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假象)의 생철학적 기적과 의미 서사
기적은 사적 이기심이나 이익을 벗어던지고 초월자의 뜻에 맡길 때 일어난다.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답해야 한다.”(Viktor E. Frankl, 박현용 옮김, 빅토르 프랑클 회상록.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 책세상, 2012, 205쪽)
종교적 서사(narrative)가 어떤 기적을 규명·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종교현상과 종교체험은 기적의 연속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교가 초월적인 존재에게 염원하는 바를 발원하면 자연 질서 속에서 강력한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적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한 물음보다는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관심에 더 집중되어 있는 듯합니다. 어쩌면 기적에 대한 근본물음, 즉 ‘기적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기보다는 사적 관심, 사적 이익에 따라 개인의 신변을 유리한 쪽으로 변경하기 위해서 초월적 존재에 발원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우만(Z. Bauman)은 이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인간은 논리학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적 때문에 신을 필요로 합니다. 신의 투명성과 일상적 모습 때문이 아니라 불가사의함과 예견 불가능성 때문에 말이죠. 사건들의 흐름을 뒤집어버릴 수 있는 신의 능력 때문에 말이죠. 사물들의 질서에 노예적으로 복종하는 대신-인간은 그렇게 하도록 강요되며, 또 대부분의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렇게 하고 있지요-그것을 한 켠으로 밀어젖힐 수 있는 신의 능력 때문에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의 이해와 행동 능력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저 모든 무시무시한, 겉보기로는 감각이 없고 말이 없는 맹목적 힘들을 설명하고, 바라기로는 길들이고 순치시키기 위해서입니다.”(Z. Bauman, 조형준 옮김, 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 새물결, 2014, 227쪽)
이를 가볍게 여기지 않은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적의 의미는 ‘어떻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왜’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기적을 많이 행한대도 그것으로 인간의 건강문제, 경제문제, 정치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행하신 것은 그것으로 어떤 뜻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한 뱃길 19, 한길사, 1985, 355쪽)
기적은 이유와 까닭의 문제요, 뜻의 문제라는 겁니다. 기적을 행하는 자가 발원하는 자를 위해서 마음껏 자기 실력과 능력을 뽐내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종교적 기적의 서사는 도대체 왜 그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초점이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사건 혹은 어느 정도 바랐던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는 분명한 뜻이 있게 마련입니다. 로고테라피(의미요법)의 창시자 빅토르 프랑클(Viktor E. Frankl)이 말한 것처럼,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어떤 궁극적인 의미, 다시 말해 초월적인 의미를 가져야만 한다. 인간은 그 초월적인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그저 믿어야만 한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Viktor E. Frankl, 박현용 옮김, 빅토르 프랑클 회상록.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 책세상, 2012, 79쪽)라고 받아들인다면, 기적에는 궁극적인 어떤 의미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에는 “초월적인 의미”로서의 기적과도 같은 운명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과 삶에 대한 서사는 이미 의미 연관 구조 속에서 기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기적 서술과 기적 고백으로 할 것인가 말 것인가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마치 삶에서 뜻이 현현한다면, 삶에 뜻이 없는 것이 있을 수 없다고 가정한다면 삶은 기적의 연속이라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기적의 서술은 삶의 뜻을 발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빅토르 프랑클이 생사가 오가는 죽음의 강제수용소에서 삶의 의미와 해답을 찾으면서 그것을 잊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살아야 할 의지는 삶의 뜻을 발견할 때 매순간 기적 같은 사건들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함석헌의 이야기를 더 들어봅시다. “예수님이 기적을 많이 행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낡은 질서 속에 평안하다 하고 있다가 말라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것을 깨치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미 있는 질서가 깨지면 사람은 다시 깊이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면 새 시대가 열리고 그 새 시대에 맞추려면 노력하게 되고 그 노력 가운데 역사의 진보가 있어 생명은 일단 높은 데 가게 됩니다.”(함석헌, 앞의 책, 356쪽)
그가 말하는 속뜻은 기적이란 종래의 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 생명의 질서, 진보의 질서를 전개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기존의 질서, 현 질서를 고수하려 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깨우쳐 꿰뚫고 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뜻, 새로운 의미를 위해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의지를 강하게 하지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소이연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 체제와 질서 속에서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질서란 한번 만들어지면 좋은 것도 있지만, 사람을 부자연스럽게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들이 있어서 결국 구속과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생명의 진보와 생명의 진화가 멈추게 됩니다.
