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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1-07-02
  • 한국화학연구원, 스펀지로 열을 전기로 바꾸는 소재 개발
    [타임즈코리아] 구부러지고 늘어나고 압축이 돼, 열이 있는 곳 어디에든 붙여 열을 전기 에너지로 바꿔주는 열전소재가 개발됐다. 완전히 유연한 열전소재가 개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화학연구원 화학소재연구본부 조성윤 박사팀은 열원의 형태와 관계없이 어디든지 붙일 수 있는 ‘스펀지형 열전소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열을 전기로 바꿔주는 소재로 온도 차에 의해 전기가 발생한다. 일례로 발전소 굴뚝에 열전소재를 부착하면, 굴뚝 안쪽의 고온(150도)과 바깥 상온(30도)의 온도 차로 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구진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스펀지에 탄소나노튜브 용액을 코팅했다. 탄소나노튜브를 물리적으로 분산시킨 용매를 스펀지에 도포한 후, 용매를 빠르게 증발시킨 것이다.  제조방법이 간단해 대량생산에도 적합하다. 모양을 만들어주는 틀 없이 스펀지를 이용해 열전소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거푸집 없이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셈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열전소재는 무기 소재로 만들어진 탓에 유연하지 않았다. 사람의 몸이나 자동차 등 다양한 곡면의 열원에 붙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제조공정 자체도 까다롭고 복잡하다. 전 세계 연구진들은 유연한 열전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탄소나노튜브에 주목했다. 탄소나노튜브는 전기전도도가 높고 기계적 강도가 강하며, 지구상에 풍부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팀이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해 유연한 열전소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스펀지와 유사하면서도 높게 쌓을 수 있는 탄소나노튜브 폼(foam)을 만든 것이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압축 안정성 실험 결과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는 “지금까지 개발된 유연한 소재는 지지체나 전극의 유연성을 이용한 것”이었다면서 “소재 자체가 유연한 건 이번 스펀지형 열전소재가 처음이고 제조방법도 간단해 대량생산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개발된 스펀지형 열전소재는 열전소재의 전기적 특성과 스펀지 고유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10,000번 반복해도 형태는 물론이고 전기적 특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압축 전과 압축 후의 저항값이 각각 1.0Ω(옴), 0.3Ω으로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이는 스펀지에 기공이 무수히 많아 변형에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펀지의 탄성을 이용한 응용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경우, 압력이 커질수록 발전량도 덩달아 높아졌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했을 때 최대 2㎼(마이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하여, 압축 전과 비교해 발전량이 10배 정도 증가했다. 이에 대해 연구논문 1 저자인 김정원 박사는 “스펀지의 압축되고 복원되는 탄성을 활용해 몸에 부착하는 웨어러블 기기에 적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수한 기계적 성질이 요구되는 자동차 등에도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정원 박사는 “열전소재 분야 전망도 밝다. 현재 자동차에서 사용하고 난 후의 열이나 온천수를 이용한 열전발전 시작품의 실증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관련 기술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성과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에너지 소재 분야 권위지인 『나노 에너지(Nano Energy), IF:16.602』8월호에 게재됐으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창의형 융합연구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 한국뉴스
    • 과학
    2020-09-22
  • 종속될 것인가, 회복할 것인가
      [타임즈코리아]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느린 사람은 어찌 살라는 건지, 넋이 나갈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많은 것들이 바뀌곤 한다. 이런 현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변화는 순리이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논리가 더 우세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약육강식이 진리이어야 한다. 여기에 동의할 사람들은 모두 강자라야 가능하다. 적어도 변화가 자연에 의한 것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이 자초한 변화에 순응하라는 것은 무조건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이 그만큼 편리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만큼의 행복을 확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비대 면화되어 가고 있다. 이것을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변화라고 동의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코로나19에 따른 불가피한 강요인 셈이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에 따른 변화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만남에서 누리고 싶은 행복은 사람의 DNA 속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다. 현장 공연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감흥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런 노력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 개인의 욕심이 아니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예술을 가상의 세계에 가두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 만약 가상의 세계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우리가 굳이 직접 여행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영상이나, 증강현실 그리고 가상현실 시스템만으로도 더 자세하게 보며 실감 나는 장면 속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온라인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계기로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콘텐츠를 구별하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가 파산했다는 기사가 유난히 아프게 느껴진다. 