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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저항하는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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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4.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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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간 정신의 온전성, 삶의 숭고함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세계의 관념을 상대화시키고, 세계의 악과 타협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세상을 비워내고 부정하면 무엇이 남을까요? 무(Nichts, 無), 실재의 허무뿐일까요? 세상을 거부하고 그것의 객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존재론적 위상의 문제와 세계의 거부는 세계 그 자체의 퇴폐에 있습니다. 따라서 존재 망각, 존재의 퇴락이 세계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세계에 대한 저항은 필연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세계가 무사유로 일관하는 욕망의 동체라면 주체의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을 위해서라도, 정신의 히스테리 가능성을 떠나야 합니다. 함석헌이 “세상을 버리면 정신값이 돌아오고 정신적 보화가 돌아온다.”고 했는데, 세계의 구성은 정신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만큼, 세계가 정신적 수치(羞恥)를 안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 순간 정신이 갖고 있는 가치, 정신은 수치감을 견딜 수 없습니다. 타락하고 병들어버린 세계는 정신이 대면할 수 없기에 정신값의 고양을 위해서라도 세계는 버려져야 하고, 정신에 의해서 비워져서 삶을 곧추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정신이 세계를 버린다고 해서 분열증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체의 존재론적 위상이 달라지고 삶은 더욱 세련될 것입니다. 더욱이 세계를 버린다고 해서 정신과 이분화되어 세계를 타자화시키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세계는 세계로서 존재할 뿐이지만, 더 이상 정신적 삶과는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기에 세계를 무화시키는 것뿐입니다.
 
세상을-버리면-정신값이-돌아.jpg▲ 세상을 버리면 정신값이 돌아오고 정신적 보화가 돌아온다.
 
 
그렇게 될 때 함석헌이 말한 ‘영생, 즉 세계와는 동뜬 살림’의 삶이 도래할 것입니다. 퇴락한 세계, 정신과 균형, 그리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충동적인 세계를 무화시키는 순간, 새로운 삶의 세계가 열립니다.
 
영 딴판의 세계, 정신의 무력함을 극복하고 펼쳐지는 삶이 생겨날 것입니다. 영생은 지금의 세계와는 다른 모습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영생은 의미가 없습니다. 영생은 사물성(thingness)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그리워하는 유희적 삶을 대망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다만 정신의 수치, 정신의 결여, 정신의 외설이 승화되어 더 이상의 의심과 의문이 남지 않는 순수한 정신의 세계, 정신적 삶의 지극함일 것입니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인간이 바라고 꿈꾸는 궁극의 삶은 바로 이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종교인은 ‘따라나서야’합니다.
 
종교적 창시자의 삶을 부끄러워하거나(선망) 욕망의 화신인 것처럼 생각하여 추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인에게 있어서 창시자의 추종은 ‘질문’입니다. 나없는 초월자, 그리고 앞선 창시자의 삶과 정신세계에 대한 질문을 통한 해답 찾기가 되어야 합니다. 질문은 나를 바로 세우고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종교적 태도이지만, 그것이 가지는 목표는 결국 나를 없애기 위한 자기 심층의 노출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창시자의 본의와 부합하여 따라나서기가 됩니다.
 
따르면서 자신이 서 있는 근본적 자리가 독단이나 권력의 자리가 아닌지를 묻고 선 주체의 위상을 올바로 정립해야 합니다. 그래서 따라나설 때는 내 것이 있다는 소유 관념, 내가 있다는 존재 관념도 버려야 합니다.
 
소유는 주이상스(Jouissance)입니다. 가짐을 통해서 마음과 몸의 향락을 즐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이상스는 인간 정신의 공백과 결여와 다르지 않습니다. 주이상스는 나의 정신적 결핍의 감정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이상스는 정신적 죄의식의 아프리오리(a priori)한 결과입니다. 인간의 무의식은 이 주이상스를 갈구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결핍으로 남아 있는 잔여물과도 같습니다.
 
“욕망은 항상 욕망의 욕망”일 뿐입니다. 지젝은 말합니다.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속성들을 지니고 있으며 일련의 효과들을 산출할 수 있는, 그러한 역설적인 기괴한 실체로서 실재를 규정한다면 탁월한 실재는 향락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
 
향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수많은 외상적인 효과들을 양산한다.” 향락은 비어 있음이자 실체가 없습니다. 따라서 소유 관념, 존재의 관념을 무로 돌려야 진정한 삶, 참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도약이고, 초약(超躍)입니다. 초월하면서 도약한다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나 철학이 “넘어 뜀” 혹은 넘어-뜀이 없이는 그 궁극의 자리에 다다를 수가 없습니다. 절대 생명, 곧 영생을 얻으려면 상대적 세계를 넘어서 절대적 세계로 뛰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세계와 정신의 양립불가능성, 불일치에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정신과 세계가 분열되고 세계 때문에 정신이 사라지고, 정신으로 인해서 세계 변혁이 불가능해지는 상호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신은 타협이 없습니다. 세계가 상실되고 장벽이 된다고 하더라도, 세계가 정신을 뒤틀리게 만든다면 단순히 정신을 개량하거나 세계를 개량하는 수준에서만 그칠 수는 없습니다.
 
온전하고 완전한 탈바꿈,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만드는 세계에 대한 부정의 부정성만이 세계를 살리고 정신도 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세계와 정신이 유기적인 통일체로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부 아니면 전무일 뿐입니다. 부분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더더욱 정신의 방해가 되는 세계라면 세계 그 자체를 비움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인식에서나, 존재에서 비워있는 대상으로 놓아야 대립이 해소되면서 오히려 정신의 자유로움이 진리 그 자체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정신이 지향하는 것이 진리의 발현이고, 그것을 통해서 삶의 세계가 숭고해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 정신을 선택해야 합니다. 세계를 선택하면서 끊임없는 정신의 죄책감과 수치감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계는 정신에 의해서 해명되어야 하고 선함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지, 정신을 축조하는, 정신을 조작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신의 자발성과 정신의 자유, 정신의 의지를 성숙한 삶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워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본원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따라서 정신의 세계가 굴복하거나 세계의 힘에 의해서 정신이 배반하는 인간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과 영혼이 온전해야 합니다. 온전해야 한다는 것은 필연성입니다. 초월자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지켜야 하고 구현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정신 혹은 영혼이 세계와 평형상태로만 유지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정신과 의식이 항상 세계에 앞서 있어야 세계 이전의 세계, 삶 이전의 삶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간 정신의 온전성, 삶의 숭고함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세계의 관념을 상대화시키고, 세계의 악과 타협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세계로부터 이미 주어졌다고 하는 선험적 사실, 사건, 대상에 대해서도 정신은 의심의 시선을 견지해야 하며, 더불어 삶과 정신을 항상 변혁하는 해석학적 이해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신과 영혼, 그리고 의식의 온전함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 과정적, 중단 없는 과제입니다. 그것이 나의 실재, 나의 현실이 될 때까지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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