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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숫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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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4.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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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실제가 아니라 환상이고 허구이다.
 
인간은-숫자가-아니다.jpg▲ 숫자는 실제가 아니라 환상이고 허구이다.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수(number)는 만물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그처럼 원초적 무의식의 숫자 혹은 수는 인간 문명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발견이었다. 기원전 3천 년경부터 이집트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문명사회의 척도인 수는 인간 상상력의 극치였다. 그 상상력은 인류의 역사에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0’이라는 숫자는 기원전 3백 년경에 바빌로니아에서 어떤 자릿값의 빈자리를 표시하기 위한 기호로 쓰였던 것이, 서기 628년에 인도에서 현대적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지금 우리가 활용하는 수는 인도 사람들이 발명했지만, 그 당시 무역을 활발하게 하던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서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아라비아 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수는 셈이나 산법에서 출발을 했으나, 인간의 논리이자 이성의 발로이기도 했다. 이성(reason)이라는 말은 수, 즉 계산을 의미하는 라틴어 ratio에서 나왔다. 이것이 헤아리고 생각하는 이치·이법의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차 수는 인간의 욕구를 넘어 욕망을 분출시키는 개념이 되어버렸다. 편리성·기계성·표준성·효율성·획일성·과학성 등을 통하여 도구적·파괴적 힘을 드러냈다.
 
20세기 초에 벌어진 양차세계대전의 아비규환은 숫자의 분열이자 수의 불안과 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게르만(아리안)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과의 구분과 배제는 표준이라는 잣대와 우월의 신화 혹은 열망의 화신으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통계학적으로 전혀 쓸모없을 정도의 소수(小數)의 집단으로 분류된 사람들마저 굴뚝의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양상은 달라졌으나 오늘날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ID)을 나타내는 특별한 기호들을 숫자로 식별하는 체계 속에 살고 있다. 주민등록번호, 학번, 입양번호, 죄수번호, 카드식별번호, 은행대기번호, 군번, 선거후보번호 등, 숫자는 분류와 계급서열이라는 도구이며, 차별과 분절을 가져오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엄연히 이름이 있고 얼굴이 있는 인격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숫자라는 편리성 때문에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숫자와 일치시켜버린다. 설령 그것이 임시방편이라고는 하나 기분이 썩 좋을 수는 없다. 효율성 때문에 숫자로 정체성을 바꾸고 호명하도록 한다면 정작 ‘나’라는 존재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타자는 우리에게 간혹 물어온다. “주민등록번호가 어떻게 되세요?”, “학번이 어떻게 되세요?”, “몇 번 손님?” 등. 여기에해서도 우리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정당하게 자신의 이름이나 인격적으로 호명되는 인간의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숫자도 하나의 소통의 매체이다. 그러니 수를 잘못 이해하면 수치(shame)가 된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 아니던가. 망상의 숫자를 걸머쥐기 위해서 죽음의 경쟁을 마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적하고 결투하며 심지어 살인을 한다. 도대체 숫자가 무엇이기에 그러는 것일까. 숫자는 스스로 고백하지 않는다. 하지만 숫자를 다루는 인간에 의해서 그것은 의미와 질량과 부피와 크기와 길이 등으로 나타나 인간의 상상력을 메운다. 그 상상력이 지나치면 망상이 되어 버린다.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아니 손에 잡히지 않는 그저 욕망이 되어버린다.
 
이런 현상이 지배하는 세상이다가 보니, 이 세상은 그저 속고 속이는 또 ‘하나’(1)의 세계라는 숫자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숫자,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Non manifeste sed in occulto)”. 과연 앞으로 그럴 수 있을까? 숫자, 기껏해야 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것이 너무 많은 언어와 함의를 남발하게 하고 있다.
 
숫자는 아슬아슬하게 영혼을 팔아먹고 본능마저도 조각을 내는 특성이 있다. 숫자 뒤에 감추어진 익명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영혼을 팔아넘기는 것이다. 숫자는 그저 우연이다. 나에게 부연된 숫자는 우연한 만남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필연으로 여기고 격상·평가하는 것도 찬탄을 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평상시 너무 숫자에 대한 맹신에 젖어 있었던 탓은 아니었을까. 은행에서 자신의 정보가 유출되었다고 해서 다시 숫자만 달리해 플라스틱을 바꾼다고 영원히 비밀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의 도덕적 해이, 숫자가 곧 돈이다, 숫자로 정보화된 인격체마저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는 잘못된 관념을 바꾸어야 한다. 공동체-국가공동체이든, 사회공동체이든, 경제공동체이든-는 최소한의 상도(商道)는 지켜주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숫자면 모든 것이 된다는 인식을 멈추고 인간 의식과 존재의 전격적인 탈바꿈을 감행해야 한다.
 
개인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공동체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는 법이다. 개인이 그저 숫자로만 인식되기 때문에 개인의 인격과 사적인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려고 든다. 이런 생각이 공동체를 불신과 위험에 빠뜨리게 되는 것이다.
 
숫자는 실제가 아니라 환상이고 허구이다. 그것을 실제라고 믿는 순간 숫자와 그것이 가리키는 지시체를 동일시하면서 오류를 범하고 착각에 빠진다. 돈이라는 숫자가 가진 신화나 주민등록번호가 갖고 있는 환상, 그리고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수많은 숫자 시스템은 실제가 아니라 허구이다.
 
실제와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세계, 환상을 실제로 인식하는 인간은 병리적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세계 속의 숫자는 돈으로 대표된다. 오늘날 정치는 머릿수이고, 경제는 수치이고, 권력은 돈이 되어버렸다.
 
인간과 세계는 결국 숫자뿐인 것인가? 오늘도 스마트폰 매장에서, 메일계정에서, 우체국에서, 은행에서, 서점에서 번호가 나를 부른다. 그 번호가 곧 나인 것이다. 잠시뿐이라고는 하지만 왠지 씁쓸하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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