을 넉넉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조화를 이루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창의성은 경쟁력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이런 발상을 보면서, 말은 그럴 듯하지만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적 소리라고 일축해버리는 사람도 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도덕과 윤리가 밥 먹여 주느냐,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이겨야 살지’ 이런 논리로 산다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될까? 이것은 진화론적 발상에 기인한 적자생존의 논리다. 이런 논리는 약육강식의 사회를 양산할 뿐이다. 소수와 약자에 대한 배려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발상에서라면 창의성은 생존 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묘수고 견인차일 뿐이다. 이것은 스스로를 몰락시키는 악의 조종에 속는 행위다. 창의성은 나만의 누림을 위한 타인에 대한 제압력이나 무기가 아니다. 나에게 잠재된 발현을 통한 소명의 실현이다. 이로써 모두와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미 FTA가 시행되고 있다. 기왕에 시행되는 일이라면 어느 한쪽을 위한 경쟁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순박한 농부의 한숨을 만들어내는 압박과 마음의 그늘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말 그대로 서로 잘살아 보자고 한 일이라면 잘살게 해주어야한다. 대승적 차원에서 어차피 희생은 따르는 법이니, 누군가는 감수하라는 논리는 폭력이나 다름없다.나눔과 배려가 필요하다. 이것이 지도자들이 할 일이다. 경영에서도, 무역에서도, 경제에서도 창의적 발상이 필요하다. 진정한 창의성은 자신만의 욕심과 유익을 채우는 수단을 말하는 경쟁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어울림과 상생을 위해 남들보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힘을 보태는 것이다. 그래서 창의성은 경쟁력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의 창의성이라면 대 환영이다.그런데 과연 창의성이 무엇인가? 우리는 천재성과 창의성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인 시야에서 본다면 두뇌가 우수한 사람, 체력이 남다르게 뛰어난 사람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공평하다는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창조 본래적 목적으로 인한 잠재력의 발현인 것이다. 사과나무가 사과를 결실한다고 해서 그것이 크기가 그 보다 작은 다른 과일들에 비해 천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창의성이라 함은 잠재력의 발현에 따른 또 하나의 유익의 창출로 인한 공동체적 아름다움의 실현이라 할 것이다. 최대식 타임즈코리아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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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11
  • 사랑과 허용은 다른 것이다
    사랑은 자기만의 편리와 욕심을 위한 분별력 없는무조건적인 허용과 무례함이 아니다 ▲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5-7) 세상에는 많은 착각과 오해가 존재한다. 잘못 된 기준을 제시하는 논리에 빠져든 탓이다. 소위 도둑도 도둑질에 대한 나름의 변명과 논리가 그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언 23:7)이라고 한다. 그 마음의 생각이 행동을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연이외연內燃而外延)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누가복음 6:43-45)인간은 이성의 지배를 받도록 창조되었다. 이 판단의 기준을 구성하는 것이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이렇게 형성된 세계관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며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어떤 교육과 환경 가운데 영향을 받고, 그의 사상이 형성되느냐는 그의 전 일생을 결정하게 된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 국한되어 끝나는 것이 아니다. 히틀러(Adolf Hitler)에게 형성된 그릇된 세계관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수많은 희생을 초래함은 물론 자신의 조국에도 엄청난 오욕을 짐 지웠고, 자신도 음독자살로 최후를 맞았다.오늘날 북한을 제외한 그 어디에서 공산주의가 버티고 있는가? 공산주의라는 잘못된 논리와 세계관은 엄청난 불행과 씻을 수 없는 범죄의 발판을 제공할 뿐이었다. 그래도 북한은 우리의 민족이다. 그래서 우리는 북한 주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가운데 도와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요, 자매인 그들을 지금도 여전히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들의 잘못된 논리와 세계관을 허용한다는 것이 결코 동일시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많은 침략을 당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다보니, 민족주의와 저항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은 우리 모두의 상처요, 아픔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본질적 판단력이 흐려져서는 안 될 일이다. 노동자를 위해서 권익을 대변해야 할 사람도, 이론도 필요하고 그것이 마땅히 존중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정당한 부(富)가 존중받지 못해야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공생공영의 화합 속에 사랑의 자양분이 나눔과 배려의 아름다움을 꽃 피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상이 아니라, 실제가 되는 사회가 먼 훗날의 언젠가에 오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실천에 따라 즉시적 실현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기결정주의적 편협한 도그마(dogma)에서 과감하게 탈피해야 한다. 