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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여! 상업화를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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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4.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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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리고 불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복음을 종교 사업의 수단이요, 교회 규모의 확장 수단으로 생각하는 복음 판매 상인들의 태도 때문이다. 
 
복음(福音)은 그리스 어원적으로 ‘기쁜 소식’(euangelion, good news) 혹은 ‘좋은 소식’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교적 시각에서 보자면 예수 그 자체가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고,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가 민중들에게 기쁨과 구원과 해방과 화해를 가지고 온 것처럼,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도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종교에게는 그야말로 순기능적인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석헌은 헐값에 “복음이 팔린다.”고 비판합니다. 복음이 터무니없는 상술적인 자본의 가치에 매매가 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복음이 타자의 기쁨, 구원, 해방, 화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업 행위로 전락이 되어 버렸습니다. 판매하는 복음상인도 문제이거니와 복음을 사서 사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복음의 구입자도 문제입니다.
 
그들 모두가 복음을 왜곡하고 매도하고 복음을 퇴색시키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한 뱃길 19, 한길사, 1985, 312-313쪽). 함석헌은 더 나아가 복음은 증거될 뿐이지 강요하거나 판매될 것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복음상인은 “영혼을 구할 능력도 권세도 없다.”라고 봅니다. 복음은 몸으로 증거하고 마음으로 새겨야 합니다. 복음은 타자에게 강압적으로 반드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은 자칫 판매가 됩니다.
 
복음은-몸으로-증거하고-마음.jpg▲ 복음은 몸으로 증거하고 마음으로 새겨야 합니다.
 
 
공자는 『논어』 「술이」편(「述而」編)에서 ‘묵이지지’(黙而識之)라는 말을 했습니다. 진리를 알게 되었다고 경박하게 떠들어 댈 것이 아니라, 우선 마음에 두고두고 새겨야 합니다.
 
증거라고 하는 것이 마치 입으로, 말로 떠들어 대는 것이어야 할 것 같지만, 예수의 말씀과 행업을 몸으로 살아내지 않고는 무용지물입니다. 복음도 해석학을 통하여 이해하고 감정이입이 되어야 합니다.
 
말을 이해하고 문자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나의 눈과 마음을 언어 사용자의 눈높이로 맞춰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복음을 해석해서 말을 전해야 하는 대상, 즉 타자가 누구인지, 나와 마주 서 있는 타자가 누구인지를 해석해야 하고, 그보다 앞서 나 자신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져야 나에 대한 이해와 타자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적절한 복음이 발생하는 적합한 장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제하지 않고, 해석학적 이해가 없이 복음을 말만 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며, 약장수와 같은, 물건을 팔기 위해 인간을 수단으로 여기는 매매 행위만이 발생할 뿐입니다.
 
여기에서 복음을 위한 상도(商道)를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어차피 상도를 말한다고 해도 복음을 매매하기 위한 상술에 불과할 것이니 말입니다.
 
복음은 사건(ereignis)이요, 발생(geschehen)입니다. 예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 독특하면서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이것이 증거가 말로만 하는 행위로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복음이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리고 불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복음을 종교 사업의 수단이요 교회 규모의 확장 수단으로 생각하는 복음 판매 상인들의 태도 때문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14쪽).
 
지금까지 교회는 복음을 교회 사업을 위해서, 교회 세력을 불리기 위해서 말해왔습니다. 타자의 마음과 상황과 처지가 어떠한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음 판매 상인의 자기 성찰적 해석도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복음을 소비해주는 청중이 중요할 뿐입니다. 어떻게 복음을 소비하도록 할 것인가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함석헌은 말합니다. “복음은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살 수도 없고 살 필요도 없다.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복음이라고는 할 수 없다. 복음이 복음된 소이는 대가 없이 누구나 받을 수 있다는 데 있다.”(함석헌, 위의 책, 314쪽)
 