과학과 기술이 육체적 요소라면 문화와 예술은 정신적 요소이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난국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문화와 예술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예술의 존엄과 가치는 예술가들이 지켜 내야 하는 것이다. 대중화, 실용화 이런 측면들은 굳이 지키려 하지 않아도 어느 시대에나 자생해 왔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변하지 않게 하는 일,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려는 힘은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자극하여 거대한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예술의 힘이고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망가트려놓은 만남과 관계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 속에 내어주고 거기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만남과 관계를 열망하는 DNA와 인간의 지혜가 코로나19보다 더 강함을 증명하며 예전과 같은 역동성을 회복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왔듯이 이 또한 극복해 낼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코로나19를 이겨낼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이전과 같은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예술가들이여, 우리는 과학자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감동을 선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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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합정보
    2020-07-06
  • 인문학은 이론이 아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본질을 찾아 나선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사변적으로 흘러가면 이념이나 현상적인 집착으로 이탈하게 된다.   이런 행태는 수많은 증오와 폭력을 낳으며 씻지 못 할 마음의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남길 뿐이다.   인문학적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삶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타자와 참된 관계를 형성하는 정신을 의미한다.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사람은 ‘너’와 더불어 ‘나’라는 관계를 통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조화로움의 아름다움을 통해 공감함으로써 상대방을 이웃으로써 인식하고 수용하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문학, 역사, 철학, 종교 등의 이론을 습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그들의 아픔과 울분, 사랑과 기쁨을 공유하는 공감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인문학은 ‘너’와 더불어 존재하는 ‘관계’로서의 ‘나’를 인식하고 사랑(자비, 나눔, 배려, 공감)으로 소통하는 지혜를 깨우치고 표현하게 하는 모든 문화, 사상, 지식 등을 말한다.   인문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진리를 찾고 따른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온전히 깨닫고 그 사랑을 최선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6-03-18
  • 현대인 허균이 살았던 과거의 삶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동부승지, 삼척 부사,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허엽(許曄)은 30년간이나 관직에 머물렀는데도 생활이 검소했고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한 인물이다.   허엽의 호는 초당(草堂)이다. 오늘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초당 순두부의 본고장이 바로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이다.         이곳에서 허엽의 아들 허균(許筠, 1569~1618)이 태어났다. 교산(蛟山) 허균은 명문가의 자제로 천재적인 두각을 나타내 모든 것이 보장된 인물이었지만, 불우한 계층을 대변하는 삶을 선택했다.   이런 까닭으로 허균은 조선시대 반역의 상징 같은 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평등사상에 눈을 뜬 허균의 급진적인 개혁 사상은 오늘날에 와서는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단과 반역을 도모하는 사회전복세력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쓴 《홍길동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허균이라는 인물을 볼 때, “역사는 현대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항상 새롭게 해석되고 평가될 수 있기에 역사를 보는 모든 이들의 시각은 상대적이다”고 말한 영국의 정치학자이며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 1892년~1982년)의 견해가 더욱더 공감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6-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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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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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2
  • 한국화학연구원, 스펀지로 열을 전기로 바꾸는 소재 개발