일제강점기였던 1920~30년대 억압받던 젊은이들에게 사회주의는 하나의 서광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가들에게도 이런 정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결성되었던 것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FP)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회원이었던 작가 박영희는 1933년 이 단체를 탈퇴하면서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말을 남을 남겼다.우리는 인류와 우리의 역사에서 현재와 미래를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굳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논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누가 막겠는가?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전제가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해서 도둑질이나 폭력행위를 허용하겠는가? 민족을 넘어 지구촌 공동체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물론 다름도 배려하고 포용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된 논리와 세계관까지의 허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오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이 한 달만이라도 가정을 더 생각하며 살자는 취지일 것이다. 어린이날도 있고, 어버이날도 있다.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고 진심이 담긴 선물도 주고받을 것이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올바른 논리와 세계관을 심어주는 일이다. 요즘은 대부분 한두 명의 자녀를 기르다보니, 자녀가 우상이 된 듯한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공공장소나 대중식당에서 마구 뛰고 소란을 피워도 무조건 허용이 된다. 이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자기만의 편리와 욕심을 위한 분별력 없는 무조건적인 허용과 무례함이 아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5-7)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박요섭 박사 타임즈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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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10
  • 왜 기준이 달라야 하는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배려와 포용은 약자나 국민들을 위한 자세 ▲ 소위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정권, 다른 당, 다른 후보들에게는 조금만 문제가 있는 듯해도 맹공을 퍼붓는다. 하지만 자신과 연관된 문제는 언제나 넓은 아량과 배려라는 포용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자세는 약자나 국민들을 생각하는데 필요한 자세가 아닌가? 자신에게 만큼은 유독 관대한 것은 이기주의의 전형이다. 4·11총선은 끝났지만 관련자들의 논문 표절, 공천시비, 권력층 인사들의 비리 등의 문제가 여전히 국민들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하고 있다. 이런 현상에서 유독 쉽게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남에 대해서는 그렇게 엄격하던 기준제시가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침묵으로 일관하기도 하고, 적극적 해명이라는 명분으로 합리화를 하고 나서기도 한다. 소위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정권, 다른 당, 다른 후보들에게는 조금만 문제가 있는 듯해도 맹공을 퍼붓는다. 하지만 자신과 연관된 문제는 언제나 넓은 아량과 배려라는 포용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자세는 약자나 국민들을 생각하는데 필요한 자세가 아닌가? 자신에게 만큼은 유독 관대한 것은 이기주의의 전형이다. 공직자가 가져야할 덕목 가운데 으뜸은 봉사정신이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이기적인 발상의 소유자라면 봉사정신이 앞서야 하는 공직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심지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도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윤리경영을 앞세우고 있지 않은가!  잘못도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될 일이지만 잘못보다 더 큰 문제는 핑계나 합리화(rationalization)다. 합리화는 용납될 수 없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자기 보호적 방어기제(防禦機制, defense mechanism)다. 이는 스스로 잘못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잘못을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고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것이 변화하여 새롭게 되려는 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떻게 해서든지 사회적 승인을 얻을 요량으로 변명이나 궤변을 늘어놓기도 한다. 잘못을 저지른 진정한 동기를 감추고 자기를 보호하기에 급급한 모습은 스스로 지도자적 권위를 추락시키고 부정하는 행위다. 그렇다고 잘못이 결코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빛과 같아서 날이 밝으면 어둠 속에 묻혀있던 사실들을 드러내게 만드는 것이다.입만 열면 정의와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사람들의 반민주주의적, 비윤리적 행태는 겉으로만 민주와 정의를 부르짖던 세력들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자신들이 말하는 좋은 결과를 위해 과정은 잘못해도 괜찮다는 것인가? 패권주의에 물든 나라들은 때론 ‘평화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전쟁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들이 치켜든 명분용 횃불은 타인을 비추는 데에 있어서는 과도하리만치 밝다. 그러나 그것으로 자신을 조명하는 데에는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과정은 결과와 하나이지 분리가 될 수 없다.