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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의 민족정신, 삼일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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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3.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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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정신은 단지 정치․경제․문화․언어․사상 등을 잠식한 사건에 대한
저항일 뿐만 아니라
의식의 저항, 마음의 저항이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 오늘날 삼일정신을 현실을 변혁, 혁명하라는 세계사적 의미 혹은 계몽적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그런 의미에서 삼일정신은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인 삶, 스스로 타협하려는 의지, 이기주의와 무감각, 몰이성과 비도덕에 대한 저항으로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몸과 정신을 억압하는 모든 형태의 수단과 세력은 자유를 향한(위한) 어떤 지속적인 몸부림을 발생시킨다.

자유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상태, 그것은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래적인 특성이다. 그 본래적인 존재성을 누르게 될 때 인간은 저항하려고 한다. 다시 그 자리도 돌아감, 다시 그 자리에 서 있기를 원하는 힘이 놀랍도록 분출하는 것이다. 저항은 자유스럽지 않은 자리에서 자유스러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감이다.

삼일만세운동정신이야 말로 바로 역사의 저항 정신이 드러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일본이라는 외세로부터 이탈하고 폭압으로부터 분연히 일어나려는 우리 민족의 단결된 힘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는 데에만 역사적 의의를 두어서는 안 된다. 그 역사적 사건, 삼일정신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져 우리에게 실존적으로 요청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왜 인간은 가시적으로 보이는 현상에 대해서 혹은 자신의 이익이 눈앞에 있을 때에는 저항(반항)을 불사하면서 무지불식간에 정신과 육체를 통어하는 것(구조, 체제, 언어, 이미지 등)에는 저항하지 못하는가? 삼일정신은 단지 정치․경제․문화․언어․사상 등을 잠식한 사건에 대한 저항일 뿐만 아니라 의식의 저항, 마음의 저항이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함석헌이 “산 생명의 그 줄 잡아/ 날로날로 닦아내면/ 굽이치는 큰 물결이/ 온 누리에 넘치리라.”(함석헌전집 6, 「살림살이」, 『시집/수평선 너머』, 한길사, 1983, 45쪽)고 읊었던 것처럼 죽을 생명, 죽은 정신을 산 생명으로 일으키는 역사의식이 필요하다.

온갖 체제와 권력으로 인한 과잉과 결핍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시대에 인간 존재 자체의 억압과 죽음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강제, 강압, 부조리, 부자유 속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의 자기 각성과 자기 저항밖에는 없다. 구조의 속박, 자본의 전염은 인간을 병들게 하고 인간 존재의 고유 영역이 침탈당한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존재적 삶의 시공간이 조작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존재 본래의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본래적 영역, 본래적 자리, 본래적 자기 자신은 자유이다. 저항 정신을 품고 있는 자유, 즉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서 모든 근원과 정신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삼일정신은 인위(人爲)에 대한 무위(無爲)의 발로이다. 강제로 끄는 힘의 인위성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자연스럽지 못하다. 스스로(에게서) 그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삼일정신을 논하는 것은 기념이나 기억의 차원이 아니다. 자신의 삶이 무위에서 연원하기를 바라는 각자의 고유한 자신에게서 비롯되기를 바라는 실존적 인식 때문이다. 삶은 풍요로워졌으나 자신의 고유하고 본래적인 인식과 행위는 날로 퇴락하고 무뎌지는 것은 내부의 존재의 목소리보다 소음과도 같은 외부의 목소리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거다.
 
따라서 굽이치는 삶의 거대한 물결이 우리 자신을 휘감고 있을 때조차도 그 목소리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거칠고 험한 힘(세력)과 맞설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때’ 그 소리, 그 힘과 그 뜻을 되새길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때’ 거기가 없었더라면 지금 여기가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현존재는 지금으로서만 존재하기에 그때 거기를 망각하면서 자기의 본래성, 인간의 참 자리를 항상 벗어나고 만다.

문득 멈춰 서서 자신의 존재 자리를 바라보는 것은 그때 거기의 목소리이다. 그때 거기의 목소리가 자신에게 동시에 온 누리(세계)에 울려 퍼지지 않으면 세계는 변혁되지 않는다. 세계의 진보는 지금 여기의 목소리를 그때 거기의 목소리로 보채고 재촉하면서 닦달하는 닦음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때 그 목소리는 현존재를 침묵 속으로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상황 안에서 깨어나 자신과 세계를 닦음이라는 구체적 삶으로 나타나게 한다.
 
닦음은 닦아-내는-존재의 행위로서 자신과 세계를 정화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의 의식을 퇴락의 집적층을 만들어내는 인식과 실천의 망각으로 빠져들게 함으로써 그것을 걷어내는 닦음은 수없이 반복되는 의식의 닦음과 그때 그 목소리를 삶의 실존적 생명으로 잡고서 일어나야 한다.

지금 우리는 그러한 닦아-세움이 필요하다. 마음-닦음, 정신-닦음, 생명-닦음으로 온 세상이 두루두루 닦아-세워져 외부에서 오는 온갖 힘으로부터 자유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삼일정신은 과거의 시간적 사건을 되새기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쇠락해져 가는 인간의 이성과 세계 혹은 삶에 대한 풀어진 긴장감을 끊임없는 의식의 닦아-세움으로 밝혀야 한다.

오늘날 삼일정신을 현실을 변혁, 혁명하라는 세계사적 의미 혹은 계몽적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그런 의미에서 삼일정신은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인 삶, 스스로 타협하려는 의지, 이기주의와 무감각, 몰이성과 비도덕에 대한 저항으로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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