    [타임즈코리아] 구부러지고 늘어나고 압축이 돼, 열이 있는 곳 어디에든 붙여 열을 전기 에너지로 바꿔주는 열전소재가 개발됐다. 완전히 유연한 열전소재가 개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화학연구원 화학소재연구본부 조성윤 박사팀은 열원의 형태와 관계없이 어디든지 붙일 수 있는 ‘스펀지형 열전소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열을 전기로 바꿔주는 소재로 온도 차에 의해 전기가 발생한다. 일례로 발전소 굴뚝에 열전소재를 부착하면, 굴뚝 안쪽의 고온(150도)과 바깥 상온(30도)의 온도 차로 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구진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스펀지에 탄소나노튜브 용액을 코팅했다. 탄소나노튜브를 물리적으로 분산시킨 용매를 스펀지에 도포한 후, 용매를 빠르게 증발시킨 것이다.  제조방법이 간단해 대량생산에도 적합하다. 모양을 만들어주는 틀 없이 스펀지를 이용해 열전소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거푸집 없이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셈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열전소재는 무기 소재로 만들어진 탓에 유연하지 않았다. 사람의 몸이나 자동차 등 다양한 곡면의 열원에 붙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제조공정 자체도 까다롭고 복잡하다. 전 세계 연구진들은 유연한 열전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탄소나노튜브에 주목했다. 탄소나노튜브는 전기전도도가 높고 기계적 강도가 강하며, 지구상에 풍부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팀이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해 유연한 열전소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스펀지와 유사하면서도 높게 쌓을 수 있는 탄소나노튜브 폼(foam)을 만든 것이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압축 안정성 실험 결과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는 “지금까지 개발된 유연한 소재는 지지체나 전극의 유연성을 이용한 것”이었다면서 “소재 자체가 유연한 건 이번 스펀지형 열전소재가 처음이고 제조방법도 간단해 대량생산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개발된 스펀지형 열전소재는 열전소재의 전기적 특성과 스펀지 고유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10,000번 반복해도 형태는 물론이고 전기적 특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압축 전과 압축 후의 저항값이 각각 1.0Ω(옴), 0.3Ω으로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이는 스펀지에 기공이 무수히 많아 변형에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펀지의 탄성을 이용한 응용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경우, 압력이 커질수록 발전량도 덩달아 높아졌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했을 때 최대 2㎼(마이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하여, 압축 전과 비교해 발전량이 10배 정도 증가했다. 이에 대해 연구논문 1 저자인 김정원 박사는 “스펀지의 압축되고 복원되는 탄성을 활용해 몸에 부착하는 웨어러블 기기에 적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수한 기계적 성질이 요구되는 자동차 등에도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정원 박사는 “열전소재 분야 전망도 밝다. 현재 자동차에서 사용하고 난 후의 열이나 온천수를 이용한 열전발전 시작품의 실증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관련 기술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성과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에너지 소재 분야 권위지인 『나노 에너지(Nano Energy), IF:16.602』8월호에 게재됐으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창의형 융합연구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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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2
  • 종속될 것인가, 회복할 것인가
      [타임즈코리아]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느린 사람은 어찌 살라는 건지, 넋이 나갈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많은 것들이 바뀌곤 한다. 이런 현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변화는 순리이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논리가 더 우세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약육강식이 진리이어야 한다. 여기에 동의할 사람들은 모두 강자라야 가능하다. 적어도 변화가 자연에 의한 것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이 자초한 변화에 순응하라는 것은 무조건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이 그만큼 편리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만큼의 행복을 확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비대 면화되어 가고 있다. 이것을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변화라고 동의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코로나19에 따른 불가피한 강요인 셈이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에 따른 변화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만남에서 누리고 싶은 행복은 사람의 DNA 속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다. 현장 공연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감흥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런 노력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 개인의 욕심이 아니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예술을 가상의 세계에 가두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 만약 가상의 세계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우리가 굳이 직접 여행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영상이나, 증강현실 그리고 가상현실 시스템만으로도 더 자세하게 보며 실감 나는 장면 속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온라인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계기로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콘텐츠를 구별하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가 파산했다는 기사가 유난히 아프게 느껴진다. 