한비자(韓非子) 세난편(說難篇)에 나온, 방패와 창을 팔던 楚(초)나라 장사꾼의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당착(矛盾撞着)의 이야기를 알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파는 방패와 창이 천하의 어떤 것도 막을 수 있고, 뚫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스스로 거짓임을 입증하는 것일진대, 그것도 모르고 소리치며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다면 우습고 허무맹랑한 꼴이다. 이런 모습을 오늘 날에도 재현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이는 스스로 어리석음을 만천하에 홍보하면서, 또 나라와 민족을 위한 지도자로서 봉사하려고 한다는 꼴이니 말 그대로 모순이라는 것이다.모든 것이 만들어진 본래적 목적에 따라 쓰이고 작동되어야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이다. 자동차는 사람을 태우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자동차를 타지 않고 밀고 다닌다면 이거야말로 우스운 꼴이다. 이것은 자동차로서의 효용가치와 아름다움을 잃은 셈이다. 국민의 대리를 위해 뽑은 지도자들이 국민을 위해 대리하고 봉사하지 못한다면 이로써 이미 그 아름다움과 효용가치를 상실한 것이다.“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복음 5장 13절)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 Coram Deo, in front of God)”라는 인식으로 삶을 살았다고 한다. “Me Vidit Deus(메 비디트 데우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날마다 올바른 삶을 위하여 경각심을 일깨워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大學)에 신독(愼獨)이라는 말이 있다. 비록 혼자 있다고 할지라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올 곧은 몸가짐을 하고 언행을 삼간다는 말이다. 지도자들이여!보이는 곳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비록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라도 ‘국민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라는 자세로 정직하고 성실해야한다. 그렇게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본인이 만족되고 기쁠 것이며 국민들은 그를 아름답다할 것이다. 기준은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늘 변함없이 같아야 한다. 하지만 지도자로서의 인격의 소유자라면, 더 나아가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아량과 사랑의 시야를 소유해야 할 것이다.최대식 타임즈코리아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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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09
  • 자신의 길을 내라!
    남이 낸 길은 똑같은 흔적을 남기는 것내가 내야 비로소 길이 된다 ▲ 길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길을 내는 것이다. 반드시 참 길, 삶의 길, 다님 길을 내야 한다. 내가 내야 비로소 길이 된다. 다닌 길을 가는 길은 진리/참 길이 아닐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야 한다. 가야 할 목적지가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길은 멈춘 적이 없다. 길이 길 아닌 적도 없다. 길은 사람과 함께 존재해왔기에, 길은 사람의 고향이다.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는다. 그래서 길은 지나감이요, 지나가야 할 길인 것이다. 스스로 길을 내고 살아야 하는 살아감의 길, 즉 삶의 길이다. 길을 내지 않아도 길은 길이다. 길은 선험적이고 초월적이다. 함석헌이 “사람이 길을 낸 것 아니요, 길을 걷는 것도 아니요, 도리어 길에 떨어진 한 알이 사람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165쪽)라고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수많은 길이 있다. 사실 길 없는 곳이 없다. 다닌 길은 다닐 길이고 다닐 길은 계속 다닐 길이다. 그러나 길 아닌 곳은 가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가기보다 다닌 길을, 간 길을 가려고 한다. 자국이 남은 길이 편하고 안심을 할 뿐만 아니라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길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길을 내는 것이다. 반드시 참 길, 삶의 길, 다님 길을 내야 한다. 내가 내야 비로소 길이 된다. 다닌 길을 가는 길은 진리/참 길이 아닐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야 한다. 가야 할 목적지가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함석헌은 “길이 참이다. 기르는 것이 참이다. 갈 길 있는 것 아니다. 감이 길이다.”(위의 책, 165쪽)라고 말한다. 가고 감. 가는 것은 삶을 감는다, 마음을 감는다는 것이다. 가는 것은 감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삶을 감고, 마음을 감기 위해서 선뜻 길을 가려하지 않는다. 오직 남이 낸 길을 따라 똑같은 흔적을 남기려고 할 뿐이다. 그러니 새로운 길이 나지 않는다. 새로운 길이 나야 새로운 삶이 열린다. 새로운 길을 가야 새로운 씨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길은 기르는 것이다. 나를 기르는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은 같은 길이 아닌 늘 다른 길이다. 길은 늘 거기에 있지만 그 길을 가는 나는 다른 시간, 다른 길을 만난다. 길의 신비, 길의 진리는 현상을 넘어 우리를 이끄는 세계를 지시한다. 길은 있음이지만 반드시 가야 있는 것이다. 길의 형이상학은 넘어선-곳, 넘어서-있는-곳에 새로운 나를 놓아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길은 시간성과 공간성을 동시에 갖는다. 새로운 존재는 시간성을 나타내지만, 넘어서-있는-곳, 혹은 넘어서-있을-곳은 공간성이다. 넘어서-있는-곳은 다시 너머에-있는-곳이다. 길은 ‘너머’가 없다면 ‘넘어’는 무의미하다. 의미 없는 너머의 길은 의식과 행위의 불가능성을 낳지만, 길과 너머는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원인체이다. 길을 떠나는 사람은 항상 넘어서, 너머에-있는-곳을 향해 간다. 