복음은 무상(無償)입니다. 복음은 무차별적입니다. 그러니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복음이 대가가 있는 것이라면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은 부자나 가난한 자, 지배자나 피지배자, 남자나 여자, 어른이나 어린이 등 누구에게만 열려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누구든지 만날 수 있었고, 예수는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에 대한 이야기, 즉 복음을 들으려면 헌금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복음에 값을 지불하도록 한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사람의 근본을 바꾸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되도록 하는 모집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315쪽). 복음은 돈이 있고 계급이 있다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자본가라고 해서 복음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대가가 없습니다. 파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삶으로 구현해야 할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대가가 없지만 듣는 이의 성찰과 행동변화를 요구합니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의 삶을 남김없이 배워서 또 한 사람의 예수로, 또 한 사람의 예수 따르미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거듭난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모, 처자, 형제자매 등을 버리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포기와 따름의(이 수반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수양도 아니요 개량도 아니다.”(함석헌, 위의 책, 316쪽) “예수를 믿어 풍부한 교양을 얻으려는 자는 가라. 사회에 유익한 사업을 하려는 자도 가라. 무슨 이익을 얻으려는 자는 첫째로 가라. 예수는 오직 자기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자기에 의하여 새로 살기를 원하는 자만을 허락한다. 크리스천은(문자대로) 생명을 버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함석헌, 위의 책, 317쪽)
 
종교인은 거짓된 자기 자신을 축조하지 말고 오직 신앙의 진실한 자기 자신을 축조하도록 해야 합니다. 종교를 교양의 도구로 생각하고, 종교를 사업의 수단으로 여기고, 종교를 통해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이들은 거짓된 자기 자신을 축조하는 사람입니다. 참 종교인은 그러한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에 의해 자기 자신을 축조하고 참된 자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매매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것의 포기, 심지어 생명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타자를 헌금의 대상이나 세력 확장으로 환원시키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타자와 더불어 한 몸이 되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로 인해서 얻게 된 새로운 삶만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버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생명의 포기는 다시 생명이 살아나기 위해서입니다.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소유가 아닙니다. 복음이 매매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사적 소유를 전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적 소유가 되어 판매 및 구입, 소비가 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공적이기 때문입니다.
 
모두를-위한-기쁜-소식,-좋은.jpg▲ 모두를 위한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 값싼 대가를 지불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종교에 대한 모욕입니다.
 
 
모두를 위한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 값싼 대가를 지불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종교에 대한 모욕입니다. 대가라면 오직 고통과 죽음, 그리고 그로인한 생명과 구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교양입니다-깨달음에 의한 의지(will)만이 작동될 뿐입니다. 깨달음의 의지가 강할 때 매매의 의지와 욕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함석헌의 깨달음의 의지, 십자가의 의지는 지배도, 독식도, 강제도 없는 적극적인 개인의 자유를 위한 것이기에 아나키즘적입니다. 어느 누구도 매매를 위한 특권이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정치학자이자 저널리스트였던 크리스토퍼 히친스(C. Hichens)는 “신도들을 속여먹기 좋은 장난감쯤으로 취급하는 종교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광경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두려움과 불안감에 휩싸인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믿으라며 이용하는 광경. 그렇다면 기도를 둘러싼 논쟁에서 도덕적 위기가 가까이 다가올 것 같은 순간에 우리 무신론자들이 가엾다는 표정을 짓더라도 너무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Christopher Hichens, 김승욱 옮김,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알마, 2014, 48쪽)고 말했습니다.
 
히친스는 속이는 종교, 인간의 두려움을 감소시키고 위안을 주는 대가로 복음을 판매하는 종교에 대해 냉소를 퍼붓습니다. 죽음의 상황에서도 그가 종교에 대해서 끝까지 무신론적 입장을 고수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혹 종교의 기만과 거짓, 그리고 술수로 복음을 헐값으로 취급하는 복음판매상과 복음 구매자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의지(will)하고 의욕하는 복음은 좌판대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으로서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포장한 시뮬라크르(Simulacre·흉내, 시늉, 복제의 복제물)가 아닙니다.
 
복음판매상과 복음구매자는 모든 그 시뮬라크르를 판매·소비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종교인은 말합니다. “나는 원한다. 십자가에의 의지를!”, “나는 행한다. 생명을 버리는 의지를!”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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