과학과 기술이 육체적 요소라면 문화와 예술은 정신적 요소이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난국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문화와 예술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예술의 존엄과 가치는 예술가들이 지켜 내야 하는 것이다. 대중화, 실용화 이런 측면들은 굳이 지키려 하지 않아도 어느 시대에나 자생해 왔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변하지 않게 하는 일,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려는 힘은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자극하여 거대한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예술의 힘이고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망가트려놓은 만남과 관계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 속에 내어주고 거기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만남과 관계를 열망하는 DNA와 인간의 지혜가 코로나19보다 더 강함을 증명하며 예전과 같은 역동성을 회복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왔듯이 이 또한 극복해 낼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코로나19를 이겨낼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이전과 같은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예술가들이여, 우리는 과학자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감동을 선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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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6
  • 인문학은 이론이 아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본질을 찾아 나선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사변적으로 흘러가면 이념이나 현상적인 집착으로 이탈하게 된다.   이런 행태는 수많은 증오와 폭력을 낳으며 씻지 못 할 마음의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남길 뿐이다.   인문학적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삶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타자와 참된 관계를 형성하는 정신을 의미한다.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사람은 ‘너’와 더불어 ‘나’라는 관계를 통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조화로움의 아름다움을 통해 공감함으로써 상대방을 이웃으로써 인식하고 수용하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문학, 역사, 철학, 종교 등의 이론을 습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그들의 아픔과 울분, 사랑과 기쁨을 공유하는 공감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인문학은 ‘너’와 더불어 존재하는 ‘관계’로서의 ‘나’를 인식하고 사랑(자비, 나눔, 배려, 공감)으로 소통하는 지혜를 깨우치고 표현하게 하는 모든 문화, 사상, 지식 등을 말한다.   인문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진리를 찾고 따른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온전히 깨닫고 그 사랑을 최선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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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8
  • 현대인 허균이 살았던 과거의 삶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동부승지, 삼척 부사,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허엽(許曄)은 30년간이나 관직에 머물렀는데도 생활이 검소했고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한 인물이다.   허엽의 호는 초당(草堂)이다. 오늘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초당 순두부의 본고장이 바로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이다.         이곳에서 허엽의 아들 허균(許筠, 1569~1618)이 태어났다. 교산(蛟山) 허균은 명문가의 자제로 천재적인 두각을 나타내 모든 것이 보장된 인물이었지만, 불우한 계층을 대변하는 삶을 선택했다.   이런 까닭으로 허균은 조선시대 반역의 상징 같은 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평등사상에 눈을 뜬 허균의 급진적인 개혁 사상은 오늘날에 와서는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단과 반역을 도모하는 사회전복세력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쓴 《홍길동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허균이라는 인물을 볼 때, “역사는 현대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항상 새롭게 해석되고 평가될 수 있기에 역사를 보는 모든 이들의 시각은 상대적이다”고 말한 영국의 정치학자이며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 1892년~1982년)의 견해가 더욱더 공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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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5
  • 원전과 핵무기를 누구도 가져서는 안 되는 이유
       우리는 모두 원전과 핵무기를 거부하고 이를 위한 생태적 삶과 영성을 모색해야만 한다.   후쿠시마 원전 재앙(2011년 3월 11일)이 일어난 지 5년이 되었다. 다른 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망각의 사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후쿠시마에서는 더는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사건을 바라보면서도 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원전을 지으려고 그토록 혈안이 되어 있는가?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는 그것을 정치·경제적 놀이로 설명한다.(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 임경택 옮김, 후쿠시마, 일본 핵발전의 진실, 동아시아, 2011, 98-99).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나머지 본질에서 중요한 것을 놓쳤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일본도 원폭의 피해를 철저히 경험한 나라이다. 그런데도 선거에서의 표를 의식하는 인기영합 정책(populism)은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로 나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다. 