길의 형이상학은 너머의 존재를 해명하려 한다. 그것은 길을 가는 자가 향해-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향해-있음의 존재는 향해-있는 존재의 본질이 향해야-할-곳을 본다. 지금 향해-있는-곳으로부터 향해야-할-곳, 즉 너머에-있는-곳으로 향해 가려고 한다. 저축은행 사태, KTX 민영화, 미국산 수입쇠고기 반대, 총선부정, 원전반대 등등의 모든 이슈들이 길과 연관된 것들이다. 국가 정치경제는 이미 낸 길을 날 길로 바꾸려 함인지, 아니면 낸 길을 새로운 길로 하겠다는 것인지, 씨알은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씨알은 난 길을 낼 길로 알고 자기의 길인 양 가고 말 것이다.길은 길기 때문에 아무도 지레짐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가야 비로소 길을 알 뿐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길을 간다. 길을 가기 전, 길을 가는 도상이라도 그 길이 참 길인지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다. 더불어 현재 향해-있는-곳에서 과연 향해야-할-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인지를 자문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리로 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어야 할 것이다.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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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08
  • 외모지상주의 과연 행복의 돌파구인가?
    외모가 서로 다름이 아닌 우열적 차이로 수용인간의 인간됨은 다양성의 표출과 하나 되어 서로를 존중하는 것 ▲ 인간의 인간됨은 다양성의 표출과 더불어, 하나 되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움을 발하는 공동체로서의 조화를 드러냄에 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선(善)이며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문제는 행복에 대한 기준이 문제다. 기준이 잘못 되면 모든 것이 잘못 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잘못된 기준들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테지만 그 가운데 외모지상주의 또한 만만치 않은 기세다. 외모지상주의(Lookism)가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정보통신의 물결을 타고 전염병처럼 급속하게 지구촌으로 번져가고 있다. 대한민국은 유독 심한 것 같다. 인구대비 1인당 화장품 소비량이나 성형수술의 비율이 세계최다 수준이다. 이제는 성형도 하나의 스펙(Specification)으로 자리 잡고 있는 분위기다. 외모가 서로 다름이 아니라, 우열적 차이로 수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외모도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한 요소가 되고 있다는 의미다. 인종차별, 성차별을 넘어 외모차별이 개인 간의 우열과 성패에 적극적으로 개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연구 결과들은 외모가 사회생활에서의 관계나 취업 등에 상당한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모 경쟁력을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외모가 잘나야 자신감도 생기고 다른 사람들도 알아주니 행복하게 된다는 것이다.이런 차원에서 성형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에 인류의 재앙이 숨어 있다. 창조섭리에 순응하는 조화와 아름다움이 아니라 저급한 자기 생성적 쾌락주의가 여기에 물든 사람들을 자기 입맛대로 제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끝없는 비교의식과 우월주의를 부추겨서 마침내 인간을 파멸로 몰아간다. 인간의 기계화, 상품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몰개성화(Deindividuation)를 의미한다.몰개성화란 말 그대로 모두의 개성이 하나로 되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각자의 개성이 각각이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로 합쳐져 버린다는 말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르봉(Gustave LeBon)에 따르면 군중 속에 있는 사람들은 몰개성적 현상으로 인해 충동적, 야만적, 파괴적인 본능들을 충족시키려는 것에 보다 자유롭게 노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보더라도 획일주의적 발상의 외모지상주의에 의한 몰개성화는 엄청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우리는 자기 생성적 저급한 쾌락주의의 대가가 그렇게 만만치 않음을 직시해야 한다.  외모지상주의에 의한 성형은 자기 파괴적 행위다. 더 예뻐지려는 자기 생성적 쾌락의 발상이 외모라는 겉모양의 파괴를 넘어 자기 정체성과 개성이라는 본질적 순수와 아름다움을 송두리째 파괴해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하천을 정비한다고 콘크리트로 반듯하고 깔끔하게 정리해 놓으면 당분간은 멋지게 보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생태계는 파괴되고 생명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게 된다. 비유하자면 외모지상주의적 발상에 의한 성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콘크리트로 단장한 하천이 얼마동안은 좋아보여도 그 본질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없듯이 외모지상주의는 결국 인간성을 파괴하는 행위다.전파교란 행위처럼 인간의 아름다움이라는 본질적 가치를 교란하는 파괴적 속임수다. 하천의 하천 됨은 물고기는 물론 온갖 생물들이 살아가고, 스스로 정화하며 자연과 인간에게 상생적 유익으로써 함께 어울려 사는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인간됨은 다양성의 표출과 더불어, 하나 되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움을 발하는 공동체로서의 조화를 드러냄에 있을 것이다. 여기에 창조섭리에 부응하는 인간의 행복이 있지 않겠는가? 박요섭 박사 타임즈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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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04
  • 재능은 자신만을 위한 시혜적 방편인가?
