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5(월)

내적 삶의 구원과 종교적 발화의 진정성

댓글 0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밴드
  • 페이스북
  • 구글플러스
기사입력 : 2014.06.30
  • 프린터
  • 이메일
  • 스크랩
  • 글자크게
  • 글자작게
   
진정한 신앙은 죽어서 본 모습이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로 탈바꿈되어야 한다. 
 
인간이 종교-내-존재 혹은 신앙-내-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그것은 말로서 만도 아니요 글로서 만도 아닌 행동으로서 증명해내는 일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말하기와 글쓰기를 넘어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 행동이 종교 안, 신앙 안에 있다고 말해줍니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가 종교 노릇을 못하고 인간의 존재가 종교의식, 즉 종교 내적 존재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이 아예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그런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이유를 함석헌은, 그리스도교가 민중의 의식, 민중의 정신을 선도하지 못하고 감격을 주지 못하면서 단지 현상유지에만 급급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1985, 319쪽).
 
모든 인간은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종교인 혹은 그리스도인만이라도 종교 내적 삶이 가능하도록 해야 하는 그것은 고사하고 민중의 정신을 깨우지 못하는 종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종교적 실존의 가능성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종교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정신이고 의식이고 영입니다. 종교가 그것을 표현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힘이 없다면 인간의 정신 성장은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문사철(文史哲)의 종말을 고하는 이때에, 그나마 명맥을 유지한다는 것이 겨우 자본의 시녀 역할이나 하고, 자기 계발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상황에서 종교는 고도의 정신세계를 그려줄 수 있고 제시해줄 수 있는 보루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신적·감정적 감격을 불러일으키려면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으로부터의 성찰이 전제되어야 호소력이 있습니다.
 
종교가 종교 본연의 역할, 즉 정신적 계몽은 하지 않고 도리어 조직과 체계와 건물과 형식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안간힘을 쓴다면 종교는 희망이 없습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종교 내적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종교 지향적 삶을 살고, 종교를 갈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는 토대는 오직 종교가 정신에 목적을 두고 있을 때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종교가 종교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조직체로서의 종교가 죽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조직·체제·건물·외형·물질 등의 가변적이고 가시적인 데에 치중하는 종교가 본질에 충실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민중의 의식은 변하고 또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데, 종교는 여전히 외양의 큰 건물, 세력 확장, 예산 증액, 자본주의적 성공신화, 성과위주의 목표를 지향한다면 시대를 역행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시대를 잘못 읽고 있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부흥이나 개량가지고서는 안 된다.’고 비판합니다. 철저한 회개와 자기 성찰이 있지 않으면 안 되며, 근본부터 새로 움트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처음으로 돌아가 토대부터 새롭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예전에 고수했던 구태, 즉 부흥론을 벗어던지고 신앙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언명대로 죽고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죽어서 본 모습이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로 탈바꿈되어야 하는데, 그래야 본질이 살고 본질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인데, 죽지 않으려고 하니까 문제가 됩니다(함석헌, 위의 책, 320-321쪽). 
 
시대가-맥락을-잘못-해석하더.jpg▲ 시대가 맥락을 잘못 해석하더라도 종교는 그것들을 무한히 끊임없이 초극하려는 의지를 가질 때 가능합니다.
 
 
낡은 종교를 해체해야 합니다. 본질에 부합하지 않는 기업형·상업형·자본형·홍보형·관광형 종교를 해체하여 새롭게 재구성해야 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21쪽).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신을 앞세우고 정신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는 종교는 모두 해체되어야만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종교적 실존의 올곧은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시대가 다 타협을 하고, 시대가 자본을 중시하고 시대가 무비판적이고, 시대가 진보하지 않고 안주하고, 시대가 맥락을 잘못 해석하더라도 종교는 그것들을 무한히 끊임없이 초극하려는 의지를 가질 때 가능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가 자신의 시대를 초극하려고 할 때 발전이 있어왔습니다. 자신의 시대를 넘어서는 종교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시대에 안접(安接)하고 타협하려고 했던 종교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323쪽).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종교가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이 시대를 초극할 수 있을까요?
 