정치·경제적 권력의 논리로 움직이는 자들은 신을 바라보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려 들지 않는다. 자연은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뗄 수 없는 인간의 터전이며 생명 그 자체이다. 그런데 창조주로 인해서 존재하고 있는 그 자연을 유한 자인 인간이 주인 노릇을 하며 파괴하고 있다.   모든 것 안에는 창조주와 창조 섭리가 깃들어 있다. 이것이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기본적인 인식과 태도가 되어야 한다. 이런 바탕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연에 대해서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하려고 들지 않는다. 유한이 무한을 계산할 수 없고 인간이 하나님을 산술적으로 측량할 수가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처럼 어마어마한 원전 사고가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할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구촌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 원전과 핵무기는 이념과 경제의 문제를 넘어 무조건 모두 안전하게 폐기해야 한다. 이것은 누구나 안전한 식품을 먹어야 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 지구촌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 원전과 핵무기는 이념과 경제의 문제를 넘어 무조건 모두 안전하게 폐기해야 한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는 “땅은 인간의 놀이터(Spielraum·놀 수 있는 공간)가 되어야 하는데, 인간이 과학기술을 통해서 스스로 자연 안에서의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창조주가 되려고 한다. 인간은 점점 더 자연을 모욕하고 맞서는 존재(Gegenstande)가 되는 동시에 기술을 통해서 자연에 도전, 도발하면서 자신의 제국주의적인 의지를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원전에 의존하는 에너지 창출, 핵무기로 제압하려는 폭거는 누구에게도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제라도 우리는 모두 원전과 핵무기를 거부하고 삶의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 이를 위한 생태적 삶과 영성을 모색해야만 한다.   과학자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는 전쟁으로 핵폭탄이 터지게 되면 수천 톤의 흙먼지가 발생하게 돼 소행성의 충돌과 같은 재앙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상층권 대기에 쌓여 ‘핵겨울’(nuclear winter)을 초래함으로써 인류는 자멸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북한은 무조건 당장 핵무기를 포기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나라도 핵을 보유해야 할 아무런 명분이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빼앗을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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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정보
    2016-02-29
  • 근원으로부터(Ad fontem) 사유하는 사람
       영성의 외현으로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좌표가 되어주는 인도자가 노인이다.     노인이 될수록 보수화되고 고루해지기 쉽다. 숱한 삶의 과정과 경험들이 한 인간으로서의 노인을 그렇게 만들었다. 생물학적, 정신적 퇴행을 무기로 안정적이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인 퇴행은 인정하더라도 시간의 흔적을 퇴행과 연관 짓는 것은 억측이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나 노력을 젊게 산다는 논리로 합리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지나치면 추하게 보일 수도 있다.   노년은 노년답게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름다움과 멋이다. 이것이 영원한 현재를 누리는 카이로스적 삶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젊음을 유지하는 길이다. 이런 노년에게서는 내면의 깊이와 정신의 성숙으로부터 나오는 향기가 진동한다.   ▲ 노인은 ‘근원으로부터’(Ad fontem) 사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신 혹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영성의 외현으로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좌표가 되어주는 인도자가 노인이다. 이것이야말로 노년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노년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그래서 노년은 더 배워야 한다. 배움이 있었던 사람은 그 배움과 학문의 깊이를 사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으로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연륜으로 더욱더 깊고 넉넉하게 숙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노인은 ‘근원으로부터’(Ad fontem) 사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식이나 지혜를 근원적으로 성찰하고 그 가치를 후세대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는 자신을 근원으로부터 사유해야 한다. 자기 성찰이 되어야 타자를 가르치고 젊은이들에게 훈계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자기를 성숙한 이성으로 바라보고 공동현존재적(Mitdasein) 관계 속에서 인식하려는 노인이 될 때 자기의 외현이 더욱더 확장되고 설득력이 드넓어지는 것이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6-02-13
  • 노년의 숭고한 의무와 공동현존재적 삶
