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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 메커니즘과 정의(正義) 사유(思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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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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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는 생명이요, 욕망은 죽음입니다.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존재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4, 302쪽). 어쩌면 모든 생명적인 것들(숨탄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함석헌이 말하고 있는 것이 종교적인 의미에서 영혼의 생명일 수도 있고, 그것을 넘어선 다의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영혼의 생명성만 아니라 생명적인 것들의 본질인 본래적 생명입니다. 살고자 하는 의지, 살고자하는 욕구, 그것은 단지 영혼의 사안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생명적인 것의 직접적 현상은 무엇일까요? 말(saying) 혹은 말-하기입니다. 음성적 발화, 발성적 기관에 의한 소리-말 이전에 사유를 담은 뜻-말, 말을 하는 행위 전체가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말은 운명과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내짐입니다. 말은 메시지, 즉 전언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보내짐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은 목적과 방향을 지시하고 길을 냅니다. 말은 적어도 인간의 말인 이상 한갓 소리-말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발생/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말에는 생명이 있고, 생명적인 존재는 역사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Michael Roth, The Politics of Resistance: Heidegger’s Line,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6, p. 79).
 
그렇다면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의, 즉 정의입니다. 정의가 바로 서야 역사는 모든 인류 앞에 떳떳할 수 있습니다. 정의가 구현되지 않는 인간의 역사를 역사라 말할 수 없으며, 불의의 역사 또한 인간에게 도달한 치욕과 자존심의 훼손이라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은 “하나님의 의의 법칙, 그는 사랑이신 동시에 의다.”라고 말하면서 ‘의는 신앙에 의해서 깨달을 수 있다.’고 봅니다(함석헌, 앞의 책, 302-303).
 
우리가 적어도 초월적 존재를 상정한다면 그가 의도하는 지향성은 정의라는 형이상학적 가치일 것입니다. 인간 초월의 가능성을 신의 존재 가능성과 일치시킬 수 있다면 인간은 정의를 추구해야 하고, 정의를 위해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일깨워줍니다.
 
함석헌에 의하면, 신의 정의는 열강의 정의, 권력의 정의가 아니라, 인간의 맘을 다스리는 정의, 인류의 역사를 지배하는 정의, 영원을 향한 생명을 주는 정의라고 풀이합니다. 다시 말하면 정의는 강자가 만들어가고 강자에 의해서 길을 내는 정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02쪽). 그것은 마음과 마음이 맞닿아 있어서 정신의 흐름을 주도하고 생명을 천시하지 않는 약자를 위한 정의일 것입니다.
 
“복음은, 영혼 내부의 사실이다.” ‘구원을 얻는 자 먼저 의를 구한다.’(함석헌, 위의 책, 304쪽)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정신을 깨달은 자, 정신을 차린 자, 내면의 정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가 복음을 올바로 받아들인 자이고 구원을 얻은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운명은 말의 운명이고 존재의 기반을 둔 인간의 사유는 역사의 길, 정신적 역사의 길, 정신적 사유의 길을 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생명을 위하여 의를 구하라.”라고 말할 때, 모든 생명적인 것들이 소생하기 위해서는 정의가 필요합니다.
 
정의를 밑바탕에 둔 생명만이 인간의 존재방식의 독특함을 나타내 준다는 것입니다. 정의의 목적은 생명입니다. 정의는 생명의 길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장애가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입니다. 욕망은 먹기 위해서 먹고, 자기 위해서 자고, 입기 위해서 입습니다.
 
정의의-목적은-생명입니다.jpg▲ 정의의 목적은 생명입니다. 정의는 생명의 길을 내야 합니다.
 
 
“욕망이 욕망을 낳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298쪽). 욕망은 욕망 위에 욕망을 더합니다. 욕망은 욕망을 위해서 스스로 불의의 길을 냅니다. 욕망은 욕망을 위해서 죽음을 낳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욕망은 정치적 욕망, 자본의 욕망, 군사적 욕망 등이 인간의 근원적인 생존의 욕구를 유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 죽임의 욕망, 살인의 욕망으로 치환되었습니다.
 