“갈릴래아 어부의 씨”, “소박한 자유 독립의 신앙”을 가진 실존이 되는 일이 중요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24쪽). 갈릴래아의 정신적 바탕, 갈릴래아 제자들의 감동을 간직한 종교인, 갈릴래아 제자들의 순수와 열정을 계승한 종교인, 처음 즉 신앙의 본질을 찾고 그것에 충후(忠厚)한 종교인이 되어야 표본이 되고 사표가 됩니다. 정신의 좌표, 신앙의 기수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어떤 체제·강제·조직·계급과는 상관없는 자유로운 종교인이 요청됩니다. 종교는 자유입니다. 종교는 억압(抑壓)이나 농반(籠絆)이나 기속(羈束)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종교적 삶에 대해서 자기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책임을 지는 종교인이 될 때, 종교가 성숙할 수 있습니다.
 
당분간의 지지와 의존, 지도는 필요할지는 몰라도, 정신의 성년이 되었을 때는 더 이상 자유로운 신앙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개인이 신 앞에서 단독자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가 건강하고 성숙하려면 개별적인 종교적 실존들이 제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개인이 깨어야 종교 총합의 정신이 깨이게 됩니다. 우리의 실존적 토대와 근거는 오직 예수에게만 두면 됩니다. “예수는 진리의 세계, 생명의 세계를 말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29쪽)
 
진리와 생명을 깨우쳐 주는 종교가 참을 지향합니다. 종교 발언과 종교 신앙의 방향이 항상 근원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종교 본연이 색깔을 잃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종교가 참 종교인가 거짓 종교인가의 판별을 종교가 추구하는 본질을 지속적으로 묻고 그에 부합하려고 하는지에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종교 논리의 참 거짓의 여부는 종교의 형식·규모·교리·조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본질, 종교 그 자체, 종교 그 원형, 종교 그 사태로 자꾸 거슬러 올라가려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종교가 담지하고 있는 최초의 그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종교가 종교 발언과 종교 행위도 정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의 본질을 주관적 신념과 계획된 발언, 의도된 방향에 두지 말고 내면과 영혼 속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있다면, 우리 영혼 속에서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있다면 속임 없고, 껍데기 없는 우리 영혼밖에 없다.”(함석헌, 위의 책, 333쪽).  
 
진정한-신앙은-죽어서-본-모.jpg▲ 진정한 신앙은 죽어서 본 모습이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로 탈바꿈되어야 한다.
 
 
종교적 언표는 즉흥적일 수 없고 자의적일 수 없습니다. 종교 전문가 혹은 종교 지도자라 할지라도 종교적 언표에는 책임과 겸손이 뒤따라야 합니다. 언표 속에 진심과 진실, 진리가 내포되지 않고 단지 거짓된 언표와 자의적 해석에 입각한 진리 선동적 발화로 일관할 경우 초월자의 만남이 오해가 되거나 잘못된 정보와 확신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종교적 발언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내면의 초월자, 내면의 누미노제(Numinose·순수한 비합리적, 종교적인 성스러움)와 진정한 만남을 통한 숙고된 발언이 아니라면 진정성이 결여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는 종교적인 공적 발언과 언표, 곧 전도는 지극히 개별적이고 주관적 확신에서 나온 사적 진리 체험 행위라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는 너희 위해 하는 것도 아니요, 씨 뿌린 자 위해 하는 것도 아니요, 아버지를 위해 명하신 대로 하는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335-336쪽)
 
이렇듯 겸허한 언표만이 타자를 배려하는 종교가 될 수 있고 타자를 이해하는 종교적 실존이 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선교가 사(私)가 아니라 공(公)이 되고, 노력이 아니라 초월자에 대한 헌신된 태도로 비치기 위해서는 각 개별자 안에 있는 종교적 신념을 존중해야 합니다.
 
진리는 공동체와 공동체, 개별자와 개별자 사이의 소통불가능한 아포리아(Aporia·해결 방안을 찾을 수 없는 난관)가 아닙니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진리는 선물입니다.”(Jean-Paul Sartre, 정소정 옮김,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2009, 9쪽)
 
그러므로 진리 언표의 주장에 대해서 자신의 절대적 언어 놀이 공간이 중요한 만큼 타자의 진리 언표 주장에 대한 공간을 선물로서 인식, 공유할 수 있는 종교적 진리 담론의 상호주관적 의사소통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타임즈코리아 톡톡뉴스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내적 삶의 구원과 종교적 발화의 진정성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