       젊은이들에게 유연하며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삶의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근력은 약해지고 이성과 감정의 통제 능력도 현저하게 떨어진다. 이런 이유로 젊은이들의 속도와 기계 문명의 변화에 잘 따라가지 못한다.   여유롭고 이해심이 많은 태도로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삶의 연륜에서 비롯되는 지혜로 젊은이들과도 소통하고 삶의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조그마한 일에도 서운해 하고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함으로써 젊은이들로부터 빈축을 사기 일수다. 아마도 어른이 되면 자신의 인격을 더 성숙시켜서 후세대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이제는 당연히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어떤 보상심리 같은 것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우리 한국사회의 특수한 역사적 트라우마로 인한 신경증이 젊은이들과의 관계나 사회 곳곳에서 투사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럴수록 노년의 이성과 감정은 아름다워야 한다. 아니 멋있어야 한다. 후세대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연하며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삶의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 노인들에게는 젊은이들이 깨어나고 현실을 직시하며 올바른 삶의 가치관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도록 돕고 이끌어야 할 숭고한 의무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곤과 억압으로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지하철에서 자신의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서로 배려할 수 있는 틈새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공의 장소나 교통 시설 등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보면 노년의 움직임은 욕망이 꿈틀거리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공동현존재(Mitdasein)와 같은 인간 고유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하이데거는 “함께 있음”(Mitsein), 곧 “함께”는 존재의 고유한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직 인간만이 서로 함께 있을 수 있다”고 보았는데, 지금의 고령사회에서는 노인과 노인, 노인과 젊은이의 공동현존재의 더불어 있음의 삶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 무색해지는 것 같다.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두 가지에만 몰입하다가 보니 인간의 인문적 교양(Bildung), 혹은 교양이 있는 인간상을 표방하는 계몽사회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생존을 위해서 살아왔고 고통스러운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 자식들을 교육했던 세대라는 것,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희생했다. 교양과 배려, 공동현존재를 자식들에게 교육하기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매우 급한 현실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에 대한 결과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타자를 배려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관계적 존재를 외면하게 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현상 자체가 우리의 과거 역사가 안고 있었던 뼈아픈 시간과 경험으로서의 한계상황이었음을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사회가 이렇게 지속하여서는 안 된다.   노인들에게는 젊은이들이 깨어나고 현실을 직시하며 올바른 삶의 가치관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도록 돕고 이끌어야 할 숭고한 의무가 있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6-02-12
  • 대학과 실존적 삶
    대학의 존재 가치와 목적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것을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언젠가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철저하게 고민하면서 이 사회의 메커니즘과 체제에 저항하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점점 더 위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실존적인 허무만을 느끼고 있다. 진정한 대학이 사라지고 있다. 이름만 대학이지 취업률로 순위가 매겨지는 현실 앞에 철저히 무릎을 꿇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대학의 개념이 수명을 다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기야 진리가 아닌 이상 모든 것에서 기준이며 가치, 개념은 사회적 실천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난날의 대학 개념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린다면 이 또한 타당하다고 외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 진정한 대학이 사라지고 있다. 이름만 대학이지 취업률로 순위가 매겨지는 현실 앞에 철저히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런데도 놓아버리기 어려운 것 대학에서 학문적 기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학의 존재 가치와 목적이 학생들에게 돈벌이 수단을 가르치는 것으로 전락하는 것을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대학은 직업훈련소가 아니다. 진리를 탐구하며 올바른 인간을 육성하고 바람직한 사회인을 길어내는 곳이다. 이 범주 안에 직업을 찾아 사회로 진출하게 하는 교육도 들어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물드는 원인이 ‘생각하지 않음’에 있다고 했다. 데카르트도 ‘사유’를 가장 확실한 실존의 근거로 제시했다. 그런데 이 ‘사유’마저도 자본주의의 목적 실현에 시중드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다. 생각하기는 하되, 기껏해야 자본주의에 예속된 노예적 범주에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공포의 관리, 공포의 정리정돈과 공포의 재활용 공장’”(Z. Bauman, 조형준 옮김, 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 새물결, 2014, 221쪽)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깊이 생각하는 인간은 쓸모가 없다. 죽을 때까지 아무런 의식도 없이 몸과 영혼을 팔며 충성을 다하는 기계만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 대학은 직업훈련소가 아니다. 진리를 탐구하며 올바른 인간을 육성하고 바람직한 사회인을 길어내는 곳이다.       실존은 무엇이며, 인간은 무엇일까? 삶의 본질은 무엇이고 타자는 인간에게 어떤 존재일까? 지금 이 물음을 던지는 것은 사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에서 이런 사유의 기회마저 배제해 버린다면 우리 사회는 자정능력을 잃은 하천처럼 심각하게 오염되고 말 것이다.   어떻게든 직장이라는 큰 기계의 부속품으로 들어가 잘 적응할 수 있기를 바라는 학생들에게 실존이니 존재니 하는 말들이 더 상처받게 할 것이고 고통에 빠져들게 할 수도 있다.   실존의 돌파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공장이 잘 굴러가도록 조처를 하고 관리 감독하는 그들도 똑같이 기계나 다름이 없다.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그것이 생산해내는 제품은 늘 동일하다. 규격, 수치, 무게, 색깔 모든 것이 같아야 한다. 같지 않으면 불량품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동일성의 잣대로만 판단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인간의 실존, 인식, 존재, 본질, 삶, 사랑, 화해, 환대 등을 숫자로 저울질할 수 있을까?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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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정보