    배워서 남 주는 것, 소통과 조화의 아름다운 세상재능은 자신과 세상 모두를 위해 위탁된 것 ▲ 인간은 ‘너와 더불어 나’라는 공동체로써 존재적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경쟁과 전투의 대상이 아니라 돌보고 사랑하며 나누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동일한 지능 지수와 외모를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어디가 달라도 다른 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손가락의 지문도 똑같은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창조의 신비가 놀라울 뿐이다. 요즘 각 학교들은 중간고사를 치르는 기간이다. 피곤에 찌든 학생들의 모습에서는 진한 한숨이 베어 나온다. 만족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표시일 것이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얻지 못한 것이야 본인의 탓이다. 그러나 동일한 열심을 내더라도 지능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결과적으로 그만큼의 거리가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이런 현실을 감안한 평가적 판단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운동경기에서는 체급별로 치르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 그렇지 않으면 체격조건이 좋은 사람이 유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평등에 대한 것들에서도 다양한 이해와 기준이 필요하다. 무조건 허용한다고만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허용적 평등은 소극적 기회균등과 차별 철폐적 성격이 강하다. 이런 점에 대해 적극적 기회균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보장적 평등이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조건을 부여하는 조건의 평등, 취약한 부분을 지원하거나 보상하는 결과의 평등도 있을 수 있다. 평등에 대한 어떤 적용도 그것이 기계적인 적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인간의 존재적 가치와 의미를 구현하는데 얼마나 더 바람 직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실현은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가령 수많은 금은보화를 준다고 해도 그 조건이 무인도에서의 삶이라면 그 순간 그 가치는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관계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것이다.인간은 ‘너와 더불어 나’라는 공동체로써 존재적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경쟁과 전투의 대상이 아니라 돌보고 사랑하며 나누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그런데 성적 지상주의식 교육은 나만 잘되자는 것이다. 소위 ‘배워서 남 주느냐’는 식이다. 배워서 남에게 주어야 사는 의미가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다. 이렇게 해야 소통과 조화가 이루어지고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그런데 재능이 자신만을 위한 스스로의 생성적 산물인양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창조섭리에 대한 도전이요, 창조세계에 대한 파괴적 행위다. 따라서 이것은 죄악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도층이 더  높은 도덕성을 발휘하여, 보다 앞장서서 책임이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마땅한 것이다. 좋은 재능은 자신만을 위해 시혜(施惠)를 베풀도록 부여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신은 물론 세상 모두를 위해 위탁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식물이 계절에 순응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모든 사람들은 주어진 재능에 따라 자발적 기쁨 가운데 의미 있는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모두가 이런 삶을 실현해나간다면 이것은 가장 아름답고 복 된 생명적 교감과 열락(悅樂)이 될 것이다. 정부나 교육당국의 모든 정책도 이런 안목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배려하게 하는 인재육성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이를 위한 입법과 제도가 우선적으로 마련 될 때 학교 교육은 교육다운 교육으로써의 아름다움을 발하게 될 것이다.박요섭 박사 타임즈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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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02
  • 다문화에 이중적 잣대는 안 된다!
