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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나의 발화적 진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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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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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나는 서로 열려 있고 서로 만나고 전체로서의 몸-나입니다.
 
발화(發話)는 몸-나(corpus ego)의 그때-거기와 지금-여기를 떠나서는 발생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발화는 자리, 즉 발생 자리와 상관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발화는 말을 밀어내기 때문에 공간성을, 나(자기)를 열어 밝히기 때문에 시간성과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지도자의 정치적 발언이든, 개별적 존재의 일상적 말이든, 동물의 소리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발화를 단순히 말을 열거나 몸-나의 그때-거기와 지금-여기를 고려하는 맥락적 발언으로 보기보다 종교적 명법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종교적 명법은 항상 명령(imperative)을 합니다. 경전을 빗대어 말하는 화자의 말은 도덕적 정결주의와도 같아서 청자는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엄숙한 선의 실천으로 가져야와 한다는 강박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발화하는 몸-나의 시공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더불어 듣고 있는 몸-나의 시공간도 동일한 맥락에 존재하고 있어야 합니다.
 
정치적 발언의 그때-거기와 지금-여기는 듣는 이로 하여금 맥락적으로 설득되지 않는다면, 발화 주체의 몸-나의 우월성과 일방적 커뮤니케이션, 심지어 폭력성으로 비추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발화 주체가 가장하고 있는 도덕적 정결주의와 엄숙주의는 악이 됨으로써 청자에게는 수용 불가능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221쪽).
 
몸-나의-발화적-진정성.jpg▲ 종교적 발화 주체이든, 정치적 발화 주체이든 그 발화는 이성의 자기 발화이어야 하고 내면적 자기 영혼과의 일치를 이룬 그때그때의 순수한 긴장이어야 합니다.
 
 
정치적 발화가 종교적 명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선이란 것도 자기 보기에 선인 것 뿐”(함석헌, 위의 책, 248쪽), 그때-거기와 지금-여기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몸-나의 맥락적 발화이기 때문입니다.
 
발화가 되는 순간, 몸-나와 목소리, 몸-나와 말은 분리(depart)가 됩니다(Jean-Luc Nancy, 김예령 옮김, 코르푸스-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문학과지성사, 2012, 29-31쪽). 타자에게 제안하는 말조차도 몸-나와 떨어진 말을 듣는 몸-나를 가진 타자 역시 그 제안을 분리가 아닌 인격적 통합성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면 몸-나의 의식과 정치적 도덕성의 자기 증식이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종교적 발화 주체이든, 정치적 발화 주체이든 그 발화는 이성의 자기 발화이어야 하고 내면적 자기 영혼과의 일치를 이룬 그때그때의 순수한 긴장이어야 합니다. 몸-나의 자기 인식의 유한성을 인식하지 않고 사태를 몸-내 쪽으로 끄잡아 당기면서 타자의 몸-나를 배려하지 않는 강제와 강요, 강압적 발화로 일관한다면 그것은 타자의 몸-나를 나의 몸-나로 일방적으로 구성하겠다는 발상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야말로 몸-나의 지성과 영성의 조화를 이룬 발화이어야만 비로소 나의 몸-나와 타자의 몸-나가 교류, 교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함석헌, 앞의 책, 215, 220쪽).
 
몸-나의 발화가 진정성이 있으려면 속눈이 밝아져야 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210쪽). 속눈은 나의 몸-나와 타자의 몸-나가 침투 불가능할 것 같은 공간과 시간까지도 꿰뚫을 수 있는 실존의 고유성이자 순수성입니다.
 
이러한 상호주관적 실존의 순수의식의 연관성만이 공통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상호주관적 실존의 울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눈은 몸-나의 더 깊은 몸-나 속에 있는 정신입니다.
 