    2016-01-25
  • 종교와 시니어의 삶
    종교는 노년 생활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게도 한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나라 종교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도 종교는 여전히 어떤 형태로든 우리 인간의 삶의 곁에 충실히 남아 있을 것이다. 종교가 젊은이들에게는 흥미가 다한 폐물에 지나지 않아도 시니어에게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시니어들을 위한 전유물이란 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죽음으로 인한 자신의 사라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철학이나 심리학이 해결해 주지 못한다.   남은 것은 종교다. 종교는 노년 생활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유년시절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노년의 삶은 종교와 더불어 보내야 한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즐거움과 위안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 스러지고 사라지는 것들이라 영원성을 담보해 주지 못한다. 친구도, 돈도, 사교춤도 노년이 될수록 궁극적으로 사람의 정신 건강을 지켜주지는 못한다.   막연히 종교를 홍보하거나 선전하는 것은 아니다.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면 생명에 대한 욕망은 커지지만, 육체의 건강과 정신의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그러다 보니 영원할 것 같은 호흡도 점차 가빠지고 생명의 시한도 젊은이들보다는 그만큼 짧을 수밖에 없다.   단지 죽음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종교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 생활의 가장 큰 장점은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더욱더 높여주는 것이다. 영성이라는 초월적 가치를 지향하게 해주니 삶의 욕망을 점점 더 내려놓게 한다.   노년의 시기는 기존의 과욕이나 혈기를 버리고 비워, 그 자리에 여유와 평화를 채우는 시기이다. 물질적인 욕망이나 생명에 대한 집착, 혹은 사람에 대한 애착까지도 덜어내야 한다. 육체와 마음이 가벼워질수록 영원에 대한 지향이 더욱더 넓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종교가 필요한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종교는 영혼과 육체를 관조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철학과 종교적 삶에 자신의 정신과 인생을 담아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시니어들의 지혜는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적어도 건전한 종교라면 노년의 심약한 마음과 의식을 이용해 정신을 흐려놓으려고 들지는 않는다. 노인을 공경할 줄 알고 늙음에 대한 상식을 간파한 종교는 그에 걸맞은 의식과 정신, 그리고 영성을 깨우쳐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다면 노년에는 한 가지 정도의 종교를 갖고 생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교제와 사귐, 그리고 정신적 교감을 통해서 자신의 언어성과 정신적 향상을 꾀하며 그것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본이 되는 삶의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노욕이나 고집을 앞세우면 사회적으로 부조화를 만들어 낸다. 젊은이들을 배려하고 또 더욱더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욕망으로 가득하고, 훈계만 일삼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여정에서 수많은 트라우마를 경험하면서 그에 대해 보상받고 싶은 심리가 증폭된 원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니어들의 의식과 행동이 달라져야 한다.   시니어들이 삶에 있어 더 용기가 있고 더 성숙한 안목으로 인생과 사회의 스승이 되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시니어들의 원숙한 인격과 여유로움, 삶의 식견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아깝지 않은가? 철학적인 시니어이자, 더불어 종교적인 시니어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철학과 종교적 삶에 자신의 정신과 인생을 담아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시니어들의 지혜는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이제껏 숱하게 인생을 살아오면서 힘겨운 삶의 고비들을 넘겨왔는데, 무슨 또 영성과 정신을 소비하라는 말이 아니다. 젊은이들이 종교를 더는 소비하지 않으니 제발 시니어들이라도 소비 좀 해달라는 부탁도 아니다. 이제는 종교나 영성을 소비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으니 그 흐름을 역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시니어들은 소비만 하고 남은 인생을 소진하는 시기가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을 생산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시니어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경쟁에 찌든 젊은이들이며 국가와 사회에 대해서 훌륭한 덕과 정신으로 힘을 실어주는 울타리 역할을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역할이야말로 종교가 있는 시니어들의 강점일 것이다. 노년에게 종교는 생애를 좀 더 생산적이며 깨어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 시대와 우리 사회는 넓은 시야와 깊은 영성으로 곳곳에서 자신과 후세대들을 연결하는 통로로써 종교를 통해 아름다운 담론의 장(場)을 펼쳐가는 시니어들을 갈망하고 있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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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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