    ‘다’는 다름이 있지만 다 같은 한 민족이라는 동질성을 내포하는 개념 ▲ 한국 내에 문화적 다양성, 민족적 다양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진지하게 ‘다’에 대한 존재와 이해를 달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문화적 현실을 타개해 나가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여유가 있지만 작은 지혜를 지닌 사람은 남의 눈치만 본다. 위대한 말은 담담하고 너절한 말은 수다스럽기만 하다.”(大知閑閑, 小知閒閒, 大言炎炎, 小言詹詹.)-莊子아마도 우리 민족은 같은 핏줄을 타고난 동포가 해외에서 잘 나가는 위치에 서게 되고 세계 언론에 주목을 받게 되면 박수를 보내싶고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는가 보다. 보상심리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왜소한 국가에서 사는 우리 국민의 속성인지는 몰라도 선진국에 대한 엘리트 콤플렉스도 작용을 하는 것 같다. 한국인으로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한 유명한 대학의 총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세계은행의 총재 후보로까지 오르내리는 김용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와 비교하고자 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필리핀에서 대학도 중퇴하고 한국으로 시집와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고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까지 선출된 이자스민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자신의 태어난 나라에서보다 현재 국적을 취득한 나라에서 훨씬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비교에서 우리의 잣대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성공적인 출세길을 달리고 있는 김용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반면에 이자스민에 대해서는 그렇게 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외국인혐오증(Xenophobia)으로 인한 인격적 폄하도 없지 않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이미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었다고 말들을 하건만 타인에 대해서 환대하지 못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연유일까?다문화(多文化)에서 ‘다’(多)는 단순히 많다거나 다양하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다’는 다름이 있지만 다 같은 한 민족이라는 동질성을 내포하는 개념이다. 설령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정체성이 인간성이나 인격을 대변하는 것이 아님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선진국에 대한 우월의식, 백인 선망의식 같은 것들이 공존하면서 피부색이 다른 민족에 대해서는 인종차별적 태도를 서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앞으로 ‘다’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 내에 문화적 다양성, 민족적 다양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진지하게 ‘다’에 대한 존재와 이해를 달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문화적 현실을 타개해 나가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다’는 포개어짐이다. 여러 개가 중첩되어 하나가 되는 현존재적 성격을 띠고 있다. ‘다’에는 특별한 시공간이 있는 장소이다. ‘다’는 거기에-있음이라는 존재 의미를 드러낸다. ‘다’는 다른 어떤 말보다도 우선성을 점유한다. 그러므로 ‘다’를 인식하고 인정해야 그 다음의 언어와 행위가 가능한 것이다.  지금의 우리나라와 같은 ‘다’의 사태를 미리 내다 본 사람이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다. 그는 “본국인이 기피하는 업종에서 기꺼이 일해 줄 노동력을 수입”할 수밖에 없고 “값싼 노동력의 부족으로 자국민이 제공할 수 없는 용역에 대한 수요는 계속 있을 것이기 때문에, 제3세계에서 제1세계의 인구 이동은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보았다(에릭 홉스봄, 안토니오 폴리토, 강주헌 옮김, 새로운 세기와의 대화, 끌리오, 2000, 184-185쪽).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우리에게도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때가 있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우리 앞에 나타나 있는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최소한 그들이 이제 이 사회의 뼈아픈 고통과 여러 난관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적어도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이라면 영원한 이방인은 없다. 몸이 낯설다 하여서 그들의 정신세계마저 혐오스러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땅에서 풀 한 포기, 돌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듯이, 이성을 가진 존재의 삶과 행위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자본은 이미 세계 자본이요, 정치는 세계 정치가 되었다. 이 지구사회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공공의 선을 위하여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어느 누구도 손가락질 받거나 차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에릭 홉스봄은 “대부분의 이민자가 제3세계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인종 차별은 피할 수 없다... 다른 용모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은 인정받기가 훨씬 어렵다”(에릭 홉스봄, 안토니오 폴리토, 강주헌 옮김, 새로운 세기와의 대화, 끌리오, 2000, 186쪽)라고 인종차별문제에 대해서 진단을 내린 적이 있다. 하지만 결코 이 사회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차별주의) 만큼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너와 더불어 나’는 인간의 본질적 가치와 의미를 부여함인데, 이에 대한 몰이해나 부정은 그야말로 모순이라는 것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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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합정보
    2012-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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