말이 본래의 말이 되고 시간이 유일한 시간이 되고 공간이 자신의 공간이 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말(saying)은 이미 사건이 되었습니다. 말은 행위(행동)가 되었습니다. 말도 행동이고 말없음도 행동입니다. 살아 있는 자의 말도 행동이고, 죽어 있는 자의 말없음도 행동을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사유로서 말이 밖으로 던져낸 것은 사유의 외현입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든 4·16 세월호 참사이든 그들의 희생과 아픔은 모두에게 본질적으로 동일함에서 시작되는 다양한 사유를 쏟아내게 합니다. 사유는 바깥으로 나타난 흔적을 새기는 것이며 기억이고 무한히 뻗어 있습니다.
 
생명적인 것들은 이렇듯 길 위에 무한히 열어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유만이 인간의 욕망을 거슬러 생명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사유만이 인간의 정의의 길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사유만이 길을 잃지 않고 길을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유는 길을 길로서 존재하도록 만듭니다. 길을 도래하게 하고 흔적을 지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유와 욕망은 끊임없는 투쟁과 갈등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유는 역사의 지평에서 끝없는 길을 뻗게 할 것이고, 욕망은 길을 폐쇄할 것입니다. 욕망은 말함에 대해서 결코 듣지 않을 것이고, 정의에 대해서는 눈을 감을 것입니다. 사유는 열려 있음이요, 욕망은 닫혀 있습니다.
 
사유는 생명이요, 욕망은 죽음입니다. 말-하기는 사유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사유는 앞을-향해-말함입니다. 사유는 항상 생명을-향해-말하기입니다. 그러므로 사유는 죽을 수 없습니다. 설령 생명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말을 하는 자는 생명적 존재입니다. 사유가 미래를 향해 있다고 할 때,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고 할 때, 그 사유는 말-없음의 말, 말-있음의 말을 통해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4·16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말-없음과 말-있음은 모두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명은 정의를 말하고 있으며, 생명적인 존재는 반드시 정의를 말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실존들입니다. 실존은 지속적으로 역사적 시공간에 참여하고 관계를 맺는 존재로서, 결코 텅 빈 존재들이 아닙니다. 말-없는 존재로서의 생명적 존재와 말-있음의 존재로의 생명적 존재는 차이는 있으나 둘 다 미래를 (향해) 여는 존재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폭력은 계속해서 희생물만을 향하므로 애초의 대상을 시야에서 놓쳐버린다.”, “희생제의는 공동체 전체를 그들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며, 폭력의 방향을 공동체 전체로부터 돌려서 외부의 희생물에게로 향하게 한다는 것이다.”, “희생 덕택에 백성은 동요하지 않고 계속 평정을 유지하므로 이 희생제의가 국가의 단합을 강화한다는 것이다”(Rene Girard, 김진식· 박무호 옮김, 폭력과 성스러움, 민음사, 1993, 16, 19-20쪽).
 
이처럼 공동체의 오염과 그로 인한 속죄를 위해서 욕망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사람들, 욕망을 위해 살인과 살해도 마다하지 않는 국가에게는 더 이상 보존해야 할 생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Rene Girard, 위의 책, 142-144쪽). 희생양은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재갈을 물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말할 자격도 없습니다. 희생양은 전체주의와 군림자를 위해서만 필요한 존재이기에 그들의 말하기(speaking)는 말-하기(saying)로 끝이 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소리는 때에 따라서는 들리지 않습니다. 살해자와 살인자는 희생양의 말-하기(saying)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늘 수단이요, 국가공동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사용가치면 충분합니다. 그들만의 시공간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그들의 희생은 기억조차 되지 않습니다. 아니 기억이나 흔적이 남으면 안 됩니다.
 
신에게 바쳐지는 재물은 성스러워서 공동체의 오염을 완전히 속죄하기만 하면 될 뿐, 면피 당사자인 주체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들의(그것의) 폭력은 묵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모든 생명존재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내가 살아간다는 것을 말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은 그러한 부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생명존재들은 욕망 고발(말-하기)와 정의 사유에 대해 멈춤이 없어야 합니다. 더 이상의 희생양이 필요치 않은 인간의 삶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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