바깥으로(extra) 나 있는 정신은 감동과 설득을 불러일으킬 수 없습니다. 오직 몸-나 속의 정신으로만 타자의 몸-나 속의 정신을 열 수가 있습니다. 바깥은 여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깥은 결국 바깥 껍데기만을 접촉할 뿐입니다.
 
마치 함석헌이 말하는 것처럼, ‘성경, 정신이 사는 생명의 양식이다.’(함석헌, 위의 책, 113쪽)라는 발화를 몸-나의 주체적 발화로 삼고자 한다면, 혹은 자신의 몸-나 발화가 종교적 명법과도 같은 효과를 낳고 싶다면, 정치적 발화는 몸-나의 상호주관적 정신이 사는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단지 자신의 몸-나 발화 하나만으로 ‘혼합’ 혹은 ‘통일’, ‘일치’를 가져올 수 있다는 오만은 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몸-나 발화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때-거기와 지금-여기의 유한한 맥락적 목소리(vox)이기 때문에, 그것이 뜻이 있는 목소리 혹은 뜻을 만들어 내는 목소리(vox significativa)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전체의 몸-나의 목소리로 확장하고 관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몸-나 주체적 발화를 듣지 않는다고 분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종교적 명법에서도, 종교의 본질은 도덕이지만, 그것[好惡]을 넘어서야 하는 것처럼(그것 또한 상대적이기 때문에, 함석헌, 위의 책, 212쪽), 정치적 발화 행위조차도 하나의 명법이 되고자 한다면, 양극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매체를 통한 극단적 발화 행위(스크린을 통해 비춰지는 한쪽의 부정적 모습들, 마치 발화에 반하는 적대 행위만 하고 적대 감정만을 토로하는 것으로 매도하는 조작적·조정적 발화)가 “사라(消)지는 것이 살아(生)지는 것”(함석헌, 위의 책, 252쪽)입니다.
 
몸-나가 발화를 통해서 말을 밀어내는 순간 몸-나가 사라지고, 발화가 살게(生)될 때 상호주관적 몸-나가 사라져서(消) 전체 몸-나가 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의 몸-나가 죽음으로써 온 우주의 몸-나가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몸-나는 우주의 몸-나와 왕래합니다.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상호주관적 몸-나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니 애초에 몸-나는 끈끈하게 이어져-있음으로 존재했습니다. 몸-나의 발화는 그것을 끊임없이 확인을 하고 의미를 만들어 가면 됩니다. 그것이 몸-나가 바라는 일입니다.
 
함석헌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안 하는 것이 궂은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212쪽). 몸-나의 속에 있는 진정한 자기는 날마다 소리를 냅니다. 그런데 몸-나는 그것을 듣지 않고 자기 겉의 몸-나의 발화만 하려고 합니다. 자기 몸-나의 뜻대로만 행위를 하려고 합니다.
 
정치적 발화가 무분별하고 무책임하여 닫히고 폐쇄적으로 변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몸-나 속의 자기(Self) 발화의 뜻보다 몸-나 겉소리/발화가 고유한 자기성을 갖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발화가 전달이 안 되고 침투가 안 되는 것입니다. “몸-나, 코르푸스 에고에는 고유성이 없습니다. 이른바 ‘자기성’(egoite)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Jean-Luc Nancy, 앞의 책, 30쪽).
 
몸-나는 서로 열려 있고 서로 만나고 전체로서의 몸-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몸-나는 고유성, 자기성이 아닌 공통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몸-나는 공통적인 몸-나, 전체의 몸-나 속의 진정한 자기의 목소리의 뜻대로 살아야 하고 행위를 해야 합니다.
 
종교적 명법에 따라 사는 종교인이든, 그것을 발화하는 몸-나 주체이든, 또 그것을 모방하는 정치적 발화 주체의 몸-나로서 정치적 명법을 말하는 존재이든, 그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발화 혹은 발화의 톤(ton)은 상호 공포, 상호 두려움, 상호 죄의식, 상호 죽음을 조장할 뿐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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