“이 세상의 근본 질서는 너, 나, 네 것, 내 것을 구별하는 데 있습니다... 쓰면 없어진다, 네 것은 네 것이고 내 것은 내 것이라는 그대로가 진리가 아니다 하는 것을 알려주자는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57쪽) 질서는 구분, 구별, 차별로 치닫게 됩니다.
비판적인 시각에서 볼 때, 질서가 계급을 정당화하고 빈부의 격차를 당연시하며 통제를 가장한 폭력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설령 그것을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종래의 질서를 개혁하려는 의지와 행동이 좌절되곤 합니다.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는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Viktor E. Frankl, 앞의 책, 71쪽) 그러므로 기적은 그러한 것들을 뒤집는 데 있습니다. 예수의 기적 서사/사화가 말하는 것은 단지 자연 질서를 역행하는 비과학적 서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적은 철저하게 삶의 왜곡된 현상에 대해서 바로 잡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현대의 문제를 순 경제, 정치적으로만 생각해서는 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문제가 문제되는 근본 까닭은 사람은 물질로만은 살 수 없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인간이 된 점은 도덕적인 것이 그 인격의 핵심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함석헌, 앞의 책, 357쪽)
오늘날 삶의 질서와 척도는 경제적 힘과 가치, 즉 돈에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계의 근본 질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초월자에게 물질적 축적을 위한 발원을 하기 마련입니다. 물질적인 축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물질적 질서에 편승하기만 하면 되니 말입니다. 빅토르 프랑클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꺼리를 던져줍니다.
“사람에게는 돈이 필요하지만, 돈을 소유하는 진정한 의미는 돈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있다는 것이 소박한 내 생각이다.”(Viktor E. Frankl, 앞의 책, 184쪽)
돈을 생각하지 않는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것을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가 보여주었습니다.
인간적인 질서는, 인간적인 삶은 도덕적 가치와 인격에 있습니다. 모든 삶은 그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물질적 토대 위에서 도덕이나 인격이 설 수 없습니다. 도덕과 인격의 구조 속에서 나눔과 베풂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빅토르 프랑클의 다음의 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니힐리스트들의 신랄한 냉소와 냉소주의자들의 니힐리즘에 반대한다... 그 악순환의 고리(circulus vitiosus)를 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한 가지이다. 즉 폭로하는 자를 폭로하는 것... 폭로를 멈출 수 없는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진정성을, 즉 인간의 인간적인 것을 평가절하하는 무의식적인 경향만이 폭로된다.”(Viktor E. Frankl, 앞의 책, 196-197쪽)
인간적 세상을 위한 폭로. 폭로는 새로운 질서로의 편입을 가능하게 합니다. 달리 말하면 기적 같은 사건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기적이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도덕적 가치, 인격적 성숙을 우선으로 하는 인간적인 세상을 이루게 될 때, 그렇게 인정, 서술할 수 있습니다.
초월자의 역사 개입을 통해 시공간의 잉여를 확보함으로써 삶의 허무와 공백을 메우는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마술이나 요술도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공백은 존재의 낡은 질서 속에 계속 머무르는 것입니다. 낡은 질서는 바우만이 말하는 “인간 쓰레기”가 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의미 없는 잉여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기적을 받아들이는 심리는 나의 판단을 완전히 버리고 순전히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려는 태도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서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생명의 약진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함석헌, 앞의 책, 358쪽)
기적은 사적 이기심이나 이익을 벗어던지고 초월자의 뜻에 맡길 때 일어납니다. 이른바 “생명의 약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기적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생명이 계속 살도록 맡기는 일입니다.
생명은 거듭 사는 것입니다. 생명은 쉬지 않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인생을 살라고 생각하라. 첫 번째 인생을 잘못해서 모두 망쳤는데, 두 번째 인생을 살면서도 지난번의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라. 실제로 책임감은 그런 가상의 자서전을 거쳐 진짜 자신의 삶으로 옮겨 가게 된다.”(Viktor E. Frankl, 앞의 책, 193쪽)
의미의 연속, 의미의 질서가 깨지면 새로운 질서를 필요로 합니다. 물론 하나의 질서를 깨고 또 다른 질서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기적은 그 불안을 극복하고 새로운 실존으로의 도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적 기적의 서사 구조나 종교 기적 서술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실존의 변화입니다. 상황이나 조건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실존적 인식의 변화가 기적이었습니다. 이것을 달리 실존적 의미 구조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와 관계 맺고 있는 나의 의미, 관계적 의미에 초월자의 뜻을 온전히 흡수해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에 바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비로소 초월자의 뜻에 자신의 실존을 맡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